
‘사이언스’ 논문으로 황우석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가 정점에 올랐을 때 쏟아져 나온 찬사 가운데 하나일까. 그러나 출처가 다르다. 이 글은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해마다 발간하는 ‘조선중앙년감’ 1964년판(版)에 실린 것이다. 대상은 평양의학대학 김봉한 교수가 진행한 ‘인간의 경락체계에 대한 연구’. 연감에는 공적 설명과 함께 김봉한 교수의 사진 화보가 크게 실려 있다. 이 연감에 김일성 당시 수상 이외의 인물사진이 그처럼 크게 게재된 것은 처음이었다.
기이한 점은 1961년을 기점으로 5~6년간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라며 국내외적으로 어마어마하게 칭송되던 이 연구가, 1967년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후의 ‘조선중앙년감’에서는 김봉한이라는 이름 자체를 찾아볼 수가 없고, 중앙언론은 물론 북한의 관련 학회지, 전문지에서도 봇물을 이루던 관련 글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온 나라를 들뜨게 한 ‘줄기세포 신드롬’, 그리고 온 나라를 충격과 혼돈으로 몰아넣은 ‘황우석 진실 게임’의 막이 서서히 내리고 있다. 사태가 말그대로 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닫던 2005년 12월말, 한 북한 연구자가 기자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황우석 사태와 비슷한 사건이 예전에 북한에서도 벌어진 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쉽진 않겠지만 꼼꼼히 뒤져보면 공식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말도 이어졌다.
그의 말대로, 1960년대 중반에 발표된 북한의 공식자료에서는 ‘김봉한’이라는 이름과 그의 연구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봉한학설’이라고 불리는 김봉한의 연구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전통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구명한 ‘봉한관설’이다. 다른 하나는 세포보다 작은 미세한 조직인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뜻)이 봉한관을 주행하면서 세포가 되고, 세포는 다시 산알로 변하기를 반복하며 순환 시스템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산알학설’이다(구체적인 내용은 위 상자기사 참조).
특히 김봉한 교수가 연구를 진행하다 갑작스레 좌초하는 일련의 과정은 황우석 교수와 매우 흡사했다. 정부 당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온갖 찬사를 받으며 대대적으로 추진되던 연구가 돌연 사그러들고마는 상황전개가 놀랄 만큼 닮아있는 것. 40년의 시차를 두고 남과 북에서 벌어진 그 역사의 반복을 따라가보자.
‘신분상의 한계’
자료에 따르면 1916년생인 김봉한은 경성제2고보(지금의 서울 경복고) 출신으로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지금의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다. 194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의대) 생리학교실 조교수가 되어 여러 학교를 오가며 강의하던 그는 6·25전쟁 와중에 북한으로 가서 1953년 평양의학대학 생물학교실 부교수가 됐다.
북한으로 가게 된 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전쟁 중에 인민군 제2후방병원에서 군의관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발적인 월북이기보다는 서울에 진주한 인민군에 징집됐을 가능성이 크다. 남한에 처자를 두고 있어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는 전언에 비춰봐도 마찬가지다. 비교적 유복한 집안 출신으로 성격이나 관심분야 모두 좌익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경성제대 동창생들의 회고도 이를 뒷받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