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나라는 스스로 정한 국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국의 능력을 엄밀하게 파악하고, 자국이 처한 외교적 환경을 명확하게 이해해 국가 목표 달성에 가장 적합한 외교수단을 사용한다. 이렇듯 국가 목표, 국가 능력에 대한 평가, 외교환경에 대한 이해, 국가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의 수단이 체계적으로 결합한 것을 외교정책의 패러다임, 외교정책의 비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초 한국의 외교를 움직이는 패러다임은 과연 한국의 현실에 부합하는가.
반세기 동안 이러한 패러다임은 매우 성공적으로 작동했다. 6·25전쟁이라는 경험을 통해 한국은 스스로의 국가적 능력과 외교환경을 더욱 처절하게 평가하게 됐고, 그에 따라 한미동맹을 체결했다. 한미동맹이라는 외교안보 수단은 한국이 20세기 후반 냉전(冷戰)이라는 험악한 외교환경에서 안정적인 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한국은 독립과 생존, 번영이라는 국가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고, ‘약소국 현실주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국 외교의 ‘정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면 자신이 처한 위치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외교환경 또한 늘 그 자리에 머무르지 않는다. 기존의 패러다임은 조건의 변경에 따라 새롭게 변화하라는 압력과 도전을 받게 된다. 한국 외교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은 19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채 안 되는 극빈국(極貧國)이었지만 이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가 넘고 경제규모는 세계 11위로 도약했다. 초약소국에서 세계 굴지의 국력을 가진 나라로 상승한 것이다. 한미동맹을 통해 한미연합 군사력도 급속도로 강화됐고, 한국군은 세계적인 수준의 군대로 성장했다. 국내외 군사전문가들은 한미연합 전력을 세계 10위권의 군사력으로 평가하고 있다.
군사력이나 경제력뿐 아니라, 한류(韓流) 현상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역량, 국민의 교육수준이 반영된 인적 자원, 민주화 달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자신감도 한국의 총체적 국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있다.
한국을 둘러싼 외교환경도 1990년대에 들어와 급속도로 변화했다. 20세기 후반 동안 한국에 가장 큰 안보위협은 공산주의 진영과의 대결이었지만, 냉전구도가 붕괴하면서 공산주의권은 사라졌고 북한 등 몇몇 나라를 제외하면 대부분 자본주의 시장경제로 전환했다. 그 과정에서 초강대국 소련이 해체되면서 이제는 한국보다 경제규모가 작은 러시아로 남게 됐다. 체제경쟁에서 실패한 옛 공산국가들은 대부분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제는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정점에 서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함께 세계화가 안정적으로 작동하도록 불확실 요인들을 관리해 나가는 외교환경이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의 외교환경은 이전보다 전체적 위협이 훨씬 줄어든 상태로 변화했다.
패러다임 관성과 변화 압력
이러한 변화는 ‘약소국 현실주의’라는 기존의 외교 패러다임에 충격을 가한다. 한국은 예전의 약소국이 아니고, 외교환경도 다른 강대국의 군사공격에 대비해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냉전적 대결구도가 아니다. 북한의 위협은 상존하지만 북한은 전체 경제규모가 한국 국방예산(GDP의 약 2.7%) 수준에 불과한 극빈국이 됐고, 한미연합 전력은 이에 대해 충분한 억지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외교가 북한위협 대응과 한미동맹 지키기에만 전력을 기울이기에는 국력의 규모나 해외 진출 판도가 너무 커져버렸다. 미국도 이러한 변화를 고려해 최근 동맹 역할의 재조정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민은 이러한 조건의 변화와 외교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변화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기존 패러다임의 관성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우선 한국은 너무나 급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변화가 생생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인식의 혼란이 생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보수적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에 집착하게 된 측면이 있다. 또한 세계적 냉전 종식과는 무관하게 한반도라는 ‘소우주’에서는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대치상태도 영향을 끼친다. 한국이 아무리 부강해졌다 해도 주변국과 비교하면 여전히 약소국이라는 상대성도 기존의 ‘약소국 현실주의’ 패러다임에 관성을 더하는 요소다.
동티모르의 평화유지를 위해 파견됐던 상록수부대 1진 대원들의 귀환 환영식. 상록수부대 파병은 한국의 국력이 성장함에 따라 높아지는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 요구에 적극 대응한 사례다.
두 번째로는 한국의 국익(國益) 범위가 한반도에서 세계시장으로 넓어졌다. 세계 각지에서 발생하는 불안요인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한국의 국익에 영향을 준다. 중동의 불안이 한국 경제에 끼치는 영향, 동남아시아 테러사태가 한국 경제와 재외국민에게 끼치는 영향, 미국의 안보 및 경제 불안이 한국의 금융·자본시장에 끼치는 영향 등이 그것이다. 미국에만 의존해 앉아서 기다리기에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졌다. 1997년 금융위기 때 미국이 보인 소극적 태도, 최근 진행되고 있는 일방적인 한미동맹의 재조정 과정,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국의 북폭(北爆) 계획 등을 봐도 알 수 있듯, 미국이 항상 우방으로서 한국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한국과 자국의 이익이 상충할 경우 한국의 이익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최전방기지로서 한국의 가치는 과거와 달리 급격히 떨어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미국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나라지만 미국에만 절대적으로 의존할 시기는 지나갔다. 이제는 우리의 국가적 목표가 무엇인지 재확인하고, 국가적 능력과 외교환경 역시 엄밀하게 파악해 국가 목표를 달성하는 최적의 외교수단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다. 외교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가 된 것이다.
연성 권력(soft power)의 중요성
외교 패러다임의 변화를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따져봐야 한다. 현재도 ‘국가의 안정과 번영’이라는 국가 목표가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안정과 번영은 예전처럼 특정체제의 안정이나 국가적 부(富)의 증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세계화 시대를 사는 국민 개개인의 안전과 윤택한 생활을 더욱 철저하게 보장하는 것이다. 국가 이익의 개념이 ‘국민 이익’의 개념으로 전환하고 있다.
한편 우리의 능력은 국력과 환경에 좌우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으로 상승했다. 경제 총량에서는 세계 11위이지만, 우수한 인적자원과 문화력, 기술 능력과 혁신 능력, 애국심, 위기극복 능력 등을 포함하면 국력은 그 이상일 수도 있다. 여기에 우수한 한미연합 군사력을 포함하면 한국은 이른바 ‘10걸 국가’로 진입할 수 있다.
변화한 외교환경은 한국의 국력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고 있다. 냉전종식 이후 강대국들은 세계화라는 바다에서 모두 한 배를 타고 서로 협조하며 풍랑을 헤쳐 나가고 있다. 서로 경쟁하긴 하지만, 이는 배에서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지 상대방을 배에서 밀어내려는 경쟁이 아니다. 주요 강대국간에 상호공존의 신뢰는 이미 쌓였으므로 공존의 규칙을 누구에게 유리하게 하느냐를 두고 겨루는 것이다. 이들 사이에 군사력이나 강압적 압박을 사용하는 것은 한 배 타기를 거부하는 것이므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고 외톨이가 되는 외교적 실패로 연결된다.
따라서 국력의 의미에선,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경성 권력(hard power) 못지않게 상대방의 호감을 빼앗아오고 자발적으로 협조하도록 만드는 연성 권력(soft power)이 중요해졌다. 이미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기본가치로 하는 강대국 사이에는 무력을 통한 갈등해결이 아니라 협상과 협의를 통한 갈등해결이 외교의 주요 패턴이 됐다. 19세기적인 세력균형보다는 다양한 사안별로 국가간 연합을 달리하는 사안별 연합이 주요한 외교패턴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세력균형의 사고로 가상의 적(敵)을 규정해 군사력과 경제력이라는 경성 권력의 균형전략을 취한다면, 이는 시대에 뒤떨어진 외교다.
이 같은 요인을 고려할 때 한국은 미국을 포함한 다른 강대국과 함께 경쟁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좀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외교를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량과 주변환경의 변화를 반영한 새로운 한국 외교의 비전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세계질서 관리연합’의 일원으로
한국 외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방향은 간명하다. 이전의 패러다임은 한국을 미국이라는 강대국의 종속변수로 놓았고, 따라서 한국 외교는 미국에 수동적이고 반응적(reactive)이었다. 이제는 여타 강대국과 함께 같은 배를 타고 세계의 질서를 관리하는 독립변수로 한국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 세계 곳곳에서 생겨나는 문제를 다른 강대국과 함께 해결하는 세계질서 관리연합의 주도적 일원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이 세계질서의 관리를 위한 분업구조에 주도적인 일원으로 참여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느 범위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어떤 외교자원을 활용해야 하고 또 어떠한 외교기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구상해야 할 것이다.
1. 한국 외교의 지역적 범위
냉전 종식 이후 세계질서의 관리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정점(頂點)에 서서 다른 강대국들과 분업을 형성해 수행되고 있다. 미국이 유럽과 분업체제를 구축해 동유럽과 중동, 아프리카를 관리하고, 일본과 분업체제를 구축해 동아시아와 중동을 관리하는 구조가 그것이다. 따라서 강대국들은 미국과 경쟁적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국에 유리한 방법으로 세계질서에 도전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 해결방법이 미국과 다를 경우 미국 중심의 질서 유지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미국도 이들과 협조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해결을 위해 이익이 된다.
한국은 노무현 정부에 들어와 외교의 지역적 범위를 동북아시아로 규정한 바 있다. 이러한 비전 아래서 ‘동북아 중심국가’ ‘동북아 허브’ ‘동북아 균형자’와 같은 하위개념이 생겨났다. 동북아시아가 한국에 긴요한 지역임은 물론이지만 한국의 지역적 범위를 동북아로 좁게 규정하는 것은 국익과 외교적 역량 발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 한국의 국익은 동북아를 훨씬 넘어서 동남아, 중앙아시아, 중동, 서남아, 동유럽, 서유럽, 미주지역 등으로 크게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지역에서 국민의 안전과 다양한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한국 외교의 지역적 범위도 동북아를 넘어서야 한다.
사실 동북아시아는 가공의 공간이다. 동북아를 구성하는 국가들은 한반도와 일본을 제외하고는 모두 지역적으로 다른 지역에 더 넓게 걸쳐 있고, 한반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동북아 국가가 아니라 세계적인 강대국이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은 이미 오랜 강대국이므로, 한국이 외교의 지역적 범위를 동북아에 국한시키면 알아서 이들 세계 강대국의 종속변수를 자임하는 꼴이 돼버린다. 또한 한국이 동북아에서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려면 오히려 동북아 밖에서 기여한 공로를 내세워야 한다. 그래야 국제사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 외교의 지역적 범위는 더 넓어져야 한다. 필자는 그 지역적 범위를 ‘한국이 세계 질서 관리에 기여하고자 할 때 그러한 한국의 역할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지역’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지역은 한류가 유행하는 지역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국민적 호감을 갖고 있고, 또 비슷한 정서와 문화적 소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류가 유행하는 것이다. 한국이 이들 지역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하려 할 때 이들은 우호적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사안별로 다르겠지만, 잘 짜인 전략으로 한국의 경성 자원과 연성 자원을 적절히 사용하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류가 유행하는 지역은 중국, 일본말고도 동남아, 중앙아시아, 극동러시아에 이른다. 최근에는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일부로도 퍼지기 시작했다. 이중 중국과 일본은 이미 세계질서 관리연합의 일원이므로, 한국이 외교를 집중해야 할 지역은 동남아와 중앙아시아, 극동러시아가 된다. 이 지역은 한국의 차세대 성장동력 중 하나인 문화산업의 주요 수출시장이고, 문화산업의 수출이 증대되면 한국의 전체적인 브랜드 파워가 커지므로 이 지역에서 다른 상품수출도 늘게 된다. 또한 이 지역은 한국에 주요한 자원과 에너지,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이들 지역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것은 한국의 국익에 매우 긴요하다.
물론 한국이 이 지역에서 미국처럼 적극적인 개입 전략을 구사할 수는 없다. 한국이 지역전문가를 풍부하게 보유하지 못한데다, 역사적·정치적·종교적으로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어 자칫하면 오히려 외교적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적극적인 개입보다는 우리가 잘할 수 있고 충분히 기여할 수 있는 사안을 선택해 집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물론 그 선결과제는 이들 지역에 대한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대담한 국가적 투자다.
2. 연성 권력의 투사
한국이 위에서 말한 범위와 사안에서 위상에 맞게 기여하고 그를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이들 나라와 중장기적으로 우호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외교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 외교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이므로 군사력이나 경제력 같은 경성 권력이 단기적 문제 해결에 긴요한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우호관계를 형성해 정치·경제적 저변을 확대해가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중장기적 우호관계의 저변 확대는 안보적 협력국가를 확보하는 것이고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국 국민의 안전이 보장되며 한국 경제인의 진출 가능성도 높아진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한국은 외교에서 경제원조 자산, 문화력, 인적 자원, 경제발전, 민주화에 기초한 연성 권력 자원(soft power resources)을 주요하게 활용해야 한다. 즉 이 지역에 꼬리표 없는(조건을 달지 않는) 경제원조를 하고, 인적 자원 개발, 교육 및 문화교류, 갈등 관리, 경제개발 및 민주화의 경험 등을 제공해 한국과의 친화성을 높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지역민 전반에 한국에 대한 우호적인 이미지가 형성되면 이들 국가와의 중장기적인 문제 해결에 영향력이 생기게 된다.
연성 권력의 투사(投射)는 인프라를 필요로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지역전문가의 양성, 해외동포 네트워크, 이를 총괄하는 국가적 총괄 인프라다. 다른 지역으로 연성 권력을 투사하려면 그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전략적 사고를 가진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종합적인 지역전략을 세우려면 이들 지역전문가의 연구와 협력, 이를 국가전략으로 연결하는 국가적 인프라가 필요하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해외동포라는 비교적 준비된 지역전문가가 있다. 이들은 이미 그 사회에 대한 경험적 지식을 갖춘 훌륭한 인적 자원이다. 이들을 학문적으로 양성해서 연성 권력을 투사할 수 있는 현지 인프라로 만들어야 한다.
결국 핵심은 지역전문가를 양성해 국가전략에 연계하는 국가적 총괄체계의 수립이다. 한국이 새로운 외교 패러다임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전략적 사고에 입각한 국가적 총괄체계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3. 세계질서 관리체와 사안별 연합
새로운 한국 외교에는 새로운 기법이 필요하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제까지 한국 외교의 핵심을 이뤄온 한미동맹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다. 한미동맹은 앞으로도 매우 중요한 외교 자산이 될 것이다. 미래의 외교환경이 어떻게 급변할지 알 수 없으므로 한미동맹을 통한 군사적 대비태세를 확보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새로운 외교환경에서는 군사력의 용도가 크게 달라질 것이므로 한미동맹이라는 자산을 이용하는 방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냉전이 끝나면서 강대국간에 군사력이나 강압적 압박을 사용해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워졌다.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체제와 세계화 시대에 사용될 군사력은 일극체제의 불안정 요인을 관리하는 군사력이 될 것이다. 즉 테러, 소규모 지역분쟁, 무정부상태의 실패국가(failed state), 평화유지 등의 관리가 주요 임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은 한미동맹을 지속시켜 전체적 종합국력은 유지하되, 변화된 외교기법을 통해 반드시 필요한 사안을 제외하고는 연성 권력을 주로 사용하는 외교를 추구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변화된 외교기법이란 바로 ‘사안별 연합’이다.
한미동맹을 계속 유지한다 해도 미국과 반드시 모든 사안에서 함께 가야 할 필요는 없다. 같이 가지 않는다 해도 미국이 한국에 군사적·경제적 보복을 가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일방주의적인 보복은 장기적으로 미국의 지도력을 크게 약화시키리라는 사실을 미국 또한 잘 알고 있다. 따라서 한미동맹은 남북간 긴장이 해소되지 않는 한 우선 대북(對北) 억지를 위한 기능으로 사용하고, 그 외의 기능, 예를 들어 해외에서의 군사활동은 한국민 보호와 경제활성화 유지, 인류 보편의 가치에 기여한다는 국가 목적에 맞춰 사안에 따라 협력하기도 하고 경쟁하기도 해야 한다.
군사적 사안이 아닌 경우에도 반드시 미국과 같이 갈 이유가 없다. 우리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인류 보편의 가치를 공유하는 다른 강대국과 연합해 미국이 내놓는 해법과 논리에 대항할 수 있다. 이미 통상·환경·문화 분야에서는 이러한 사안별 연합이 진행되고 있음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의 새로운 외교기법은 현실을 일정 정도 반영해 한미동맹은 유지하되 사안별로 국가간 연합을 바꾸는 형태가 돼야 한다.
다른 강대국들과 사안별로 연합을 바꾸는 기법을 적절히 사용하려면 한미동맹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세계 10위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세계질서 관리체(Global Concert)를 구상해 그 관리체에 한국이 일원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 안에서 강대국들과 경쟁하고 협력해 한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사안별 연합외교를 지향해야 한다. 특히 보편적 가치는 미국과 공유하지만 세계질서를 관리하는 방법에서는 미국과 의견이 다른 유럽 국가들을 활용하는 사안별 연합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극단적 국가주의를 경계하며
한국 외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안하면서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팽창적·극단적인 국가주의의 발흥이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세계질서 관리에 참여하고 연성 권력을 투사하는 방향으로 외교전략을 바꾸면, 일부 극단적인 세력이 군사력 확장이나 영토 확장, 실지(失地) 회복, 인권 문제의 방향으로 담론을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연성 권력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우호국 조성은커녕 이미 형성된 우호국도 잃게 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은 철학과 원칙을 바로 세우고 국제 기준에 맞는 외교를 추구해 이러한 극단적인 세력의 발흥을 단호히 처리해야 한다. 일본의 극우세력이 일본의 연성 권력을 갉아먹는 것만 봐도 보편적인 원칙과 철학을 갖춘 외교의 중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또한 한국의 국내적 관행도 보편적인 규범에 맞춰 고쳐 나가야 한다. 한국 내 외국인 노동자의 인권 침해 상황을 보면 과연 한국이 인류 보편의 가치를 추구할 자격이 있는 세계 10위권 국가인지 회의가 들 정도다. 한국의 정치세력들은 이러한 국내적 관행을 우선적으로 고치는 동시에 외교 선진화를 목표로 삼아야 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