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때론 호기심이 정도를 넘쳐 “왜 굳이 도서평론가라고 하느냐?”고 물어와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름대로 ‘출판’이란 말 대신 ‘도서’란 말을 붙인 데는 큰 뜻이 있으나, 일일이 답하기가 뭣해 멋쩍은 웃음으로 때우는 경우가 많다.
도서평론가의 책 읽기
직함 때문에 겪는 곤란은 또 있다. 일주일에 몇 권이나 읽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책 읽기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일반인보다 책을 몇 배 더 읽을 터인데, 그게 도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추궁에 가까운 질문을 듣다보면 대답을 안할 수 없는데, 나는 그때 보통 100여 권 이상 ‘본다’고 답변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대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 정도는 읽어야지 하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이 정도에서 문답이 끝날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린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분명 한 가지를 더 물었을 텐데, 다행히 은근슬쩍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100권을 읽지 않고 본다고 한 데는 사연이 있다는 얘기다. 생각해보라. 어떻게 일주일에 100권이나 읽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속독법에 능한 사람이라도 불가능한 일이거늘, 스스로 게으름뱅이라 말하는 나에겐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나는 속독을 지독히도 싫어한다. 책을 빨리 읽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책 읽기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과 같다. 연주자가 함부로 빠르게, 임의대로 높은 음으로 악기를 다뤄서는 안된다. 악보의 표식을 기준으로 연주해야만 한다. 책에도 지은이가 숨겨놓은 표식이 있다. 그것이 ‘점점 빠르게’일 수도 있고, ‘점점 강하게’일 수도 있다. 그 리듬을 타면서 읽어나갈 때 비로소 지은이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법이다.
이야기가 곁길로 샜다. 내가 읽었다고 하지 않고 굳이 본다고 명토 박는 까닭이 있다. 도서평론가가 하는 일이란 게 별거 아니다. 쏟아져 나온 책 가운데 좋은 책을 솎아내는 게 주임무다. 물론 책을 쓰거나 펴낸 사람은 자기 책이 다 좋다고 떠벌이지만, 어림없는 소리다. 알고 보면 속 빈 강정이 숱하다. 그러니 반드시 읽어보아야 그 책이 알려진 만큼 좋은 책인지 여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일주일 동안 나오는 책의 종수를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요령은 있다. 책의 구성요소 중 일부분을 정독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목하면, 서문·목차·결론·역자의 말 등속이다. 얼추 이 정도만 해도 20여 쪽에 이르니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다.
책의 서문은 주로 어떤 문제의식으로 글을 썼는지 명확히 밝히고 있다. 사실 여기서 승부가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을 쓴 동기가 미약하고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정확히 밝혀놓지 못했다면, 그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 결론은 책 전체를 통해 지은이가 주장하고자 한 바를 요약한 부분이다. 서론에서 밝힌 문제의식이 어떤 지점에 이르렀는지 판단케 하는 잣대가 된다. 번역서엔 역자의 말이 있는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한 정보를 얻는 경우가 많아 책을 평가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가 읽지 않고 본다고 한 것은 이처럼 핵심 요소만 가려 읽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별거 아니네”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별거 아닌 것은 아니다. 책의 우열을 판단하는 데는 나름의 숙달이 필요하다. 그 숙달이야 물론 평소 책을 얼마나 많이, 정확히 읽어왔느냐에 달려 있다. 책 읽는 것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만큼, 나는 책의 일부분만을 근거로 전체를 판단할 수 있는 눈을 키워왔다. 엘리아데의 ‘성(聖)과 속(俗)’도 그런 경우에 든다. 이 책이 서점가에 나온 것이 1983년 6월이고, 내가 읽은 때는 이듬해인 1984년 2월이다. 개강을 하면 대학 3학년이 되는 시점이었으니, 지적 욕구가 참으로 왕성할 때였다.
내가 엘리아데를 알게 된 것은, 지금은 돌아가신 은사 덕이다.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고전소설 수업은 예상외로 흥미로웠다. 우리 고전소설이 세계문학사와 맞닿은 대목이 있다는 걸 배우면서 나는 흥분했다. 그때 은사가 일러준 이론가들이 멀치아 엘리아데와 카를 G. 융, 노드롭 프라이다. 그러나 나는 프라이의 소책자를 읽는 것으로 만족했고, 그것만으로 세계문학을 모두 해석할 수 있는 양 떠벌이고 다녔다. 되돌아보면, 부끄럽기만 한 젊은 날의 치기였다.
그런데 뒤늦게 ‘성과 속’이 나왔다는 것을 알고는 겨울방학에 읽었던 게다. 옮긴이의 말에 감명받아 독파한 것이다. 옮긴이는, ‘창작과 비평’이 폐간되면서 대신 나온 ‘한국문학의 현단계’에 인상적인 평론을 발표했던 이동하다. 그가 번역했다는 것에 일단 입맛이 당겼는데, 아! 다른 책과 달리 맨 앞에 나온 옮긴이의 말에 나는 그만 ‘감전’되고 만 것이다.
이동하는 옮긴이의 말에서 이 책이 현대종교학의 방향을 이해하고자 하거나,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예지의 서’라고 평가하며 개인적 체험을 다음처럼 솔직하게 털어놨다.
“역자 자신, 군복무를 마친 직후의 황량한 절망감 가운데서 이 책을 처음으로 대했을 때 느낀 벅찬 감명을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혼탁한 일상 속에, 혹은 지상적인 역사의 그물망 속에 갇힌 인간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살게 해주는 능력을 이 작은 책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후략).”
나는 분명 ‘황량한 절망감’이란 문구에 전율했을 것이다. 옮긴이 이동하는, 그 절망감이 군복무를 마친 직후에 느낀 것이라며 개인적인 것임을 명백히 밝혔다. 하지만, 나는 그 절망감을 지극히 시대적인 것으로 읽었다. 1984년 2월이라, 얼마나 지독한 절망감이 우리 사회를 짓누르던 때였는가. 젊다는 게 죄였던 시기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 하나 없는 지하실에 갇혀 있듯, 질식할 것만 같던 때였다. 옮긴이의 개인적 절망감과 내가 느낀 시대적 절망감이 일치하면서 나는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금 다시 펼쳐본 ‘성과 속’엔 몇 겹으로 그어진 밑줄과 어설프게나마 이해한 것을 요약해놓은 낙서가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을 보니,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읽으면서, 나는 신화의 세계 속에서 나를 옭아매는 현실이란 오랏줄을 끊어버리고 자유롭게 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찢기고 분열된 자본주의의 틀을 박차고 “나는 세계의 중심이다”라고 소리질렀던 콰키우틀 족의 외침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속의 세계에 드러난 성의 세계를 보며 나는 상징을 읽어내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동하는 시간이 흐르면서 최초의 경복(敬服)이 퇴색했다고 밝혔으나, 나는 여전히 엘리아데의 숭배자로 남아 있다.
‘솔개도 오래면 꿩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 책을 많이 읽다보면 다 읽지 않고도, 더 정확히 표현하면 특정 부분만을 읽어도 그 책의 함량을 잴 만한 깜냥이 생겨난다. 나는 나를 감탄시켰던 수많은 저자들, 김현·김병익·백낙청·리영희·루카치·푸코 등을 그런 방식으로 만났다.
이제, 당신들에게 질문을 하나 해보자. 당신은 좋은 책을 어떻게 고르는가? 혹시 신문에 나거나 방송을 탄 책이라면 무조건 좋은 줄 알고 읽는 건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간곡히 권유한다. 서점에 가라, 그곳에서 책을 뒤적여보라. 시간이 있다면, 서문과 결론, 옮긴이의 말까지 찬찬히 읽어보라. 시간이 없다면, 서문이라도 읽어보라. 거기서 당신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구절을 발견했다면, 그 책은 좋은 책이니 믿고 사라.
나는 당신이 내게 던질 마지막 질문을 안다. “그런데 정작 읽어보았더니 별로인데 어쩌냐?”라고 묻고 싶을 것이다. 준비된 답이 있으니 들어보시길. 그런 경우는 만에 하나도 안될 것이고, 만약 그렇게 했는데도 속았다면 글쓴이를 칭찬해주시라. 훈련된 독자를 속여넘길 정도의 재주를 가진 글쓴이라면, 까짓 한번쯤 눈감아주는 것도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