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지구온난화 대응의 최전선에 선 ‘글로벌 사령부’

  • 황일도│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

    입력2009-11-04 14: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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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료주의에 빠진 맥없는 국제기구라는 비판도 들었다. 손에 잡히는 현장사업 대신 회의와 조율에만 열중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들어왔던 환경 분야의 국제적 이슈들이 모두 이 조직을 거쳐 공론화되었고, 여전히 가장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음은 틀림없는 사실. 지구의 반대편 끝 아프리카의 한 자락에서 세계를 향해 ‘기후변화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있는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를 찾았다.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케냐 나이로비의 유엔 사무소 진입로에 내걸린 만국기.

    세계 평균기온이 20세기 후반에 비해 1.5~2.5℃만 상승해도 지구상 모든 동식물종의 20~30%가 멸종할 우려가 있다. 3.5℃가 오르면 40~70%가 멸종 위험에 놓인다. 21세기 중반까지 지중해 연안과 미국 서부, 남아프리카와 브라질 북동부 등의 반건조기후 지역은 심각한 물 부족 현상에 시달릴 것이 확실시된다. 그린란드와 남극의 빙하는 예상보다 빠른 속도로 녹고 있고, 가뭄과 장마, 혹서 등의 이상기후는 급증하고 있다.’ -2007년 유엔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IPCC)의 4차 평가보고서 중에서-

    어쩌면 이제는 식상한 이야기일까. 기후변화에 관한 갖가지 우려는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주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기후변화 문제를 ‘현재 인류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라고 선언하고 각국 정부에 함께 대응해달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 한마디로 지구온난화와의 전쟁은 세계가 공동으로 맞닥뜨린 가장 급박한 전선인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국제사회의 반응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사실. 9월22일 반기문 총장의 소집으로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변화정상회의에는 세계 주요국 지도자가 모두 참석했지만, 기후변화의 책임을 둘러싸고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견해 차이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았다. 특히 그 대표 격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기대와는 달리 자국 온실가스의 구체적인 감축 목표치를 끝내 제시하지 않았다.

    유엔 환경조직의 ‘어머니’

    케냐에 입국한 이래 처음으로 만나보는 ‘제대로 된 도로’다. 차선도, 신호등도, 인도도 있다. 심지어는 가지런히 심어진 가로수까지. 수도답지 않게 도로 사정이 엉망인 나이로비에서는 흔치 않은 광경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택시기사에게 물었더니 “각국 대사관저가 자리한 길이라 그렇다”는 답이 돌아온다.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육중한 철문마다 국기가 휘날린다.



    그 길의 끝, 기기리(Gigiri) 지역에 유엔 구역이 있다. 모두 50여 개의 유엔기구 현지사무소가 모여 있는 유엔 구역의 출입문은 흡사 군사시설의 그것을 연상케 한다. 외부인을 철저히 통제하는 엄중한 보안절차를 거쳐 들어서자 유럽의 어느 공원처럼 잘 정돈된 숲과 쾌적하게 설계된 건물군이 나온다. 아마도 1960년대 언저리 서울 용산기지의 느낌이 이랬을까.

    나이로비 유엔 구역의 사무소들은 주로 각 기구의 현지사무소지만, UNEP(United Nations Environment Programme)와 유엔거주프로그램(UNHABITAT)만큼은 이곳에 본부를 두고 있다. UNEP의 경우 제네바와 뉴욕이 도리어 현지사무소라는 것. 출입문에서 다시 한참을 걸어 들어가야 만날 수 있는 복합건물의 S동에 오늘의 목적지인 UNEP 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1972년 환경문제에 관한 국제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만들어진 UNEP는 이후 환경 분야의 주요 이슈에 대해 인류 공동의 대응을 선도해왔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환경 이슈, 곧 온실가스 배출이나 오존층 파괴 문제, 사라지는 빙하와 해수면 상승 등의 사안이 모두 이 조직의 노력을 거쳐 국제적인 의제로 떠올랐다. 프레온가스 사용을 제한하는 1989년 몬트리올의정서나 온실가스 감축량에 관한 1997년 교토의정서 등 환경문제에 대한 세계 각국의 실행방안 합의를 주도해온 것도 바로 UNEP다.

    그 결과 현재의 유엔은 UNEP 외에도 많은 환경 분야 조직을 거느리고 있다. 주요 이슈에 대해 국제적인 합의가 만들어지면 이를 담당할 새로운 기구를 창설해왔기 때문. 기후변화의 경우 UNFCCC(유엔기후변화협약기구)와 IPCC가 그 대표적인 조직으로, 비유하자면 UNEP가 이들 조직의 어머니 격에 해당한다. UNEP는 또한 이들 조직간의 조정 임무를 수행하고, 환경문제에 관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유엔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보이는 일과 보이지 않는 일

    마침내 들어선 UNEP 본부 대외협력국은 한눈에 보기에도 분주하다. 기자가 방문한 9월 하순은 마침 유엔 총회에 맞춰 열린 기후변화정상회의가 한창이었다. 상당수 직원은 뉴욕의 유엔 본부로 날아갔고, 남은 직원들도 실시간으로 업무를 진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울에서 e메일과 전화로 요청했던 인터뷰들이 몇 차례 혼선을 겪은 뒤에야 성사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니면 말로만 듣던 유엔기구 특유의 관료주의 탓일까.

    “기후변화와 관련한 UNEP의 임무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기후변화의 폭과 심각성, 악영향 등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해 보고서 형태로 경고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후변화의 폭을 줄이고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각국 정부와 민간의 정책결정을 이끌어내는 작업이고요. 세 번째는 기후변화의 심각성과 정책적 대응방향을 각국 대중과 정책결정자들에게 전파, 홍보하는 일입니다.”

    UNEP 본부 대외협력국의 언론팀장을 맡고 있는 셰린 조르바씨의 첫마디다. UNEP 실무부서의 조직체계 역시 이러한 임무별로 나누어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예를 들어 조르바씨가 속한 대외협력국(DCPI)은 세 번째 임무를 담당하고 있고, 조기경보국(DEWA)은 첫 번째 임무를, 환경정책이행국(DEPI)과 법률·협약개발국(DELC) 등은 두 번째 임무를 맡고 있는 부서다. 여기에 세계 곳곳의 환경감시 설비 설치를 조율하고 관리하는 임무 등을 포함해 UNEP본부는 총 7개의 실무부서로 나뉘고, 대륙별로 6개의 지역사무소와 각종 환경관련 협약 사무국을 산하에 두고 있다.

    공식자료에 따르면 2005년 연말 현재 UNEP에서는 400여 명의 일반직(general service)과 500여 명의 전문직(professional)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환경문제가 점차 강조되면서 조직 확대가 이어져 현재는 1000명 수준으로 증가했다는 게 직원들의 설명이다. 각국 정부의 출연금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산은 2010~11년 2년 동안 5억달러에 조금 못 미치는 수준. 이 가운데 1억5000만달러가량이 직원들의 인건비로 지급되고 3억5000만달러가 사업비에 해당한다.

    UNEP의 다양한 임무 가운데 기후변화와 관련한 과학적 증거들을 수집해 국제사회에 경고하는 작업은 이제 IPCC 등 다른 유엔 조직이 주도하고 있다는 게 UNEP 안팎의 대체적인 평가다. 비록 IPCC 자체가 UNEP와 국제기상기구(WMO)에 의해 설립된 기구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기후변화 관련 보고서는 IPCC를 통해 작성, 공개되고 있는 것. 상대적으로 최근 UNEP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국제적인 홍보 캠페인이다. 세계 각국의 시민사회에 기후변화 대응 동참을 촉구하는 ‘Unite to Combat Climate Change’, 나무심기 프로젝트인 ‘Billion Tree Campaign’, 청소년을 위한 환경프로그램 등이 그것이다.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나이로비의 유엔 복합건물 중 UNEP가 사용하고 있는 S동.

    ‘그린 뉴딜’의 가능성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UNEP 업무의 상당부분은 기후변화에 관한 정책적 대응이다. 이러한 활동은 다시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기후변화 때문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기후나 주거환경 변화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이른바 적응(adaptation)이다. 늘어나는 가뭄과 홍수, 해수면 상승 등으로 인해 제3세계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을 막기 위해 각국 정부에 정책적 권고안을 만들고 기술적 협력을 유도하는 것이 그 요체다. UNEP는 적응 정책의 주요 대상으로 가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와 가라앉고 있는 태평양 도서국가,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저지대(거대 삼각주)의 주민들을 지목한 바 있다. 변화하는 기후로 인해 달라지는 식생이나 전염병 분포, 농업생산성 변화에 각국이 준비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일도 포함된다.

    정책적 대응의 또 다른 축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여 기후변화 자체의 속도를 낮추고자 하는 저감(mitigation) 분야다. 탄소를 많이 배출하는 화석연료의 사용을 줄이고 태양광 등 청정에너지의 사용을 전세계적으로 늘려가도록 하는 작업이 핵심을 이룬다. 탄소배출권 거래시장 활성화나 에너지 고효율 설비 권장, 대안적 교통시스템 구축 등 최근 수년간 세계 각국의 이슈가 된 환경친화적 인프라 구축사업이 모두 UNEP가 추진해온 저감정책을 통해 부상한 과제들이다.

    특히 UNEP는 근래 들어 금융제도를 이용해 제3세계의 친환경 설비구축을 유도하는 프로그램에 힘을 쏟고 있다. 2003년부터 4년간 UNEP가 인도에서 진행한 솔라론(Solar loan) 프로젝트가 대표적인 사례. 현지 대형 은행과의 협조하에 2만여 가구의 일반 가정에 태양에너지 설비 설치비를 대출해주는 방식이다. 소매금융을 성공적으로 활용한 이 프로그램이 큰 성공을 거둠에 따라 UNEP는 유사한 프로그램을 튀니지, 모로코, 이집트 등으로 확대해 진행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친 지난해 이후 UNEP는 이른바 ‘녹색 경제(Green Economy)’로 불리는 이러한 친환경 인프라 구축사업이 경제위기 탈출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아힘 슈타이너 UNEP 사무총장은 최근 한 정책자료에서 “대공황 시기 미국의 뉴딜정책에 버금가는 ‘그린 뉴딜’이 될 것”이라고 역설한 바 있다.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라는 측면을 강조해 민간기업과 단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전략인 셈이다.

    UNEP가 최근 한국 정부의 ‘녹색 경제’ 추진계획을 긍정적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UNEP의 포인트와 한국의 정책방향이 맞아떨어진 셈. 조르바 팀장은 “한국이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다른 국가들에 전파하는 성공적인 롤모델 역할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UNEP가 8월 대전에서 세계청소년환경회의를 개최하고 슈타이너 사무총장이 직접 방한하는 등 한국과의 접점이 늘어난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고 한국인 전문직원 이윤애씨는 평했다.

    기후변화 대응의 주무조직인 만큼 UNEP의 운영방식 자체를 친환경적으로 바꾸려는 노력도 상당하다. 지난해부터 UNEP는 기후중립전략(climate neutral strategy)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할 담당관 ‘그린레이디(Green Lady)’를 임명했다. 우선 탄소배출량의 85%를 차지하는 교통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출장을 화상회의 등으로 대체하거나 비행기 대신 열차를, 비즈니스석 대신 이코노미석을 이용하며, 직원들의 출퇴근에 카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 등이다. 사무실의 저효율 전구를 교체하거나 재생용지를 활용하는 작업들도 함께 진행된다. UNEP 그린레이디 로바 닐슨씨의 설명이다.

    “우선은 가능한 한 탄소배출량을 줄이고, 그럼에도 배출되는 양에 대해서는 상쇄할 수 있을 만큼의 나무심기 프로젝트 등에 자금을 출연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지금 당장은 UNEP가 중심이지만 나이로비 유엔 사무소는 물론 전세계 유엔기구로 확산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매뉴얼을 장차 민간기업이나 단체로 전파할 계획이고요.”

    아프리카의 의미, 그리고 한계

    언뜻 간단해 보이는 카풀도 대중교통 인프라가 매우 취약한 나이로비에서는 이야기가 사뭇 다르다. 우선 외국인은 일몰 후에 혼자 다니지 말라는 충고가 호텔 객실 안에 붙어있을 만큼 치안이 불안하다. 유엔 구역 출입사무소를 나서는 순간 변변한 건물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 아프리카의 현실이 곧바로 펼쳐지는 것이다.

    UNEP는 제3세계 국가에 본부를 설치한 몇 안 되는 유엔기구 가운데 하나다. 이 같은 결정에는 조직이 창설되던 1970년대 초반 아시아·아프리카 비동맹국가들의 발언권이 높았던 국제정치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지만, 환경문제의 가장 큰 피해자인 저개발지역의 복판에서 이슈에 직접 부딪히겠다는 의지도 포함돼 있었다.

    최근 수년간 극심한 가뭄이 이어져 삶의 질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는 아프리카는 기후변화의 피해를 가장 심각하게 당하고 있는 국가들 가운데 하나다. 현재 추이가 이어질 경우 2020년까지 7500만에서 2억5000만명의 사람이 물 부족 문제로 고통 받게 되리라고 UNEP는 예측한 바 있다. 이 때문에 UNEP는 5대 공식과제 가운데 하나로 아프리카에 대한 지원을 명기해놓았다. 조르바 팀장은 “뉴욕에서 환경문제를 ‘생각’하는 것과 아프리카에서 직접 맞닥뜨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변방’이라는 지리적 한계가 UNEP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직원은 “UNEP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대응을 주도해나가기에는 교통·통신의 불편 같은 문제가 걸림돌이 되고 있는 형국”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2007년에는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UNEP를 보다 강력한 기구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WHO(세계보건기구)처럼 각국 정부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UNEO(United Nations Environment Organization) 형태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 이러한 아이디어에는 환경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 확산과 함께 기존의 유엔기구가 지나치게 비효율적이라는 선진국 정부들의 시각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제안을 UNEP 본부를 빼내가기 위한 시도로 판단한 케냐 정부가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다. 나이로비에서 유엔기구가 차지하는 경제적·정치적 비중이 워낙 크고, UNEP는 나이로비 유엔 구역의 대주주에 해당한다. 나이로비 대통령실 청사 앞에서 우연히 만난 한 케냐 예산기획부 관료는 “나이로비가 동아프리카 국제비즈니스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 것도, 외국인 거주비율이 높은 것도 이들 유엔기구 덕분”이라고 말했다.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8월19일 청와대를 방문한 아힘 슈타이너 UNEP 사무총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행을 소개하고 있다.

    비판과 반박

    UNEP의 조직적 특성을 둘러싼 이 같은 논란은 최근 UNEP가 ‘관료주의와 비효율’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직개선에 열중하고 있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올해 작성된 UNEP의 ‘2010~13년 중기전략(Medium-term Strategy 2010-2013)’ 문서에는 ‘성과에 대한 명확한 평가(clear evaluation of performance)’‘지수화를 통한 목표 설정(objectives with indicators)’ 같은 경영학 용어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복잡하고 난삽한 조직체계를 정비하고 내부소통을 강화해 ‘하나의 UNEP’로 만든다는 콘셉트다.

    기후변화 대응의 사령부 역할을 맡고 있긴 하지만, 각국의 환경이슈에 직접 개입할 방도가 마땅치 않은 UNEP의 정책적 수단은 대부분 각 나라 정부로 하여금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도록 조율하거나 유도하는 방식에 집중돼왔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솔직한 토로다. 앞서 설명한 솔라론 프로젝트처럼 새로운 분야에서 성과가 생겨나고는 있지만, 여전히 숫자로 딱 떨어지는 목표와 결과를 제시하기 어려운 프로그램이 많다는 반성이다. 특히 온실가스 배출량 등 주요 분야의 구체적인 목표치 조율은 관련 협약의 사무국 기구로 넘어간 상태다보니, UNEP는 ‘자식들을 떠나보낸 어머니’마냥 추상적인 영역에 홀로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9월22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이 때문에 UNEP 직원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임무를 발굴해내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라는 평가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UNEP의 고유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방식 가운데 하나로 한 직원은 제3세계 개도국의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 대변하는 일을 들었다. UNEP가 ‘지속가능한 개발(sustainable development)’이라는 구호를 적극 사용하는 것 역시 결국은 ‘개발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믿는 개도국들의 이해를 배려한 측면이 크다는 설명이다.

    최근 UNEP는 12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제15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준비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7년 마련된 교토의정서가 2012년 만료됨에 따라 이를 대체할 새로운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목표를 국가별로 도출하는 것이 이 회의의 목표다. UNEP는 이 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합의를 만들어내자는 뜻에서 ‘Seal the Deal’이라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서두에서 밝혔듯, 이를 둘러싼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해관계는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선진국들은 최근 온실가스 배출량이 급증하고 있는 중국 등 신흥개발국의 자제를 주목하고, 후발국들은 기후변화 자체가 그간 선진국에서 배출한 온실가스 때문에 발생한 것이므로 개도국에 같은 잣대를 적용해선 안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마르셀라 캐루 조기경보국 정보담당관의 말이다.

    “따지고 보면 개별 국가의 이해관계를 넘어 공동의 행동을 조직해나가야 한다는 유엔의 이념 자체가 이상주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세계는 여전히 국가 중심의 질서로 움직이고, 국가 간의 이해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엇갈리지요. ‘인류가 당면한 최대의 위협’이라는 기후변화 문제에서도 이 같은 국제정치의 현실은 에누리 없이 작동한다고 봐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같은 현실을 들어 UNEP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업보다는 국가 간의 조율에 너무 많은 힘을 쏟는 것 아니냐는 거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간 UNEP가 프레온 가스 사용금지와 온실가스 감축이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낸 것 역시 모두 이 같은 이해관계 조율과정을 거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느리지만 분명한 걸음

    출장에서 돌아온 직후, 기자는 몇 가지 빠뜨린 궁금증을 담아 e메일을 보냈다. 답변은 10일이 지나 기사를 최종 마감하는 시점에야 가까스로 도착했다. “조율된 답변을 하기 위해 상의를 거치느라 늦었다”는 이야기였다.

    관료주의의 극단으로 볼 수도 있는 이 같은 일처리 방식을 경험하고 짜증이 앞섰던 기자가 다음 순간 섣불리 탓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UNEP의 혹은 유엔기구 전체의 관료주의적 특성은 어쩌면 깨지기 쉬운 국제적 합의를 어렵사리 만들어온 과정에서 형성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UNEP를 알면 알수록 복잡한 절차와 끝도 없는 조율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알 것 같았다고 할까.

    ‘인류 공동체’에 관한 꿈을 꾸기 시작한 20세기 초반 이래, 그 꿈을 향한 인류의 움직임은 분명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느렸다. 끔찍한 비극 앞에서 국제기구가 무기력했던 적도 많았고,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조소도 적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과가 하나 둘씩 꾸준히 만들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동아프리카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UNEP는 분명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하나씩 만들어가며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위협을 넘어설 인류 공동체의 미래를 준비하고 있었다.





    UNEP 본부의 한국인 전문직원 이윤애씨

    “열정과 현장의식 넘치는 젊은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케냐 유엔환경계획(UNEP) 본부
    UNEP의 공식자료에 따르면 500여 명의 전문직원(P1~5) 가운데 한국인은 모두 다섯 명이다(2005년 말 현재). 여기에 2008년 8월 박영우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지속가능경영원(BISD) 원장이 태국 방콕에 있는 아태지역사무소장으로 선임되어 UNEP 최초의 국장급(director·D1~2) 한국인 직원이 됐고, 비서업무 등을 담당하는 일반직원 가운데도 한국인 직원이 한 사람 있다.

    2004년부터 UNEP에서 일하고 있는 이윤애(47)씨는 케냐 본부의 한국인 정식직원 가운데 최선임자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서 석·박사 과정을 마친 그는 1996년 미국 뉴욕의 유엔인구기금(UNFPA) 근무를 시작으로 유엔기구에 첫발을 들여놓았다.

    -맡고 있는 업무를 소개해달라.

    “현재는 P4 직급으로 UNEP 전체의 프로그램 조정과 관리업무를 맡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UNEP가 운영하는 각 프로그램의 결과물과 성과를 확인해 이를 다시 관리에 반영하는 업무가 주를 이룬다. UNEP가 더욱 실용적인 조직으로 재정비되는 과정에 동참하는 일이어서 만족하고 있다.”

    -UNEP 나이로비 본부 직원들의 구성은 어떻게 되나. 한국인 직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듯한데….

    “우선 일반직원 가운데는 90% 이상을 케냐 현지 직원으로 고용하는데, 주로 여성이 많다. P2급에서도 여전히 여성이 많고 P4부터 남자가 많아져서 P5에서는 압도적으로 남성이 많다. UNEP는 유엔사무국에서 받는 예산이 매우 적고 대신 각 나라의 출연금으로 운영된다. 주요 출연국인 유럽 국가들은 매년 감사 때마다 자국 출신 직원의 숫자와 직급을 챙기지만, 출연금이 적은 아시아 국가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런 목소리를 낼 여지가 별로 없다. 다만 한국 환경부에서 과장급 직원을 파견해 나이로비에서 3년간 순환제로 근무하고 있다.”

    -뉴욕에서 일하다 아프리카로 옮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당시의 한국인 동료들이 모두 ‘너 미쳤냐?’고 물었다. (웃음) 회의 때문에 방문했던 케냐와 UNEP에 대해 워낙 좋은 인상을 받기도 했고, 또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직접 맞닥뜨려가며 일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생활환경의 문제다. 우선은 치안도 불안한 편이고, 계속되는 동아프리카 지역의 가뭄 때문에 전기가 자주 끊기고 물도 배급제를 실시하는 등 어려움이 많은 지역이니까. 여기에 국내정치적 혼돈까지 겹쳐 나이로비의 삶의 질은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다. 국제전화가 연결이 잘 안 되어 업무에 지장을 받는 경우도 있을 정도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국제기구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갓 들어온 젊은 친구들을 보면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세계를 활보하길 원하는, 현장에서 직접 부딪치고 싶어하는 이들이 주로 이 일을 택하는 것 같다. 온 세계 곳곳에서 온 동료들과 온 세상을 보며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국제기구도 다양한 사람이 부대끼는 조직사회라는 점이다. 사명감이나 문제의식보다는 제3세계 현지에서 유엔 직원이 갖는 사회적 지위나 직업적 안정성만을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나이가 들어도 퇴색하지 않을 열정 넘치는 젊은이들이 유엔의 문을 더 많이 두드리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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