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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북한이 버린 천재 음악가 정추 1923~2013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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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검은머리 차이코프스키’…향년 90세 永眠
  • ● 1957년 모스크바서 反김일성 시위 주도
  • ● ‘불귀의 망명자’로 마감한 70년 음악 인생
  • ● 윤이상, 김원균, 정추의 엇갈린 인생 항로
  • ● “죽거든 고향에 묻어달라” 유언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분단의 질곡에 날것으로 부딪치면서 한 편의 영화 같은 삶을 살아온 남자가 5월 13일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별세했다. 음악가 정추(1923~2013). 한반도가 낳았으나 한국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비운의 천재다.

광주→평양→모스크바→알마티

고인은 1923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니혼(日本)대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했다. 이후 일제에 강제징병 당했다. 오사카에서 8 ·15광복을 맞았다. 1946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영화동맹 초대 서기장이던 친형 정준채를 따라 월북했다.

1952년 세계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모스크바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6 ·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때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김일성 우상화 반대 시위를 벌였다. 그 길로 50년 넘게 망향(望鄕)의 세월을 보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인물은 헤아릴 수 없이 많겠으나 정추처럼 극적인 일생을 산 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엔 ‘황국신민’, 광복 후엔 북한 공민, 북한에서 버림받은 뒤엔 무국적자(카자흐스탄에서 17년간 그는 국적이 없었다), 그 뒤엔 소련 공민,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카자흐스탄 국민으로 살았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사회주의자가 됐다가 혁명국가 건설에 일조하겠다면서 38선을 넘었고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한 후 고난의 삶을 끌어안았다. 말년엔 북한 독재집단을 타도하겠다고 나섰다.



고인은 1992년 일본에 망명한 남로당 마지막 총책 박갑동(1957년 탈북)을 비롯한 망명객들과 힘을 합쳐 조선민주통일구국전선(구국전선)을 결성해 사망할 때까지 의장을 지냈다. 차이코프스키 음대 졸업 작품 ‘조국’, 스탈린 독재 시절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한 고려인의 한을 담은 교향조곡(몇 개의 악곡을 모아서 만든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17시 40분 스탈린’, 통일조국의 애국가가 되기를 바라면서 작곡한 ‘내 조국’이 대표작이다.

고인의 생전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해본다.

越北했지만 평생 反北 외쳐

“나를 윤이상 같은 변절자와 비교하지 말라”

정추는 5월 14일 카자흐스탄 알마티 근교 부른다이 묘지에 묻혔다.

그는 광주의 부호이던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0년대 외할아버지댁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어요. 예술인 집안이었죠. 외삼촌도 베를린 음대를 졸업했어요.”

그는 일곱 살 때 노래를 작곡하는 등 어릴 적부터 천재성을 드러냈다. 집안 분위기가 예술적 감수성을 간질였다고 한다. 형제들도 예술가로 활약했다. 형 정준채는 1950년대까지 북한에서 영화감독으로 활약했다. 현재 서울에 거주하는 동생은 동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을 작곡한 음악가다.

“1938년 광주서중 다닐 적에 조선어 사용 문제로 일본인 교관과 다퉈 퇴학당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양정고보에 편입해 졸업장을 받았어요. 1942년 니혼대 음악학과에 입학해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은사께서 전문성을 키운 후 그것에 기초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조언하시더군요. 1944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습니다. 친구들과 탈영을 도모하고 있을 때 일본이 패망했어요.”

니혼대 재학 시절 그는 형 정준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자가 돼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좌익 영화계의 중심인물이던 정준채는 1946년 사회주의 혁명 분위기가 고조되던 북한으로 건너갔다. 그는 북한에 도착한 직후 동생을 평양으로 불러들였다.

“어머니가 나를 끔찍이 사랑했어요. 며칠 동안 평양에 다녀오겠다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38선을 넘었죠. 그러곤 어머니 얼굴을 지금껏 뵙지 못했습니다.”

월북 후 평양음대에서 학생을 가르쳤다. 1952년 사회주의 종주국의 수도이면서 사회주의권 문화·예술 중심지이던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김일성훈장’을 받은 북한의 ‘음악 영웅’ 김원균(1917~2002)이 모스크바 시절 그의 유학 친구다. 차이코프스키 음대에서 정추와 함께 공부한 김원균은 북한의 ‘애국가’와 ‘김일성 장군의 노래’ 등을 작곡했다. 북한 최고의 음대(김원균평양음악대학)에 자신의 이름이 붙는 영예를 누렸다.

정추는 1957년 10월 17일 모스크바대 광장에 서 있었다. ‘청년 정추’의 외침은 쩌렁쩌렁했다.

“북한에 김일성 숭배가 있다는 게 사실 아닌가. 소련에서도 스탈린을 격하한다. 독재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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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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