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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생지와 묵은 지, 익은 지에 깃든 어머니의 손맛, 숨결

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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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 삭은 홍어 같기도 하고, 푹 익은 홍시 같기도 하고, 조선간장으로 담근 몇 년 묵은 게장 같기도 하고. 밥도둑 밥도둑해도 천하의 이런 밥도둑이 따로 없다.
잃어버린 김치를 찾아서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 먹고 싶다.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제’

“아이고, 호랭이 물어가네!! 올 시한(겨울) 날씨가 추웠다가, 더웠다가 미친년처럼 떠들어싸터니, 짐장헌 지 열흘이 넘었는디 아직도 지(김치)가 미처서 못 먹것고만이잉! 뻣뻣허고 씁쓸허니 맛이 하나도 안 들어부렀네! 지국(김치국물)도 익을라먼 한참 걸리것고….”

새벽잠결에 밖에서 어머니의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얼마 전 담근 김장김치 맛을 보았나 봅니다. 마당가 장광에서 김칫독 뚜껑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어머니의 가랑잎 밟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말씀마따나, 예년 같으면 지금쯤 김치가 들척지근하니 맛이 들었을 만도 한데, 아직도 ‘쌩지(생김치)’에서 익을락 말락 지랄 같은 상태인가 봅니다. 한마디로 김치가 설익은 것이지요. 김치가 미쳐버린 것입니다.

김장한 뒤 바로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그랬을 겁니다. 한 사나흘 영하 1~2℃쯤 죽 이어져야 서서히 맛나게 익었을 텐데….

흔히 날씨가 떠들면(나부대면) 김치가 잘 미칩니다. 바람까지 씽씽 들까불고 있으니 ‘생지가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는 김치가 뻐셀뿐더러, 쓴맛까지 나서 먹기에 영 거시기합니다. 도리 없습니다.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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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성│동아일보 편집국 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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