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사회에는 중소기업을 멸시하는 풍조가 있다. 대기업은 중소 하도급 업체를 노예처럼 취급한다. 갖은 수단으로 불공정거래를 강요한다. 그 결과 중소기업은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 정부와 민간에서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을 펴야 한다.
중소기업이 밀집된 경기도의 한 공단.
대기업 특혜의 역사
강하고 부유한 나라를 건설하려면 우선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경쟁력과 국내 기간산업 육성을 담당할 대기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낼 수 있는 농수산업이 튼튼한 기반이 돼야 한다. 또한 중소기업 육성도 필수불가결하다. 이런 토대 위에서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을 이루고 국민이 직업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여 사회적, 경제적, 정서적 화합을 이뤄내야 한다.
한국 경제의 역사는 한마디로 대기업에 대한 특혜의 역사였다. 정부는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경제구조를 탈피해 명실상부한 자립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일반대중의 경제적 욕구를 조속히 충족시키기 위해 압축성장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은 대기업에 집중됐다.
정부는 일본이 한국에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대기업에 불하했고, 미국의 원조물자를 대기업이 독점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원조물품 가운데 면화, 밀가루, 설탕을 아주 싼 가격으로 대기업에 넘겼다. 대기업은 이른바 3백(三白)산업인 면방직·제분·제당업 부문에서 이익을 독차지했다. 이들은 국내시장에서 국제 시세의 2배에 달하는 유통마진을 챙겼다.
금융지원 또한 대기업에 편중됐다. 또 건국 초기 정부는 공정환율을 시장환율의 40~60% 수준으로 낮게 책정해 대기업을 특별히 배려함으로써 대기업이 환율 차익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만들었다.
제1∼5차 경제개발계획을 시행할 때는 경제개발권, 중화학공업 개발권이 대기업에 돌아갔다. 1960~70년대 정부가 설립한 국영기업, 정부투자 형태의 공기업을 민영화할 때 대기업은 유리한 조건으로 알짜 공기업을 인수할 수 있었다. 1980년대 중화학 투자조정 시기엔 대기업에 부실채권 탕감이나 종자돈(seed money)까지 얹어주는 특혜도 베풀었다.
대기업이 금리부담이 너무 커서 기업하기가 어렵다고 호소하자 정부는 기업이 짊어진 사채를 모두 신고토록 해 사채금리를 낮추고 상환기간을 연장해주기까지 했다. 이른바 8·3 긴급경제조치(1972년 8월3일)가 그것이다. 대기업에는 구조조정 자금이 200조원씩이나 지원됐다. 1980년대에는 대기업들이 1, 2 금융권에 진출할 수 있는 혜택이 제공됐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정부의 대기업 편애가 1997년의 IMF 금융대란을 불러일으켰다. 정부의 전폭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지원정책의 힘으로 대기업은 오늘날과 같은 고도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면에는 소외당한 중소기업의 크나큰 희생과 피눈물이 있었다. 대기업이 외국자본과 손잡고 국내시장을 장악해 중소기업이 설자리조차 없게 만든 것은 횡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의 대기업은 국민 앞에서 겸허해야 한다.
건국 후 일관된 ‘중농정책’
정부가 대기업과 함께 각별히 신경을 쓰고 육성한 산업은 농업이다. 1948년 3월 중앙토지행정처가 설립됐고, 그해 8월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신헌법의 제정과 함께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분배했다. 농가경제(農家經濟)의 자립과 농업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한 농지개혁 정책의 일환이었다.
정부는 소유자가 직접 경작하지 않는 농토(소작인의 경작농토)에 한해 5년 연부보상(年賦補償)을 조건으로 유상취득해 농민에게 분배하되 농민은 5년 동안 농산물로써 정부에 상환하도록 했다. 정부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5년 상환계획을 늦춰 1964년까지 기간을 연장해주기도 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당국은 중농정책을 추진했는데, 농어민의 고리채를 신고토록 해 채권자에게는 연이자 20%의 농협금융 채권을 지급하고 농어민에게는 고리채 정리자금으로 연이자 12%의 249억환을 융자해줬다.
1970년대에는 양곡수매 및 고미가(高米價) 정책이 도입됐다. 정부는 외국농산물 수입억제 정책으로 농촌경제의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또한 농촌 새마을운동으로 농가환경 개선사업인 가옥 보수, 도로 확장 및 포장, 전화 보급이 대규모로 이뤄졌다. 이때 경지정리, 농업용수 개발, 농협 직매장 확충 등 농촌경제를 위한 방대한 지원정책이 효과적으로 전개되어 한국 농촌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1980년대에는 농어촌종합대책(1986년), 농어촌발전종합대책(1989년) 등이 입안됐다. 전업농 육성에서 제외되는 농민들은 농촌공업화추진정책에 포함되어 취업을 보장받았다. 정부는 농어민연금제도를 추진하기 위해 15조원의 농어촌특별세를 신설했고 42조원의 자금을 지원했다.
1950년대에는 농업금융 지원정책의 일환으로 신용사업 위주의 농업은행이 설립됐다. 그 후 농업은행과 농업협동조합이 통합되어 종합 농협으로 일원화됐다. 농협은 1970년대 들어 상호금융을 본격화함으로써 2000년 7월 현재 39부 1처 5분사, 16개 지역본부, 918개 금융점포, 80개 사업소에 이르는 규모로 발전했다. 농협에 딸린 기구로는 농협무역(주), 농협유통(주), 농협선물(주), 농협기술교류센터가 있다. 특히 농협유통(주)의 경우 그 산하에 농산물류센터, 농산물백화점, 하나로클럽, 하나로마트를 두고 있어 규모가 크다.
정부가 2006년 5월19일 발표한 제2차 농업 경영체 활성화 방안에 따르면 정부는 매출 50억원 이상의 농업법인 169개를 2015년까지 1000개로 대폭 늘릴 예정이다. 2008년까지는 농업법인의 농업소득 배당에 대한 소득세는 비과세, 농업외 소득 배당에 대한 소득세는 14% 분리 과세된다. 2006년 말로 끝날 예정이던 농업전문투자조합 출자금에 대한 소득공제 제도와 영농조합의 배당소득세 감면시한도 연장된다. 정부는 농업소득세의 면제 조치를 유지하는 방향으로 농업소득세를 국세로 전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농업인에게 사업자등록증을 발급할 계획도 갖고 있다. 또한 현재 180억원에 불과한 농업전문 투자펀드를 2010년에 1000억원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기업, 농업과 비교했을 때 중소기업은 정부로부터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았다. 1960년대 초부터 중소기업은 경제정책 대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수립될 때쯤에서야 정부는 중소기업에 눈길을 줬다(대한민국정부 1977년 행정백서). 정부가 중소기업 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은 1961년부터다. 자금력이 취약한 중소기업을 뒷받침해줄 중소기업은행은 1961년 발족됐다.
그해 중소기업협동조합법도 제정됐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이하 중앙회)가 창립된 것은 1962년 5월14일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정책은 형식적이고 소극적일 뿐이었다. 당시 중앙회의 직원 수는 9명, 연간 예산은 290만원이었으며, 조직은 2부 2과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회는 업무시작 9일 만인 5월23일 회관 건립 보조금을 지원해달라는 건의서를 경제기획원장관에게 올렸으나 묵살됐다. 1966년에 이르러서야 중소기업기본법이 만들어졌다.
중소기업엔 당근 줬다 빼앗아
4차 5개년 계획에 ‘독립적 항목’으로 중소기업이 올라가기는 했지만, 여전히 발전전략의 중심은 대기업에 있었다. 중소기업은 구제금융·특혜조치·기술개발지원·행정·조세 등에서 거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정부의 중소기업 특별지원정책을 구태여 지적한다면 중소기업협동조합 구성, 단체수의계약제도, 중소기업 고유업종제도 정도였는데 단체수의계약제와 고유업종제는 폐지되고 말았다. ‘단체수의계약제와 고유업종제는 마약과 같은 부작용을 낳아 기업체질만 약화시킨다’는 논리였다. 정부 관리는 심지어 ‘우리 경제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중소기업 보호·육성책의 폐지가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1980년 초까지 중앙회는 정부에 중소기업 지원을 지속적으로 건의해 중소기업은행과 중소기업진흥공단 설립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중소기업협동조합의 법적 뒷받침은 빈약하기만 했다. 이에 중앙회는 정부에 촉구하여 헌법(123조 제3항, 제5항)에 처음으로 중소기업보호육성 조항이 들어가도록 했다.
그 뒤 중앙회는 정부로 하여금 중소기업제품구매촉진법을 제정하도록 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이 관납할 때에는 단체수의계약으로 물품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 후 경제적 여건의 변화와 시대적 요구에 따라 중소기업 행정에도 변화가 있었다. 현행 중소기업 지원체제는 1998년 2월 정부조직 개편 때 틀이 갖춰졌다. 중소기업 특별위원회, 산업자원부의 외청인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공단 3대 기구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 행정은 많은 문제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위원회 방식의 한계, 정책집행 기능의 중복, 정책 방향의 모호성이 나타나고 있다. 중소기업 지원 행정은 양적으로는 확대됐으나 행정업무의 종합성·전문성·독립성을 실현하지는 못하고 있다.
대기업을 전담하는 관청은 산업자원부이다. 농수산업은 농림부와 해양수산부가 담당한다. 각각 장관급이 장인 독립된 정부 부처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소기업정책 주무부서는 산자부 산하 외청(중소기업청)이 고작이다. 이나마 ‘중소기업과’에서 ‘청’으로 확충되기까지 40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중소기업부 신설하라”
중소기업 관련 행정기관이 정부 각 부처에 흩어져 있으므로 정부가 발표한 지원정책은 효율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 일선 창구마다 내용이 다르고, 지원 신청절차도 복잡하며 준비할 서류의 내용은 매우 까다롭다. 중소기업이 지원을 받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헌법 제123조 제3항과 제5항은 “국가는 중소기업을 육성해야 하며, 중소기업의 자조조직을 육성하고, 그 자율적 활동과 발전을 보장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헌법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는 조직에서도, 정책결정에서도, 지원체제에서도 너무나 허술하기만 하다. 중소기업은 헌법상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는 중소기업 관련 조직과 법, 제도를 효율적으로 개편해야 하며 중소기업 관련 부처의 위상도 크게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국가경제적 측면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산적해 있는 많은 현안을 해결하려면 중소기업청은 대기업이나 농수산업을 담당하는 주무관청과 대등한 ‘중소기업부(部)’로 승격돼야 한다. 또한 중소기업 담당 부처의 장은 부총리급으로 격상돼야 한다. 중소기업부 안에 소기업청, 협동조합 총괄부서를 두는 게 마땅하다. 중소기업협동조합에도 개선할 일이 많다.
사회 지도급인사들은 중소기업을 멸시한다. 대중도 중소 제조업을 낮추보기는 마찬가지다. 중소제조업 종사자는 2류로 취급받는다. 이 때문에 구직자들은 대기업만을 선호한다. 많은 젊은이가 3디(D) 업종이라 하여 중소기업에 들어가는 것 자체를 기피한다. 그래서 청년 실업난에도 불구하고 중소기업은 늘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기업은 자금, 인재, 기술, 정보의 면에서 대기업보다 열세다. 특히 정부 지원 면에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대기업은 중소 하도급 업체들을 노예처럼 취급한다. 대기업측은 중소기업측에 인격적인 모독행위도 서슴없이 자행한다.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 불공정거래를 강요하는 등 그 횡포가 심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중소기업권(權)을 회복해 부강한 나라를 이루고 경제적·사회적 균형을 찾으려면 중소기업에 대한 이 같은 사회적 냉대, 정책적 차별, 대기업의 횡포가 시정돼야 한다. 현재 중소제조업은 고립무원의 외톨이 신세다. 여기에다 중소기업 업계 자체의 목소리마저 미약하다.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 벌이자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중소기업 살리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아울러 중소기업 스스로도 반성하고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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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특혜로 성장한 대기업이 시장경제 논리를 앞세워 국내 소비시장을 완전 장악, 중소기업의 제품은 아예 소비자를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는 시장구조를 개선해야 한다. 대기업이 하도급 업체들을 옥죄는 횡포, 정부의 대기업 비호 관행은 시정돼야 한다. 단체수의계약제도가 폐지되면서 그 대안으로 제시된 중소기업간 경쟁품목입찰제는 업계의 속사정을 외면한 제도로서 그 보완책이 절실하다. 중소 제조업, 판매업, 서비스업이 상부상조할 수 있도록 제반 규정도 정비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