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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힐링 healing 필링 feeling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선유도공원의 나목(裸木)

  •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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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층된 시간의 켜

2002년 4월 이 정수장이 시민을 위한 공원, 그것도 생태공원으로 거듭났을 때 시민은 물론 전문가 그룹에서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것은 바로 그 기억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공간을 빚어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이 어우러져 소박한 미래를 비추는 곳, 선유도공원이 그렇게 변했다.

비슷한 사례로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서서울호수공원이 있다. 경인고속도로 신월 인터체인지 옆에 위치해 있다. 미국조경가협회(ASLA)가 주는 전문가 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1959년부터 신월정수장이 가동돼 하루 평균 수돗물 12만t을 공급하다가 2003년 10월 ‘서울시 정수장 정비계획’에 따라 가동이 중단됐다. 그 후 한동안 버려져 있었으나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2009년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물’과 ‘재생’이라는 주제에 따라 직경 1m에 달하는 수도관 등 옛 정수장시설이 물놀이장, 100인의 식탁, 놀이터 등과 어우러졌다. 녹슨 침전조 구조물과 이를 지탱해온 오랜 콘크리트 벽체가 공원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흔적과 기억을 선물한다.

서서울공원의 시설물 중에서 매우 이채롭고 신기하면서도 복합적인 감정을 자아내는 것이 ‘소리 분수’다. 이 일대의 상공으로 하루 평균 360여 대의 비행기가 날아다닌다. 가까운 곳에 김포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만 비행이 가능한데도 3분에 1대꼴로 이착륙하는 셈이다. 항공기 소음 기준을 웨클(WECPNL)로 표시하는데 이는 단순히 소리 크기만을 표현하는 데시벨(dB)과 달리 운항횟수, 시간대, 소음의 최대치 등에 일정한 가중치를 둬 측정하는 방식이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설정한 단위다. 김포공항 일대의 2013년 항공기 평균 소음은 84.3웨클로 소음영향 지역 기준인 75웨클보다 높다. 신월동, 공항동, 방화동은 물론 부천의 고강동 사람들도 오랜 세월 비행기 소음에 시달렸다.

기억을 담은 공간



‘소리 분수’는 바로 그 항공기 소리 및 궤적과 관련한 시설이다. 축구장 두 개 면적보다 큰 호수에서 분수가 솟구치는데 그 방향이 41개다. 항공기 노선을 따라 설치된 것이다. 상공으로 비행기가 지나가면 그 궤적에 따라 해당 분수가 자동으로 물을 뿜어낸다. 신기한 구경거리지만 동시에 착잡한 생각이 들게도 한다.

이 같은 일들, 그러니까 산업화 시대의 시설을 공원이나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작업이 런던의 테이트모던 갤러리, 독일 에센 탄광지대의 공연장과 미술관들, 그리고 인천 군산 대구 부산 등지에서도 벌어지거니와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 매서운 칼바람이 한강을 스치며 날아와서 여지없이 겨울 외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이곳, 선유도공원에서 상당한 수준의 성취를 이뤄냈다.

동아일보 2013년 2월 5일자 기사는 선유도공원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잘 보여준다. 동아일보와 건축전문 월간지 ‘공간 SPACE’는 2000년대 이후 지어진 건축물 중 최고와 최악을 선정하는 공동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건축가 조성룡이 설계한 꿈마루, 의재미술관, 선유도공원이 20위 안에 모두 포함됐다.

광진구 능동의 꿈마루는 이 나라 중년의 추억이 담긴 어린이대공원의 관리사무소 건물을 철거하지 않고 오히려 기억이 내장된 공간으로 개조한 곳이다. 선유도공원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뤄진 개가다. 기억과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우람한 콘크리트와 화려한 유리로 도시적 건물을 치솟게 하는 경향과 달리 조성룡의 두 작품은 ‘공간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일정한 해답으로 평가된 것이다. 그 밖에 우규승의 환기미술관, 이타미 준의 제주도 포도호텔, 승효상의 웰콤시티 등이 베스트 건축물로 꼽혔다.

한편 세빛둥둥섬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각각 ‘전시성 건축 행정의 전형’ ‘기억의 장소를 지워버리는 건축의 폭력’ 등의 이유로 워스트에 이름을 올렸으며, 그밖에 종로타워, 교보생명 광화문 사옥, 강남 아이파크타워 등도 장소의 의미를 무시하며 위세등등하게 군림하는 건축적 오만함의 사례로 꼽혔다.

같은 맥락의 기사가 2011년에도 있었다. 조선일보는 그해 6월 29일자 기사에서 건축가와 건축학과 교수 등 전문가 30명(23명이 응답)을 대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설문조사했는데, 선유도공원이 13표로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 것이다. 이 조사에서는 원서동 공간 사옥, 인사동 쌈지길, 경주 선재미술관, 전북 무주 공공시설 프로젝트 등이 베스트 목록에 올랐고, 광화문광장, 예술의전당, 타워팰리스, 청계천, 독립기념관 등이 워스트로 지목됐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당 장소의 기억과 해당 공간의 맥락’이 판단의 대체적인 기준이었다.

건축가 조성룡과 조경 전문가 정영선이 함께 만든 선유도공원은 역사적 유산을 어떻게 보존하고 그것을 당대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답안지와 같은 곳이다. 2004년 미국조경가협회가 수여하는 ‘2004 Professional Award’에서 전문가 부문 최고상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 조경 분야의 획기적인 이정표로도 평가받는 공간이다.

이 공간에 흐르는 것은 시간이다. 설계자들도 그 점을 최대한 고려해 착상하고 설계하고 조성해냈다. 누적된 시간, 퇴적된 기억, 적층된 흔적이 이 선유도공원에는 해변의 모래밭처럼 펼쳐져 있다. 설계 공모 과정에서 정수장 시설을 완전히 밀어버리고 흔하디흔한 도심형 공원 내지는 위락 중심의 테마파크 등을 조성하는 아이디어들도 제출됐으나 정수장의 시설은 물론 폐기물까지 최대한 활용하려는 조성룡의 제안이 결국 선택됐다.

완공 이후 이 공원을 관리하는 쪽에서 과시적으로 보이는 각종 홍보물을 부착해 놓기도 했으나, 2013년 바닥재의 석면을 제거하고 여러 시설을 안전하게 보강하는 리모델링 작업을 10개월가량 진행하면서 이러한 홍보성 장치들을 모조리 떼어내고 현재의 모습처럼, 즉 옛 시설들과 기억들이 현재의 공간 안에 유영하는 방식으로 보완한 것도 특기할 만한 일이다.

누적된 시간 속에서 기억을 생산한다

옛 수돗물 생산시설의 밸브와 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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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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