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무소유와 다른 기독교적 내려놓음
마음 비우는 게 아니라 신의 사랑으로 채워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라면 당당해져
남편이 바라는 존중, 아내가 바라는 사랑
진정한 자유는 안정감에서 나온다
이용규 선교사. [박해윤 기자]
그는 기독교계에서 베스트셀러 저자로 통한다. 2006년 처음 펴낸 책 ‘내려놓음’(규장)은 무려 389쇄를 찍었다.
‘움켜쥐려 할수록 소멸되고 가지려 할수록 공허해지는 삶’이라는 부제가 알려주듯 최고 학력이 보장하는 세속의 길 대신 험지 사역이라는 어려운 종교인의 길을 택한 그에게 기독교적 ‘내려놓음’이란 것은 무엇인지 묻고 싶었다. 마침 그가 서울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만났다.
‘내려놓음’이라는 게 보통 불교에서 쓰는 말인데 크리스천으로서 내려놓음은 무엇을 말하나요.
“실제로 많은 분이 불교 책인 줄 아세요(웃음). 우선 한국말 ‘내려놓는다’는 말을 다른 나라 언어로 해보려니까 적확한 단어가 안 나오더라고요. 굉장히 독특한 한국말이란 거죠. 예를 들어 중국어로 번역하면 ‘팡샤’가 가장 가까운 말인데 굉장히 네거티브한 의미가 있어요. 포기한다는 의미가 강하죠. 영어로 번역할 때는 서렌더(surrender), 아니면 렛 잇 다운, 렛 잇 고 정도인데 이건 좀 무신경하게 내버려 둔다는 의미가 있죠. 한국말 ‘내려놓음’은 포기보다는 굉장히 적극적인 행위거든요.”
‘비움과 채움’의 두 바퀴
이용규 선교사가 쓴 베스트셀러 ‘내려놓음’. [규장]
“네. ‘내려놓음’을 흔히 불교의 무소유, 공(空) 사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불교철학은 근본적으로 끊임없이 욕망을 없애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봅니다. 비우고 비우다 보면 언젠가는 제로(0) 상태가 된다고 하는 신념 체계죠. 결국 비우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데 기독교에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보지요.
불교에서는 윤회의 사슬을 끊기 위해서는 고통의 근원이 되는 번뇌와 생각 자체를 스스로 끊어야 한다고 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그게 어려운 이야기죠. 실은 안 돼요. 안 되는 게 맞아요.”
그렇다면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가능해지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로 들어가야 해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힘이 밖으로부터 와야 한다는 게 기독교의 기본 생각입니다. 따라서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내려놓음은 불교의 버림이나 비움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내려놓음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채움과 같이 가는 거죠. 여기서 채워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지는 과정이죠. 맛있는 음식으로 배가 채워져 있으면 라면이나 맥도날드 햄버거가 더 는 먹고 싶지 않겠죠.”
그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 놓인 컵을 가리키더니 말을 이었다.
“여기 컵 속의 물을 욕망이라고 할 때 불교의 가르침은 계속해서 그 물을 퍼내라고 하는 거예요. 근데 그렇게 해서 비워지면 좋은데 누군가가 와서 다시 채울 수도 있고, 비가 와서 채워질 수도 있어요. 기독교적 방법은 다른 걸로 채우는 겁니다. 물을 퍼내는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채우는 일도 함께 하는 거죠.
제가 말하는 복음적 의미의 내려놓음은 ‘비움과 채움’ 두 바퀴가 같이 가는 겁니다. 나의 어떤 죄성(罪性)과 해결되지 않은 과거와 모든 복잡한 고민과 버거운 인생의 짐들을 해결하는 방식은 절대자가 내 삶 가운데 개입하시고 찾아와 주셔서 내 삶이 만족됐을 때 다른 부분들이 정리가 되는 과정. 그게 제가 이야기하는 내려놓음입니다.”
그의 얼굴은 흡사 수도자처럼 맑고 단아했다. 시종일관 차분한 톤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안정감과 신뢰를 주었다.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여러 대형 교회의 초청으로 강연을 다니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흔히 내려놓는다고 하면 무소유나 가난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기독교적 내려놓음은 청빈 사상과는 다릅니다. 제가 ‘내려놓음’을 주제로 책을 쓰니까 대중이 저한테 그런 걸 기대한다고 느낀 적이 있어요.”
무슨 말이죠.
“가난 가운데 있지만 찌들지 않고 자족하면서 사는 걸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제가 동양사상을 오래 공부하다 보니까 저 역시 순간적으로 헷갈린 적이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버리거나 없이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난 자체가 삶의 어떤 목표가 되면 안 되죠.
그런 의미에서 무소유와 기독교는 좀 궤가 다른 것 같아요. 제 삶도 마찬가지예요. 저라고 하는 사람은 제 안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어떤 생각들, 미움이라든지 남들한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 같은 걸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어요. 해결한 척 포장은 할 수 있겠지만 제 안에는 그런 힘이 없어요. 하지만 앞이 막막하고 희망이 안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제 삶이 여전히 감사가 넘치고 행복하고 더는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삶 속에서 체험했습니다.”
이용규 선교사는 “복음적 의미의 내려놓음은 ‘비움과 채움’ 두 바퀴가 같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박해윤 기자]
죽음의 순간에 나타나는 차이
실제로 그의 책에는 유학 시절부터 몽골에 선교사로 가기까지 고비 고비마다 겪은 절대자와의 교류가 쉽고 따뜻한 언어로 담겨 있다.절대자와의 교류에는 특별한 영적 체험이 필요한가요.
“특별한 체험이나 결단의 능력이나 이런 게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부족하고 약하다고 느끼는 그 자리에서 ‘도와주세요,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요’ 하는 그 작은 속삭임에서 시작되는 거죠. 어떤 극적인 체험으로 어느 날 갑자기 삶이 180도로 바뀌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여정이 시작됩니다. 그때 당시에는 잘 모르지만 삶의 끝에 가서 돌이켜 보면 굉장히 다른 지향의 삶으로 전환이 그때 일어난 거였구나 인식하게 되죠.
제가 한국에 와서 병문안을 가거나 죽음을 눈앞에 둔 분들의 모습을 보면 확연히 다른 두 가지 모습이 있어요. 전자는 죽음을 무서워한 나머지 죽음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분들이 있어요. 아무리 거기다 대고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잠시뿐이죠. 그 사람을 이끄는 굉장히 강한 내면의 힘은 두려움이에요.”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지요.
“맞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안 다니고를 떠나 죽음을 굉장히 편안하게 받아들이면서 웃으며 감사하는 가운데 삶을 마감하는 분들이죠. 이건 엄청난 차이로 보여요. 왜냐하면 이분들을 끌어왔던 힘은 두려움이나 고민, 걱정이 아닌 다른 힘인데 살면서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죽음의 순간에도 그 힘으로 편안하게 갈 수 있는 거죠.
이건 노력을 통해 되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순간 시작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를 바꿀 수 없지만 나를 만든 분은 나를 바꾸실 수 있다는 믿음, 그 바꾸시는 어떤 근본적인 통로가 되는 걸 복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거고요.”
믿음이라는 게 어떻게 보면 그냥 믿으면 되는 건데 어떤 사람들에겐 그게 참 어렵습니다. 믿음이라는 건 누가 주는 겁니까?
“믿음은 선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자신이 구해야 얻는 것이지 강제로 억지로 주어지는 건 아니죠. ‘선물을 주세요’까지는 사람의 몫이지만 주어지는 건 내가 내 안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절대자로부터 주어지는 거라는 것을 저는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많이 느껴요. 제가 우리 셋째 아이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동생이 생기고 나서 짜증이나 떼를 많이 부려서 저를 힘들게 했어요. 하지만 이건 겉으로 드러난 감정이었고, 진짜 문제는 아이의 내면에 있었던 불안이죠.”
어떤 불안이었을까요.
“동생이 태어남으로 인해 내 위치가 흔들리고 있고 내 세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불안감이죠. 그런 아이에게 수시로 ‘아빠는 널 사랑해’라고 말했지만 (두 귀에 손을 갖다 대더니) 아~ 하고 귀를 막고 도망을 갔어요. 실은 자기가 제일 듣고 싶은 말인데 문제는 그게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 눈에는 먹잇감밖에 안 보여
이 선교사는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사랑한다’는 절대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어느 순간 아이가 ‘아, 정말 엄마 아빠가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태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라고요. 저는 아이에게 성장이 일어났구나 하는 게 느껴졌어요. 믿는 것만으로도 삶의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니까 나를 충동하고 끌고 가던 어떤 두려움의 힘이 다른 힘으로 대체돼서 살아가는 모습이 보이는 거죠. 그게 믿음인 것 같아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수용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긴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사람은 그 즉시 되기도 하고.”
그렇죠. 믿음을 받아들이는 순간도 사람마다 다른 것 같아요.
“어쨌든 믿음이 자리 잡으면 내 마음 안에 어떤 평안과 센스 오브 시큐리티(sense of security)라고 할까요? 안정감이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내가 더 가지지 않아도 안전하구나, 사회적 지위나 포지션이 안전함을 주는 게 아니구나라는 걸 깨닫게 되지요. 그런 안정감을 가지면 자신감이 생겨요. 그러면 밖에 나갈 때 굳이 좋은 옷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고 명함에 뭘 많이 적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하죠.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가 영적으로 배고픈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당당하게 대할 수 있죠.”
상대방에게 뭔가 좋은 에너지를 나눠줄 수 있는 상태가 되겠지요.
“맞아요. 내가 영적으로 부유해지는 거거든요. 제가 유명한 연예인이라든지 스포츠 스타라든지 재벌가의 누구라든지 이런 분들을 만날 때 때로는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너무 불쌍하게 느껴져 어떤 식으로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만약 제가 영적으로 배가 고프다면 이런 사람들이 내 배고픔을 달래줄 수 있겠다는 기대가 생길 수 있겠지만 하나님 사랑으로 충분하다는 안정감을 갖게 되면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잘 도와줄까 이런 마음이 들지요. 가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내면의 풍요함으로 그게 되는 거예요.”
우선은 가장 가까운 가족을 보는 태도나 생각이 달라지겠죠.
“남편이나 아내를 대할 때에도 상대가 나의 부족이나 내 배고픔을 채워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상대의 배고픔을 채워줘야 할 존재라는 책임감이 생기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주는 관계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기빙(giving)’을 통해 채워지는 관계가 돼 풍성함이 찾아옵니다. 관계에서 굉장히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지요. 스스로 나를 비우려 하지 않아도 관계를 통해 풍성하게 채워짐이 이뤄지기 때문에 불안하지가 않은 거예요. 수천억 원대 재산을 갖고 있는 사람보다 더 넉넉할 수 있고 진심 어린 도움을 줄 수가 있는 거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이익의 관점에서 보지요.
“배고픈 사람 눈에는 먹잇감밖에 안 보여요. 다 뜯어먹을 대상이죠. 내가 부족하다, 뭔가가 결여돼 있다고 하는 생각이 오면서 불안감과 배고픔이 시작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영적인 만족은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분 안에서 안전하다는 생각이 파운데이션(기반)이 될 때 가능하다는 겁니다.
다윗이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고 산성이고 요새고 이렇게 고백하는 그 수많은 이야기가 결국은 사람은 하나님을 통할 때 안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왕에게서 미움 받아 쫓기고 심지어 왕의 자리에 올라서도 끊임없이 불안하고 위험하다고 느끼면서 살 수 있는 요소들이 많았을 텐데 다윗이 건강하게 반응하면서 믿음 안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 안에서 안전하다는 고백인데 시편에 나오는 그 수많은 고백은 결국은 그 안정감에 대한 이야기이지요.”
작은 신음에서 시작하다
책에서 부부관계나 자식을 키우는 가족 안에서의 관계 맺음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던데요.“사람에게 궁극적인 배고픔을 두 가지라고 봐요. 우선 사람은 ‘관계적인 존재’로 지음을 받았어요. 관계 안에서 채워지지 않으면 끝없는 배고픔을 만들어요. 부부관계에서는 남편과 아내가 좀 다른데 남편들이 아내한테 바라는 건 ‘존중’이죠. 남자들이 뼈 빠지게 일하는 이유는 결국 존중받기 위해서거든요. 그게 지나칠 경우에 명예욕, 권력욕, 물욕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데 결국은 어떻든 ‘내가 당신 벌어먹이려고 뼈 빠지게 일하고 있다’고 하는 말의 그 깊은 의미는 ‘나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으니까 좀 존중해 달라’는 거거든요. 반면에 아내들이 원하는 건 사랑인 것 같아요.”
맞아요. 얼마나 잘해 주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배려하는가?
“그렇죠. 남자들은 잘해 주면 충분히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성의 경우에는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자괴감과 함께 다른 곳에서 그걸 채우려고 하는 내적인 몸부림이 생기는 것 같아요. 어떻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인간은 관계 속에서 채워져야지만 안정감을 느끼게 되지요.
성경적인 이야기는 그걸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거예요. ‘십자가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내가 너를 귀히 여기고 사랑하니 너는 안전해, 남편한테 사랑받지 못해도 아내한테 존중받지 못해도 괜찮아, 네 세계가 무너지는 게 아니야.’ 이런 말씀이거든요. 하나님이 나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남편과 아내를 존중할 힘을 가질 수 있는 거지요.
이렇게 우리가 외부적으로 들어오는 어떤 에너지를 통해서 내가 누군가를 품을 수 있을 때 그래서 뭔가를 공급받기 시작할 때 배고팠던 사람이 채워지고 자연스러운 리액션이 생기면서 관계가 바뀌게 되지요. 이건 저의 체험적 결론입니다.
제가 아내와 아이 넷이라는 가정 공동체를 이루면서 또 어린이들부터 청년들까지 교육을 하면서 ‘아, 안정감이 주는 힘은 먼저 밖에서 들어와야 하는 거구나, 그래서 복음이 맞구나’ 라는 걸 경험적으로 확인해 왔거든요.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던 샌님 같았던 저 같은 사람의 내면에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남을 위해 사는 삶으로 기뻐지는 삶을 경험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힘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 힘을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받나요?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명상을 해라, 참선을 해라 그런 게 있는데.
“무엇을 하는가의 문제라기보다는 결국은 믿음이에요. 그게 기적이거든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어느 날 믿어지고 실재하는 힘으로 현실 세계에서 경험되고 체험되는 과정,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단 믿음으로 시작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그 믿음조차 내가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도와주세요’라고 하는 작은 신음에서 시작하는 거죠.”
인생에 지고 가는 짐은 다 똑같다
보통 기독교를 고난의 종교라고 하지요. 고난이 돌이켜 보면 약이고 선물이었다는. 믿음은 그런 고난과 고통 속에서만 자라나요?“믿음이 고난 없이 자랄 수 있으면 참 좋은데 그런 점에서 저는 누가 옆에서 혼나는 거 보면 알아서 기는 아이들 있잖아요. 좀 그런 쪽이었던 것 같아요(웃음).
하지만 어느 누구든 고난을 피할 수는 없어요. 인생에 지고 가는 짐은 다 똑같잖아요. 생로병사라는 게 누구에게나 다 주어지지 않습니까. 누구나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내가 약하구나, 헐벗었구나, 내면이 가난했구나, 배고팠구나를 알아차리게 되는데 내 힘으로 뭘 할 수 있다고 느끼고 컨트롤 하려고 할 때는 절대자의 힘이 안 보이지요.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걸 받아들이고 놓는 순간에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에 의해서, 그 도움 안에서 다음 단계로 갈 수밖에 없음을 배우는 거죠.”
그는 “진정한 자유는 안정감에서 나온다”고 했다.
“자유란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한다’는 게 아니라 완전한 믿음 속에서 내 삶을 컨트롤할 필요도 없고, 다른 사람의 삶을 무시하거나 부러워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상태죠. 거듭 말하지만 그건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파운데이션이 필요합니다. 안 그러면 밑으로 떨어져요. 그 파운데이션이 되는 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과 그것이 믿어지는 삶의 과정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