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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의 개구리 소리는 절절하게 다가온다. 겨울잠을 자는 동안 내내 참았던 소리이므로 그럴 만도 하지 않을까 싶다. 사람도 함부로 배설하듯 말해서는 안 된다. 간절하지 않은 말이 상대의 가슴에 남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을 목울대 너머로 꾹꾹 눌러놓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어야 한다. 말은 침묵의 체로 거를수록 격조가 생기는 법이다. 요즘 자칭타칭 정치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여름철 개구리 소리처럼 귀청이 따가울 정도다. 여름철 개구리 소리는 ‘아굴아굴’ 하고 들린다. 미안한 얘기지만 온화한 말이 아니라 소음을 내지르는 것 같다.
개구리의 절절한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내 산방 이불재의 매화나무들이다. 내 산방 뜰에는 청매, 홍매, 백매가 있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났다고 개골개골 신고하면 매화나무들이 꽃봉오리를 터뜨리며 화답한다.
그러면 나는 봄나들이로 당일치기 탐매(探梅) 여행을 떠난다. 나의 봄나들이 여행지는 두 군데다. 하나는 200여 년 전에 화가 소치(小痴) 허련이 말년을 보낸 진도 운림산방이고, 또 하나는 섬진강 부근의 지리산 매화나무 밭이다. 나이가 들면서는 매화 꽃 일색인 지리산 산자락보다 운림산방을 자주 찾아가고 있다. 청매 꽃이 설원처럼 뒤덮인 지리산의 장관도 좋지만 서사가 있는 운림산방의 두 그루 매화나무 꽃이 내 마음을 더욱더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어제도 아침 8시에 진경(珍鏡) 선생의 차에 동승해 아내와 함께 진도를 갔다. 이불재 매화나무에 꽃망울이 부풀었으니 운림산방의 매화나무는 만개했으리라고 짐작했다. 진도는 내가 사는 산중보다 더 남쪽이므로 따뜻할 것이 틀림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운림산방을 찾아간 것은 16년 전의 일이다. 승용차 운전이 서툴러서 버스 편으로 물어물어 찾아갔다. 이후 매년은 아니지만 운림산방 매화나무 꽃이 필 무렵이면 가곤 했다.
2년 전 나는 운림산방에서 우연히 매화나무 밑에서 매실 몇 개를 주워 와 이불재 텃밭에 묻었는데, 그중에서 한 개가 발아해 지금은 1m쯤 자라 있다. 꽃이 피려면 더 성장해야 하지만 매실이 싹을 틔워준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텃밭의 매화나무가 성년에 이르면 굳이 운림산방을 가지 않아도 될 터. 아무래도 나 역시 고령이 되면 진도까지 외출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까.
운림산방의 매화나무는 두 그루인데 모두 백매다. 백매는 분홍색 꽃받침인데 꽃잎은 흰색이다. 청매는 푸른색 꽃받침인데 흰 꽃잎에 푸른빛이 어려 있다. 홍매는 꽃받침과 꽃잎이 붉은색이다. 운림산방의 매화나무는 소치가 첫 스승 초의선사를 잊지 않고자 일지암에서 가져와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운림산방 매화나무는 초의의 혼이 서려 있는 셈이다.
다 알다시피 소치의 두 번째 스승은 추사(秋史) 김정희다. 초의가 한양에 있는 추사에게 소개한 것이다. 소치가 초의 문하에서 그림을 익힌 지 4년째 되던 해, 초의는 추사에게 소치의 그림을 보내면서 평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추사는 “아니 이와 같은 뛰어난 인재와 어찌 손잡고 함께 오지 못하셨소…. 즉각 서울로 올려 보내도록 하시오”라는 편지를 띄웠다. 그리하여 그해 8월, 소치는 한양으로 올라와 월성위궁 바깥사랑에 기거하며 추사에게 그림을 배운다.
추사는 소치에게 원말 4대가의 그림을 모사한 화첩(畫帖)을 주고 폭마다 열 번씩 본떠 그리라고 했다. 소치는 추사의 가르침대로 날마다 그림을 그려 바쳤다. 소치의 그림 실력은 일취월장했고, 추사는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한 폭씩 나누어주면서 소치를 소개했다. 이때부터 소치의 이름이 한양에 알려졌다. 이윽고 추사는 허련에게 소치라는 호를 주었다. 원말 4대가 황공망의 호인 대치(大痴)에서 착안한 호다.
마침내 소치는 어전으로 나아가 그림을 그렸다. 헌종15년(1849) 그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었다. 소치는 헌종 앞에서 5개월 동안 다섯 번이나 하사받은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등 지방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흥선대원군과 당대의 세도가인 김홍근과 민영익 등도 소치의 그림을 극찬했다. 이처럼 영예를 누리던 소치가 고향 진도로 낙향한 것은 스승 추사가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 10년 유배 생활 끝에 과천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낙향한 얼마 뒤 공교롭게 초의도 대흥사에서 입적했다.
나는 소치의 위대함을 스승 초의와 추사를 대한 변함없는 의리에서 본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갔을 때 거룻배로 목숨을 걸고 망망대해를 세 번이나 건너갔으며, 일지암에서 선물받은 매화나무를 가져와 운림산방 마당에 심은 뒤 날마다 정성껏 돌본 일은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자 하는 마음의 발로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뛰어난 소치의 진면목은 스승을 뛰어넘는 청출어람을 보였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소치는 추사가 죽고 나자 남종화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진경산수풍의 운림산방을 그렸다.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보관된 ‘선면산수도(扇面山水圖)’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진도대교를 건너 바로 운림산방으로 가지 않았다. 진도읍 현대미술관에서 소치의 손자 남농(南農) 전시가 열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박주생 관장의 설명과 함께 남농 그림을 감상하면서 소치의 그림자가 어떻게 스며 있는지를 살폈다. 미술관 2층에 남농의 그림이 초기, 중기, 후기 순으로 전시돼 있었다. 나는 남농이 40대 초반 무렵 다리에 동상이 걸려 결국 몇 년 뒤 자르고 의족을 한 채 제주도로 가서 그린 그의 투혼이 서린 그림들이 좋았다. 소치가 온갖 역경에도 화격(畵格)을 높였던 것처럼 그러한 DNA가 손자인 남농에게까지 이어진 듯해서였다.
남농전을 감상한 뒤 우리는 시중(時中) 정현인 선생과 함께 소치의 정신을 잇겠다는 진도 출신 진치(珍痴) 김양수 화백의 화실을 방문했다. 진치당(珍痴堂)이란 현판이 걸린 화실은 농막이었다. 지난해 번듯한 화실이 누전으로 모조리 전소돼 버린 탓이었다. 농막 안으로 들어가 차를 두세 잔 마셨다. 다관과 찻물을 담은 숙우에도 불에 탄 흔적이 검게 남아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꺼낸 다관과 숙우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런데 김 화백은 절망하지 않고 그 다관으로 차를 우리며 또 다른 자신의 미술 세계를 구상하는 듯했다.
나는 동국대 후배이기도 한 김 화백을 위로했다. 소치의 정신을 잇겠다는 그의 극복 의지라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인지 진치당 마당에 핀 청매 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불에 그슬린 다관과 숙우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청매 꽃은 나를 위로했다. 청매 꽃은 위로하러 간 나를 위로한 셈이다.
이후 우리는 운림산방으로 갔다. 일행은 매표소를 지나 소치의 ‘선면산수도’에 나오는 돌다리를 건넜다. 조금 더 올라가자 예의 그 매화나무가 나타났다. 내가 만나고자 한 매화나무였다. 때마침 백매 꽃이 만개해 음음한 둘레가 불을 켠 듯 환했다. 내 산방 이불재 텃밭에 자라고 있는 매화나무의 아버지로서 위의(威儀)가 대단했다. 이윽고 우리는 소치의 화실인 소허암(小許庵)을 둘러보았다. 추사 글씨를 소치가 새겼다고 하는 현판이 정겨웠다. 뒷문으로 나온 우리는 다시 매화나무 한 그루 앞에 섰다. 이 백매가 바로 소치가 일지암에서 직접 가져온 2대 매화나무인데, 늙어서인지 아직도 꽃을 피우지 못하고 있었다. 일행 중에 누군가가 아쉬워했지만 나는 소치의 혼이 꽃봉오리에 뭉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나는 탐매 여행의 종점에 서 있었다. 소치의 혼을 봤으니 이제는 운림산방을 떠나도 그만이었다.
정찬주
● 1953년 출생
● 동국대 국문과 졸업
● 1983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 ‘유다학사’ 당선, 등단
● 저서: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 ‘나는 조선의 선비다’ ‘아소까대왕’, 장편소설 ‘천강에 비친 달’ ‘다산의 사랑’ ‘광주아리랑’ ‘깨달음의 빛, 청자’,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 ‘부처님 인생응원’ ‘마지막 스승 법정스님’ 外
● 행원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동국문학상, 류주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