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점의 과실은 그 무엇보다 달콤하다. 잊고 싶지 않은,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은 그런 맛. 차지한 자는 뺏기지 않으려 공고한 권위의 벽을 두르고 경계의 탑을 쌓는다. 그렇게 철저히 혼자가 된다. 권력의 끝은 필연적으로 고립무원. 자신을 죽이는 것 또한 자신일 따름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비롯한 각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며 로마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넷플릭스]
6월 21일 이준석 국민의힘 전 대표가 당 중앙윤리위원회의 징계를 앞두고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이 전 대표는 자신을 고대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BC 235~183)에 빗댔다. 스키피오는 ‘우는 아이도 울음을 그친다’는 공포의 한니발을 꺾고 제2차 포에니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끝냈다. 그때 그의 나이가 32세. 깨끗한 사생활, 탁월한 능력 그리고 온화한 성품까지 겸비한 ‘완벽남’이었다.
그럼에도 스키피오는 빛나는 전공이 무색해질 만큼 로마 역사를 통틀어 불명예 퇴진한 대표적 정치인 중 하나다. 그는 ‘져도 이길 수 있고 이겨도 질 수 있다’는 정치계산법을 간과했다. 오만함이 화를 재촉했다. 승자의 절대 권력을 인정치 않던 로마 정치판에 30대 나이로 입문해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나 덕분에 로마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측근 뇌물 문제가 불거진 최후의 순간에도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원로원을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전쟁에서 그의 특기였던 절묘한 승부수는 정치판에선 무리수가 돼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과적으로 역사엔 승장인 스키피오보다 패장인 한니발이 더 선명히 새겨졌다. 스키피오의 실패는 전쟁과 정치의 전술이 다름을 증명하는 좋은 본보기다. 스키피오로 와닿지 않는다면 더 유명한 인물인 카이사르는 어떨까. 그 역시 비상한 능력으로 모든 영예를 손에 넣었지만 스스로가 스스로를 망친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로마제국’ 포스터. [넷플릭스]
한국인의 로마에 대한 관심도가 급상승한 데엔 1992년 발간된 시오노 나나미(85)의 베스트셀러 ‘로마인 이야기’가 큰 몫을 했다. ‘로마인 이야기’가 한국말로 번역되며 그 이전까진 막연하게만 알려졌던 로마 영웅들의 매력이 두각을 드러내게 됐다. 다만 이 책은 역사서가 아니다. 역사를 배경으로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한 작가의 창작물이다. 작가의 주관적 해석이 많아 역사 왜곡 가능성이 다분하다. 맹신하면 곤란하다. 반면 ‘로마제국’ 시리즈는 동시대 역사가들의 학술적 고증과 감수를 받은 다큐멘터리다.
어째서 국가에 재앙을 가져온 폭군 칼리쿨라(가이우스)와 콤모두스가 영웅 카이사르와 함께 시리즈로 만들어졌을까. 각자 상이한 인물이지만 이들 모두 권력의 정점에서 측근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공화정과 대립했다는 점도 같다. ‘로마제국’ 시리즈는 로마 역사상 완벽한 정통성을 가진 지도자들이 왜 측근에 의해 살해당했는지에 대해 다각도로 파헤친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역사에 등장한 카이사르를 자세히 살펴보며 현실 정치에 대입해 보자.
10대에 권력의 속성을 깨우친 기린아
카이사르의 전리품과 다름없던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넷플릭스]
그는 로마 건국 시기부터 쭉 귀족으로서 권세를 누린 뼈대 깊은 가문의 자제다. 하지만 기원전 300년대에 로마가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며 수많은 귀족이 무역을 통해 떼돈을 벌어 입지를 넓힌 반면 카이사르의 집안은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해 뒤처지고 말았다. 당시 로마에서 정치를 하려면 반드시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했다. 현대 선거에서 상상할 수 없는 ‘돈 선거’가 당연시되던 때다.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유력 정치인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던 카이사르의 집안은 그의 아버지대에 이르러 비로소 중앙정치에 다시 발을 들였다. 카이사르의 고모부로서 ‘민중의 수장’으로 칭송받은 가이우스 마리우스(BC 157~86) 덕분이다. 그는 로마 교외 출신이지만 여느 갑부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재력이 상당했다. 해외 원정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탄탄대로 출세가도를 달렸다. 전쟁영웅으로서 공화정 최고지도자인 ‘집정관’을 7차례나 역임했다. 그러나 말로는 처참했다. 권세에서 멀어지면서 9족이 멸족당하는 화를 입는다.
이때 열아홉 살이던 카이사르는 마리우스가 그의 부관이던 술라에게 부관참시당하고 테베레강가에 버려지는 광경을 목격한다. 술라에 의해 집안의 일가친척이 몰살당하는 와중에 카이사르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집안의 수장이 된다. 이 사건으로 카이사르는 권력의 속성을 ‘너무 일찍’ 간파하고 만다.
카이사르가 위기의 상황에서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해외 로마군 입대뿐이었다. 외지로 나가 쥐 죽은 듯 때를 기다렸다. 술라가 사망하자 조용히 로마로 돌아와 요직을 거치며 차근차근 권력의 중심으로 돌진했다. 비록 정쟁에서 패배해 참담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로마 민중은 여전히 마리우스를 추앙하고 숭배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마리우스의 후계자임을 천명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는다. 술라파가 견제의 칼끝을 겨누자 술라의 외손녀와 재혼해 그를 무력화하는 ‘신의 한 수’를 둔다.
개방·실용·현실 정치의 정수, 카이사르式 정공법
카이사르는 ‘적과의 동침’ 전략을 절묘하게 구사했지만 명분 없는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마리우스의 최후를 통해 권력의 허상을 깨달은 그는 잔꾀나 모략을 부리는 대신 정정당당히 맞서는 방법을 택했다. ‘카이사르식 정공법’은 지금까지도 동서고금 지도자가 귀감으로 삼는 방식이다.자세히 살펴보자. 카이사르는 마음속에서 천불이 끓을지라도 사리사욕이나 자존심보다는 로마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실용주의’로 정치에 임했다. 당시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식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전리품을 독차지했다. 국가의 부는 권력자들에게 편중됐다. 혼란스러운 정국에 카이사르는 41세의 나이로 집정관 선거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선거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자 로마 최고 갑부이던 크라수스의 도움을 받고, 지금의 ‘팬덤 현상’을 방불케 하는 인기를 누리던 폼페이우스와 손잡았다. 이를 위해 카이사르는 자신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은 폼페이우스에게 17세 딸 율리아를 시집보내 동맹관계를 공고히 했다. 이들의 절대적 협조 덕에 카이사르는 집정관 등극에 성공한다.
이후엔 이들과의 ‘삼두정치’로 개혁을 이끌었다. 국가 살림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시민들은 환호했지만 기득권층의 반발은 하늘을 찔렀다. 설상가상으로 집정관의 임기 1년은 카이사르의 입지를 굳히기엔 너무 짧았고, 이에 ‘정치적 동지’들과의 동맹에도 균열이 생긴다.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가 힘을 합쳐 카이사르의 연임을 저지한 것. 결국 임기를 마친 카이사르는 전쟁이 끊이지 않던 ‘험지’ 갈리아(현 프랑스 지역) 총독으로 보내져 본국을 떠나게 된다. 여기까지가 2화까지의 이야기다.
카이사르는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갈리아를 7년 만에 평정한다. 갈리아는 로마군의 보급물자가 될 만한 모든 것을 불태우는 청야 전술을 쓰며 항전했지만 카이사르의 결의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카이사르에게 갈리아에서의 실패는 사실상 정치생명 끝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정세는 그를 벼랑 끝에 서게 했다. 딸 율리아가 출산 중에 사망해 폼페이우스와 맺어진 끈이 끊어졌다. 이에 더해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대척점에 서 있던 원로원 실세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재혼하기까지 했다. 폼페이우스를 견제해 줄 수 있는 크라수스마저 파르티아 원정 전쟁 중 객사하며 카이사르는 무원고립(無援孤立) 처지에 빠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위기의 카이사르를 지탱해 준 것은 ‘인기’였다. 7년 공백에도 카이사르에 대한 로마시민의 지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비결은 ‘갈리아 전기’다. 카이사르는 매년 갈리아에서 쌓은 치적은 물론 이민족의 특성과 지리적 특색까지 빠짐없이 기록해 로마에서 출판했다. 카이사르는 청중을 매료하는 언변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지는데, 필력도 만만치 않았던 듯하다. 술술 잘 읽히는 갈리아 전기 덕분에 카이사르는 여전히 로마의 중심에 남을 수 있었다.다만 중앙 정계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카이사르에 이어 집정관에 선출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총독 임기를 마치자 군대를 해산시키고 로마로 입성하라고 명한다. 로마로 들어가기 위해선 군대의 무장을 해제하고 혈혈단신으로 향해야 했다.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휘하 군대 4500명과 함께 루비콘강에서 일생일대 ‘선택의 순간’에 직면한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장고 끝에 카이사르는 이와 같이 외치고 고작 1000명도 안 되는 병력을 이끌고 남하한다. 나머지 병력에겐 폼페이우스가 모병하지 못하도록 그의 고향과 주변 도시 함락을 명령했다. 폼페이우스의 병력은 2만 명에 이르러 카이사르의 그것보다 수배가 많았지만 허를 찌르는 전술에 허둥대고 만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친(親)폼페이우스 세력은 모병할 여건이 안 되자 해외로 도주해 후일을 도모한다. 이는 패착이 됐다. 무주공산에서 쉽게 집정관에 등극한 카이사르에게 ‘로마의 배반자를 척결한다’는 명분을 부여하고 만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그리스 파르팔로스 지역에서 카이사르에게 대패하고 이집트로 도주한다. 당시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우스 13세가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둘 사이의 권력투쟁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연대할 움직임을 보이자 프톨레마이우스 13세는 선수를 치겠다는 의도로 폼페이우스를 살해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집정관으로서 이 사건을 명분 삼아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고 프톨레마이우스 13세에게 폼페이우스를 살해한 책임을 물어 축출한다. 이후 연인으로 발전한 클레오파트라에게 이집트의 지배권을 선물하고 소아시아, 그리스, 스페인 일부 지역에 출몰한 폼페이우스 잔존 세력을 모두 소탕하고선 로마로 향한다. 소아시아에서 젤라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원로원에 보낸 전문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는 아직까지도 많이 인용되는 말이다.
스스로만은 구하지 못한 아이러니
카이사르는 정점의 자리에 올라섰으나 오만함으로 인해 파멸의 길을 걷고 만다. [넷플릭스]
카이사르의 개혁정책은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동 없는 ‘독주(獨走)’는 ‘폭주(暴走)’가 돼 카이사르를 종말로 치닫게 했다. 카이사르는 자신을 군주와 다를 게 없는 종신 독재관으로 ‘셀프 임명’한다. 그리고 3년 뒤엔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신전 ‘바실리카 율리아’를 착공하기에 이른다. 또 서서히 카이사르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던 무렵 여론을 더 악화시키는 사건이 발생한다.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카이사리온을 대동하고 개선장군과 같은 위세로 로마를 찾은 것이다. 카이사르는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달변가다운 천부적인 유머 감각과 빼어난 패션 감각으로 많은 여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인물이다. 수많은 여성과 벌인 불륜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로마 정계의 여인들이 클레오파트라를 고운 시선으로 볼 리 없었다.
카이사리온도 카이사르에겐 악재였다. 로마 최고 권력자의 아들이 이집트의 왕위 계승자라는 사실이 로마인의 마음에 불안감을 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카이사르에게 간질 증상 등 건강 이상 증세가 나타나자 불안은 증폭된다. 카이사르는 정세를 환기하기 위한 돌파구로서 파르티아 정복전쟁을 구상하지만 이 역시 역효과를 초래한다. 사회·경제적 안정을 맛보기 시작한 로마시민은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며 카이사르를 전쟁중독자로 여긴다.
‘폭주 기관차’가 된 카이사르는 멈추지 않았다. 만약 카이사르가 이때라도 멈췄다면 로마 역사가 바뀌었을까. 결국 파르티아로 떠나기 직전 그는 원로원 회의장에서 반대파 귀족들에게 23번이나 난자당하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암살 세력은 “독재 타도, 공화정 수호”라는 말로 암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부에 있는 법. 그러나 적이 생긴 것은 스스로의 책임이다. 카이사르는 철두철미하고 비상한 전략으로 단번에 경쟁자를 꺾고 성공을 쟁취했다. 하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태도로 인해 주변인들을 떠나게 했다. 유독 생사고락을 함께한 측근의 배신이 잦았고 결국엔 “브루투스 너마저”를 외치며 죽게 됐다. 카이사르는 나라를 구하고 최고의 권력을 얻었지만 오만함으로 인해 정작 자신을 구하진 못했다. ‘헛똑똑이’ 영웅의 말로가 씁쓸하다.
황승경
● 1976년 서울 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국립음악원 디플럼, 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 성균관대 공연예술학 박사
● 국제오페라단 단장
● 前 이탈리아 노베 방송국 리포터, 월간 ‘영카페’ 편집장
● 저서 : ‘3S 보컬트레이닝’ ‘무한한 상상과 놀이의 변주’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