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처럼 생생한 묘사
평자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남유럽 국가들의 민주화를 다룬 16장(‘이행기’)과 동구권의 ‘89혁명’들을 묘사한 19장(‘구질서의 종말’)이다. 특히 1989년의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저자는 “나는 당시 프라하에 있었기 때문에 매시간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느낌에 도취해 있었음”을 각주에서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주트는 이 모든 동구권 혁명이 결국 모스크바의 용인 덕분이었음을 잊지 않고 강조한다. 그러한 점에서 ‘1989년의 혁명은 고르바초프의 혁명이었다.’
이 책의 강점은 무엇보다도 유럽사를 서유럽의 몇몇 나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북쪽의 노르웨이에서 남쪽의 그리스까지, 서쪽의 포르투갈에서 동쪽의 러시아(구소련)까지 수십개의 유럽국가 거의 모두에 대해 고루 논의하고 있다. 기실 주트는 1945~89년 동유럽 국가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장벽 너머의 망각된 세계’ 주민들의 처지에 대한 서유럽 정부들과 지식인들의 무관심을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저자의 독특한 유럽관(觀)이다. 주트에 따르면 동유럽인들이 그렇게도 갈구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유럽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의 반대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유럽’이라는 주장이다. 제도상으로 ‘유럽’은 ‘유럽연합’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지만 저자가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생활양식’으로서의 유럽, ‘유럽식 사회모델’이었다. 그것은 특히 ‘미국식 생활양식’과 대비되는 것으로, (미국인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고 더 안전한 생활을 누리고 더 건강하고 더 오래 사는 사회, 빈곤의 원인이 개인의 무능력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였다.
유럽 중심주의적 시각도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유럽’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낙관이다. 미국식 생활양식보다 유럽식 사회모델이 훨씬 낫다는 인식에는 필자도 동의하지만 유럽 중심적이거나 유럽 우월주의적인 사고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럽은 유럽인이나 비유럽인 모두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꼽는 가치의 공동체’라는 인식이라든지 ‘유럽의 번쩍거리는 새로운 이미지가… 살아남을지는 유럽인들이 그들 가운데 주변화되어 있는 비유럽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달렸다’는 주장, 나아가 ‘유럽을 위한 애국심’은 ‘확대되고 성장하여 문명세계 전체를 끌어안아야 하며, 세계에 온당한 충고를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는 자들은 유럽인’이라는 주장 등은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러한 저자의 성향과 가치관이 이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방대한 분량임에도 지루하지 않고 잘 읽히며 때로는 생생하고 종종 깊은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다. 2005년 뉴욕타임스, 가디언 등 전세계 수많은 언론들로부터 ‘올해의 책’에 선정된 이 책이 비교적 일찍 국내 독자를 만나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특히나 역자의 역할이 이 책을 돋보이게 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서도 매끄럽게 읽히게 했고, 충실한 역주들을 꼼꼼하게 달아 역자의 역량과 정성이 책의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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