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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 사회의 한계

제1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을 상상하라

  • 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매뉴얼 사회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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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쓰나미 높이 수정한 적있는 후쿠시마 제1발전소

비상발전기가 온전한 덕분에 도카이 제2발전소는 해수펌프실 안에 4.9m까지 차오른 물을 빼내고 고장 난 한 대의 해수펌프도 고쳐 정상가동시켰다. 도카이 제2발전소는 비상발전기가 온전했기에 침수된 한 대의 해수펌프도 고칠 수 있었고 그 결과 어떠한 피해도 당하지 않았다. 도카이 제2발전소는 대지진 발생 나흘째인 3월 15일 오전 0시 40분 차단된 외부전원을 복구함으로써 정상으로 돌아갔다.

‘지질히도 운이 없었던 것’이 후쿠시마 제1발전소였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불운은 기상청 자료를 너무 믿었던 데서 비롯된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의 1호기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원전인 고리 1호기보다 7년 앞선 1971년 가동에 들어갔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 1호기는 일본의 과학이 덜 발전한 1960년대 초 설계된 것이다.

그 시기 설계자들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지역으로 밀려올 수 있는 최고 쓰나미 높이를 3.1m로 상정했다. 그러나 원전은 안전한 기반에 지어야 하니 해발 10m 위치에 짓기로 했다. 도쿄전력은 이러한 원칙에 따라 설계해 관계 기관의 허가를 받고 공사를 했다. 1호기를 해발 10m 지점에 지은 다음 연이어 2,3,4호기도 같은 높이에 건설했다. 그러나 5,6호기는 해발 13m 위치에 지었다.

그런데 2002년 일본공학협회(JSCE)가 일본에서 일어날 수 있는 쓰나미를 다시 분석해야 한다며 ‘일본 원전의 쓰나미 평가방법’을 발표했다. 이 평가에 따르면 후쿠시마 제1발전소에는 5.7m의 쓰나미가 발생할 수 있었다. 최고 쓰나미의 높이가 달라졌다고 해서 원전의 위치를 옮길 수는 없다. 5.7m의 쓰나미가 올 경우 침수될 수 있는 시설에 대한 방비를 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책이다. 도쿄전력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에 있는 방파제를 5.7m로 높이고, 5.7m보다 아래에 있는 6호기 해수펌프의 위치를 높였다.



그런데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 제1발전소 쪽으로, 과학의 대가들이 모인 일본공학협회의 분석이 무색하게 최고 15m의 쓰나미가 몰아쳤다. 후쿠시마 제1발전소가 들어선 일대는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다.

매뉴얼 사회의 한계
매뉴얼 사회의 한계

원전은 24시간 돌아가야 하기에 근무조를 짜서 운영한다. 대지진이 일어난 시각, 1·2호기에서는 A조가 근무하고 있었다. A조 직원들이 대지진과 쓰나미를 겪은 당시 상황을 정리해놓은 것을 보면 흥미롭다.

2시 46분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 건물이 크게 흔들렸을 때 A조 직원들은 지진 규모가 사상 최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발전소에서는 거대한 쇠뭉치인 터빈이 고장 나면 충격이 발생한다. A조 직원들은 터빈 등이 고장 났기에 강력한 진동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여진이 이어졌다. 그제야 큰 지진이라고 판단해 매뉴얼대로 건물을 빠져나와 언덕으로 피신했다.

언덕으로 피신한 다음에도 여진은 계속됐다. 일본은 자연재해에 대한 훈련이 아주 잘 돼 있는 나라다. 일본은 한마디로 ‘매뉴얼 사회’다. 매뉴얼 때문에 자연재해에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뉴얼이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고 우두커니 있다가 큰 피해를 당한다. SBO는 매뉴얼이 없는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임기응변의 사회다. 한국에서는 매뉴얼대로 하면 자기만 손해를 본다고 믿는 사람이 많다. 따라서 큰 사건이 일어나면 혼자 살길을 모색한다. 모두가 살길을 모색하니 아비규환에 빠진다. 3·11대지진 후 시민들이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서 귀가하는 도쿄 시가지의 풍경은 우리에겐 낯선 것이다. 매뉴얼 사회는 일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권철현 전 주일대사는 회고록에서 유학생 시절 겪은 일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일본 유학 시절의 일이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아이들의 등하교 통학로를 지정해놓고 있었다. 아이들은 항상 그 통학로로 다녀야 했다. 한번은 애가 감기에 걸려 늦게 일어나 지각을 할 처지였기에 내가 자전거에 태우고 다른 길로 바삐 달려갔다. 그때 어떤 학부형이 나를 불러 세우더니 통학로로 가라고 했다.

나는 애가 감기에 걸려 몸도 아프고 늦었으니 이 길로 빨리 가야겠다고 했지만 그 학부형은 요지부동이었다.

“아버지 아이를 직접 데리고 가는 게 아닙니까? 그러니 이번만 양해해주십시오.”

“물론 아버지와 같이 가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혹시라도 아이 혼자 갈 때도 이 길로 갈까봐 그럽니다. 그러니 보호자와 함께라도 통학로로 가야 합니다.”

나는 결국 길을 되돌아와 통학로로 가야 했다.’

매뉴얼 사회는 매뉴얼에 있는 사고가 일어나면 잘 대처한다. 그러나 매뉴얼에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큰 피해를 당한다. 임기응변의 사회는 모두가 임기응변을 발휘할 때는 아수라장이 된다. 그러나 워낙 큰 사건이 일어나 창조적인 소수만 임기응변을 발휘하면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다.

보통의 일에는 매뉴얼대로 대처하고, 매뉴얼이 없는 사건이 일어나면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사회를 만들면 좋은데, 그러한 사회는 이루기 쉽지 않다. 언덕에 있던 A조 직원들은 후쿠시마 제1발전소 앞의 바다가 뒤로 쑥 물러났다가 잠시 후 확 몰려오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게 몰려온 1차 쓰나미의 높이는 4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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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전문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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