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노래를 낳는 항구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4/4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목포 오거리는 시인 김지하가 밤을 보낸 곳이다.

그 노래를 찾아 삼학도(三鶴島)로 가보았다. 애절하게 넘어가는 ‘사~암하악~~또오오~, 파도~ 깊이 스며~어 드으으는~데’로 유명한 삼학도는 오래전 섬이 아닌 육지로 바뀌었다. 1968~1973년 진행한 연륙(連陸) 및 간척공사로 삼학도는 섬이 아니라 목포시 영해동의 일부로 편입된 지 오래다. 세 마리의 학이 내려앉았다 해 대삼학도, 중삼학도, 소삼학도 곧 삼학도로 칭했으나 항만청, 해양경찰대,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등 정부 기관과 기업 건물들이 들어서서 옛 기억과 지형은 완전히 사라진 바 있다.

그랬는데, 2000년 초부터 10여 년 가까운 복원공사를 진행해 옛 모습을 일부 재현했다. 무려 1243억 원을 들여 평지가 된 삼학도에 흙과 자갈을 깔고 가급적 원형에 가깝게 봉우리를 만든 후 760m의 물길을 새로 냈다. 이렇게 가까스로 지형을 재현한 후 삼학도공원을 기점으로 어린이바다체험과학관, 카누캠프, 김대중노벨평화상기념관, 난영공원 등을 조성했으니 이 삼학도의 간척과 해체와 재현만 검토해봐도 목포의 역사, 나아가 한반도 역사의 어떤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이 삼학도에 이난영의 묘가 있다. 원래 경기 파주시 공원묘지에 안장돼 있었는데 2006년 3월 25일 유해를 고향 목포로 옮겨 삼학도공원에 새로 심은 백일홍 나무 아래 안장한 것이다. 이 수목장(葬)한 나무 부근에 ‘목포의 눈물’을 비롯한 이난영의 불멸 곡들을 들을 수 있는 장치가 있다. “사~공의 배햇~ 노호 래 가아~무을 거리며 사~암 하악 또오~ 파도호 깊이 스~며~ 드느흐흔 데~”

열아홉 살 때 목포에 온 적 있다. 자전거를 타고 춘천을 지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울진으로, 다시 거기에서 경북 내륙으로 꺾어 영주로, 상주로, 대구로, 다시 거기서 남해안을 따라 마산, 하동, 광양, 보성 지나 광주 찍고, 그 아래로 다시 내려가 목포에 온 적 있다.

자전거를 팔아 한 끼 식사를 하고 남은 돈으로 제주도에 가려고 여객터미널에 갔는데, 뱃삯이 부족했다. 돈을 벌어서라도 제주도에 가고 싶었다. 그래서 목포역으로 가보았다. 허드렛일이라도 없을까 해 살펴보니 역 건너편에 있는 다방에서 DJ를 구한다고 했다. 숙식도 제공한다 했다.



2층의 다방 이름은, 요즘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커피숍을 줄여 부르는 이름 그대로, 별다방이었다. 별다방 아래에는 별문방구가 있었고 그 건물 3층에는 별당구장이 있었다. 아마도 어떤 사람이 건물을 다 소유하고 문방구와 다방과 당구장을 다 운영하는 듯싶었다. 나는 별다방에서 오디션을 봐 합격했고 별문방구에서 이력서를 사서 빈 칸을 채운 후 별당구장에 가서 최종 면접을 보았다.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다방 주인은 신원이 불확실한 낯선 사람을 쓸 수 없다고 했다.

27년이나 지나 그 건물로 가보니 다방도 당구장도 문방구도 사라지고 ‘임대중’이라는 글씨만 나붙어 있었다. 잠시 건물을 보다가 항구 쪽으로 걸었다. 목포역에서 오거리 방향으로, 또 오거리를 지나 항구 쪽으로 뻗은 대로에는 목포시가 장식해놓은 인공조명(루미나리에)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지금 내 기억에는, 19세의 내 앞으로 거센 파도가 방파제를 넘어와 부서지는 듯하다. 그런데, 정말 그러했는지는 의문이다. 시인 최하림의 글을 읽고, 나 자신의 기억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인 최하림은 “나에게 시 같은 것을 가르쳐준 것은 국어선생님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고 선배들도 아니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 거리였다”고 쓴 적 있다. 젊은 날의 최하림은 시인 김지하 등 목포의 문청들과 함께 목포 오거리에서 밤을 보냈다.

19세 소년의 노래

목포 문화예술의 산실이 바로 오거리의 수많은 다방과 술집과 화랑들이었다. 20세기 중엽의 목포의 삶과 문화를 다룬 ‘항구도시 목포의 추억 1번지, 오거리’ 특별전이 열린 적도 있다. 지금도 그 공간적 자취는 군데군데 남았는데, 실로 왕성한 문화예술이 밤낮으로 피어나는지는, 이번 한 번의 방문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어찌 됐든 도시가 살아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해본다’는 취지로 설치한 것처럼 보이는 인공조명을 따라 항구 쪽으로 걸어갔다. 목포의 근대를 압착한 옛 건물을 여러 채 보았다. 일제의 대표적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 사옥과 당시 일본영사관 건물을 축으로 해 옛 목포 도심의 네모반듯한 지형과 그 위에 남아 있는 한 세기 전의 유산을 살펴보았다.

그렇게 살펴보면서도, 내가 마음속으로 찾던 것은 19세의 나였다. 열아홉 살의 내가 걷던 곳, 그 아이가 보던 항구의 불빛, 점심을 먹은 후 무안으로 터벅터벅 걷던 소년, 걷다가 낡은 트럭을 운 좋게 얻어 타고 광주역까지 가던 19세의 나 말이다. 트럭을 몰던 나이 든 아저씨는 환타와 카스테라를 사서 19세의 나에게 주면서 객지 돌아다니지 말고 기술을 배워서 기반을 잡으라고 했고, 나는 밤늦게 출발하는 호남선을 탔다.

비둘기호였다. 모든 역에 다 정차하는 비둘기호였다. 자리가 없어서 객차와 객차 사이에 웅크리고 앉아 서울까지 타고 온 호남선 비둘기호였다. 그 비둘기호의 냄새 나는 곳에 앉아서 나는 환타와 카스테라를 먹었다. 눈물이 났던가. 그것은 기억에 없다. 비둘기호는 새벽에 서울에 도착했다. 어른의 문턱에 갓 들어서서 목포역을 배회하며 제주도 아니면 서울,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서성거리던 19세 아이를 나는 사실 찾고 있었던 것이다.

신동아 2015년 4월호

4/4
정윤수│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목록 닫기

목포는 설움이다 이난영이다

댓글 창 닫기

2023/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