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결국 삶이다

  • 입력2012-06-21 10: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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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선거를 앞둔 지금, 전 시대의 상투적인 험담들이 다 쏟아진다. 권위주의 군부독재의 망령에서 종북주의 빨갱이의 혐의까지. 거의 모든 악의적인 말이 총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험담은 하도 오랫동안 들어서 현실로 와 닿지 않는다.

    권위주의가 위력을 잃은 지 한참 지났다. 어느 누구도 대통령이란 직위, 그 자체에 두려움을 갖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통치권자에 대한 막말과 욕설조차 이제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지금 한국 사회에 군부독재의 행태가 여전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분명 시대착오적이다. 바뀐 현실을 보지 않고, 옛 기억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틀어주는 고물 확성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를 “군부독재의 딸이기 때문에 권위적이고 오만한 독선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민주주의 화법의 기초가 돼 있지 않은 자다. 비겁한 험담은 오히려 독이 되어 되돌아올 것이다. 오로지 당사자의 입장과 태도에서 독선과 오만을 발견하고 비판해야 한다. 왜 지금 여기서 아버지를 들먹이는가. “원래 종북주의자는 박정희 대통령이었다”는 험담에 이르러서는 그만 헛웃음이 나오고 만다. 북한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한 것은 박정희와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각기 다른 방식의 정치적 결행이었다. “내가 종북이면 너도 종북이다” 식의 논리는 개흙밭의 개처럼 서로 물어뜯는 흙탕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북한 사회와 관련된 좌우 진영 논리만큼 현실성이 없는 담론도 없다. 북한은 지금 모든 관심이 삶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북한이 중국을 등에 업는가 아니면 미국과 손을 잡는가 하는 문제는 주체사상과 별개의 현실적 고민이다. 북한 사회가 없는 돈을 들여서 포를 쏘고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을 전쟁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는 발상 자체가 닫힌 사고다. 이건 자체 생존을 위한 극단적 아우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배려다. 북한 사정을 조금만 이해하려 든다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종북주의자 운운하는 것처럼 저급한 매카시즘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꿰뚫지 못하고 자폐적인 당파성에 갇혀 있는 일부 진보진영 운동가 본인의 문제일 수는 있어도, 진보진영 전체를 싸잡아 종북주의자 혐의를 덮어씌울 수는 없는 것이다.



    왜 그렇게 모든 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비방하는가? 이게 정치인가? 혹자는 대선주자라면 으레 혹독한 비판과 검증의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중한 비판과 객관적인 검증이 아닌, 흑색선전과 중상모략의 험담은 시민들을 정치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 나락에 떨어뜨리고 만다.

    아직 시간은 있다. 미래에 대한 정치적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대선주자는 올여름을 지나며 자연히 도태될 것이다. 가을이 오면 상대방의 약점 헐뜯기에 혈안이 된 물귀신들은 결국 퉁퉁 부어오른 주둥이만 둥둥 띄워놓고 물밑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대선주자 여러분은 올여름 험담에 더위 먹지 말기를 바란다. 변덕 심한 비바람과 뙤약볕을 견뎌내며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저 멀리 드높게 푸른 하늘이 펼쳐질 것이다. 그 맑고 푸른 하늘에 한국 사회의 미래를 펼쳐주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는 어떤 미래 사회를 꿈꾸는가? 그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아마 가을쯤이면 이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쟁점들이 대선 분위기를 뜨겁게 달굴 것이고,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도 무르익을 것이다. 이제 권위의 시대도 저항의 시대도 지나갔다. 권위와 저항이란 개념을 내세우는 정치가는 희망이 없다. 그들은 그냥 전 시대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하자.

    지금 한국 사회의 치명적인 병폐는 소통의 부재에 있다. 정치권은 전제된 입장으로 무장한 채 계속 자신들의 주장만 반복한다. ‘100분 토론’이 아니라, 100분 동안 일방적인 자기 주장과 타인에 대한 험담으로 시간을 채운다. 그 어떤 합의도 결론도 없이 토론은 끝난다. 이런 식의 토론 문화는 입만 아프고 귀만 지저분해진다. 셰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말한다. “악의가 선의를 지배하지 않도록 재판해주시오.” 악의가 설치고 선의가 무시되는 정치권의 화법부터 정화할 필요가 있다. 결코 상대방을 헐뜯는 자의 편을 들어주지 말자.

    올해 대선에선 선의의 경쟁이 꽃을 피우는 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온전한 인격과 품위를 갖춘 대통령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국격이다. 대통령은 전 시대적 관습인 일방적 권위와 카리스마를 내세우지 말기를 바란다. 먼저 세상에 대해 귀를 열어두는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속속들이 보고 듣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움직이려 들지 말고,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대통령이 필요하다. 물줄기를 바꾸려들기 전에 강의 흐름을 타고 노를 저어가는 뱃사공 같은 대통령이 필요하다.

    대선주자가 제시해야 할 과제는 경제적 평등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는 부자 나라가 됐다. 그런데 왜 국내에서는 중산층의 절반 이상이 도시빈민으로 추락하고, 젊은이들은 백수로 전락하는가. 이 분배의 불평등은 경제적 소통의 부재에서 온다. 공산주의 경제가 무너진 것이 일방적 평등이 자초한 비생산성이었다면, 자본주의 경제는 성장과 경쟁의 생산성이 초래한 분배의 불평등이었다.

    그렇다면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할 수 있는 제3의 경제적 대안과 실천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제는 정치적 선택이 경제를 좌우하게 둬서는 안 된다. 세계 경제의 흐름을 정치가 파악하고 조정해주는 상호 소통과 협력의 관계를 열어야 한다.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 따로, 경제 따로 논다. 그래서 시민들은 불안하다.

    결국 한국의 미래 사회는 전 시대적 권위와 저항이란 수직적 관계를 허물어뜨릴 것이다. 그러면서 개별적이고 다양한 일상을 전개할 것이다. 인터넷을 소유한 개인은 더 이상 중앙통제와 대중조작의 사회를 용납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더 이상 권위적이지도 명령적이지도 않은 위치다. 드넓은 일상과 만나고 대화하는 대통령의 이미지가 중요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통령의 덕목은 지성과 인격이다.

    결국 삶이다

    이윤택<br>1952년생 밀양연극촌 예술감독

    정치는 이제 더 이상 선동적 구호나 개발계획 등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한국 사회는 ‘경제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과학, 의학, 생명공학, 첨단 우주과학 등 과학적 전문성이 사회구조를 바꿀 것이다. 그래서 국가도 자연스럽게 전문화된 각료 중심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국정 운영 상당부분을 전문성에 의존하게 되고, 한국 대통령의 고유 권한처럼 여겨졌던 정책 결정이 각료와 전문가들에게 상당수 이양돼야 한다.

    대신 대통령은 좀 더 넓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다. 통일, 한민족 공동체에 대한 인식, 국가 윤리와 시민 윤리 등 형이상학적이고 도덕적 영역에 대한 국정 철학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미래 한국의 대통령은 우리의 이웃으로 존재했으면 한다. 좀 더 가까이 내려와야 하고, 좀 더 많은 계층과 만났으면 한다. 결국 정치는 다양한 일상의 장에서 전개될 것이다. 정치의 최대 현안은, 러시아의 극작가 체호프의 말처럼 “결국,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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