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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과 닮은 것은 얼굴에서 코가 차지하는 면적이 크다는 것과 키가 작다는 것뿐이었으나, 몇몇 몰지각한 지인이 톰 크루즈라는 별명을 붙여주었고, 무엄하게도 난 그 별명을 손사래 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
톰을 좋아하게 된 것은 별명 때문이 아니라 영화 ‘탑건’ 때문이다. 당시 영화평론가들로부터는 미국 해군 홍보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영화는 재밌었다. 시간 때우기에 딱이었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탑건이 한국에서 개봉한 해는 1987년. 유난히 국내 정세가 급변하던 해였다. 6월 민주항쟁이 있었고, 6월 29일을 기점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됐다. ‘신동아’ 10월호에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인터뷰가 실렸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 정부는 이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때가 그랬던 만큼 당시 정치 상황을 빗댄 콘텐츠가 많았지만 탑건은 달랐다. 그저 멋진 장면의 연속이었다. 노을이 걸려 있는 하늘에 미군 최신예 전투기인 F-14가 날고, ‘Take my breath away(나의 마음을 가져가)’라는 음악이 배경에 깔린다. 영화 속 톰은 라이방 선글라스를 쓰고 항공 점퍼를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여주인공 켈리 맥길리스를 만나러 간다. 전투기에 오토바이, 미녀까지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가 영화 내에 가득하다.
톰이 연기한 주인공 매버릭은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여자를 밝히는 젊은 군인이다. 그 나이대가 그렇듯 독불장군 같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전투기 조종 솜씨만은 누구보다도 뛰어난 천재 파일럿이다. 동료를 잃는 사고를 겪고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진지함 또한 가진 인물이다. 영화 개봉 당시에는 나도 20대였다. 젊음이 있었기에 매버릭의 패기, 자신감은 물론 오만함,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 객기까지도 동경했다.
영화는 매버릭과 동료들의 갈등과 위험한 전투비행에서 드러나는 전우애가 주 내용이다. 전투가 끝난 뒤 매버릭이 미국 전투기 전술 교관으로 지원하면서 영화는 다음을 기약한다. 그 이후 ‘탑건’은 내 기억 속에 붉은 노을, 굉음을 내는 F-14 항공기, 멋진 오토바이 등 근사한 장면으로로만 남아 있었다.
돌아온 매버릭, 그가 선택한 자리
탑건의 속편을 제작 중이라는 소식은 지난해부터 들려왔다. 36년이나 지난 영화의 후속작을 제작한다니 너무 늦은 것 아닐까 하는 우려와 돌아온 매버릭에 대한 기대감이 함께 일었다. 그만큼 내 기억 속의 탑건은 내 젊음의 한 부분을 장식한 편린이었는지도 모른다.톰이 다시 그 매버릭으로 등장했다. 다른 영화 시리즈의 후속편은 나이 든 배우 대신 젊은 새 배우를 주인공으로 앉히기도 한다. 탑건의 주인공은 36년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톰이다. 그 사실이 반가웠다.
1962년생인 톰은 한국 나이로는 환갑이 지났다. 요즘에야 환갑도 중년이라고 하지만, 관객인 나도 이제 젊지 않다. 외모는 그와 많이 다르지만 나이는 비슷하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자칭 ‘중년의 남자’다.
아무리 영화지만 매버릭도 세월을 피해 갈 수 없는 것 같았다. 과거의 천재 파일럿은 승진 누락을 몇 번 거친 만년 대령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매버릭의 매력은 세월이 흘러도 퇴색되지 않았다. 그는 흘러간 시간을 붙잡으려 억지를 부리지 않았고, 젊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그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나이 든 이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다.
전작에서 매버릭이 천재 파일럿이었다면, 이번에는 ‘훈련교관’을 맡았다. 36년 전 젊은 시절의 자신처럼,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피 끓는 청춘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맡는다.
초반부 영화는 뻔하게 흘러간다. 매버릭은 후배들로부터 나이 든 퇴물 취급을 받고, 청춘들은 그를 신뢰하지 못한다. 매버릭이 “나 어릴 때는 안 그랬는데” 같은 말만 외치는 꼰대였다면 굳이 톰이 그 역할을 맡지는 않았을 터, 나이 든 톰은 뭔가 보여줘야 했다. 결국 그가 보여줄 것은 나이나 계급이 아닌 실력, 그는 직접 초음속 전투기의 조종석에 앉아 현란한 조종 기술을 선보인다. 젊은 장교들의 불신은 “죽이네”라는 대사와 함께 사라진다.
중년은 멈추어야 할 때일까?
세계의 수많은 여성을 잠 못 들게 한 그 소름 끼치게 화사하던 미소는 이제 차분한 미소로 변했고, 안타깝게도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톰의 얼굴에 상당 부분 자리 잡았지만, 36년 전 톰의 열정은 그대로였다.초음속 전투기에 직접 탑승하고, 놀라운 그 비행 장면을 직접 촬영했다는 기사에 톰과 비슷한 나이인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됐으니 관람료 값은 충분히 했다 여긴다. 아니 관람료 이상의 가치와 약간 남사스럽고 유치할지 모르나 가벼운 울림이 있었다. 중년의 톰은 아직 건재했고, 멋졌다. 그의 나이 듦은 퇴색이 아니라, 농익음이었다. 나의 박수가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겠으나 나는 소리 없이 물개 박수를 쳤다. 매버릭이 아닌 톰에게.
언젠가는 파일럿이 사라지고, 물러나야 할 것이라는 제독의 말에, 매버릭은 “Not today(오늘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미소를 짓는데, 영화 속의 매버릭이 아닌, 현실의 중년 배우 톰 크루즈의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는 35년 전의 매버릭을 중년이 돼 다시 만난 날, 나의 중년과 톰의 중년을 쓸데없이 비교·분석하며, 35년 전 그날 영화를 같이 봤던 그녀와 맥주를 마셨다. 흐르는 세월이 꼭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 같지만은 않다는 묘하게 기분 나쁜 이야기를 들으며.
나이가 들어, ‘중년’이라는 범주에 포함되면서부터 중년, 정년, 퇴직 등에 대한 글을 자주 쓰게 된다. 나이 들어가는 걸 아쉬워하는 방증일 게다. 50대 후반이 되고 정년이 다가오면 우리는 나이 든 자신의 정체성에 제법 혼란을 겪는다. 평생을 사회 속에서 열심히 살아온 자신이 내팽개쳐지는 기분, 수십 년 전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설렘과는 반대로 이제 힘을 잃고 그 쓰임새가 다해 가는 퇴물의 기분 때문에, 어느 구석 한 켠에서 애물단지가 될 것을 우려하게 된다.
중년의 나이에도 아직 다리는 짱짱하나, 내가 사랑했고, 내가 헌신했던 사회는 나를 차츰 멀리하는 듯하고, 100세 시대에 대비해 스스로 뭔가를 시작하려니 마음이 두렵고, 주변 환경은 녹록하지 않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 늙지 않는다
초년, 중년, 말년으로 구분하는 중년의 범주가 사실 애매하기는 하지만, 50대면 후반일지라도 아직 노년의 시기는 아니니, 중년이라 말하는 데 태클 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중년의 나이대가 정년과 퇴직이라는 시기와 겹쳐 있다 보니, 중년의 의미가 동적이기보다는 정적인 의미가 앞서고, 시작보다는 끝의 의미로 더 쉽게 다가선다. 20~30대 젊은이에게 중년의 의미를 물으면 고민도 없이 한물간 사람들로 대답할 것은 자명하나, 다행히 요즘은 중년을 새로운 시작으로 주장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 쏟아진다. 물론 저자가 대부분 중년이고, 그 중년들이 본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쓴 것이겠지만, 많은 이들이 그래도 중년을 끝물로 보지 않고 있다는 것에는 나 또한 마음의 위안이 되고,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중년쯤 돼야 객기가 사라지고, 놀랄 만한 지혜가 그 자리를 대신하니, 그 지혜를 쓰지 않고 묵히면 세상에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라는 멋진 말처럼, 세상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라도, 중년을 새로운 시작의 나이로 규정해 그 소임을 다해야 할지 모르겠다. 톰이 보여준 그 열정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전투기가 아닌 자전거에 올라탈지라도, 근육질이 아닌 지방질의 몸일지라도, 부지런히 손과 다리를 놀리고, 머리를 굴려, 그 책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은 성장하는 동안은 늙지 않는다”는 김형석 교수의 고언처럼 중년은 멈추어야 할 시기가 아니라, 아직 계속해야 하는 시기, 아니 새로운 시작의 시기일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멈추고 사라질 때가 오겠지만, “NOT TODAY”, 오늘은 아니리라 믿어본다. 예순이라는 나이에 멋진 파일럿을 연기한 중년의 톰 크루즈, 그를 응원한다. 그 또한 나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중년을 응원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