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에 경기 불황까지 겹치면서 삶이 안정적이고 차분해지길 갈망하는 이가 늘고 있다. 이러한 갈망은 의·식·주에서 드러난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한적하고 고요한 교외의 전원생활을 염원하고, 느리지만 건강한 먹거리를 찾아다닌다. 요란스러운 트렌드에 현혹되지 않고 좋은 소재에 집중하며 유행과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한 아이템들을 추구한다. 이탈리아 올드머니 패션을 대표하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가 바로 그런 브랜드다.
Pre-Spring 2024. [보테가 베네타]
Z세대를 상징하는 SNS 인스타그램에서는 1990년대 올드머니 패션으로 주목받는 AI 모델 펠리(Feli)가 32.1만 명(2024년 2월 14일 기준)의 폴로어(follower)를 두고 있다. 올드머니 트렌드를 이끄는 유명인은 모델 소피아 리치와 켄달 제너, 카일리 제너 등이다. 소피아 리치는 가수 라이오넬 리치의 딸로 오래전부터 인스타그램을 통해 클래식한 데일리 룩을 공개하는 모델이다. 미국 Z세대 스타일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스타 인플루언서 켄달 제너와 카일리 제너 자매도 힙하고 과감한 뉴머니 패션에 국한하지 않고 단정하고 고급스러운 올드머니 패션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올드머니는 브랜드명이나 로고를 부각하지 않는 패션 사조다. 올드머니 스타일을 추구하는 대표적 럭셔리 브랜드로 이탈리아 ‘브루넬로 쿠치넬리’ ‘로로피아나’ ‘보테가 베네타’, 독일 ‘질 샌더’, 영국 ‘더 로우’ 등이 꼽힌다. 그중에서도 보테가 베네타는 가죽 제품으로 유명하다.
조디 백(왼쪽)과 카세트 백. [보테가 베네타]
1980년대 젯셋족이 선택한 보테가 베네타
보테가 베네타는 1966년 10대 초반부터 가죽 재단 기술 등을 연마한 미켈레 타데이(Michele Taddei)와 렌조 젠지아로(Renzo Zengiaro)가 설립했다. 이탈리아어로 ‘베네토 장인의 아틀리에’를 의미한다. 독특한 인트레치아토(Intrecciato) 기법이 브랜드의 상징이다.보테가 베네타는 탁월한 장인정신과 로고가 배제된 디자인 등으로 1970년대부터 프랑스와 독일 등 해외에 진출하고 1974년 미국 뉴욕 맨해튼에 매장을 오픈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 소규모 사업과 장인들이 생산하는 수공예 방식으로 경영의 어려움을 겪었다. 브랜드의 창립자인 렌조 젠지아로는 이미 브랜드를 떠나 스페인의 가죽 브랜드인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창립자 미켈레 타데이 역시 보테가 베네타를 떠났다. 타데이의 전처 라우라 몰테도(Laura Moltedo)는 남편 비토리오 몰테도(Vittorio Moltedo)와 뉴욕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1980년 보테가 베네타를 인수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됐다.
1980년대 보테가 베네타는 젯셋족(Jet-set·자가용 제트기나 호화 크루즈를 타고 세계 여행을 다니는 상류층)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1990년대에는 절제미로 대표되던 브랜드 고유의 철학을 잃어갔다. 2001년 당시 구찌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던 톰 포드가 1980년대 젯셋족 사이에서 유행한 보테가 베네타의 가능성을 보고 구찌 그룹에 보테가 베네타를 인수할 것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보테가 베네타는 그렇게 구찌 그룹에 넘어갔고, PPR 그룹을 거쳐 지금은 프랑스 글로벌 그룹인 케링 그룹 산하에 있다.
케링 그룹에서 구찌 다음으로 매출 효자
2001년 토마스 마이어(Tomas Maier)가 보테가 베네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발탁된다. 토마스 마이어는 처음 2년 동안 런던·파리·밀라노·뉴욕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고, 2005년 2월 첫 여성 기성복(RTW) 컬렉션을 개최한다. 2006년 6월 보테가 베네타는 첫 남성 기성복(RTW) 컬렉션을 열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차세대 가죽 공예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지원하고, 브랜드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장인 양성 전문 교육 기관 ‘스콜라 델라 펠레테리아(Scuoladella Pelletteria)’를 이탈리아 동북부 비첸차에 설립해 인트레치아토 가죽 직조 기술의 맥을 이어갔다.미국의 패션전문 여류 사진작가인 알렉스 프래거가 2011년 봄여름(S/S) 시즌 광고 촬영을 담당해 이슈가 되기도 했다. 2011년 S/S 광고는 1970~80년대 특징과 클래식함을 잘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2016년 9월 보테가 베네타는 브랜드 창립 50주년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마스 마이어의 부임 15주년을 기념해 밀라노 브레라 국립예술대학에서 2017년 S/S 컬렉션을 위한 스페셜 패션쇼를 개최했다.
2000년대 토마스 마이어의 보테가 베네타는 브랜드명이나 로고를 부각하지 않는 ‘은밀한 럭셔리’ 콘셉트로 인기를 모았다. 보테가 베네타는 2014년까지 케링 그룹 내에서 구찌 다음으로 매출 비중이 높다. 토마스 마이어의 디자인 역량에 힘입어 2015년에는 매출 15억 달러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했으나 2017년 이후 성장이 정체됐다. 2018년 토마스 마이어의 고전적이고 섬세한 럭셔리 성향이 밀레니얼 세대에게 호응을 얻지 못한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토마스 마이어는 보테가 베네타에서 퇴진한다. 그의 기성복 브랜드 토마스 마이어에 대한 투자도 중단된다. 토마스 마이어의 퇴진은 사실상 실적 부진에 따른 경질로 평가됐다.
4대 패션 위크 중 가장 주목받는 컬렉션
2022 마티유 블라지 첫 데뷔 컬렉션. [보테가 베네타]
대니얼 리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하면서 보테가 베네타는 ‘뉴 보테가’로 불리며 4대 패션 위크 중 가장 주목받는 컬렉션으로 급부상했다. 2020 Pre-Spring 컬렉션에서는 일상을 위한 진정한 의상을 정교·신중·우아로 정의하고 부드러운 패브릭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한 실루엣을 선보였다. 니트는 인트레치아토로 연결했다.
2021년 대니얼 리가 사임하면서 바통을 이어받은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 역시 셀린느에서 경력을 쌓은 디자이너로 2022년 F/W 컬렉션으로 보테가 베네타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첫선을 선보였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아이템 가방을 매개체로 집에 머물지 않고 자유로운 이동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컬렉션은 대니얼 리의 부재가 무색할 정도로 호평이 이어졌다.
로고보다 강력한 소재 ‘인트레치아토’
인트레치아토 기법. [보테가 베네타]
의류뿐만 아니라 장인이 만드는 가방 역시 로고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표현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1980년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보테가 베네타의 인트레치아토 파우치백을 옆구리에 낀 채 리처드 기어 곁을 맴도는 로런 허턴의 모습은 사랑을 찾는 현대 여성의 초상으로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됐다. 2017년 S/S 컬렉션에서 토마스 마이어는 ‘더 로렌 1980 클러치’로 영화에 나온 로런 허턴의 파우치백을 다시 선보였다. 영화 ‘아메리칸 지골로’에서의 모습 그대로, 트렌치코트 차림에 와인 컬러 파우치백을 옆구리에 낀 채 런웨이에 오른 73세의 로런 허턴은 시간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을 향한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의 신념을 보여준다.
2019년 F/W 컬렉션에서 대니얼 리가 선보인 ‘카세트 백’은 기존의 인트레치아토 디자인을 재해석해 패턴의 사이즈를 키우고 캐주얼한 느낌을 강조한 가방으로 출시 이후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를 대표하는 가방이 됐다. 조디 포스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조디 백’은 인트레치아토 기법을 사용해 통으로 핸들까지 짠 디자인과 매듭을 준 호보 백으로 카세트 백과 더불어 출시하자마자 폭발적 호응을 이끌었다. 지금까지 사랑받는 보테가 베네타의 시그니처 가방 중 하나다. 보테가 베네타 브랜드의 가죽을 엮어 만든 고급스러운 가죽 제품들은 도시뿐만 아니라 여행지에서도 유용해 젯셋족의 리조트룩을 연출하기에도 적합하다.
올드머니 스타일, 어떻게 입을까?
올드머니룩 입은 소피아 리치(왼쪽)와 카일리 제너. [인스타그램]
내가 선택한 패션과 스타일은 나의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다. 올봄, 바쁘게 유행을 따르는 옷보다 실용적이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좋은 소재와 클래식하고 단정한 디자인의 올드머니 스타일을 선택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