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호

‘총선 블루(blue·우울감)’ 호소하는 ‘어르신’들

“나라 걱정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

  • 김우정 기자 friend@donga.com

    입력2020-04-2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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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화통 터져 선거 후 TV 안 봐

    • ‘엄마, 1번 찍어’ 586세대 자식 야속

    • 통합당, ‘반대 위한 반대’ 보수 말아먹어

    • 선거조작? 쓸데없는 소리 말라 티격태격

    “요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나라 걱정에 제대로 잘 수가 있나. 막 가슴이 쿵쾅거리고 그런다니까.” 

    이모(84) 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소연한다. 총선이 마무리된 지 일주일이 지난 22일 오후 1시 30분, 노년층 ‘핫 플레이스’로 불리는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인근의 한 카페는 나이 지긋한 손님 12명으로 꽉 차 있다. 

    총선 결과에 대해 묻자 이씨는 “문재인 대통령이 뭘 잘했다고 그리 표를 몰아줬어? 이제 민주당을 견제할 수도 없어. 큰일이야, 큰일…”이라며 장탄식을 쏟아낸다. 

    이씨는 답답한 마음에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모처럼 나들이를 나온 참이다. 코로나19가 무서워 집에만 머무르다 우울한 마음에 오랜만에 외출했다. 마침 TV에서 이번 총선 결과를 평가하는 방송 프로그램이 나오자 “요새는 답답해서 TV도 안 봐”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새파란 놈들이 뭘 안다고”

    이씨의 얘기를 듣던 노신사가 “나라가 큰일 난 게지. 새파랗게 젊은 놈들이 뭘 안다고 엉망으로 투표해”라고 일갈한다. “맞아, 맞아”라며 폭소가 터져 나온다. 카페 사장 송모(63) 씨도 “그러게요. 젊은 사람들이 죄다 좌파가 돼버려 큰일이야. 보수도 젊은 피를 많이 수혈했어야 된다니까요”라면서 손님의 말을 거든다. 



    이들이 총선 결과에 분노한 이유는 뭘까. 친구를 기다리던 유모(81) 씨에게 묻자 “저마다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예요. 국민의 선택인데 왈가왈부할 것도 없어요”라며 빙그레 웃으며 답을 피한다. 답을 재촉하자 그제야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세대는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문 대통령이 대기업 활동을 규제하거나 교육을 평준화하려 하면 ‘사회주의 아닌가’ 싶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죠. 어떨 때는 한국이 중국·베트남보다 더 사회주의 국가 같아요.” 

    그는 중국과 베트남에서 공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통합당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극우·보수적 주장만 되풀이해 국민 대다수인 중도 세력을 껴안지 못했죠. ‘반대 위한 반대’만 하다 보수를 말아먹은 셈이죠.” 

    차를 마시던 윤모(80) 씨는 “586세대(50대·80년대 학번·60년대 출생) 자식들과 정치에 대한 견해 차이가 크다”고 토로한다. 

    “외국에 사는 자식이 선거 앞두고 전화했더라고요. 평소 정치 얘기를 잘 안 하는데, ‘엄마, 이번엔 꼭 1번 찍어야 해’라고 당부하는 거야. 노인들의 생각은 무조건 틀렸다는 식으로 강요하는 것 같아 야속했지. ‘선거는 알아서 하는 것이지, 뭐 그런 소릴 하니’라고 답했어요.” 

    또 다른 윤모(80) 씨가 커피에 딸려 나온 삶은 달걀을 먹다가 “얘, 자식들하고 정치 얘기하면 안 돼. 싸움난다, 싸움”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윤씨는 “또래 사이 ‘2판4판(지역구 2번 미래통합당·비례대표 4번 미래한국당)’ 찍자는 구호가 유행이었는데, 자식들한테 말했더니 ‘통합당 찍으면 안 된다’고 성화였어”라고 말한다.

    “엉터리 선거로 빨갱이가 또 이긴 것”

    오후 2시 30분 카페를 나와 길거리를 둘러보니 드문드문 행인이 보인다. 상인들에게 묻자 코로나19가 주춤해 사람이 늘어난 것이란다. 

    식사 후 산책 중인 박모(63) 씨에게 총선 결과를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말해 뭐해. 울화통만 터진다. 유튜브 보니까 이번 선거도 조작이라는데 ‘조작공화국’에서 엉터리 선거로 빨갱이가 또 이긴 거지 뭐”라면서 언성을 높인다. 

    동행한 지인 최모(65) 씨가 박씨에게 “쓸데없는 가짜뉴스 퍼뜨리지 말라”고 핀잔한다. 최씨는 “나도 평생 보수를 자처했고 문 대통령을 지지하지도 않지만, 이런 헛소문으로 선거에 불복하는 것도 문제”라고 말한다. 그는 박씨의 팔을 붙들고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며 길을 재촉한다. 

    노년층의 민심이 한결같지는 않다. 탑골공원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태우던 조모(80) 씨는 통합당 참패에 대해 “그럴 줄 알았다. 꼴좋다”고 평한다. 

    “유세에 나선 황교안 후보의 연설을 듣고 깜짝 놀랐어. 많이 배워 총리까지 한 양반이 정부 욕만 하더라니까.” 

    탑골공원 인근 이발소에 염색·이발 중인 손님 5명이 앉아 있다. 총선 결과에 대한 견해를 묻자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쉽사리 대답하지 않는다. 이발소 사장 원모(47) 씨가 침묵 끝에 입을 뗀다. 

    “종로가 정치 1번지라고 하지만, 요즘 이 바닥에서 정치 얘기하는 사람 찾기 어렵습니다. 이미 끝난 선거 갖고 얘기해봤자 싸움만 더 나니까요. 진보고 보수고 국민을 속이기만 하잖아요. 민주당이고 통합당이고 죄다 꼴 보기 싫어 아예 투표를 안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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