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훈 응원에 용기 내 정치 입문
기업인, 정치인 삶 본질적으론 같아
국가 진일보 위해 필요한 국민의힘 총선 승리
매일 여의도에 깨끗한 물 한 그릇씩 들이붓는 심정으로
‘정치인 고동진’의 ‘갤럭시’는 ‘보통 시민’ 모습으로 기억되기
[영상] 부산 가서도 전화하는 한동훈이란 남자…
3월 11일 고동진 서울 강남병 국민의힘 후보는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국민에게 국민을 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정치인 고동진’의 ‘마스터피스’”라고 말했다. [조영철 기자]
이날 그의 이름이 낯설게 비친 까닭은 ‘경제’가 아닌 ‘정치’ 섹션에 등장한 데 있다. 국민의힘이 4월 총선을 앞두고 그를 영입하려고 한다는 뉴스였다. 한동훈 비대위원장이 인재영입위원장이 된 후 직접 영입을 시도한 첫 인물이라는 사실도 곁들여졌다.
1월 22일 이 소식은 현실이 됐다. 고동진은 여의도 국회에서 환영식을 열고 국민의힘에 입당했다. 한동훈 위원장은 ‘갤럭시의 아버지’에 대한 예의를 갖추듯 쓰던 ‘아이폰’을 내려놓고 갤럭시를 꺼내 그와 함께 ‘셀카’를 찍었다. 입당 후 비례대표 출마설이 돌다가 3월 5일 전략공천을 받아 서울 강남병 국민의힘 후보가 됐다. ‘정치인 고동진’의 본격 시작이다.
“부산 가서도 전화하는 그 마음에…”
고 후보는 정치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이다. “우리나라 기업은 2류, 관료·행정조직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고(故) 이건희 회장의 말을 새기고 살았다. 혼탁한 물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다. 직장인으로서 그저 열심히 일했다. 몸을 너무 혹사한 탓에 갑자기 쓰러져 한쪽 귀 청력을 잃고 보청기를 끼게 됐을 정도다. 1984년 사원으로 시작해 2015년 사장에 오르고 2022년 퇴사했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우러러볼 입지전 커리어다.회사를 나온 후에도 정치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만 회사에서 거둔 성공 경험을 사회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다. ‘환원(還元)’이 그가 살면서 내내 품어온 삶의 가치라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후배들에게 늘 말한 게 있어요. 삼성만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고요. 몸은 삼성에 있지만 궁극적으론 대한민국의 경제와 미래를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삼성이 잘돼서 내는 세금이 다 우리나라에 보탬이 되니까요.”
고 후보가 택한 환원법은 출판이다. 지난해 7월 직장 생활 노하우, 통찰을 담은 책 ‘일이란 무엇인가’(민음사)를 냈다. 강연도 숱하게 다니며 직장 생활이 고민인 직장인, 예비 직장인을 만났다. 이 만남에서 그는 생각보다 젊은이들의 고민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힘듦을 나눠 질 수 있을까 고심에 빠져들었다. 국민의힘이 그에게 손을 내민 건 이 무렵이다.
“지난해 10월부터 국민의힘으로부터 연락이 오긴 했습니다. 배현진 의원이 몇 번씩 연락해 입당을 권하고 집에 찾아오기도 했죠. 고민은 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결심이 서진 않았어요. 그러다 지난해 말 국민의힘 지도부가 바뀌는 과정에 들어갔고, 자연스레 제 정계 입문도 흐지부지되는 것 같았습니다. 고민을 내려놓고 다시 원래 삶에 집중하며 살았는데, 1월 3일 한동훈 위원장에게 전화가 왔죠. 사실 모르는 번호라서 이땐 안 받았어요. 그랬더니 ‘한동훈입니다’라고 문자가 오더군요. 이때까지도 누가 장난치는 줄 알았는데, 한 위원장 번호를 아는 누군가가 ‘한 위원장이 맞다’고 알려줘서 그제야 진짜 한 위원장이라는 걸 알았습니다(웃음).”
1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인재 영입 환영식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갤럭시 휴대전화를 꺼내 고동진 서울 강남병 국민의힘 후보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한 위원장이 제 고민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게 ‘충분히 고민해 보라’며 시간을 줬죠. 고심하며 차차 ‘제도권으로 진입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초등학교 때 반장 정도 해본 거 말곤 출마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한 위원장의 ‘진심’이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몇 번에 걸쳐 연락하는데, 심지어 부산에 내려갔을 때도 전화를 걸어 저를 설득하더라고요. 그 모습에 정치에 뛰어들겠다는 마음을 굳혔습니다.”
결심을 굳히니 번뇌가 사라졌다.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기업인으로서 거둔 성공 경험이 정치의 영역에서도 발휘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새겼다.
“정치의 본질은 국민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기업인의 삶도 본질적으로 정치와 같다고 봐요. 기업인의 덕목은 제품과 서비스를 통해 소비자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그런 삶을 살았으니까요. 결국 ‘작은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정치인이 되면 특정 소비자가 아니라 국민 전체로, 대상이 굉장히 넓어지겠죠. 하지만 제가 약 40년간 한 회사에서 근무하며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발휘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좋아하는 낱말은 ‘중용’
고 후보는 회사의 말단에서 꼭대기 층에 다다른 인물이다. 사회를 하나의 회사로 본다면 그의 삶 자체가 그가 겪은 직장 생활과 닮았다. 고 후보는 1961년 서울 서대문구 굴레방로 아현시장에서 6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자랐다. 집안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큰형과 둘째 형, 큰누나는 고등학교만 졸업 후 생업에 뛰어들었다.일찍 철이 들어야 했다. 고기를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었다. 중학생 때 ‘마흔이 되면 점심에 언제든 불고기 백반을 사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정도다. 성공에도 목이 말랐다. 삼성전자 입사 첫날부터 ‘이 회사의 사장이 되겠다’ 마음먹고 수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목표를 달성했다. 경제적 부도, 성공도 이뤘다. 점심은 물론 삼시 세끼 언제든 불고기를 사 먹을 수 있는 사람도, 사장도 됐다. 퇴직할 때 받은 돈만 118억3800만 원(급여·상여·퇴직금 포함)이다. 그럼에도 젊을 적 고단한 삶이 몸에 밴 까닭인지 그는 여전히 소박함을 지니고 있다. 3월 11일 동아일보 충정로사옥에서 만났을 때 그는 “목이 마르다”며 80원짜리 믹스커피를 찾았다. 익숙하다는 듯 홀짝이더니 한 잔을 다 비웠다.
사회의 모든 층위를 경험해 본 그다. ‘진보’를 외칠 수도, 마음먹기에 따라 국민의힘 외에 다른 정당을 갈 수도 있었다. 그가 국민의힘을 선택한 이유는 노력이 배신당하지 않는 사회를 바라기 때문이다.
“제가 어렸을 땐 다들 사정이 어려웠어요. 물론 부자인 사람도 있었죠. 중학교 때 여의도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뜨거운 물이 나오고 화장실이 집 안에 있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전 부자들은 나쁜 방법으로 돈을 모았을 거라고 생각했죠.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말을 듣기 전까진요. 선생님께선 ‘동진아, 세상엔 정당한 노력을 통해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많다. 그 덕분에 이 사회와 나라가 굴러가는 거야’라고 하셨어요. 이 말씀이 제 가치관을 바꿨습니다.”
고 후보는 아직 짙은 정치적 색채를 발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중도’라고 말한다. 제일 좋아하는 말도 ‘중용’이다. 그는 국민의힘이 보수가 아니라, 오히려 이 가치에 더 가까운 정당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균형을 추구합니다. 물론 어쩌면 중간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와 있는 것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진보’라고 하는 민주당이 15~20년 전 봤던 진보입니까. 탈(脫)권위, 탈권력을 나타내며 서민과 취약 계층에게 다가가던 그 모습이 남아 있습니까.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보수라고 불리는 국민의힘이 훨씬 더 나아지고, 발전하고 있어요. 제가 추구하는 국가는 전쟁 중에도 굴러가는 나라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입법·행정·경제 모든 면에서 시급한 문제가 너무나 많은데, 절대 다수석을 차지한 야당에 의해 국가는 멈춰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진일보하기 위해서라도 4월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승리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내 ‘마스터피스’는 사람”
한번 시작하면 제대로 한다. 3월 13일 고 후보는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비례대표로 출마하려다가 지역구 의원으로 마음을 바꾼 것도 지역 이곳저곳을 다니며 당을 지원하기 위함이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유지되며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소속 비례대표로 출마하면 국민의힘 선거를 지원할 수 없어서다.“이왕 시작한 거 국민의힘 승리를 위해 할 수 있는 바를 다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려고 했는데, 위성정당으로 가면 그럴 수 없다고 해서 당황했습니다. 당 전체 선거를 돕기 위해 지역구 의원으로 바꿨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가족, 특히 아내다. 30여 년에 이르는 결혼 생활, 삶의 반평생 동안 그의 성공을 위해 물심양면 내조와 희생을 아끼지 않은 반려자다. 고 후보의 휴대전화에 아내는 ‘보물 1호’로 저장돼 있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해요. 제가 전무, 사장으로 일한 약 15년간 평균 출장 일수가 170~180일이었어요. 많이 할 땐 202일이었고요. 그런데도 아내가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을 때와 같은 상황을 빼고는 한 번도 집안일로 제게 전화한 적이 없어요. 얼마나 고마워요. 묵묵히 제 옆을 지켜준 사람인데. 제가 직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 절반은 아내 몫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아내를 위해 퇴사 후엔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했어요. 그런데 결국 약속을 깨게 됐죠. 사실 처음에 비례대표로 출마하려고 한 이유에 아내를 위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비례대표는 지역구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니 입법·정책에 집중할 수 있고, 그나마 여유가 있다고 들었어요. 이 논리로 아내를 간신히 설득했는데…. 또 상황이 바뀌니 참(웃음). 그래도 이젠 다 이해해 주고 누구보다 절 응원합니다.”
밖에선 한 위원장, 안에선 아내의 응원을 받는다.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두려움은 남아 있다. 고 후보는 삶에서 ‘무엇을 남기는 것’이 남은 과업이라는 마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한다.
“어차피 한번 살다 가는 인생입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뜻이죠.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삶에 뭔가를 남긴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국민의 마음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요. 국회의원이 된다면 매일 혼탁한 여의도에 깨끗한 물 한 바가지를 들이붓는 마음으로 일할 겁니다. 변화가 없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무언가를 남기는 것. ‘기업인 고동진’은 갤럭시를 남겼다. 사람들이 그는 모를지라도 그것은 아는, 세계를 누비는 그의 ‘마스터피스’다. 고 후보는 ‘정치인 고동진’도 갤럭시와 같은 역작을 남기길 바란다. 바로 ‘보통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훌륭한 법이나 정책을 만들면 그것을 만든 사람이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이렇게 뛰어난 법을 만들었나’ ‘누가 악법을 이렇게 올바르게 개정했나’라면서요. 이런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습니다. 국회에 가면 청년의 미래, 중소·중견기업, 소프트웨어 산업, 사회적 약자 관련 만들고 싶은 법이 많습니다. 혼자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여야 상관없이 참여하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좋은 법을 만들기 위해 함께 공부할 겁니다. 정말 국민을 위하는, 친근하고 평범한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국민에게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정치인 고동진’의 마스터피스입니다.”
신동아 4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