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잘나가는 국가, 기업, 가정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반드시 제대로 된 지도자가 있다. 이들에겐 자신과 조직을 행복하게 하고 성장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 같은 역량을 발휘하는 개인이 모인 조직, 이런 조직이 모인 사회는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훌륭한 리더십은 자기중심적 오만을 반성하면서 자신을 지탱하는 공동체를 위한 삶을 지향할 때 우러나온다.
그런 임진란을 치른 지 채 300년이 못 되어 우리는 다시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고, 국민이 징용과 정신대로 끌려가는 수난을 반복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실감케 한다. 어디 그뿐이랴! 처절했던 가난의 역사 ‘보릿고개’를 벗어난 지 30년도 안 되건만 지금 그것을 아는 젊은 세대는 없고, 그 역사를 가르치는 교과서도 없다. 1998년 IMF 구제금융 위기 때 무수히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직장을 잃어야 했고 가정파탄까지 겪었지만 그 수난의 아픔도 모두 잊은 것처럼 보인다.
자기지도력과 노사정 대타협
‘과거의 고통은 빨리 잊는 것이 좋지 않소? 그런 것을 기억해서 무엇에 쓰겠소?’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정신심리학자 프리츠 쿤켈에 따르면 우리는 역사적 수난을 되새기면서 과오를 깊이 반성하고 미래를 위한 새로운 깨달음을 정리할 수 있다고 한다. 쿤켈은 인간의 자아(self) 발달 과정에서 자아 위기(the ego crisis) 경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자아가 파멸에 이를 만큼 심각한 사태에 직면한 인간은 자신을 지탱해주고 있는 것이 진정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이런 진실의 순간에 인간은 오만하거나 이기적이던 자기중심적 생각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기반이 되는) 공동체를 위한 창조적 삶을 생각하는 계기를 맞는다고 한다.
필자는 심리학의 쿤켈 이론을 경영학의 자기지도력(self leadership) 이론과 결합해 한국이 노사정(勞使政) 대타협을 달성하고 정신적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이론적 기초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경영학에서 말하는 자기지도력이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자. 잘나가는 국가, 기업, 가정을 들여다보면 거기엔 반드시 제대로 된 지도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모든 조직의 안전과 성장, 발전 뒤에는 반드시 좋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이다. 그런데 모든 조직의 궁극적 구성단위는 개인 각자이므로 각 개인이 불행해지면서 전체 조직이 안전, 성장, 발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인 각자의 행복을 이끌어갈 지도력은 어디서 오는가. 물론 조직 구성원 개인의 행복도 국가 또는 직장의 지도자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간접적, 한정적 범위에 그치기 때문에 개인의 행복은 결국 자기 자신이 책임질 수밖에 없다. 이런 맥락에서 자기 자신의 행복, 성장, 발전을 이끌어가는 역량을 자기지도력이라고 부르자.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여러 문제는 모두 개인 각자의 자기지도력 부족에서 온다. 예를 들어 자기 소득 수준을 망각한 무분별한 카드 사용, 알코올 혹은 마약 중독에까지 이어지는 방만한 생활태도, 그리고 조직생활을 버텨내는 인내력 부족에서 오는 높은 이직률 등이 그것이다.
자기지도력을 못 갖춘 사람은 어떤 조직에서도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 2만여 개의 부품 하나하나가 제 기능을 발휘해야 성능 좋은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듯이 조직 구성원이 자기지도력을 갖추고 있어야 그 조직은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다.
주기적인 영적 교육
그러면 각자의 자기지도력 배양에 필요한 기본조건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현대경영학에서는 긍정적 자기 이미지(positive self image) 구축과 계속적인 자기 동기부여(continuous self motivation)의 필요성을 든다. 이스라엘 민족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전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은 세계 인구의 0.3%,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수준이지만, 정치 경제 과학 예술 등 분야별 엘리트의 10%, 노벨상 수상자의 25% 이상이 유대인이다. 세계 최강 미국의 막강한 힘 뒤에는 유대인 두뇌 집단이 있다. 미국 100대 부호 중 20%가 유태계이며, 그들은 세계 경제를 좌우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CNN’ 등 미국의 특수권력으로 등장한 주요 언론 미디어도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모두 유태계 로비 단체의 지원을 받았고, 이스라엘 지원정책에 반대한 대통령은 모두 재선(再選)에서 낙선했다. 고대 이집트의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이래 세계 도처에서 핍박을 받아온 유대민족은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나고 잘사는 민족이 됐다. 그들의 어떤 점이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냈을까.
이스라엘은 한반도 면적의 11분의 1밖에 안 되는 땅이고, 여기에 살고 있는 약 600만명을 제외하면 유대인은 전세계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 말은 곧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을 일사불란하게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들은 세계 도처에서 자기 분야의 세계 정상에 올라 있다. 이 현상은 이들이 자기지도력을 탁월하게 발휘하고 있다는 것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 유대인은 자기지도력을 어떤 방식으로 배양하고 있을까. 이들의 자기지도력 배양은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 확립에서 출발한다. ‘나는 아무 능력도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정신 에너지를 발휘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긍정적 자기 이미지를 정립하기 위해 유대인은 자녀가 5세가 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선민(selected people)’이라는 영적 교육(spiritual education)을 시킨다. 그들은 ‘토라’(Torah·모세 5경)를 중심으로 유태민족의 하나님 여호와는 누구이며,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민족인가를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이런 선민사상은 유대인 2세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능력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의미 있는 목표를 설정한 후 그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고무한다. 목표를 설정한 다음에는 그것을 향해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하며 부단히 노력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이런 의지를 현대경영학에서는 자기 동기부여 능력이라 한다.
일본과 아일랜드의 경우
아무리 긍정적인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해도 목표가 뚜렷하지 않거나 목표를 향해 부단히 노력할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의미 있는 성취를 할 수 없다. 유대인은 자기 동기부여 능력을 기르기 위한 그들 고유의 교육 시스템을 개발해 수천년 동안 실천해왔다. 안식일 제도가 그것이다. 유태민족에게 안식일은 단순한 휴일이 아니고, 물질생활을 떠나 정신세계로 침잠해 유태 역사를 생각하며 자기관리 능력을 기르는 날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쿤켈이 말한 자아 파멸에 이를 만큼 심각한 위기를 무수히 겪어왔다. 이들은 안식일을 통해 이런 위기의 역사를 잊지 않고 새롭게 기억하고 해석하면서 슬픈 역사의 반복을 막기 위해 자기 동기부여 노력을 반복한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유대인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웃나라 일본은 어떤가. 일본도 국민의 자기지도력을 길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다. 일본의 어느 고고학자는 (일본 역사를 유구하고 찬란한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에서) 선사시대의 유물을 일본 땅에 몰래 묻으려다 발각되기도 했다. 또 일본이 과거에 한국을 지배했다는 둥 일본 민족의 우수성, 즉 긍정적 자기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역사조작까지 하고 있다.
이뿐인가.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 것은 과학과 기술(예를 들면 원자탄 개발) 같은 지식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본은 그 패배로 인해 받은 고통을 잊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자는 메시지로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탄 피폭 현장을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주변국의 강한 반발을 자초하면서까지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것도 패전의 아픔에 대한 국민의 기억을 상기시켜 열심히 일하게 하는 자기 동기부여의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다음으로는 서유럽에서 경제 기적을 일구고 있는 나라 아일랜드를 보자. 1980년대 중반까지 국가파산 상태로 치닫던 이 나라 또한 긍정적 자기 이미지를 정립하고 고통스러운 역사를 반성하면서 자기 동기부여를 위한 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노사정 대타협을 이룩했고 그후 불과 20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잘사는 나라 대열에 끼게 됐다.
아일랜드는 1739∼41년, 1816∼17년, 1822년, 1831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수만명이 아사(餓死)하는 상례적 기근을 겪었다. 급기야 1845∼51년에는 곰팡이균이 창궐해 이 나라의 주식인 감자가 다년간 대흉작 파동을 겪자 100만명이 굶어죽고, 150만명이 미국, 캐나다 등 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이렇게 대량 아사, 대량 이민으로 인구가 급감해 오늘날 아일랜드에 남은 인구는 고작 400만 수준이다.
과거 고통 재현한 교과서
가난도 가난이지만 아일랜드는 800년에 걸쳐 가혹한 식민통치를 받아왔다. 그러나 노벨 문학상 수상자 등 뛰어난 문인과 과학자들을 여럿 배출했다. 뿐만 아니라 가난과 식민통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간 아일랜드계 후손들 중에서 존 F. 케네디, 제럴드 포드, 로널드 레이건, 빌 클린턴 등 미국 대통령이 4명이나 배출됐다. 이는 아일랜드 국민이 긍정적으로 자기 이미지를 정립하고 있다는 생생한 역사 자료다.
이들은 자기 동기부여 교육 교재를 개발하는 노력에도 정열을 쏟았다. 과거의 가난과 식민통치의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과거 고통의 재현 작업에 나선 것. 아래 그림은 농촌의 가난한 노부부가 버터 한 통을 만들어 팔러 나가는 모습과 그들이 돌아다닌 수백리 길을 지도에 표시한 것이다. ‘1845∼51년의 대기근을 극복한 이야기(How I survived the Irish Famine)’를 주제로 하는 교육용 도서는 어느 서점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2000년대 아일랜드가 일군 경제기적의 중요한 요인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들고 있다. 그 결과 아일랜드 정부는 기업이 내는 세금을 유럽에서 가장 싼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노조는 파업을 줄이고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를 억제하기로 합의했다. 또 기업은 근로자를 쉽게 해고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해고가 쉬워지자 기업은 근로자를 더 많이 채용한 것이다. 실제 데이터를 보면 실업률이 대타협 이전의 18%에서 2005년 4.2%로 떨어졌다. 1995년 이후 아일랜드의 연 평균 경제성장률은 유럽 평균 2.5%의 3배가 넘는 8.8%였다. 오늘날 세계 10대 제약회사 중 9개가 아일랜드에 공장을 두고 있다. 인텔, 오라클 등 첨단 직종에 종사하는 기술직 종업원 중 55%만이 아일랜드 출신이고, 32%가 EU(유럽연합) 국가, 12%가 기타 외국인일 정도로 사람 구하기(직장 구하기가 아니라)가 어려운 나라가 됐다.
이제 우리가 갈 길은 어디인가. 우리 역사 속에도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자료가 많다. 뿐만 아니라 권위 있는 국제기구에서 발표하는 보고서는 잇달아 한국민의 우수성을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PISA(Program for International Students Assessment)는 지난 5년간 OECD 41개국 중·고등학생(한국 학생 1만2000명 포함 총 88만명) 학력을 평가한 결과 한국 학생이 문제해결(problem solving) 능력에서 세계 1위, 수학과 과학 실력에서 세계 3∼4위 수준에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2005년 5월 스위스 IMD(국제경영개발원)는 한국의 기술개발 능력이 세계 2위에 이르렀다고 보고했다.
‘한국형 안식일’
이렇게 우수한 자질을 가진 민족이 왜 1인당 국민소득 세계 49위(세계은행의 ‘세계개발지수 2005’ 보고서)의 2류 국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이는 지역감정, 집단 이기주의, 취약한 노사관계 등이 국력신장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주5일 근무제 실시에 따른 문화운동을 제안하고 싶다. 주말 이틀 중 하루는 물질적 생활을 떠나(금식까지는 아니어도 절식이라도 하면서) 정신을 다스리는 날, 즉 ‘한국형 안식일’로 삼자는 것이다.
우리도 과거 아일랜드 못지않게 굶주렸고 강대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이런 위기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우리 역사 속에 무수히 존재하는 (쿤켈의 표현에 따르면) ‘자아 파멸의 위기’를 재현하는 박물관을 지역마다 만들어보자. 또 ‘한국형 탈무드’를 출간, 이를 국민 교과서로 삼아 ‘한국형 안식일’에 가족 혹은 직장동료끼리 둘러앉아 읽으며 ‘공동체를 위한 창조적 삶’을 생각하는 생활문화를 창조하자. 이런 정신적 토대가 형성돼야 아일랜드가 실현한 노사정 대타협도 가능해지고, 대학을 졸업하고도 직장을 못 잡아 일생 실업자가 되는 비극의 시대도 막을 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형 탈무드’에 들어갈 콘텐츠는 무엇이어야 하며, 그 작업은 누가 해야 할까. 다행히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으니 한국형 탈무드 사이트를 만들어 국민의 아이디어와 의견을 수렴, 후대에 들려주고 싶은 감동적인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면 어떨까.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존재할 수 있도록 선조들이 이겨낸 수난의 이야기, 우리의 새로운 미래를 창조할 정신 에너지, 즉 ‘자기 동기부여’에 힘을 실어줄 이야기를 발굴해 올려보자. 이렇게 올려진 내용을 민생 차원, 기업 차원, 국가 차원으로 분류, 정리해가면 해가 갈수록 충실해지는 한국형 탈무드가 완성될 것이다.
독립기념관이나 역사박물관에 남아 있는 역사는 국가 차원의 이야기는 될 수 있겠다. 그러면 민생·기업 차원의 이야기는 어떤 것이 될까. 예를 들어보자. 안수길의 소설 ‘북간도’에서 이한복은 경작지가 없어 두만강을 건너가 몰래 농사를 짓다 들킨다. 도강(渡江)죄로 끌려온 그에게 함경도 종성부사 이정래가 다그쳐 묻는다.
“도강죄를 모르는고?”
“예! 압니다.”
“그럼 죽어 마땅하겠구나.”
“들키면 죽을 것을 각오했습니다.”
“너 담보가 큰 놈이구나.”
“담이 큰 게 아니라,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바에야 어머님과 처자를 한 끼라도 더 먹인 후 죽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소설 속 이야기지만 당시 우리 국민의 실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민생 차원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self-identity)을 정립하고 이런 가난을 되풀이 않기 위해 자기 동기부여를 독려하는 데 긴요한 역사적 자료다.
이처럼 뼈아픈 가난에서 벗어나고 오늘날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일등공신은 기업이다. 이번에는 기업 차원의 예로써, 35년 전 작은 기업에 불과하던 어느 회사가 오늘날 세계적 대기업이 되는 과정에서 겪은 고난의 이야기를 하나 들어보자.
여공과 새우깡
1971년 ‘보릿고개’의 배고픔은 어른에게도 힘겨웠지만 어린이들에겐 더욱 고통스러웠다. 어린이들이 즐겨 먹는 식품 중에 튀밥이 있었지만, 당시 곡물 자급도가 60%에 불과해 정부는 소맥분을 수입, 분식을 장려했다. 이런 때 한 식품회사가 밀가루 튀밥을 생각해냈고, 이를 ‘새우깡’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새우깡 제조 공정에 여공들이 쇠 주걱으로 새우깡을 퍼서 봉지에 담는 포장공정이 있었다. 그런데 쇠 주걱 때문에 부스러기가 생겨 제품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 문제로 고민하던 회사는 쇠주걱 대신 손으로 새우깡을 봉지에 담도록 했다. 그러나 작업이 하루 이틀 계속되면서 여공들의 손끝에 상처가 아물 날이 없었다. 고민 끝에 회사는 바느질할 때 쓰는 골무를 여공들의 열 손가락에 끼워 작업을 하게 했다. 이 회사는 그후 포장공정을 자동화하고 세계적 식품회사로 성장했지만, 이런 서글픈 역사는 잊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다. 자기 이미지 정립과 정신 에너지 함양을 위한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자선냄비 속에 지갑 털어 얼마 넣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은 일시적, 부분적 해법밖에 안 된다. 고용을 창출해서 일자리를 마련해주면 그것이 항구적, 궁극적 해법이 된다. 현대사회에서 일자리 창출의 일등공신은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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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많은 기업이 문을 닫거나 외국으로 나가고 있다. 왜 그럴까. 일부 근로자는 지나친 파업으로 기업을 괴롭혔고, 일부 언론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잘 나가는 기업을 골라 가혹하게 매도했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전제하면서 “신을 죽인 것은 인간” 이라고 했다. 같은 어법을 사용하면 지금 우리 기업을 죽이고 있는 것은 우리 국민 자신이다. 물론 기업도 반성하고 고쳐 나가야 할 것이 많다. 기업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은 좋지만 기업을 죽이거나 외국으로 몰아내는 것은 장기적으로 우리 후손들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 된다. 우리도 노사정 대타협을 이루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우리는 우리의 지정학적 역사 인식 위에 새로운 정신문화를 창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