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이라는 이름의 징병, 학도지원병
김유길, 권중혁 마지막 학병 출신 애국지사
일제가 엘리트 병사 동원에 필사적이었던 이유
박순동 ‘모멸의 시대’와 이가형 ‘버마전선 패잔기’
지리산으로 간 하준수와 ‘신판 임꺽정’
美 OSS 요원 된 한국인 톰·조·찰리
되풀이 돼선 안 되는 역사와 ‘학병 서사’
제국이 키운 엘리트에서 대한민국 설계자로
동원된 협력자인가 전쟁의 희생양인가
일제강점기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 청년들. [동아DB]
경북 영일군(현 포항) 출신의 권 지사는 보성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일본군 대구24부대에 입영했다. 이 부대에 배속된 학병(學兵) 600여 명 가운데 전선 등으로 배치되지 않은 20여 명이 집단 탈출을 모의했다. 이들의 계획은 단순한 탈출이 아니었다.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기를 탈취하며 식수에 독극물을 타서 대구 주둔 일본인 병력 6000여 명을 몰살시킨다는 거사였다. 또한 학병들이 집단 탈출함으로써 일본군 내부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민족정신과 반일 사상을 고취한다는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그해 8월 실제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권중혁 외 권혁조(1923년생, 일본 주오대), 문한우(1921년생, 연희전문), 권성훈(1920년생, 혜화전문, 권태용으로 개명), 김복현(보성전문), 김이현(1923년생, 일본 메이지대) 등 6명뿐이었다. 대구 팔공산으로 피신한 6명은 군과 경찰을 총동원한 수색대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2명씩 짝을 지어 분산 은신했지만 밀고로 김복현과 김이현 두 사람만 빼고 모두 체포됐다.
집단 탈출로 일제에 항거한 학병들
체포된 4명은 일본 규슈에 있는 고쿠라육군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10월에야 석방됐다. 당시 고쿠라육군형무소에는 이들보다 앞서 6월에 함흥 43보병부대에서 탈출했다 체포된 태성옥(1919년생, 와세다대), 임영선(1919년생, 메이지대), 이윤철(1925년생, 주오대)도 있었다. 1944년 대구 24부대 탈출 사건, 함흥 43보병부대 탈출 사건, 평양사단 탈출 사건은 학병들이 주도한 대표적 항일 의거로 꼽힌다.권중혁 지사 이전 최고령 독립유공자는 김유길 지사였다. 김 지사는 2022년 4월 향년 10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19년 평남 평원에서 태어난 김 지사는 일본 규슈 오이타(大分)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1월 입영해 중지파견군 제7997부대에 배치됐다. 중지(中支)는 중국의 중부 지방으로 양쯔강 하류 지역을 가리킨다.
김유길 지사는 평양 출신 김영호(1920년생, 보성전문)와 함께 일본군을 탈출해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운영하던 황포군관학교 분교(중국 안후이성 린취안 소재)로 갔다. 여기서 먼저 탈출해 있던 장준하(1918년생), 김준엽(1923년생) 등을 만나 특설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에 편성돼 군사교육을 받는다. 이후 25명의 학병은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이동한다. 이들의 항일 대장정은 장준하의 회고록 ‘돌베개’(1971)와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나의 광복절 시절’(1987)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김유길 등은 1944년 4월 중국 시안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이하 OSS)이 주도한 한미합작 특수훈련을 받고, 광복군의 국내 정진군 경기도 제3조에 편성돼 한반도 진입(일명 독수리 작전)을 기다리다 광복을 맞이했다.
2024년 3월 1일 현재 생존 독립유공자(애국지사)는 단 6명. 이 가운데 1924년생인 김영관 지사는 경성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44년 9월 ‘지원병’이 아닌 ‘징집’ 대상자로 입대했다. 중국 저장성에서 주둔하다 탈출 후 광복군에 합류해 항일 독립운동을 한 그도 올해 100세를 맞는다.
김유길은 중국에서, 권중혁은 일본의 형무소에서 각각 광복을 맞았지만 두 사람을 이어주는 공통점은 ‘학병 체험’이었다. 두 지사의 타계로 1944년 1월 20일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황군(일본 천황의 군대)이 돼야 했던 20대 청년들은 이제 우리 곁에 없다. ‘학병세대’가 사라진 것이다.
지원에서 입영까지 석 달 만에 일사천리
전장으로 나가는 학병을 배웅하는 가족들. [동아DB]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도’, 1943년 ‘해군특별지원병제도’와 ‘학도지원병제도(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를 실시했다. 흔히 학도지원병을 줄여서 ‘학도병’ 또는 ‘학병’이라고 하는데, 1950년 6·25전쟁 때 학생 신분으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의용군을 ‘학도병’이라고 부르면서, 1944년 일본군에 들어간 학도지원병은 ‘학병’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일제 말 학병에 징집되어’라고 표현하지만 1943년 10월부터 시행된 학병은 형식상 징집이 아닌 지원이었다. 만 20세 남자에 대한 징집은 1944년 8월부터 시행됐다.
조선총독부는 1943년 10월 20일 육군성 명령 제48호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을 통해 20세 이상(1923년 12월 1일 출생자)으로 전문학교와 법문계 대학에 재학 중이거나 졸업한 남자에 대해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이때 의학부, 이학부, 공학부와 사범계는 모집 대상에서 제외됐다. 당시 모집 대상자는 몇 명쯤 됐을까. 1917~1923년 사이에 태어나 전문학교 이상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은 7000명(국내 1000명, 재일본 6000명 추산)이 조금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
학도지원병 제도가 공포되자마자 10월 25일 접수를 개시해, 11월 20일 마감하고, 12월 20일까지 전형검사를 실시하고, 이듬해(1944) 1월 20일 일제히 입영하는 절차였다. 지원에서부터 입영까지 석 달이 채 안 걸릴 만큼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재일 유학생도 예외는 없었다. 고향과의 거리나 교통 사정 등을 감안해 가족과 협의할 물리적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고 시일 내 지원하도록 종용받았다.
반도 학생들, 피의 대가를 요구하다
재일 유학생 황호근은 1943년 진행된 학도지원병 모집을 ‘관제(官製) 영광의 사도(使徒)’라는 제목의 글로 비꼬았다.현관문을 밀치고 들어가니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멍하게 나를 쳐다보며 한참동안 말없이 어물어물하는 태도가 이상하므로 나는 직감적으로 무엇을 느꼈다.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저, 전보가 왔어요….” “네 전보요? 언제나 고향에 급하면 오는 전보인데 그리 놀랄 게 없지 않습니까?” “아니에요. 한 장도 아니고 전보가 일곱 장이나 왔어요.”(‘세대’ 1972년 9월호)
황호근 앞으로 온 전보는 발신자만 다를 뿐 내용은 한결같았다. ‘학병에 지원하라.’ 고향 경주의 군수, 면장, 서장, 국민정신총력연맹 OO면 이사장.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도 따로따로 전보를 쳤다. 마지막 전보의 발신자인 ‘이와모토’는 안동에 사는 외숙부의 창씨명이었다.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편지가 오기도 했다. 메이지대 상학부에 다니던 제주도 출신 김 아무개는 아버지로부터 ‘만약 학병에 지원하지 않으면 영업증(수산업)을 회수하겠다고 위협하니 즉시 귀향하라’는 편지를 받고 어쩔 수 없이 지원을 결심한 터였다.
학생들은 “이런 식의 권유, 지원 독촉, 강제 출원은 기필코 반대한다”고 분개했지만 도망가지 않는 한 거부할 방법이 없었다. 도망 후 가족과 친지들에게 갈 피해를 생각하면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다 닥쳐올 개죽음을 떠올리며 엉엉 우는 게 고작이었다.
1943년 11월 11일 오전 10시 니혼대 상경학부 강당에서 ‘반도의 선배’들과 함께하는 재일본 학생들의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여기서 반도의 선배들이란 학병 지원을 독려하기 위해 온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 등을 가리킨다. 그들은 도쿄 각 대학을 순회하며 조선 유학생들에게 학병 지원 권유 연설을 하고 있었다. ‘격려사’가 끝나자 와세다대 법학부 3학년 김 아무개가 발언을 요청했다.
“저희들이 전장에 나가는 피를 흘리는 것은 좋으나 학병 지원의 성적 여하에 따라 반도 시정(施政)을 근본적으로 시정하겠다는 고이소 (조선)총독의 발언은 확실히 우리들을 위협하는 언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가운데 그 피(血)의 대가를 어떻게 보상하겠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보장을 받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반도 학생들이 피를 흘리는 대가를 요구합니다.”(황호근 ‘관제 연광의 사도’)
얼마 후 이런 발언을 한 김 아무개가 보이지 않았다. 헌병에게 끌려 나간 것이었다. 이 무렵 도쿄헌병사령부 소속 조선인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이 재일 유학생들을 수시로 미행하며 동태를 감시했다. 두 달 뒤 김 아무개가 그때 받은 고문으로 정신이상이 생겨 고향으로 떠난 뒤 소식이 끊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견된 일본 패망, 개죽음은 당하지 말자
겉보기에는 모집이 순조로워 보였지만 순순히 지원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재일 유학생들은 1943년 4월 18일 오전 11시 40분 미군 B29가 도쿄를 폭격했을 때 일본의 패망을 확신하고 있었다. 매일 밤 라디오를 통해 하와이에서 방송하는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짐했다. “개죽음은 당하지 말자.”도쿄제국대 법학부에 다니던 신상초(1922년생)도 전황이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과 국제 정세의 변화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입대하더라도 반드시 탈출하겠다고 결심했다.
“태평양에서 미 해군, 공군에게 ‘롤백(roll-back)’을 당하고 있는 일본군은 남부태평양과 중부태평양의 전략거점을 잃어버리고 희망 없는 전쟁을 계속할 따름이었다. 유럽 대륙에서는 스탈린그라드 반격작전 이래 소련군이 아연 활발한 공세로 바뀌었다. 유럽 대륙에서의 미군상륙작전은 거의 필사적으로 보였다. 유럽에서 연합국이 승리하리라는 서광이 분명히 비치기 시작했다면 독일 패망이란 결정적인 것이고, 독일이 망한다면 미국과 영국은 모든 힘을 태평양에 집중할 터이니 일본의 패전은 가속적으로 심해질 것이다.”(신상초 ‘일군(日軍) 탈출기’, ‘신동아’ 1964년 9월호, 이 수기를 토대로 1966년 ‘탈출’이라는 단행본이 나왔고, 1987년 출간된 ‘1·20 학병사기’ 1권에도 실렸다.)
전황이 불리해질수록 일제는 학병 모집에 더 열을 올렸다. 조선총독부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앞장서서 ‘학도출진(學徒出陣)’ 종용에 나섰다. 학병 제도의 성공적 시행을 바라는 좌담회, 간담회, 격려대회가 이어졌고, ‘자발적’ 지원자와 자식들을 줄줄이 전장으로 보낸 부모까지 동원된 각종 미담 기사가 쏟아졌다. 입영을 앞둔 한 달 내내 지역별로 출진학도 장행회(장한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앞날을 축복하고 송별하기 위한 모임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입대 기념식)가 이어졌다.
한편 학병 거부자는 ‘응징학도’ ‘징용학도’로 분류돼 광산이나 시멘트 공장 등으로 보내 강제 노역을 하게 했다. 북한 ‘주체사상’ 이론의 정립자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냈고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1923년생, 평남 강동)은 일본 주오대에 다니던 1944년 1월 하숙집을 찾아온 형사에 이끌려 귀국한 뒤 100여 명의 조선인과 함께 지원병 훈련소에 입소했다 10일 후 징용공으로 끌려갔다.(황장엽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그가 끌려간 곳은 강원도 삼척의 시멘트 공장이었다. 시인 김수영(1921년생)은 일본 유학 중 학병 모집이 시작되자 만주로 도망갔다. 학병 동원을 피해 산으로 지방으로 해외로 도피하는 젊은이들이 속출했고, 개중에는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거나, 호적을 고치거나, 사망신고를 해버리는 사람도 있었다.
‘신판 임꺽정’, 지리산으로 간 사람들
끝내 학병을 거부하고 산으로 숨어든 사람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훗날 남도부라는 이름으로 남부군(6·25전쟁 때 지리산에서 활동한 빨치산 부대, 조선인민유격대) 부사령관을 지낸 하준수(1921년생)다.경남 함양의 천석꾼 집안 아들이던 하준수는 일본 주오대 법문학부 졸업반 때 학병모집을 피해 귀국 후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이어 지리산·장안산·백운산·괘관산(대봉산)으로 이동했고, 이곳에 모여든 학병·징병·징병 거부자들을 규합해 ‘널리 나라의 빛이 되자’는 뜻의 항일결사단체 ‘보광당(普光黨)’을 만들고, 주재소 총기 탈취 등 일종의 무장투쟁을 벌였다. 보광당은 훗날 지리산 남부군의 모체가 됐다. 하준수는 광복 후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서 활동했으나 여운형이 암살되자 지리산에서 빨치산 게릴라 활동을 했다. 1946년 ‘신천지’에 ‘신판 임꺽정-학병 거부자의 수기’라는 제목으로 3회에 걸쳐 하준수의 글이 실렸다.
“백운산에서 겨울을 난 우리들은 1945년 3월 괘관산으로 들어가서 그곳에다 큰 집을 짓고 화전을 시작하는 한편 동지 73명으로 보광당을 조직하고 일본이 전쟁을 계속 못하도록 될 수 있는 대로 방해할 것과 당원을 훈련하여 연합군 남선 상륙 시에 응할 수 있도록 제반 태세를 갖추는 것이 우리들의 행동 목표였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화전을 일어서 우리의 식량 문제를 해결코자 일을 하는 시간 외에는 나머지 시간을 전부 군사훈련에 충당시키었다.”
‘괘관산도령들’(지역민들이 붙여준 호칭)은 그들 나름의 방법으로 광복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 경남 하동 출신의 이병주(1921년생)는 와세다대 불문과 재학 중 학병에 다녀온 뒤 대표적 학병 체험 소설로 꼽히는 ‘관부연락선’(1968년 4월~1970년 3월 ‘월간중앙’ 연재)에서 하준수라는 실명을 그대로 사용했다. 관부연락선은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 사이를 운항하던 연락선을 가리킨다. 이 소설에서 이병주는 하준수가 이끈 보광당을 ‘수호지’의 양산박에 비유했다. 이병주의 또 다른 소설 ‘지리산’(1972년 9월~1978년 8월 ‘세대’에 연재)에는 ‘하준규’라는 이름으로 다시 등장한다.
인텔리 병사 사용법, 징병제 위한 사전작업
학병 모집 대상자 7000여 명 가운데 실제 몇 명이나 입대를 했을까.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일제의 조선인 학도지원병 제도 및 동원부대 실태조사 보고서’(2017)에 따르면 조선 주둔 일본군이 작성한 문건에는 3893명, ‘1·20동지회’가 확인한 인원은 4385명으로 492명의 차이가 있다. ‘1·20동지회’란 귀환 학병들이 자신들의 입영 날짜인 1월 20일을 따서 1962년 결성한 단체다.조선인 학병 연구의 선구자인 재일 사학자 강덕상은 1997년 일본에서 펴낸 ‘조선인 학도 출진’(한국어 번역서 제목은 ‘일제강점기 말 조선 학도병의 자화상’)에서, 1944년 8월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 학도의 지원 최종 현황’을 인용해 학병 적격자 수는 6203명, 실제 입대자 수는 4385명이었다고 했다. 1·20동지회가 확인한 것과 동일하다.
일제는 학도지원병제와 별개로 1943년 8월 1일 병역법을 개정해 만 20세의 조선인 남자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고, 1944년부터 징병에 의한 강제동원을 시작했다. 숭실대 사학과 표영수는 박사학위 논문 ‘일제강점기 조선인 지원병제도 연구’(2008)에서 특별지원과 징병으로 일제 말기 일본 육·해군으로 동원된 조선인 규모를 대략 21만 명으로 추산했다.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전인 1938~1943년까지 6년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에 ‘지원’한 사람은 누계 80만 2047명에 달했고, 실제 훈련소를 거쳐 군에 ‘입대’한 사람은 1만6830명이었다. 특히 1940년대 들어 지원자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매년 10만 명 이상씩 급증) 입대 경쟁률이 50~60 대 1이 넘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육군보다 5년 뒤 시행된 해군특별지원병제도에 의해 동원된 조선인 1만2166명을 포함해 일제 말기 특별지원으로 동원된 조선인은 3만300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조선 및 일본·중국·만주·쿠릴열도·남양군도·버마 등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는 거의 전 지역에 배치됐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일제에 의해 희생됐다.(표영수)
강덕상은 아무리 일제의 종용에 의한 반강제적 지원이라 해도 6년간 육군특별지원병 지원자가 누계 80만 명을 넘었다는 사실로 보아 학병 동원은 단순히 부족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일반 지원자가 넘치는 상황에서 입대 전형 기준을 조금만 낮추면 얼마든지 병력 동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000명도 안 되는 대학생 병사를 확보하기 위해 온 나라가 대소동을 벌인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황국신민 교육받은 이중언어 엘리트
1920년 전후로 태어난 이들은 날 때부터 일본 국민이었고 국어는 일본어였다. 일본인 교사가 다수인 학교에서 일본어로 역사·지리·수신 등 충실한 황국신민 교육을 받았고, 총검술 등 교련을 통해 기초 군사훈련까지 마쳤다.강덕상은 “1943년 학도지원병 적격자들은 ‘군교일치(軍敎一致)’의 연장선상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며 “일본 군인이 될 소지를 이렇게 잘 갖춘 층은 없었다”고 했다. 말 그대로 ‘준비된’ ‘양질의’ 간부 후보생이었던 것.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자녀를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집이 얼마나 됐을까. 친일 귀족이나 기업가는 물론이고 대대로 지주 집안 또는 명문가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광복 후 언론인, 교수,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신상초는 평안도 정주 지주의 맏아들로 태어나 도쿄제국대 법학부에 입학했다.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은 평북 강계의 지주 아들로 일본 게이오대 문학부에 다녔다. 신상초와는 신의주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다.
강덕상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집안의 아들이 개인 사정을 초월해 황군의 병사가 되는 것이 지역의 징병 적령자나 가족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리 없었다”면서 일제가 학병 동원에 열을 올린 목적을 다음 두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중일전쟁 이후 조선인 사이에서 애국심이 고양되고 있는 현상을 경계하며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표백화’하고 정신을 ‘국방색’으로 물들이는 것”이었다. 그는 “조선 학생의 힘이 이후 상상 이상의 세력으로 성장할 것을 알고 이를 사전에 분해시키려는 반동적 행위”(‘신천지’ 1946년 2월호)라는 귀환 학병의 발언을 인용했다.
둘째, 학병 동원은 1944년 4월부터 전면적으로 실시될 징병제의 연착륙을 위한 사전작업이었다. 총독부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조선인 징병 대상자 가운데 일본어 이해자는 3분의 1 수준이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병사가 입대했을 때 벌어질 문제를 해소해 줄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학병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어와 한국어 이중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 불어, 독어까지 습득한 인재들이었다.
“학도병 문제는 지원병 제도에서부터 징병제로 이어지는 경과 조치였지만 장기적으로는 황민화의 가열 찬 촉진에 있었다. 학병 장교가 조선인 병사를 거느린 일본 간부로 출세하고, 전공(戰功)을 세워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결합됐을 때 그 가족, 그 고향 사람들의 대일 감정은 어떻게 될 것일까. (그들이) 퇴역한 뒤 사회적·경제적 엘리트 자제가 재향군인으로서 지방 중견 인물로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광경을 상상할 때, 조선은 어떠한 딴 세계가 되었을지를 생각하면 일본 제국주의의 진정한 목적이 보인다.”(강덕상)
예상보다 빠른 일본의 패망으로 ‘제국주의의 진정한 목적’은 실현되지 못 했지만, 자의든 타의든 황군이 된 학병들에겐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라리 감옥을 택했어야 할 일이다”
1944년 1월 20일 오전 9시. 유태림은 약 1000명의 학병과 같이 대구에 있는 80연대에 입영했다. 간단한 신체검사가 끝난 뒤 검은 학생복을 벗고 카키색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군복으로 갈아입은 친구들의 모습에 반사된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운명의 채찍질을 두뇌에서 가슴에서 뼈에서 피부에서 실감했다. …인격은 학생복을 싼 옷 꾸러미와 더불어 고향으로 보내버리고 병력의 한 단위로서 스스로의 육체와 정신을 규제해야 하는 노예의 나날이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ㅡ 그리고 어떻게 하자는 이 꼴인가!’ 차라리 감옥을 택했어야 할 일이었다.(이병주 소설 ‘관부연락선’)이병주는 ‘관부연락선’(1970년 단행본 출간) 이후로도 ‘변명’(1972), ‘지리산’(1985), 미완성 유작이 된 ‘별이 차가운 밤이면’(1992)까지 학병 체험이라는 주제에 천착했다. 어쩌면 그는 평생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라는 답을 찾기 위해 살았는지도 모른다.
전남 목포 출신으로 도쿄제국대 문학부에 다니던 이가형(1921년생)에게 ‘노예의 나날’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훗날 영문학자(국민대 명예교수)이자 소설가, 번역가로 활동한 이가형은 ‘버마전선 패잔기’(‘신동아’ 1964년 11월호)를 남겼다.
연합군은 1943년 10월 인도 국경을 넘어 진군했고, 중국군은 사르윈강(버마어로 ‘분노의 강’)을 넘어 동북부로 넘어왔다. 일본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임팔 공격을 시도했으나 패배하자 지원군을 파견했다. 산포 제49연대 제5중대에 편입된 이가형은 1944년 6월 18일 용산역을 떠나 20일 부산항에서 출범하는 수송선에 올라 버마로 향했다. 이때 함께 수송선에 몸을 실은 14명의 학병 중에는 전남 순천 출신의 박순동(1920년생)과 영암 출신의 이종실(1915년생)도 있었다. 박순동은 일본 고마자와대 예과를 수료했고, 이종실은 일본 니혼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이종실과 이가형은 광주고보 선후배 사이였다. 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박순동의 수기에 다시 등장한다.
3000여 t의 낡은 화물선에 병사 5000여 명과 군수품, 군마들까지 실려 가는 상황은 지옥 같은 현실이었다. 병사들은 화물칸에 차곡차곡 선적됐다. 좁은 칸 안에서 발을 쭉 펼 수도, 고개를 온전히 들 수도 없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노예선’이나 다름없었다. 아침마다 갑판 위에 설치된 변소에서는 분뇨가 흘러넘쳐 병정들의 발을 적셨다.
부산항을 떠난 지 한 달 만에 싱가포르항에 도착한 이들은 다시 화물차에 실려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 연합군에 제해권과 제공권을 빼앗긴 일본군은 패잔병이나 다름없었다. 전투는커녕 폭격을 피해 낮에는 숨고 밤에만 행군했다. 그 와중에 광주고보·도쿄제대 선배인 박태영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말라리아에 걸렸지만 치료도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이역만리의 원혼이 된 것. 이가형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과 설사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라리아만큼이나 학병들을 괴롭힌 것은 조국이 아닌, 오히려 적이 돼야 할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적이 아닌 사람을 쏘아야 하는 부조리한 현실이었다.
우리 병정은 혁대에 수류탄을 두 개 차고 있었는데, 이것은 만약의 경우 자살을 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수류탄을 써본 적도 없거니와 써볼 생각도 없었다. 내게는 한 자루의 소총이 있었다. 늘 짐스러웠지만 ‘바모’ 부근에서 돼지와 소를 정확하게 쏜 일이 있을 뿐 아직 사람을 쏴본 적도 없었다. 우리 조선인에게는, 특히 지금 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할 수도 없었고, 따라서 자기가 미워하지 않는 사람의 손에 의해서 미움을 받아가며 죽는다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이다.(이가형 ‘버마전선 패잔기’)
이 무렵 박순동과 이종실이 사라졌다. 배낭은 그대로 있는데 두 사람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가형은 같은 조선인인 두 사람이 자신만 빼고 탈영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이가형은 박순동이 남기고 간 배낭을 정리하다 ‘당(唐)시선’ 책자를 발견하고 두보의 ‘빈교행(貧交行)’을 몇 번이고 읽는다. “그대는 관중과 포숙의 가난한 때의 사귐을 보지 아니하느냐? 이 진정한 우도(友道)를 지금 사람들은 버리기를 흙같이 한다.”
탈영병에서 ‘냅코 프로젝트’ 요원으로
이제부터 박순동이 들려주는 일본군 탈출기. 박순동의 수기 ‘모멸의 시대’는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보다 10개월 뒤 ‘신동아’ 1965년 9월호에 실렸다.나는 군복의 윗 호주머니 속에서 거의 반이나 찢어져 달아난 수첩과, 두 치가량이나 남은 연필동강이를 꺼내었다. 수첩의 어느 페이지에나 무수히 그어진 줄을 별빛으로 따라 내려가서 다시 한 줄을 그어 넣었다. 이로써 그날은 1945년 3월 20일이라는 날이 되는 셈이었다.(박순동 ‘모멸의 시대’)
줄을 그어 표시하지 않으면 오늘 날짜도 헤아리기 어려운 정글 속이었다. 부산에서 수송선을 타고 해로와 육로를 거쳐 버마 동북단의 철도 종점 라시오에 도착한 것은 1944년 9월 7일. 그 후로 버마 동북부와 윈난성 변경 수천 리를 걸었다. 버마 수도 랑군과 윈난성 쿤밍 사이를 잇는 주요 도로를 사이에 놓고 연합군과 일본군이 뺏고 빼앗기는 전투를 벌였다. 일본이 도로를 점령하자 연합군은 아예 새 도로를 건설하려 했고, 이 공사를 저지하는 것이 버마전선 파견군에 맡겨진 임무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패전을 거듭했고 병사들은 말라리아로 죽어갔다. 퇴로가 막힌 자신들의 부대가 머지않아 연합군 탱크 부대와 낙하산 부대 사이에서 ‘으깨질’ 신세임을 알게 된 박순동과 이종실은 탈출을 결심했다.
문제는 말라리아에 걸린 이가형이었다. 이종실은 건강 상태가 악화된 이가형을 두고 갈 거라면 탈출 자체를 집어치우자고 할 만큼 완강하게 반대했으나 상황이 긴박하게 흐르자 어쩔 수 없이 둘만의 탈출을 단행했다. 도주가 아닌 사고로 위장하기 위해 배낭도 두고 나왔다. 수통 하나, 쌀 한 줌, 권총 한 자루가 전부였다. 총은 만약 탈출하다 발각돼 포위되면 자살하기 위한 도구였다.
다행히 인도인 M의 도움으로 탈출에 성공한 박순동과 이종실은 영국군에 투항해 인도 뉴델리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두 사람보다 일주일 뒤 탈출한 박형무가 합류해 세 사람은 행선지도 모른 채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는 이집트 카이로를 거쳐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고, 3일 뒤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었다. 그들의 최종 기착지는 캘리포니아 산타카탈리나섬.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 도착한 섬에서 국적과 성명과 지금까지의 경력을 누구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제부터 박순동은 톰, 이종실은 조, 박형무는 찰리가 됐다.
한반도에서 일본을 상대로 비밀첩보작전을 수행할 요원을 길러내는 훈련이 시작됐다. 미국 OSS가 주도한 이른바 ‘냅코 프로젝트’. 톰과 조와 찰리는 고립된 섬에서 극비리에 고난도 침투 훈련을 받았다. 당시 함께 훈련한 미국 동포 ‘딕’(한국명 이태모, 1906년생)이 1908년 미국의 친일 외교관 스티븐슨을 저격한 전명운 의사의 사위라는 사실을 알고 놀라기도 했다.
훈련이 끝나갈 무렵 실제 침투 작전을 펼칠 전라도 해안을 찾던 중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바로 훈련은 중단됐다. 그제야 섬의 다른 지역에서 함경도와 황해도로 침투할 이북 출신 요원들이 훈련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45년 중국 시안에서 독수리 작전의 일환으로 무선 교신 훈련을 받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 [독립기념관]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을 인수할 정부가 없다”
종전이 되자 그들은 다시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PW(Prisoner of War)가 그려진 옷을 입어야 했다. 이에 격분한 세 사람이 ‘냅코 프로젝트’ 책임자이던 아이플러 대령에게 왜 자신들을 고국으로 보내주지 않느냐고 따졌다. 그때 아이플러 대령은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여러분을 넘겨주려 해도 여러분을 인수할 정부가 없다”고 답했다.“우리에게는 민족이 있고 산야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태어난 주변의 자연현상일 뿐 법적으로 남의 인정을 받는 정부가 없는 우리는 국민이 아니며 우리의 산야는 영토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버마로, 미국으로 떠돌면서도 변변한 용병의 구실도 못한 것이다. 필요하면 걷어가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는, 부평초처럼 뿌리가 떠돌아다니는 그러한 존재인 것이다.”(박순동 ‘모멸의 시대’)
박순동은 ‘모멸의 시대’ 이후로도 1968년 ‘전명운 전’, 1969년 ‘암태도소작쟁의’를 써서 세 번씩이나 ‘신동아’ 논픽션 최우수작에 당선된 바 있다. 그가 어떻게 ‘전명운’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는 OSS 요원 훈련 과정에 나온다. 박순동은 조정래 작가의 외삼촌으로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민족주의자 김범우가 박순동을 모델로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성동의 소설 ‘여명의 눈동자’(1991~1992년에 방영된 동명의 드라마가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에서 학병 출신 장하림이 OSS 요원 훈련을 받는 부분도 박순동의 수기와 겹친다. 장하림과 대척점에 있던 인물 최대치는 베이징대 재학 중 일본군에 입대한 학병으로 오는데 그가 투입된다. 임팔 작전은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에 등장한다.
박순동과 이종실이 탈영한 뒤 잔류한 이가형은 어떻게 됐을까. 부산항을 떠날 때 200여 명이었던 중대 대원들은 4분의 1도 안 남았다. 분대장,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까지 모두 전사했다. 행방불명된 박순동과 이종실을 서류상 전사 처리한 사람도 이가형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패전국 포로들은 바로 귀향할 수 없었다.
1946년 6월 30일이 드디어 버마를 떠나 싱가포르의 한국인 억류자 캠프로 들어가 국적과 이름과 모국어를 되찾았다. 여기서 처음으로 태극기를 보았고 애국가 가사를 배웠다. ‘올드랭사인’ 곡을 따서 애국가를 불렀다. 그해 7월 28일 드디어 귀국선을 탔다. 광복은 이미 1년 전 일이었다.
이가형은 자신이 ‘버마전선 패잔기’를 쓴 이유에 대해 “한 전쟁의 전모는 병정으로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전쟁의 고뇌란 한 병정만이 알 수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가형은 1993년 수기 ‘버마전선 패잔기’을 소설로 개작한 ‘분노의 강’을 출간했다.
지원자, 거부자, 탈출자, 잔류자 그들이 돌아왔다
1946년 3월 6일 미국 LST(상륙함)을 타고 부산 부두에서 내린 20여 명의 중지 귀환 학병들을 중심으로 동지회를 결성한 것이 ‘1·20동지회’의 모체가 됐다. 안경환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 모임을 주도한 사람이 ‘부산일보’와 ‘문화방송’ 사장을 지낸 황용주였다고 한다.(안경환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경남 밀양 출신인 황용주(1919년생)는 일본 와세다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1943년 11월 초 학병 입대를 위해 관부연락선을 탔다. 한 학기가 남았지만 학교는 조기 졸업을 인정했다. 중지 파견 학병들 사이에서도 리더로 활동했던 황용주는 귀환 후 1·20동지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정식으로 1·20동지회가 결성된 것은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1962년 이었다. 이때는 중지 귀환병뿐만 아니라 국내 배치자, 일본 내지 근무자, 동남아 배속자 등 ‘모든’ 동지(학병)들을 아우르는 작업을 추진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체험을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을 공유했다. ‘1·20학병사기-시련과 극복’(1987)의 간행사는 이병주가 직접 썼다. 그는 운명, 민족, 굴욕을 얘기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원망을 청산할 시기라고 했다. 그리고 학병 체험을 집대성한 ‘1·20학병사기’를 ‘영광의 씨앗’에 비유했다.
“우리는 그때 운명을 생각하고 역사를 생각했다. 아니 운명처럼 역사를 생각했다. …반항적이었건, 도피적이었건, 타협적이었건, 그 학병생활을 통해 한시 반시인들 민족을 잊은 적이 있었던가. …이제 우리는 그 곤욕의 체험으로 하여 일본인을 원망하는 마음을 청산할 시기에 이르렀다. …지금 엮어내는 학병사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굴욕의 시간을 회상하려는 노릇이 아니라 영광의 씨앗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그 씨앗은 오로지 우리의 정신과 실천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하는 데 학병사 간행의 의미가 있은 것이다.”
이어 ‘저항과 투쟁’(1988), ‘광복과 흥국’(1990), ‘통일과 번영’(1998)까지 11년에 걸쳐 총 4권의 ‘1·20학병사기’가 완성됐다.
짧지만 강렬했던 체험, 1960년대 ‘학병 서사’ 전성기
1963년 3월 16일 충북도청 회의실에서 열린 ‘1·20동지회’ 충북지부 결성식. 충북도청 [사진DB]
지원했든, 끌려갔든, 회피했든, 거부했든, 탈출했든, 잔류했든, 어떤 이유로 면제가 됐든 ‘학병 체험’은 식민지 엘리트 청년에게 ‘학병세대’라는 강한 연대감을 형성케 했다. 학병세대의 특징 중 하나가 자신들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다. 많은 학병이 훈련소나 전선에서 메모와 일기를 남겼고, 포로수용소에 갇혀서도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한국 관련 뉴스와 독자 투고가 담긴 60쪽 분량의 주간 간행물 ‘자유대한보’를 제작했다. 이가형은 싱가포르 외곽에 있던 한국인 억류자 캠프에서 한글강습회, 각종 강연회를 열고 잡지 ‘신생(新生)’을 발행했다. ‘신생’에는 중국어 신문과 영자신문에서 발췌한 한국 관련 소식을 번역해서 싣고 캠프 내 소식과 문예 작품을 실었다. 김준엽, 장준하, 윤재현은 한국광복군간부훈련반 시절 연구 교재용으로 ‘등불’이라는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신생’은 1953년 창간한 ‘사상계’로 이어졌다.
학병 체험을 토대로 한 이야기를 통칭 ‘학병 서사’라고 한다. 조영일은 논문 ‘학병서사 연구’(2015)에서 “그들만큼 자신들의 이야기를 후대에 남기려고 한 세대도 없다”면서 “이 세대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지만 어떤 것도 학병 체험만큼 강한 흔적을 남기지는 못한 것 같다. 이들 간에 존재하는 강한 연대감, 그리고 바로 거기서 자신들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그 증거”라고 했다.
1946년 최초의 학병 단체인 ‘조선학병동맹’에서 잡지 ‘학병’을 창간했고(2호까지 발행), ‘신천지’ 등 잡지에서 귀환 학병들의 보고대회라는 이름으로 좌담회, 수기, 단편소설 등을 게재했다. 1948년에는 일본 도시샤대 문학부에 다뎠던 윤재현(1920년생)이 ‘사선을 헤매이며’라는 장편 수기를 출간했다(조영일은 ‘사선을 헤매이며’가 단행본으로 출간된 최초의 학병 수기라고 본다). 같은 해 대구 24부대에서 탈출에 성공해 만주로 도망갔던 김이현이 ‘학병 탈출기’(최정식 공저)를 출간했다. 이 내용은 1991년 ‘멀고도 먼 귀로-어느 학병의 일제하 회고록’으로 재출간됐다.
6·25전쟁이라는 공백기를 지나 1960년대는 학병 서사의 전성기였고, 그 열기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출발은 한운사의 ‘현해탄은 알고 있다’였다. 일본 주오대 재학 중 학병으로 갔던 한운사는 귀국 후 방송작가로 활약했다. 1960년 자신의 학병 체험을 바탕으로 쓴 라디오 드라마가 폭발적 인기를 끌자 주인공 아로운의 이름을 딴 소설 ‘아로운 3부작’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김기영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될 만큼 장안에 화제를 뿌렸다. 이병주의 ‘관부연락선’(1968), 장준하의 ‘돌베개’(1971), 1·20동지회 집단증언집 ‘청춘만장’(1973), 한광반학병동지회의 ‘장정6천리’(1979) 등이 지속적으로 발표됐다.
신상초의 ‘일군 탈출기’(‘신동아’ 1964년 9월호).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신동아’ 1964년 11월호).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신동아’ 1965년 9월호). (왼쪽 부터)
“그들의 글쓰기의 특징은 논픽션이든 픽션이든 ‘체험’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인생의 결정적 시기에 겪은 극단적인 전쟁체험을 두고 그들은 민족적으로도 인류사의 처지에서도 그 비극성을 고발해야 할 사명감이 주어졌을 터이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 악몽에서 스스로 해방되어야 했을 터입니다. 전자는 역사에의 발언이지만, 후자는 단연 심층심리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김윤식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연세대 국문과 최영욱은 논문 ‘해방 이후 학병 서사 연구’(2009)에서 주목할 만한 학병 수기 및 소설이 다수 발표된 1960년대라는 시기에 주목했다. 이 시기를 관통하는 역사적 사건은 1960년 4·19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64년 한일국교정상화회담 반대운동, 1965년 한일협정 체결이다.
‘신동아’를 통해 공개된 학병 수기들-신상초의 ‘일군 탈출기’, 이가형의 ‘버마전선 패잔기’,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이 1964~1965년에 걸쳐 발표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박순동은 다음과 같이 당선(1965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 소감을 밝혔다.
“이 기록이 발표되는 마당에 한일협정이 비준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합니다. 만리이역의 원혼이 된 전우들을 생각할 때 나의 가슴이 착잡해집니다. 그 누가 그들의 초혼(招魂)의 예절을 베풀어줄 것인가! 이 기록은 마땅히 저 고혼(孤魂)들에게 봉정(奉呈)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당했던 지난날의 모멸의 역사는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36년 9월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사건 여파로 폐간됐던 ‘신동아’가 1964년 복간을 기념해 개최한 논픽션 공모전에서 박순동의 ‘모멸의 시대’가 최우수작으로 뽑혔다. [동아일보 1965년 8월 28일자]
누가 새롭게 건설될 나라의 주체가 될 것인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되었으나 엄밀히 말해 ‘독립’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졌지만 두 해도 안 돼 6·25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대 초중반이 돼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국가 건설’이 시작됐다. 누가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의 주체가 될 것인가.‘대한민국의 설계자들-학병세대와 한국 우익의 기원’(2017)을 쓴 김건우 대전대 교수는 “해방기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주체를 세울 때 ‘친일’ 여부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했다”면서 “문제는 너무 많은 이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력했다는 것, 이 지점에서 새로운 세대가 주목받은 것은 자연스러웠고 학병세대가 총아로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는 학병세대를 “일제 말 전쟁에 동원돼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제국 최고의 고등교육을 이수했지만 친일 전력이 없는 이들, 정확히는 친일을 요구받기에 너무 젊었던 이들”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이 책에서 ‘대한민국 설계자’로 꼽은 인물은 장준하, 김준엽, 지명관, 서영훈, 장기려, 선우휘, 김성한, 양호민, 류달영, 김수환, 지학순, 조지훈, 김수영 등이다.
일제 말 대학을 다닌 연령층은 위로는 1917년생부터 아래로는 1923년생까지, 1920년 전후 약 6~7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지만 ‘학병세대’를 구분하는 데 나이보다 중요한 것은 친일로부터 자유로운지였다. 학병세대보다 불과 서너 살 많은 1915년생 이항녕(고려대 교수, 전 문교부장관)은 경성제대 재학 중 일제 말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1941년부터 광복까지 군수로 지낸 것을 평생 부끄러워했다. 김건우는 “친일이 학병 윗세대들에게는 원죄 같은 콤플렉스로 작용한 반면, 역으로 새 조국 건설에 기여하고자 했던 학병세대는 소수를 제외하면 친일의 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첫 세대였다”고 했다.
안경환은 학병세대를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지식인 집적체”라고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민족정신을 말살당하기를 강요받은 조선인이라는 사실에 더하여 엄연한 대일본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이라는 것. 그러나 ‘제국이 키운 세대’라는 자부심은 다음 세대에 의해 ‘친일’로 의심받는 이유가 됐다. 김건우는 “제국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다는 것은 해방 후 이들의 국가 건설의 밑바탕이 된 지식이 모두 일본으로부터 온 것임을 뜻한다”고 했다.
4·19세대의 등장과 학병세대의 퇴장
학병세대는 그로부터 20년 뒤 태어난 ‘4·19세대’(1960년 4·19혁명을 주도한 세대)에 의해 일제의 주구 노릇(학병)을 거부하지 않은 동기와 이유에 대해 추궁받는다. 안경환에 따르면 “4·19세대는 스스로 일본 군국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최초의 자주국가의 주인들이라고 자부”했다. 이들은 학병세대를 향해 ‘일제의 앞잡이’ ‘수동적 협력자’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학병 서사가 집중적으로 발굴된 것도 이런 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1972년 1·20동지회가 출간한 집단 수기집 ‘청춘만장’ 편집자 후기에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했다는 ‘변명’이 나온다. ‘속죄’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우리들은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거 타의나마 일제에 협력하는 것처럼 했던 속죄의 뜻에서 각기 나름대로 국가, 사회에 이바지하였다고 자부는 하고 있으나 지나간 젊은 그 시절이 쓰라린 추억을 회상하여 볼 때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고 후세에 한 마디 남기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지윤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논문 ‘친일 청산의 딜레마: 동원된 협력자 학병을 중심으로’(2018)에서 “학병들은 왜 자신들의 경험을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해명해 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며 “청산의 정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지금까지 친일 청산이 근본적으로 민족 반역의 책임을 묻는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군 패잔병으로 돌아온 학병은 해방 당시부터 반역의 혐의를 씌우기도, 그렇다고 그 혐의를 완전히 지우기도 힘든 모호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결국 “현재 학병의 위상은 판단 유보의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 대학로(혜화동)에 있는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 일제 말 강제동원된 학도지원병들을 기억하기 위한 것으로, 입영 날짜인 1월 20일에서 딴 ‘1·20동지회’가 2008년 8월 21일에 세웠다. 비가 세워진 장소는 학병들이 입대 전 합숙 훈련을 했던 곳이다. [조영철 기자]
“일제가 2차대전 말기(1943~1945) 우리 대한의 정예 4300여 명의 전문 대학생들에게 소위 학도특별지원병이라는 터무니없는 허울을 씌워서 일군에 강제 입대시켜 무참하게 각 전선에 내몰려고 함에 한 목숨 내걸고, 이를 거부하고 자신과 민족을 위하여 항쟁, 탈주, 체포, 징역, 사형, 실종, 전사 등 온갖 희생을 몸으로 겪으면서 싸웠던 피의 투쟁 흔적을 2700명(생사 불문)의 이름과 함께 새겨서 이 겨레 후손들에게 다시는 이러한 치욕의 과거사가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준엄한 경고의 상징으로 여기 입대 전 한때 합숙훈련장이었던 추억의 자리 동성고교 구내 양지바른 언덕에 민족의 역사와 함께 영원히 자리하게 하는 것이다.”
이 행사를 주최한 것은 1·20동지회 유족회였다. 공교롭게도 ‘대한조국주권수호일념비’에서 불과 몇 m 떨어진 자리에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문구가 새겨진 4·19혁명 기념비가 있다. 80년 전 학병세대는 이제 우리 곁에 없지만 그들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다.
‘4·19의 횃불 바로 여기에서’라는 글씨가 새겨진 4·19 발원 기념비. 동성고는 서울에서 4·19혁명을 주도한 학교 중 하나다. 4·19세대의 등장은 학병세대의 퇴진을 의미했다. [조영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