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912년에 준공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손발 노릇을 한 내무대신 송병준이 1908년 11월, 전라남북도에 비밀훈령을 보내 민간의 철도 부설운동을 방해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부설운동은 좌초되고 서오순의 부설권도 취소된다. 이렇게 되자 ‘대한매일신보’는 “오호(嗚呼)라 한국동포여 이천만(二千萬)의 민족이 유(有)한 제공(諸公)이 차(此) 호남철도(湖南鐵道) 일개(壹個)를 득유(得有)치 못하니 제공(諸公)의 전도(前途)를 엇지 인언(忍言)하리오”라고 썼다.
곧 일제는 서오순에게 약간의 배상액을 일방적으로 던져주고 부설권을 인수했다. 일제는 1911년 7월 대전과 연산 사이를 우선 개통하는 것으로 공사를 시작해 1914년 1월 전 구간을 완공하고 목포에서 호남철도 전통식(全通式)을 열었다. 일제가 최종적으로 완공하고 또 곡창의 수탈과 그들 나름의 대륙 통치 계획의 일환으로 호남선을 장악했지만 그 이전에 좌초된 역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일제는 호남선과 경부선을 연결할 때 선로의 진행 방향을 서울이 아니라 부산으로 꺾었다. 호남의 쌀을 부산으로 직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랫동안 대전역에서 열차를 서울 방향으로 돌리기 위해 정차 시간이 다소 길었는데 이때 승객들이 잠시 내려서 대전역의 가락국수로 허기를 달래곤 했다.

목포 옛 도심.
그러다가 1936년 서대전역이 당시 대전 서쪽 외곽에 준공됐다. 지금의 호남선이 이 축으로 달린다. 호남선뿐만 아니라 여수로 가는 전라선, 대천과 장항으로 가는 장항선, 대전역과 서대전역을 잇는 대전선(대전삼각선)이 이 역을 이용한다. 1978년, 널찍한 한밭(大田) 북부에 거의 모든 열차가 잠시 대기 후 신호 조정을 받는 광활한 대전조차장이 완공된 이후 경부선은 대전역을 이용하고, 호남선은 서대전역을 이용하는 것으로 정리됐다.
호남선은 1913년 개통 이후 오랫동안 단선철도였는데, 오랜 기간의 공사 끝에 복선화가 완료됐다. 다른 선로와 달리 호남선은 대한제국 정부와 민간이 계획을 추진했고, 그 권리가 강제로 박탈된 후 일제에 의해 식민 수탈의 근간이 됐으며 광복 이후, 정확히는 산업화의 도정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 홀대와 차별로 인해 한동안 단선으로 운영됐다.
단선이 복선으로 오롯이 완공되는 데는 반세기가 걸렸다. 1968년 시공해 2003년 완공한 것이다. KTX의 완전 개통 또한 경부선 KTX 개통 후 11년 만의 일이다. 극심한 인구 편차와 산업화의 정도에 따른 교통 및 수송량의 절대적 차이가 엄연해 발생한 일이지만, 어쨌든 그러한 지역별 차이가 오랫동안 존재했다.
광주를 지나면서부터 확연히 20세기 후엽의 풍경이 나타난다. 나주, 함평을 거쳐 열차는 느릿느릿 목포역으로 들어갔다. 열차가 도착한 곳에는, 목포역이 호남선의 거점임을 알리는 표석이 서 있었다.
목포를 겨울과 봄 사이에 걸어보았다. 광주를 벗어나 나주, 함평을 지나면서 목포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속에서 옛 노래 ‘목포의 눈물’이 잔잔한 바다 위의 일렁거리는 파도처럼 미세하게 들려왔다. 부산이 그렇고 또한 인천이 그렇듯이 항구는 노래를 낳는다. 노래를 낳는 항구 하면 역시 목포이고, 목포의 노래라고 하면 역시 ‘목포의 눈물’이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의 새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