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지중해 연안국들이 세계의 문제아가 되고 있다. ‘내 돈 빌려다 잘들 사셨군. 그럼 빚 갚아야지!’라고 독일 같은 나라는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자본주의의 꽃인 금융은 수치로 이뤄져 있다. 그렇다면 과학의 관점에서 금융위기와 주류 경제학은 어떻게 설명될까. 금융위기로 답답해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이런 의문도 들 수 있다.
5월 12일 스페인 80여 개 도시에서 10만여 명의 시민이 정부의 긴축안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마드리드에서 경찰이 시위대원의 팔다리를 들어 연행하고 있다.
매일 유로존 위기, 경기 침체 같은 기사가 실리는데 해결될 기미는 없다. 투자자들은 유로존 국가들이 찔끔찔끔 대책을 내놓지 말고 완벽한 조치를 취하기를 바란다. 미국에는 양적 완화 조치를 기대한다. 나중에 어떤 부메랑이 돌아오든 간에 당장 경기를 부양하라고 말한다. 아니면 부양하겠다는 신호라도 계속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투자자들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폭탄일지 모르지만 터지기 전에 남에게 떠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치른 비용을 초월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경제지들은 지금도 계속 그런 쪽으로 기사를 내고 있다. 부동산 경기가 회복되고 있다는 둥, 오피스텔을 사둘 적기라는 둥, 가치주에 투자하라는 둥. 하지만 이런 기사 중 상당수는 현재 폭탄을 들고 있는 사람에게만 희망을 줄 뿐 대다수를 설득하지는 못하고 있다. 경기는 침체일로이고 투자는 전혀 활성화되지 않고 있는 것이 그 반증이다. 세계경제의 리더들조차 금융위기가 끝났다고 말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금융이 과학과는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알아보자.
즐거울 때 고위험 못 깨달아
경제학(economics)과 생태학(ecology)은 어원이 같다. 진화론의 창시자 다윈은 맬서스의 경제 이론에 영향을 받았다. 주가 변동을 설명하는 랜덤워크 가설은 물리학의 브라운 운동을 다루는 공식과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경제의 역사를 보면 과학과 관련이 깊은 사례가 무수히 많다.
심지어 가격 변동이 정규 분포를 보인다는 경제의 기본 개념은 유전학자이자 골상학자인 프랜시스 골턴의 이론 체계에서 빌린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학문 간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고 경제학과 과학은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러던 차에 경제학이 다시 과학과 손을 잡게 된다. 금융공학이 출현하면서였다. 1970년대 미국의 국력을 과시하는 데 기여한 아폴로 계획이 시들해졌다. 이 분야에 종사하는 수많은 과학자는 실업자가 될 신세에 직면했다. 경제 분야에선 위험과 불확실성을 계량하는 블랙-숄즈 모형의 등장으로 편미분 방정식을 풀어줄 인재들이 필요했다.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물리학자, 수학자, 컴퓨터과학자가 금융 분야로 진출했다.
이들은 새로운 모형을 만들었다. 모형의 정확도를 개선하는 작업도 했다. 이들이 개발한 모형, 공식, 파생상품 덕분에 금융회사들은 엄청난 수익을 올리게 됐다. 효과가 입증됐으므로 더 많은 천재적인 과학자가 금융계로 뛰어들었다. 자신이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가 아니라는 자괴감 때문에 대신 돈이나 벌자고 과학계를 떠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에 기반을 둔 금융공학으로 만들어낸 거대한 규모의 금융 거래는 세계적으로 거품 경제를 부추겼다. 결국 1990년대 아시아 경제를 위기로 내모는 데 일조했다. 2000년대에는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금융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그러니 과학은 경제의 규모를 확대시키는 한편으로 경제의 위기를 심화시키는 데에도 기여한 셈이다.
금융위기 이후 비판론자들은 “경제학의 기본 토대가 잘못됐다”는 날 선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경제행위자를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 사실상의 자동 기계, 유체 속에서 서로 이리저리 부딪치며 떠돌아다니는 입자 등으로 가정한 것이 그랬다. 모든 위험과 정보가 상품의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는 효율 시장 가설도 그러했다. 급격한 가격 변동이 일어날 확률은 수백만 분의 1에 불과하다는 가설도 마찬가지였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하지만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경제와 물리학이 결합하자…
서울 중구 을지로 외환은행 딜러룸.
이렇게 비유가 변하는 것은 과학의 패러다임이 변하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한 뒤로는 뉴턴 패러다임은 맞지 않게 되었다. 일상생활에서는 뉴턴 역학이 주로 쓰인다 해도, 세상을 뉴턴 역학으로 바라보는 것은 낡은 관점이 됐다. 세상을 좀 더 정확히 반영한 양자역학이라는 모델이 있으니까 말이다.
과거의 모델이 뉴턴 역학이었던 것은 당시 우리의 지식이 그 한계 너머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언젠가 우리는 양자역학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아인슈타인 패러다임을 대신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학이 과학으로부터 잘못된 전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자동기계든 정규분포든 간에 한정된 범위에서는 지극히 타당한 모델이다. 또 그것을 처음 받아들였을 당시에는 현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세상은 급격히 변했다. 심리학과 뇌과학은 우리가 결코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가 아님을 입증해왔다. 역사는 가격 변동이 정규분포를 따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반적인 기대 범위를 벗어나는 극단 값인 이른바 검은 백조가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반증 사례가 계속 나와도 경제학은 여전히 오래된 가설을 벗어던지지 않고 있다. 아직은 기존 패러다임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기존 가설보다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하는 개념을 찾아내지 못한 것일까?
기존 개념을 대신할 새로운 개념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기울여지고 있다. 영국 버밍엄 대학교의 키릴 일린스키는 물리학에서 뉴턴 역학이 양자역학으로 대체된 것처럼 경제학에서 뉴턴 역학 개념을 양자역학 개념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물질 입자와 장 개념을 이용해 시장의 역학을 설명하고자 한다. 입자가 움직일 때 입자 주위의 전자기장이 휘어지는데, 이것을 이용해 옵션이나 주식의 차익 거래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을 경제물리학이라고 한다. 양자역학이 본래 확률론적이며 비선형적인 과정을 다루므로 뜻밖의 가격 변동 같은 상황에 더 유용할지 모른다. 물론 블랙-숄즈 모형의 편미분 방정식에 비해 훨씬 더 어려운 수학이 쓰인다. 물리학자, 수학자, 공학자 같은 전문 인력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현장에서는 이보다는 심리학과 뇌과학을 접목하는 행동경제학이 더 많이 논의되고 있다. 행동경제학은 ‘경제행위자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기본 가정을 뒤엎고자 한다. 한 예로 뇌 연구자들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화폐의 실질적인 가치가 변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명목상의 가치에만 집착하는 화폐 착각이 실제 뇌의 활동과 관련돼 있음을 밝혀냈다. 가격이 올라 상대적인 구매력에는 아무 차이가 없음에도, 실험 대상자들은 더 큰 액수의 돈을 보자 배쪽 안쪽 이마 앞 겉질(VMPFC)이라는 뇌 부위가 더 활성화되는 현상을 보였다. 즉 뇌는 실제로 돈이 더 많다는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우리가 화폐 가치 하락이라는 뻔히 보이는 정보를 무시하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한다는 의미다.
연구자들은 거품 경제와 관련이 있는 심리적 편향성도 규명해왔다. 뇌는 자신의 관점을 입증하는 정보를 더 중시하고 오래된 정보보다 최근의 정보를 토대로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 또 기분이 울적할 때보다 즐거울 때 고위험 금융 상품에 투자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고 한다. 이런 편향은 주택 가격이나 주가에 거품이 끼는 것을 못 깨닫게 한다. 남이 부동산으로 재미를 봐서 웃고 있으면 자기도 언제든 투자해 웃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음의 피드백이 작용해 가격 거품 따위는 일어날 수 없다는 효율시장가설은 이러한 심리적 불완전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복잡계 경제학은 경제를 기후와 같은 복잡계로 본다. 이에 따라 최적 균형 상태란 없으며 끊임없이 평형에서 벗어나는 역동적인 양상을 띤다고 본다. 프랙탈 경제학은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한 것이 전체와 같은 모습을 띠는 구조가 가격 변동과 위험을 더 잘 기술할 수 있다고 본다. 한때 비판받은 이 모델들은 금융위기 덕분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물리학과 심리학은 다윈 진화론을 경제학에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생물 종은 경쟁할 때 이성적인 접근법만 취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비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큰 위험을 무릅쓰기도 한다.
새끼를 많이 낳아 그중 뛰어난 녀석들이 살아남도록 하는 전략을 쓰는 종도 있고, 소수의 새끼를 낳아 잘 보살피는 전략을 쓰는 종도 있다. 때로 돌연변이가 나타나 자연선택을 거치면서 종이 변화한다. 미국 MIT의 앤드루 로 교수가 내놓은 적응시장가설은 각 시장 참여자를 종으로 본다.
빈약한 수학 공식과 낡은 데이터
금융위기 이후 경제학이 토대로 삼는 가정들이 너무나 단순하며 비현실적이라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이런 점이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보고 있다. 투자자에게 떼돈을 벌어주다가 한순간에 파산을 안기는 금융공학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엉성한 토대까지 한꺼번에 드러나는 셈이다.
지금까지 경제 모델은 빈약한 가정을 토대로 세운 수학 공식에 과거의 자료를 대입해 수정을 하면서 버텨왔다. 모델을 과거 자료에 맞게 수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변수와 매개변수의 값을 조금씩 바꾸어가면서 대입하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컴퓨터가 알아서 한다. 하지만 변수가 여럿이기에 값을 다르게 해도 똑같은 결과가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문제는 그렇게 보정한 모델들이 저마다 다른 예측 값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남보다 더 나은 예측을 한 투자 회사는 투자자를 끌어들일 것이고, 자신감이 붙은 회사는 모델을 근거로 엄청난 돈을 파생상품에 쏟아 부을 것이다. 파생상품 본래의 목적인 위험 분산용이 아니라 투기용이다. 모델의 예측이 어긋나는 순간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경제학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천동설이 풍미할 때 이론가들은 어떠했는가. 관측 결과와 맞지 않는 사례가 점점 드러날수록 하늘에 점점 더 많은 원을 끼워 넣어 복잡하게 배열함으로써 천동설을 관측 결과와 일치시키려 애썼다. 결국 수십 개나 되는 원과 주전원이 하늘에 그려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면 단숨에 해결된다는 사실을 무시한 채 말이다.
경제학의 문제는 ‘합리적 행위자’라는 전제를 폐기하면 부담이 너무 커진다는 데 있다. 대안으로 제시된 경제학들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좋아할 만한 단순한 수학 공식을 내놓기 어렵다. 경제는 말 그대로 복잡계이기 때문이다. 일부 기상학자들은 “3일 뒤의 일기예보는 들으나마나 한 것”이라고 자인한다. 마찬가지로 경제학자들이 “부동산이나 주식의 가격 변동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고 치자. 경제학은 몰락하고 투자자들은 떠날 것이다.
물리경제학이든 복잡계 경제학이든 행동경제학이든 적응시장가설이든 간에, 대안으로 제시된 것들은 모두 “지금의 경제학으로 설명하기엔 상황이 복잡하다”고 전제한다. 물리경제학은 논외로 치고 다른 대안들은 사실상 “경제학이 생물학을 토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 비합리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들어가라는 것이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
서로 충돌하면서 에너지를 주고받을 뿐인 원자와 달리, 인간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한다. 좋은 정보가 있으면 함께 나누기도 하지만 거짓 정보를 흘려서 손해를 유도하기도 한다. 때로는 역공작에 자기가 손해를 보기도 한다.
또 상한가 따라잡기처럼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해 이익을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상투를 잡아 손해를 보기도 한다. 우량 주식을 오래 보유해 이익을 보기도 하지만 믿었던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쫄딱 망하기도 한다. 주가가 오를라치면 이익을 손에 쥐기 위해 금방 팔더니 아쉬워한다. 떨어지면 손해 보는 것이 아까워서 계속 갖고 있다가 더 손해를 보기도 한다. 이런 비합리적인 행위자를 놓고 합리적인 행위자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물학과 인문학의 융합 강의 현장.
인간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을 전제로 더 현실에 맞는 경제적 효용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야기다. 그는 과학인 척하는 경제학이 자기기만에도 능숙하다고 주장한다. 개발도상국들에 ‘시장을 개방하고 시장경제를 따르라’고 권고하다가 상황이 나빠지면 ‘그들이 조언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탓’이라고 발뺌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또 있다. 지금의 금융 시스템이 엄밀하지 못한 학문 분야에서 으레 나타나는 현상인 ‘물리학 선망(physics envy)’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물리학 선망이란 물리학처럼 기본 개념을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경향성이다. 비판론자들에 따르면 금융과 증권은 계량화할 수 없는 요인들을 자주 무시한다. 대신 계량화하면 컴퓨터를 이용해 자동적으로 프로그램 매매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인간의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인 성향까지 정량화한 단순하고 멋진 수학 방정식을 내놓기 전까지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짝을 잘못 찾았다?
지금의 금융 시스템을 움직이는 이런 이 물리학 선망은 100년 전 사고방식의 낡은 유물에 불과한지 모른다. 20세기 초 원자 모형을 제시한 유명한 물리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생각이 바로 이러했다. 그는 “물리학 외의 과학은 우표 수집에 불과하다”고 비아냥거렸다. 관련된 모든 지식에서 하나의 법칙을 추출해 아름다운 하나의 추상적인 수학 방정식을 집약해내는 물리학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이라고 그는 봤다. 자연 현상을 너저분하게 기술할 뿐인 생물학 같은 학문은 등급이 떨어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과학 분야의 다양한 특성을 무시한 독선적 견해로 드러났다. 생물학, 화학, 물리학, 지질학 등은 저마다 다른 방법론과 엄밀함을 지니고 있다. 화석이 쌓이는 과정이나 지각판이 움직이는 양상, 생물이 진화하는 과정을 하나의 방정식으로 기술할 수는 없다. 인간의 심리와 뇌 활동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금융은 자기 짝을 잘못 찾은 듯하다. 인간과 돈을 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판단을 내리는지를 알기 위해선 심리학, 신경과학, 행동학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생물학이 더 적합할 수 있다.
과연 현재의 금융 시스템이 이런 비합리성과 불확실성까지 계량화한 모형을 내놓을 수 있을까. 세계 금융위기의 근원은 여기에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