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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시대의 아픔 딛고 피어난 신학적 사유 민중에게서 예수를 보다

안병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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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병무

1970년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영결식.

1970년대 경제성장의 주요 동력이었던 노동자를 비롯해 농민과 도시빈민은 성장과 분배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근대화의 타자(他者)였다. 한국 교회는 그때까지 사회모순과 민중의 생존권 문제에 등을 돌린 채 개인의 영혼구원을 선교목표의 전부로 삼고 있었다. 기득권적 세계에 파묻혀 있던 한국 교회는 전태일 사건으로 비로소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안병무를 비롯해 서남동 현영학 서광선 문동환 김용복 한완상 허병섭 등이 민중 현실의 ‘중심에서’ 새로운 신학, 실천적 신학에의 길을 모색했다.

민중신학은 성서의 민중 이야기가 1970년대 한국의 민중사건과 합류해서 나타난 한국적 신학이론이다. 민중신학은 한국 민중의 부르짖음에 대한 신학적 메아리였다. 민중신학에 의하면 현실의 민중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메시아를 만나는 것이며, 민중과의 연대적 실천을 통해 메시아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다. 안병무는 ‘민중신학의 회고와 전망’에서 민중신학이 태동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기술했다.

“민중신학은 서재에서 나온 사변이 아니고, 한국의 정치현장에서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요, 신학적인 귀결이다. 구체적으로는 군사정권이 수립된 이래 그들의 탄압 밑에서 그 정체를 드러낸 민중과의 만남과, 그들의 고난에 어떠한 형태로든 참여한 결과가 민중신학을 낳았다.”

조선 민중의 삶을 가로지른 성장기

안병무는 태어날 때부터 상황적으로 민족적·민중적 고난의 현장에 있었다. 그는 1922년 평남 안주군에서 태어나, 만주 간도에서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란 엄혹한 시대적 조건에서 만주 땅을 유랑하던 조선 민중의 삶을 가로지른 것이다. 당시 조선 민중의 삶은 예수시대 팔레스타인의 갈릴리(갈릴래아) 지역을 떠돌던 유대민족의 삶과 흡사했을 것이다. 갈릴리는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 비천한 땅이었다. 그곳에 살던 주민은 농노와 소작인, 소농이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예수의 갈릴리 선교는 곧 민중 선교의 성격이 짙었다.(‘갈릴래아의 예수’, 한국신학연구소, 1990)



간도 용정의 은진중학 재학 시절 안병무는 윤동주 시인과 문익환 문동환 강원룡 등을 만났으며,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설립한 김재준은 한때 은진중학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이 시절을 통해 안병무는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 고취에 교회만한 터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교회를 중심으로 야학교와 주일학교를 세워 민족계몽운동에 나섰다. 그는 이때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이집트에서 탈출했는지를 담은 ‘출애굽기’를 어느 성서보다 열심히 읽었다. 조선민족의 독립과 해방에 대한 불타는 의지에서였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 그는 간도에서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해 부전공으로 종교학을 선택했다. 서울대 시절 기독학생총연합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그 시절 안병무는 기독교 신앙공동체 조직으로 ‘일신회’를 결성했으나 6·25전쟁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안병무는 전쟁 중에도 일신회 재건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 결국 열매를 맺었다. 일신회는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제3의 기독교 신앙운동을 표방했다.

1951년 11월 안병무는 2000년 전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삶을 본떠 ‘야성(野聲)’이란 잡지를 펴냈다. ‘야성’에서 안병무는 예수를 팔아 생활방편으로 삼은 한국의 ‘삯꾼 목사’들과 교회 자체의 기회주의적이며 순응주의적인 자세에 대해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그는 서울 남산 약수터 아래에서 ‘향린원(香隣院)’이라는 평신도 신앙공동체를 결성했다. 재산을 공동소유하며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무소유적 삶의 형태를 꿈꾸던 이 신앙공동체는, 그러나 결혼과 가족중심 사회제도의 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평신도 중심의 일상적 교회에 머물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적 소유와 개인주의를 포기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환상이었다. 서울 명동에 자리 잡은 향린교회의 전신이 바로 안병무가 세운 이 향린원이다.

안병무는 향린교회를 가리켜 ‘본래 호랑이를 그리려 했는데, 그만 고양이를 그리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안병무는 46세에야 결혼했다. 상대는 YWCA 총무를 맡고 있던 박영숙이었다. 안병무는 주위사람들에게 “46세에 늦장가를 가니 하나 좋은 점은 있더라”고 했다. “감옥 갔을 때 면회 올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농담 삼아 말한 것이다.

불트만 신학을 만나다

1956년 안병무는 개혁신학의 본고장인 독일의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럽에 도착해 먼저 덴마크에 있는 키에르케고르의 묘소를 둘러봤다. 유학기간을 통해 키에르케고르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 몰두하는 한편, 신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불트만의 실존주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실존주의 신학은 그 후에도 안병무 신학의 아우라였다.

안병무는 사도 바울의 실존을 과거 속의 자기와 미래 속의 자기라는 두 지평에서 이해, 과거를 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한 것으로 해석했다. 바울에게 ‘현존’은 과거의 소유를 버리고 새롭게 얻으려는 미래의 틈새에 있는 무엇이다. 과거에서 탈출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탈존(脫存)’과 ‘향존(向存)’, 그리고 ‘이미(already)’와 ’아직 아니(yet not)’ 사이의 존재가 바로 ‘현존’인 것이다.

과거의 소유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 달리는 ‘도상(途上)의 존재’에서 안병무는 신앙인의 참모습을 보았다.(안병무, ‘성서적 실존’, 한국신학연구소, 1982) 그는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의 타락 이야기에서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실존적 삶을 보았고, ‘출애굽기’를 통해 유목민의 탈향적(脫向的)인 삶의 전형을 읽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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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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