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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계절, 소리의 온도
성악가에게 겨울은 양면적이다. 몸이 곧 악기이기 때문이다. 악기가 낮은 온도의 공기에 노출되면 예민해지듯, 성악가의 몸도 이 계절 앞에서는 늘 긴장을 품게 된다. 목은 쉽게 마르고, 작은 감기 하나에도 소리는 금세 흔들린다. 하루아침에 몸의 균형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겨울은 언제나 조심스럽게 건너야 할 시간처럼 느껴진다.그러나 나는 이 계절을 완전히 고생으로만 여기지는 않는다. 겨울은 몸과 소리의 관계를 가장 정직하게 마주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성악가는 몸을 속일 수 없다. 무리하면 바로 소리로 드러나고, 조급하면 호흡이 먼저 흔들린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나는 몸의 작은 신호에 귀를 기울인다. 숨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목이 아닌 몸 전체가 어떻게 울리는지 더욱 섬세하게 살핀다. 덜 부르고, 덜 밀어내며, 대신 오래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
이 계절의 음악은 마치 얼어붙은 강 위를 천천히 걸어가는 일처럼 느껴진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고, 그만큼 단단하다. 서늘한 침묵 속에도 미세한 떨림은 남아 있고, 그 떨림이 오히려 생명처럼 다가온다. 겨울의 노래는 소리보다 침묵이 더 크게 울리는 시간이다.
무대에 서면, 그 침묵은 객석의 정적과 맞닿는다. 관객의 호흡도 느껴지는 그 정적은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서로의 숨이 얇은 실처럼 이어져, 음악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만든다. 침묵 속에서 비로소 나는 노래의 본모습을 본다. 소리와 소리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지만 가장 진실한 울림을.
겨울의 선율은 멀리 뻗기보다 안으로 접힌다. 음은 길게 늘어지지 않고, 한 음이 끝난 자리에는 맑은 침묵이 남는다.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다음 소리를 준비하는 여백이다. 고요한 공기 위에 얹힌 소리는 흩어지지 않고 또렷이 머물며, 감정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그래서 겨울에 부르는 한국 가곡은 언제나 조금 더 깊고 진하다. 이 계절의 노래는 소리를 통해 마음의 윤곽을 조용히 드러낸다.
음악의 온도는 변하지만, 그 안의 진심은 변하지 않는다. 겨울의 노래 속에는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결이 다른 두 감정이 부딪히지 않고 한 선율 위에서 조용히 포개질 때, 노래는 비로소 삶의 온도를 닮는다.
요즘 세상은 ‘K-컬처’라는 이름 아래 한국 예술이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한국어로 된 노래가 국경을 넘어 울리고, 우리의 노래가 낯선 이들의 마음에 닿는 시대다. 한국어의 리듬과 정서가 더는 지역적인 감각이 아니라 동시대의 감정으로 공유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기쁜 일이다. 그러나 이 흐름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오래된 질문 하나를 떠올린다. 우리 문화가 세계를 향해 손짓하고 있는 지금, 과연 우리는 우리 언어를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노래하고 있는가.
한국어는 ‘의미’만으로 이루어진 언어가 아니다. 발음되는 순간, 이미 감정이 생긴다. 모음이 열리며 밝아지는 기분이 있고, 자음이 닫히며 생기는 단단함이 있다. 같은 문장도 어떤 호흡으로 말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표정이 된다. 한국 가곡은 바로 그 언어가 소리로 변할 때 생기는 감정의 미세한 결을 가장 정교하게 받아 적는 장르다.
모음은 현악기의 현처럼 한껏 열려 맑게 울리고, 자음은 타악기처럼 순간의 리듬을 쳐낸다. ‘아’는 따뜻한 현의 떨림으로, ‘이’는 미세하게 날 선 빛으로, ‘오’는 깊이 있는 울림으로 공기를 울린다. 이 각기 다른 소리들이 성악가의 몸을 지나며 공명할 때, 하나의 악기가 된다. 한국어는 악보 위의 음이면서 동시에 연주자의 숨이다.
한국 가곡은 한국어의 소리와 시의 감정을 가장 정직하게 담아낸 장르다. 말의 억양, 문장의 끝에서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호흡, 모음과 자음 사이의 여백이 선율과 만날 때, 말은 더는 전달 수단이 아니라 음악 자체가 된다.
한국 가곡에서 선율은 말을 압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가진 속도와 온도를 존중하며 그 곁을 걷는다. 그래서 이 음악은 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 닿는다.
노래로 다시 살아보는 시간
하지만 현실의 교육과 무대는 아직 이 섬세함을 충분히 품지 못하고 있다. 성악 교육의 중심에는 여전히 이탈리아 가곡과 독일 가곡이 놓여 있다. 물론 그 음악이 지닌 역사적 깊이와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한국의 대학 강의실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배우는 시간은 여전히 많지 않다. 한국어 발음이 지닌 감정의 결, 말의 억양이 선율과 만날 때 생기는 미묘한 변화는 개인의 경험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늘 이 지점에서 아쉬움을 느낀다. 우리 언어가 지닌 소리의 온도를, 우리는 아직 충분히 다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래서 나는 올해도 한국 가곡으로만 독창회를 열기로 했다. 이 선택은 어떤 선언이라기보다, 나 자신에게 향한 솔직한 응답에 가깝다. 한국 가곡에는 내가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고,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이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가을과 강물, 목련화에 부는 바람, 마음에 남은 오솔길, 그리고 오래된 얼굴들. 이 노래들은 삶의 조용한 순간을 끌어올려, 과장 없이 선율 위에 올려놓는다.
한국 가곡 독창회를 준비하는 일은 한 해를 다시 살아보는 과정과 닮아 있다. 노래를 고를 때 나는 늘 계절을 먼저 떠올린다. 한국 가곡은 계절의 온도를 잃지 않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내 몸을 통과해 나오는 소리 역시 언제나 그 계절의 공기를 닮는다. 소리는 기억보다 먼저 계절을 기억한다.
겨울의 연습실에서 나는 종종 따뜻한 모과차를 곁에 둔다. 컵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향을 맡으며 잠시 숨을 고른다. 그 따뜻함은 단순히 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라앉히는 작은 의식에 가깝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와 입안에 퍼지는 향 속에서, 나는 다시 소리의 중심으로 돌아온다. 잎을 모두 내려놓은 나무와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 낮은 빛으로 가라앉은 창밖의 겨울 풍경은 노래를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기다려도 된다고 말해준다.
그 기다림은 음악의 본질이기도 하다. 좋은 노래는 서두르지 않고 제때 도달한다. 겨울의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도 바로 그 ‘느림의 음악’이다. 숨을 고르고, 온몸으로 계절을 통과할 때 소리는 비로소 살아난다.
그 고요 속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가을을 떠올린다. 가을은 언제나 조용히 시작된다. ‘가을 그리고 강물’을 부를 때, 한국어의 깊은 모음은 강물처럼 천천히 가라앉으며 흐른다. ‘가’와 ‘강’ 사이에서 소리는 끊기지 않고 이어지고, 선율은 일정한 호흡으로 감정을 데려간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를 때 억지로 소리를 밀어내지 않는다. 호흡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애써 붙잡지 않고, 그 흐름을 믿는다.
봄의 문턱에는 바람이 분다. ‘목련화에 부는 바람’을 부를 때, 한국어의 자음은 한층 부드러워지고 모음은 밝아진다. ‘바람’이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가볍게 흘러나갈 때, 선율은 그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감싼다. 말과 음악은 서로를 앞서지 않고, 나란히 걷는다. 이때 노래는 의미가 아니라 감정이 스치는 찰나가 된다.
한국어의 빛, 가곡의 기억
공연이 끝난 뒤, 관객이 모두 빠져나간 객석에 잠시 혼자 남아 있을 때가 있다. 조명이 꺼진 무대에는 아직 노래의 온기가 남아 있고, 방금 전까지 울리던 소리는 공기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다. 의자를 스치고 지나간 숨, 악보 위에 얹혔던 시선이 그 자리에 머문다. 노래는 끝났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오히려 그때부터 각자의 시간 속으로 흩어진다. 누군가는 귀갓길에 한 소절을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오래 품게 될지도 모른다. 음악은 그렇게 무대 밖으로 걸어가, 듣는 사람의 삶 속에서 다시 살아간다. 그 여운 속에서 가곡은 비로소 공연이 아니라 기억이 된다. 그리고 그 기억은, 언젠가 또 다른 겨울의 어느 순간, 조용히 다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냥 이대로’ ‘선물’ ‘마음속의 오솔길’을 이어 부를 때면, 노래는 점점 내면으로 향한다. 한국어는 감정을 과시하지 않는다. 대신 문장의 끝에서 천천히 깊어진다. 숨을 정리하며 남는 여운, 소리가 사라진 뒤의 침묵까지 음악의 일부가 된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관객과 말없이 같은 시간을 걷는다.
그리움은 한국 가곡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감정이지만, 결코 같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 ‘그대 그리운 날은’의 그리움은 고요하고, ‘그대야 날아라 높이 높이’의 그리움은 희망과 기도를 품고 있다. ‘그대’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감정의 결은 달라진다. 길게 늘이면 간절한 소망이 되고, 조심스럽게 끊으면 오래된 체념이 된다. 선율은 그 미묘한 차이를 그대로 받아 안으며 감정의 층을 만든다.
중반부에서 ‘청춘에게’ ‘시인이 되어’를 부를 때, 나는 늘 한 박자 늦게 말을 건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노래할 때, 한국어는 가장 솔직해진다. 화려한 장식 없이 말의 무게로 공간을 채운다. 이 순간 나는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사라지는 소리 속에 오히려 진심이 머물기 때문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노래는 빛의 방향을 바꾼다. ‘아침 햇살 내리면’ ‘낙엽의 향기’ ‘추억의 향기’를 부르며 한국어의 모음은 더욱 투명해진다. 숨이 스며드는 틈에서 선율은 빛처럼 번지고, 노래는 설명이 아니라 풍경이 된다. 관객은 단순한 청중이 아니라, 그 풍경 속을 함께 걷는 사람이 된다.
‘작은 연가’ ‘해질녘 풍경’, 그리고 마지막 노래에 이르면 하루는 천천히 저문다. 이때 한국어는 가장 낮고 따뜻한 소리를 낸다. 마무리하듯 내려앉는 음성, 선율이 잠잠히 가라앉는 순간 나는 노래를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놓아준다. 한국 가곡은 억지로 붙들 때보다, 놓아줄 때 더 가까이 다가온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다. 모든 계절을 지나온 끝에서 소리는 다시 맑아진다. 이 독창회는 나에게 하나의 고백이다. 몸이라는 악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날의 호흡과 온도를 존중할 때 비로소 소리는 진실해진다. 무대 위에서 부르는 한국 가곡 한 곡 한 곡은, 나에게 계절과 추억, 그리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는 편지 같다. 노래 속 어딘가에는 언제나 누군가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이 내 소리를 통해 다시 피어난다.
오늘 무대에서 울려 퍼질 한국 가곡들이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계절을 불러오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조용히 기다리게 하기를 바란다. K-컬처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도, 한국 가곡이 조용하지만 단단한 울림으로 남기를 바란다.
이 노래들은 유행이 아니라 기억이고, 소비가 아니라 축적이다. 그리고 그 축적된 시간 속에서, 한국어가 지닌 영롱한 빛이 선율을 따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퍼져나가기를 바란다.

● 1974년 서울출생
● 이탈리아 레피체 국립음악원 졸업
● 테너 김동익 애창곡집 1~9집 발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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