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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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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탈리아음악원에서 배운 서양음악사 책의 목차를 보면, 모차르트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작곡가에게도 한 챕터 전체를 할애하지 않는다. 35개 챕터 중 유일하게 모차르트에게만 한 챕터를 할애했는데, 시험을 위해서는 그의 모든 작품을 암기해야 했다. 그의 방대한 음악을 외우고 들을 때마다 ‘모차르트가 35세로 단명하지 않았다면 후세 음악가들은 더욱 괴로웠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756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차르트는 음악교육자인 아버지 레오폴트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천재성을 보였다. 4세 때는 한 번 들은 음악은 그대로 따라 연주했고, 5세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12세 때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레오폴트는 천재아들을 데리고 6세 때부터 연주여행을 떠나 유럽 각 도시를 돌아다녔고, 덕분에 사람들은 어린 소년의 기가 막힌 ‘음악묘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키가 작아서 의자에 쿠션을 깔아야 겨우 건반과 위치를 맞출 수 있었던 이 어린아이는 눈을 가리고도 완벽하게 하프시코드(harpsichord·피아노 전신인 건반악기)를 연주했고, 천으로 건반을 가리고도 유창하게 클라비어(klavier·건반이 있는 모든 현악기)를 연주했다. 즉흥적으로 분위기에 맞추어 작곡까지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의 총애를 받던, 차갑고 도도한 퐁파두르 후작부인(1721~1764)이 자신이 작곡한 곡을 능수능란하게 연주하는 신동의 재주에 감탄해 볼에 키스를 해주었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궁정극장으로 여섯 살 신동을 초대해 직접 의상을 하사했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넘어진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공주를 향해 “이 공주와 결혼할 거야”라고 큰 소리로 외친 일화도 전해진다. 이 공주가 바로 테레지아 여제의 막내딸이자 훗날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극의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다.

“이 공주와 결혼할 거야”

이렇듯 모차르트는 비록 평민이었지만, 당시 유럽의 중심에 선 인물들과 직접 교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갈 수 있었다. 동시에 10여 년간의 유럽 연주여행을 통해 각 도시 최고의 음악가들과 교분을 쌓으면서 그들의 음악을 흡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이 조숙한 천재는 영국에서 얻은 헨델의 장대함, 독일에서 얻은 바흐의 경건함, 프랑스에서 익힌 로코코 양식의 화려함과 우아함, 이탈리아에서 접한 오페라라는 새로운 형태를 모두 흡수했다. 이미 15세가 되기 전에 각 분야의 곡을 100여 곡 작곡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이후의 인생은 달랐다. 모차르트는 연주여행으로 인해 자기 또래 사람들과 사귈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해 사회성이 부족했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웠다. 성격은 순수했지만 고집이 세고 괴팍했기 때문에 도처에서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베토벤과 모차르트는 1787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조우한다. 17세의 젊은 음악도 베토벤은 음악의 절정에 도달해 있던 31세의 모차르트와 빈에서 만난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 실력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던 모차르트는, 오페라 ‘돈 조반니’의 한 부분을 베토벤이 변주곡으로 작곡하자 깜짝 놀라며 그에게 “곧 세상을 향해 천둥을 울릴 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들이 만난 합스부르크왕가의 수도 빈은 당시 인구 25만 명의 대도시로, 런던(70만 명), 파리(50만 명), 나폴리(40만 명)와 더불어 유럽 중심도시였다. 빈에는 음악을 소비하는 많은 부르주아와 귀족이 있었고, 주교의 취향에 의해 모든 곡을 결정하는, 모차르트의 고향(잘츠부르크)과는 다른 면모의 도시였다. 이 시기 빈은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음악을 맞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빈에서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1782년 초연)를 시작으로 왕성한 작곡활동을 했지만, 자신에 대한 인정과 찬사가 점차 줄어들고 경제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서 결국 1791년 빈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모차르트가 떠난 1년 후 베토벤은 빈으로 이주했다. 베토벤은 빈에서 러시아의 문호 알렉산드르 푸슈킨(1779~1837)의 희곡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와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숙적으로 묘사된 안토니오 살리에리(1750~1825)를 사사했다. 또 모차르트와 쌍벽을 이루던 고전주의의 대가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1732~1809)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자신의 색채를 확립하며 빈 최고의 촉망받는 작곡가 반열에 오르려는 순간, 베토벤은 청력상실이라는 청천벽력과 같은 선고를 받는다. 베토벤은 1798년부터 서서히 청력을 잃었다. 작곡가에게 귀가 안 들린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 베토벤은 1801년 요양차 간 빈 근교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두 동생 앞으로 유서를 작성했다. 이 유서는 베토벤 사망 후 26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는데, 그 속에는 그의 절망적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천재’ 모차르트와 ‘악성’ 베토벤 그 빛과 그림자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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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승경│국제오페라단 단장·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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