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산수화의 산실 황산(黃山)

  • 글: 권삼윤 문명비평가 tumida@hanmail.net

    입력2003-05-27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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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산은 산이면서 바다이고 또 계곡이다. 산과 물이 분리되지 않은 이런 자연 속에선 딱 부러지는 논리나 이성이 발아하지 않는다. 산수화의 고향 황산은 그래서 상보(相補)와 순환, 태극의 원리를 존중하는 동양 문화의 터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황산 서광정 앞의 소나무. 가지가 ‘V’자를 그리는데, 그 뒤로 ‘십팔나한조남해’가 미려한 모습을 드러낸다.

    어느 등산가는 “거기 산이 있으니까 오른다”고 했다지만, 동양인들에게 등산이란 개념은 생소하다. 많은 짐꾼을 이끌고 사람은 물론 생명체가 살지 않는 해발 수천 미터의 산에 오른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등산(登山)’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산을 자기의 내면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산에 올랐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현대적, 서양적 개념의 등산과는 확연히 달랐다.

    동양에서 산을 즐겨 찾은 사람들은 화가들이었다. ‘금강산도’를 그린 겸재 정선도 그랬고, ‘황산팔승도(黃山八勝圖)’라는 대작을 남긴 중국의 석도(石濤·1642∼1707)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명 황실의 후예로 태어난 석도는 만주족이 베이징을 차지한 데 이어 중국 대륙 전역을 정복하자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 황산에 들러 ‘황산팔승도’를 그렸고, ‘일획론(一劃論)’이라는 유명한 동양화론을 탄생시켰다.

    황산은 중국 남동부의 안후이(安徽)성 남쪽에 자리한 명산으로,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황산을 오악보다 더 숭상했다. 오악이란 동악인 태산(泰山·산둥성)과 서악 화산(華山·산시〔陝西〕성), 북악 항산(恒山·산시〔山西〕성), 중악 숭산(嵩山·허난성), 남악 형산(衡山·후난성)을 일컫는다.

    최고봉이래야 기껏 1800여 미터에 지나지 않으나, 기암과 기송(奇松), 운해, 온천 등을 거느리고 있어 ‘인간선경(人間仙境)’이라 불려온 황산은 1990년 유네스코로부터 세계자연유산 겸 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黃’의 나라 중국

    황(黃·yellow)은 중국을 상징하는 색이다. 중국문명이 일어난 곳이 황허 유역의 황토고원이고,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을 일컫는 용어가 황제(黃帝·Yellow Emperor)였으며, 황제(皇帝)가 사는 황궁의 지붕과 담벼락을 온통 누런색으로 칠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보면 황산이 그들에게 과연 어떤 존재였던가에 대해 감이 잡힌다.

    양귀비와의 러브스토리로 인구에 회자되는 당 현종은 황제(黃帝)가 신선이 되기 위해 수양한 곳이 바로 이곳이라며 황산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후일 황산을 찾은 석도는 “산천에서 태를 벗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것은 반평생 동안 중국의 명산대천을 유람하고 필묵을 빌려 천지만물을 그리다 터득한, 물아(物我)가 혼연일체를 이루고 주관과 객관이 통일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하는 말이다.

    세계문화유산을 찾아다니는 필자는 항저우(杭州)의 서부터미널에서 황산을 향해 길을 떠났다. 서부 연안행 버스가 오가는 시 중심가의 동부터미널은 꽤 복잡하고 시설도 무던한 편이나, 내륙 쪽으로 달리는 버스의 출발점인 서부터미널은 한적한 교외에 자리잡고 있는 데다 시설도 변변찮고 찾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았다. 내륙의 미(未)개발성을 보는 것 같았다.

    황산행 버스는 열두어 명이 탈 수 있는 마이크로버스였고, 운전기사는 그곳까지 7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항저우를 낮 1시 반에 떠났으니 오후 9시가 돼서야 도착하리라는 얘기였다.

    항저우 시내를 벗어나자 계단식 차밭과 무논이 펼쳐졌고, 이따금씩 허리를 구부려 모를 심는 사람들도 보였다. 야트막한 산들에 둘러싸인 농촌 마을에는 ‘생태주거’라고 쓴 팻말이 걸려 있기도 했다. 환경친화적 주택을 그렇게 일컬었다. 항저우가 있는 저장(浙江)성의 경계를 넘어 안후이성으로 들어서자 길은 좁아지고 도로 사정도 나빠졌다. 버스가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안후이성은 펄 벅의 소설 ‘대지’의 무대였던 곳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버스는 작은 도시에 들어서자 멈춰 섰다. 볼일도 보고 요기도 하라는 것이었다. 승객들은 ‘리치’라는 붉은색의 작은 과일을 사서는 하나씩 꺼내 입에 넣고 씨를 발라 맛있게 먹었다. 나도 따라 해봤는데, 혀끝에 닿는 신맛과 단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둠은 기별도 없이 몰려와 갑자기 사위를 덮쳐버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과, 가끔 보이다 사라지곤 하는 등불 정도였지만, 들판이나 산이 나타나면 그나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따금씩 달빛을 받은 개울이 은빛을 발해 운치를 더했다. 그러다 버스가 닿은 곳은 탕커우(湯口)의 어느 여관 앞이었다.

    오랜 시간 차 속에서 시달린 몸이라 어서 쉬고 싶은데 주위가 너무 소란스러웠다. 호객꾼들이 승객들을 자기네 호텔로 끌어들이려고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다. 중국인 승객들은 하나 둘 숙소를 정해 떠났다. 나는 좀더 조용한 곳을 찾아볼 생각으로 우선 저녁부터 시켰다. 맘에 안 들긴 식사도 마찬가지라 나는 미련 없이 그 집을 나왔다.

    한데 그 집 여자가 나를 뒤따랐다. 괜찮으니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탕커우빈관(賓館·호텔)까지 날 따라와서는 프런트에다 “이 손님을 모시고 왔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탕커우빈관은 1박에 100위안(약 1만6000원)을 받는 그녀의 집보다 조금 비싼 140위안이었으나 시설도 나아 보였고, 무엇보다 조용한 게 마음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일어났다. 5월 말인데도 새벽녘엔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아침을 서둘러 해결하고는 탕커우 쪽으로 향했다.

    황산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가지 코스가 있다. 하나는 동쪽, 즉 동해(東海)의 운곡사(雲谷寺)를 거쳐 북해빈관으로 오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해의 자광각(慈光閣)을 경유해 연화봉(蓮花峰)으로 오르는 것이다. 나는 운곡사 쪽을 택했다.

    탕커우란 ‘황산 사절(四絶)’의 하나인 온천이 있는 지구다. 그러나 온천에 눈을 팔 형편이 아닌지라 나는 산을 향해 걸었다. 일대에는 관광객과 등산객을 대상으로 장이 섰고, 운곡사로 가는 택시와 마이크로버스는 한 명의 승객이라도 더 태우려고 가다 서다를 거듭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 합승 택시에 몸을 실었다.

    몇 개의 굽이를 돌아 당도한 운곡사 앞은 ‘황산풍경구’의 입구라 매표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입장권 한 장이 130위안이나 했다. 중국의 유명하다는 명소는 거의 다 다녀봤지만 이처럼 비싼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기에다 사고에 대비한 보험료가 1위안 추가됐고, 편히 가고 싶어 로프웨이(케이블카)를 타려면 편도에 60위안을 더 내야 했다. 황산이 좋다지만 적지 않은 경비를 부담해야 될 처지였다. 그런데도 황산을 찾는 사람은 줄을 잇고 있었다. 중국은 바야흐로 ‘뤼(旅)’의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동양의 산은 걸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우리의 산은 멀리서 그 형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고, 그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걸으며 조금씩 달라지는 산세의 변화를 느껴보는 것은 더욱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산과 나는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게 우리 동양인들의 산 감상법이자 등산론이다. 동양인이 별난 종자여서가 아니라 동양의 산이 그러한 모습을 가졌기에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네 나라에 걸쳐 있는 알프스나 미국과 캐나다를 종단하는 록키산맥에도 가봤지만, 거기서는 천천히 걸으며 감상할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했다. 케이블카에 실려 급히 올라갔다가 지나는 길에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는 급히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그곳엔 걸을 수 있는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았다. 그런 만큼 그들에게는 산수화라는 게 없다. 주위 경관을 그린 풍경화 정도가 고작인데, 그 양도 인물화에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빈약하다.

    이에 비하면 중국의 산에는 잘 닦여진 등산로가 있다. 대개 돌계단을 깔아놓아 웬만한 비나 눈사태에도 끄떡없다. 특히 황산의 등산로는 일품이었다. 대나무 숲으로 뒤덮인 길을 얼마간 오르자 먼 산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길은 가팔랐다. 얼마간 걷다 돌계단에 걸터앉아 쉬곤 했는데, 그때마다 ‘탸오푸(挑夫)’라 부르는 짐꾼들이 가방을 가마(그들은 이를 ‘화간〔滑竿〕’이라 불렀다) 위에 올려놓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별로 무겁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는데도 끈질기게 채근했다. 그래서 될수록 그들을 피해 걸었다.

    나를 정말로 애타게 한 것은 그렇듯 귀찮게 구는 탸오푸들이 아니었다. 꽤 높이 올랐는데도 선경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나를 꾸짖기라도 하는 양 1979년 75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한 채 덩샤오핑(鄧小平)이 황산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리는 커다란 그림판이 나타났다. 그림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그는 아주 건강해 보였고, 그래서 새삼 산에 오르는 것만큼 좋은 건강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무색케 하는 황산과 오악

    운곡 로프웨이는 시신봉(始信峰) 아래에서 끝났다. 이곳까지 3시간이 걸렸는데, 선경은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황산도 식후경’이라는 듯, 사람들은 이곳에 오르자 대형 컵라면인 ‘캉스푸(康師傅)’를 시켰다. 그런데 하나에 25위안이라 값이 만만찮다. 아래에선 6위안인데, 산에 높이 오른 만큼 값도 덩달아 오른 것이다. 상하이에서 나는 ‘와하하 생수’ 한 병이 15위안, 빵 하나엔 10위안이었다. 아랫마을에 비해 서너 배나 비쌌다. 사람이 가파른 계단으로 지고 올라온 것이라 그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로프웨이 종점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북해빈관이란 별 네 개짜리 호텔이 있었다. 제일 싼 방이 하룻밤에 850위안이고 스탠더드는 1280위안이었다. 6인용 도미토리는 1인당 100위안을 받았다. 마침 점심 때라 레스토랑에선 뷔페식을 차려놓고 있었다. 주위에 두 개의 특급호텔이 더 있는 북해빈관 일대는 절경 바로 그것이었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기암은 ‘황산 사절(四絶)’의 하나다.

    그 앞 서광정(曙光亭)에서 바라본 경관은 인간인 나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 도무지 그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언젠가 다시 시간을 내 북해빈관에 머물며 서광정에서 동녘에 솟아오르는 해를 보겠다고 다짐하고는 그 앞으로 나아갔다.

    그곳에선 가지가 ‘V’자로 벌어진 소나무가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일러주는 듯했다. 그러다가 그것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맞추자 ‘십팔나한조남해(十八羅漢朝南海)’라 부르는 운해 속에 떠 있는 기암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날은 유난히 쾌청해 황산이 자랑하는 운해를 제대로 즐길 순 없었지만, 산골짜기 속으로 흰 구름이 피어올랐고 그 모습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어 마치 파도치는 바다 같았다. 봉우리들은 바다 속에 떠 있는 섬처럼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수시로 반복했다.

    황산에는 이런 경관, 이런 미의 세계가 숨겨져 있는데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명나라의 위대한 여행가이자 지리학자인 서하객(徐霞客)은 황산을 둘러보고 이렇게 찬사를 늘어놓았다.

    “오악을 둘러보니 황산이 무색하고, 황산을 둘러보니 오악이 무색하다.”

    황산에 올라보니 산은 산이 아니라 바다라는 생각이 든다. 산천경물(山川景物)의 특이성뿐 아니라 공통점에 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진 석도는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으니 내가 그리 생각한다고 해서 이상할 게 없다.

    “바다에 거대한 파도의 흐름이 있다면 산에도 숨었다 올라오곤 하는 흐름이 있다. 바다에 삼켰다 내뿜었다 함이 있다면 산에도 껴안는 느낌과 내치는 느낌이 있다. 바다가 능히 영감을 우리에게 던져준다면 산 또한 그 운세를 산맥으로 잘 표현해낸다. 산에는 층층이 펼쳐지는 완만한 봉우리들이 있는가 하면 깊은 절벽이 있으며, 날카롭게 찌르는 봉우리가 있는가 하면 돌출하여 우뚝 솟은 봉우리가 있다. 산은 서리는 서기와 안개, 이슬, 연기와 구름을 반드시 아우르게 마련인데, 이것은 마치 바다가 거대한 물결의 흐름을 나타내고 기를 마셨다가 내뿜고 하는 것과 같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산의 속성이지 바다가 그런 영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역시 그것은 산이 주체가 되어 바다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출처: 김용옥의 ‘석도화론’)

    仙境으로 이끄는 소나무

    황산이 자랑하는 것 중에는 소나무가 있다. ‘V’자 가지를 가진 소나무에서부터 낙락장송에 이르기까지 천태만상의 소나무가 황산을 선경의 경지로 이끈다. 물로 깨끗이 씻은 듯한 바위 위에서 어떻게 소나무가 자라며, 그 자태는 왜 그다지도 다양하여 상상을 용납하지 않는 걸까. 그래서 어떤 이는 황산의 아름다움은 소나무에서 시작된다고 말한다.

    황산의 상징인 영객송(迎客松), 가지가 한곳으로 모여 단합된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 단합송,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한 비룡송, 용이 누워 있는 듯한 와룡송, 두 개의 갈라진 바위를 덮고 있는 봉래삼도(蓬萊三島), 공작새를 닮은 공작송, 기린의 형상을 한 기린송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나무가 이 산에 흩어져 있다.

    소나무는 동양인들이 좋아하고 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대상이 아니던가. 왜 그러한지에 대해 미술사학자인 안희준 교수는,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동양화가 이영복(李英馥)의 ‘산과 소나무’란 전시회의 도록 서문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소나무는 바늘 모양의 푸른 잎, 두터운 껍질을 지닌 몸체, 땅 속 깊이 파고드는 튼튼한 뿌리를 지녔다. 잎은 사시사철 푸르며 향기롭고 몸체는 검거나 붉다. 봄이 되면 새순과 잎이 돋아나고 꽃을 피우며 가루를 풍긴다. 가을이 되면 봄에 맺은 솔방울을 터뜨린다. 생장조건이 좋은 곳에서는 하늘을 향해 열길 넓게 놀고 힘차게 뻗어올라 미끈한 아름다움과 당당한 모습을 이루며, 그렇지 못한 곳에서는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구부러지거나 뒤틀려 각양각색의 특이한 형상을 드러낸다.

    그러나 소나무는 어느 곳에 있거나 어떠한 모습을 지니거나 항상 독특한 품위와 빼어난 아름다움을 결코 잃지 않는다. 곧게 뻗어 올라갔건 구부러져 있건 늘 격조와 미려함을 잃는 법이 없다. 아마도 이 때문에 소나무는 아무리 흔해도 천하지 않고 아무리 자주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가 보다.”

    또한 소나무는 인간과 닮은 점이 많다. 바위에 붙은 탓에 먹을 게 별로 없어 적게 먹고 사는 놈은 수명이 길고, 기름진 땅에서 많이 먹고 사는 놈은 오래 살지 못하는 게 우리 인간의 수명과 같아서다.

    하지만 소나무가 미적 대상이 되어 예술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였다. 다시 말해 그 역사는 100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선구자는 산수화가이자 화론의 대가였던 형호(荊浩)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1979년 덩샤오핑은 75세의 고령에도 나무 지팡이 하나에 의지해 황산에 올랐다.

    형호는 석도가 황산의 절경을 수없이 그리다 자신의 화론을 개척했듯이 소나무를 수만 장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참뜻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태행산(太行山) 홍곡이란 곳에서 도가적인 삶을 살던 어느날 신정산(神鉦山)에 올랐다가 이끼가 이슬을 머금고 괴석에 김이 서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곳으로 걸어들어가니 모두가 고송들이었다. 그 중 유독 큰 아름드리 나무는 껍질이 늙어 푸른 이끼로 덮이고 우툴두툴한 비늘이 하늘을 향해 있어 그 모습이 규용(叫龍)의 기세로 구름을 붙잡으려는 듯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는 수만 장의 소나무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는 한 노인을 만나 육요(六要)의 가르침을 받았다. 육요란 기(氣)·운(韻)·사(思)·경(景)·필(筆)·묵(墨)이라고 말한 노인은 “물질의 아름다움에서 그 아름다움을 취하는 것이고, 물질의 실(實)에서 그 실을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이 곧 실이 된다고 고집해선 안 된다. 만약 술(術)을 모르면 그럴듯한 형태는 가하나 진(眞)을 도모할 수 없다”고 했다.

    형호가 “그러면 무엇이 형태이고 무엇이 진이냐”고 묻자 노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그의 미학서인 ‘필법기(筆法記)’에 기록해놓았다.

    “형태라는 것은 그 형(形)을 얻어 그 기(氣)를 남기는 것이요, 진이란 기질이 모두 왕성한 것을 일컫는다. 모든 기는 아름다움을 전하고 형상을 남기는 것이며 상(象)은 죽는 것이다.”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청량대로 가는 길에서 ‘천연도화’란 글자가 새겨진 돌판을 만났다.

    눈 덮인 알프스의 준봉이 보여주는 공포의 경관은 황산 어디에도 없다. 황산의 경관은 결코 예사롭지 않으나 사람을 주눅들게 하지는 않는다. 보면 볼수록 그 속에 안기고 싶다. ‘대자연(Mother Nature)’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이런 느낌을 이미 경험한 바 있는 이들은 속세로부터 절연돼 마음이 맑고 깨끗해진다고 하는 청량대(淸凉臺)로 오르는 길목 바위벽에 ‘천연도화(天然圖畵)’라는 글자를 새겼다.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이란 뜻일 것이나, 내게는 ‘자연이야말로 아름다운 그림 그 자체’란 의미로 다가왔다.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 유일신 종교에서 자연은 신의 창조물일 뿐이다. 그것도 인간을 위해 만들어놓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일러 ‘환경(environment)’이라 부른다. 둘러싸고 있는(environ) 그 무엇을 뜻하는 이 말 속엔 인간이 그 중심이라는 은유가 담겨 있다. 성서 창세기(1:28∼29)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 나무를 주노라. 너희는 이것으로 양식을 삼아라.”

    이는 인간을 만물의 중심으로 보고 그 외의 자연과 다른 생명체를 무대장치나 소도구쯤으로 보는 인간 중심주의를 키워왔다.

    山水는 창조의 원천

    한편 동양인들은 자연을 ‘스스로 그러한 것(自然)’으로 이해했다. 자연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자연에서 삶의 이치까지 발견하려 했다. 공자(孔子)가 배움〔學〕이란 것이 책을 읽거나 요즘 우리가 말하는 공부 같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속에서 그때그때 인간이 취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노력이자 실천하는 작업’이라고 주창했듯이 자연을 대하고 감상하는 태도 또한 삶의 자세와 깊이 연관돼 있다.

    황산을 즐겨 그린 석도는 산수화의 요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점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 이는 그의 사후에 묶어낸 화론서 ‘고과화상어록(苦瓜和尙語錄)’에 실려 있다.

    “대저 그림이란 것은 인간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의 큰 법이요, 산천의 모습과 기운의 정의로운 피어남이요,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지를 창생하는 기의 조화요, 음양 기상의 큰 흐름이다. 붓과 먹을 빌어 천지만물을 화면으로 옮기면서 그 천지만물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생성되고 노닐게 만드는 것이다.”(출처:김용옥의 ‘석도화론’)

    따라서 동양 회화에선 감정 이입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 대상을 내면화함으로써 서구 회화의 ‘객체로서의 사물’과는 다른 관점을 확보한다. 나와 대상인 자연이 혼연일체가 된, 살아 있는 그림이 동양 회화의 요체인데 이는 산수화를 그리고자 하는 자가 모름지기 가져야 하는 자세이기도 하다.

    동양인에게 산수는 피조물이기보다는 이렇듯 창조의 원천으로 작용했다. 석도의 ‘일획론’은 여기에서 탄생했다. 흙탕물이 한 줄기 맑은 물에 말끔히 씻기듯, 거대한 건물이 기둥 하나를 세움으로 시작되듯 그림도 백지 위에 긋는 선 하나로 출발한다. 그러므로 거기엔 그림 전체를 아우르는 디자인, 즉 구도가 담겨야 한다. 그래서 ‘뜻이 용필(用筆)을 앞서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석도는 “일획이야말로 분화하지 않은 혼돈으로부터 형상을 창조해내는 바로 그것이며, 그것을 깨달을 때 화가는 비로소 자연의 참된 모습을 표현하게 된다”고 했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연꽃이 봉오리를 활짝 벌린 듯한 연화봉. 황산 제일의 절경이다.

    청량대를 지나 석후관해(石?觀海)로 향했다. 그곳은 벼랑 끝이라 깊은 계곡 너머로 사자봉이 웅혼한 자태를 드러냈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황산에는 72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나 어디에 오르건 그 모두를 일견할 수는 없다.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10개 정도다. 인간이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시야란 이 정도라 산에 오르는 자는 자신이 우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산에 오르지 않는 자는 이런 사실을 모르기에 세상을 다 아는 체 우쭐댄다.

    석후관해는 막다른 길이라 다시 북해빈관 쪽으로 나왔다.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울려 가슴 속으로 파고들기에 찾아갔는데, 그곳엔 종정(鐘亭)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일성(一聲)에 2위안’이란 팻말도 붙어 있었다. 이런 곳에다 종을 걸어놓고 한 번 치는 데 2위안의 돈을 받고 있으니 중국인의 상술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북해빈관에서 북쪽으로 난 길을 따라 광명정(光明頂)으로 향했다. 능선 길로 접어드니 황산의 북해(北海)가 드러났다. 황산이 너무 넓어서인지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탕커우 쪽이 전해(前海)이고 북해빈관 뒤쪽이 북해다. 그 동쪽이 동해, 그 반대쪽이 서해이고, 그 중앙은 천해(天海)라 부른다.

    길 아래로 서해수고(西海水庫)라는 저수지가 보였고, 그 너머로 서해빈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석후관해에서도 본 사자봉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곳에서 대만의 단체 관광객들을 만났다. 카메라 셔터를 눌러주곤 하면서 그들과 말을 트게 됐는데, 그들은 “대만은 안후이성과 가까운 푸젠(福建)성과 바다 건너로 마주보고 있으나 멀리 마카오까지 갔다가 항저우를 경유해 황산에 왔다”며 중국 본토와 연결되는 직항로가 개통되지 않은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내가 “우리는 북한 지역을 여행할 수 없다”면서 “당신들처럼 그렇게 해서라도 중국 대륙을 여행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하자, 그들도 “그건 그렇다”고 했다. 본토를 여행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냐는 질문에는 “서로 말이 달라 통역 겸 안내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황산은 아름다운 곳이라 찾길 잘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광명정은 해발 1860m로 황산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다. 그 꼭대기에는 TV 송신탑이, 그 아래엔 기상대가 서 있다. 광명정 아래의 넓은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처럼 운곡사와 북해빈관을 거쳐 온 사람도 있고, 자광각과 연화봉 코스를 이용해 올라온 사람도 보였다. 더러는 전날 이곳을 거쳐 태평 로프웨이를 타고 가장 북쪽에 있는 부용봉(芙蓉峰)까지 올라갔다가 하산하려고 이곳에 다시 들른 이들도 있었다. 그곳은 한마디로 ‘황산의 삼거리’였다.

    광장 서쪽에는 너럭바위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곳에 올라 황산의 서해를 조망하느라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나도 그들을 뒤따라 올랐다가 곧 부용봉 쪽으로 향했다. 좁은 길은 넘치는 사람들로 교통경찰이 필요할 지경이었다.

    그때 비래석(飛來石)이란 이름의 곧추 선 돌기둥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날려왔다고 하여 비래석이라 했다면 구름을 맞기 위해 배운정(排雲亭)을 세운들 탓할 수 있겠는가. 황산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햇빛에 비치는 붉은 빛의 운기를 나타낸다는 단하봉(丹霞峰)까지 거느렸다. 단하봉의 서남쪽으로는 이름도 야릇한 몽환경구(夢幻景區)와 무송타호(武松打虎), 그리고 석인봉, 석수봉, 석상봉 등이 나름의 자태를 자랑한다.

    단하봉 바로 아래의 단하정은 부용봉으로 오르는 태평 로프웨이의 출발점이라 일단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으나, 시간에 쫓기는 나는 배운정에서 비래석과 부용봉을 바라보다 광명정 광장으로 되돌아 나왔다.

    연화봉의 절경

    그곳에서 천해빈관과 해심정(海心亭)을 거쳐 능선 하나를 넘어서자 희한한 경관이 전개됐다. 부드러운 선을 그리는 커다란 바위산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것은 황산 최고봉(1864m)이자 최고의 절경인 연화봉이었다. 무언가에 크게 놀라면 하던 말도 잊고 몸이 얼어붙듯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한동안 서 있었다. 충격을 넘은 전율, 바로 그것이었다.

    갈라진 바위로 이뤄진 산봉우리가 이름 그대로 막 벌어지는 연꽃 봉오리를 닮았는데, 미끈한 돌의 형상은 준수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연화봉은 보는 각도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지는지 가까이 다가가자 점점 다른 형상으로 바뀌어갔다. 사람들이 미끈한 바위 위로 난 돌계단을 따라 연화봉 정상으로 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이 마치 행진하는 개미들 같다. 석도는 ‘황산팔승도’의 제4도, 그러니까 그 중앙에다 그 모습을 그려 연화봉의 아름다움을 은근히 과시했다.

    연화봉까지는 그리 멀지 않으나 그 사이에 깊은 계곡이 있어 쉽게 다가갈 수 없다. 길 또한 무척 험하다. 바위틈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이 있는가 하면 큰 바위 아래 마치 동굴처럼 생긴 것도 있었으나, 가장 힘든 것은 벼랑 끝에 사다리처럼 만들어놓은 계단이었다. 잘못하다간 떨어질 수도 있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됐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북해빈관과 광명정. 광명정 꼭대기엔 TV 송신탑이 서 있다.

    그런데도 탸오푸들은 짐과 사람을 가마에 싣고 그 길을 잘도 다녔다. 중국의 산에는 등짐을 지며 먹고사는 탸오푸들이 수도 없이 많은데, 얼굴과 팔뚝은 햇볕에 그을렸으나 혈색만큼은 좋다. 대개는 자기 체중보다 더 무거운 짐을 옮기곤 한다.

    가마꾼들은 두 사람, 또는 네 사람이 짝을 맞춰 앞뒤에서 가마를 나르는데, 가마 손잡이를 어깨에 올려놓고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한다. 그런 탸오푸들을 보면서 중국은 기계보다는 근력(筋力)에 의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통산업인 벼농사와 양잠, 차(茶)농사는 또 얼마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가.

    수많은 노동자들이 등짐을 날라 쌓은 만리장성은 옛 왕조시대의 것이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지금도 호텔에선 각층마다 여자 종업원을 둬 출입자를 체크하고 객실 열쇠를 관리하게 하며, 버스나 트롤리에선 차장이 승객들 사이를 오가며 요금을 받고 표를 내준다. 이를 아직 산업화·기계화가 이뤄지지 않아 일어나는 후진적인 모습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중국은 종이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 이른바 세계 4대 발명품을 만들어낸 나라다. 이들 발명품이 훗날 서양으로 들어가 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것을 생각하면 중국이 기술적으로 뒤떨어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남송이 화약을 군사적 목적에 사용함으로써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원나라로부터 오랫동안 독립을 유지했던 사실이나, 인쇄술이 보급되면서 귀족사회가 붕괴하고 사대부 계층이 등장해 중국 사회가 신분제에서 능력제로 바뀌는 등 질적으로 크게 변화했던 것들을 떠올리면 더욱 그러하다.

    ‘내 안의 힘’ 중시

    그런 중국인데도 전통과학을 근대과학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중국역사학자 조지프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책에서 “왜 중국의 전통과학은 근대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했는가”라며 중국에서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궁금해했다.

    중국인들은 예로부터 ‘내 안의 힘’을 중시했다. 따라서 ‘내 밖의 힘’을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을 상대적으로 덜 느꼈다. 또한 그것은 기계의 도움을 받는 일을 줄일 수가 있었다. 기계는 외부에서 에너지가 공급돼야만 제 기능을 수행하는 타동체다. 기계가 동원되면 될수록 그만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와는 반대로 내 안의 힘이나 인간의 근력을 이용하면 외부 에너지의 수요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생명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만 외부로부터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억지로 살을 빼는 다이어트 같은 노력도 필요 없다. 중국인들이 외부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전거를 주된 이동 및 운송수단으로 삼고 있는 배경에는 이러한 문화적 전통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사정이 그러하고, 밥 먹고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 탸오푸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이렇듯 험한 길을 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날랜 걸음으로 걸어다니고 더러는 달리기까지 하니 놀랄 지경이었다.

    험하고 어두운 길을 지나느라 두 시간이나 걸려 연화봉 바로 아래를 지나게 됐는데, 그때 빈 가마를 옆에 놓고 휴식을 취하던 탸오푸에게 걸리고 말았다. 그가 “싸게 해줄 테니 한번 타보라”고 했던 것이다. 얼마냐고 묻자 그는 내가 방금 지나온 길을 가리키며 “100위안”이라고 했다.

    그는 나를 꼬드겨 가마에 태우고 싶었겠지만, 나는 그를 통해 황산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그는 내 의도를 간파했는지 더 이상 가마를 타보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는 다행히 몇 마디의 영어도 할 줄 알아 우리는 필담 신세를 지지 않고도 그럭저럭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탸오푸 일이 할 만하냐고 묻자 그는 “그렇다”고 하면서 남쪽에 수직으로 곧추 선 바위의 옆모습을 가리키면서 무엇을 닮았는지 맞춰보라고 했다. 내겐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자 그는 “덩샤오핑의 얼굴을 닮지 않았냐”면서 내 생각을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럴듯했다. 이번에는 내가 “덩샤오핑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중국인들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니 좋아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냐”고 답했다.

    중국인들은 등 따습고 배부르면 만사가 OK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만 보면 그들은 지극히 현실주의자이고 즉물주의자인 것 같지만, 그들의 역사를 읽으면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시각에서 전략적 사고를 하며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중국이란 땅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실험실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天然圖畵’ 72峰의 절대 미학

    황산에서 짐과 사람을 가마로 나르는 탸오푸(挑夫)들

    탸오푸와 헤어진 나는 연화봉 입구에 닿았다.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개미떼처럼 오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텅 빈 바위만이 세월의 무게를 들려줄 뿐이었다. 내가 계곡을 지나오는 사이에 그들은 볼일을 끝내고 하산한 것이다. 아무도 없는 산을 난들 어찌 오르겠는가. 아래서 꼭대기로 오르는 돌계단만 쳐다보다 옥병봉(玉屛峰) 쪽으로 향했다. 그 길도 험했다. 다니는 사람도 뜸해 혼자서 그 험한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6시까지 옥병봉 아래의 옥병정에 당도하면 로프웨이를 타고 하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계는 4시를 가리키고 있어 아직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옥병봉 기슭을 지나다가 옥병루란 이름의 산장을 만났다. 지나던 몇 사람이 “오늘 저녁은 여기서 쉬기로 하지”라고 하면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길에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다.

    그때 광명정에서 몇 마디 주고받았던 오(吳)씨 성의 청년을 다시 만났다. 그는 내게 자기 여관에 묵으라고 여러 차례 채근한 바 있기에 반갑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그는 다짜고짜 “로프웨이는 4시에 끝났으니 이제 우리 둘밖에 남지 않았다”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려줬다.

    시계는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해는 두어 시간 안에 떨어지고 말 것 같은데, 바삐 서둔다 해도 하산하는 데 3시간 반이 걸린다고 하니 난감했다. 거기다 산길은 험하고 초행이 아닌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도움을 청할 데도 없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와 운명적으로 묶이고 말았다.

    옥병루 앞엔 가지를 넓게 벌린 영객송과 천인(天人)들이 모여 산다는 천도봉(天都峰·1810m) 등이 있었으나 마음이 급한 탓에 제대로 감상하지 못했다. 갈라진 바위 틈으로 가지를 내밀고 있는 ‘봉래삼도’란 소나무만 쳐다봤을 뿐이다. 오씨 청년이 그 아래를 지나는 순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걸 한번 보라”며 일러줬기 때문이다.

    황산은 산이면서 바다

    옥병봉 코스는 정말 험했다. 운곡사 길은 보폭에 맞게 계단을 설치했기에 걸음을 떼어놓기가 그리 힘들지 않았는데, 이곳엔 천연의 바위가 돌계단 노릇을 해내고 있는 곳이 많아 발을 옮기기가 쉽지 않았다. 하산할 때라 그나마 다행이지, 올라갈 때라면 엄청나게 힘들었을 것이다. 2시간 정도를 걷는 동안 지나가는 이를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날마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았다. 수풀 속으로 난 길이라 더욱 그랬다.

    드디어 황산 기슭에 도착했다. 청년은 어느 집으로 들어갔다가 누군가와 함께 나왔다. 낯선 이는 곧 마이크로버스의 시동을 걸었다. 흥정이 끝나자 그는 곧장 시내로 달렸다. 차가 멈춘 곳은 청년의 식당 앞이었다. 잠은 못 자더라도 밥은 그의 집에서 먹어야 될 것 같아 함께 내렸다. 시간이 너무 늦어선지 식당엔 손님은 없고 그의 가족들만 둥근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따로 앉아 식사를 했다.



    청년은 “황산은 산과 봉우리도 좋지만 계곡도 좋다”며 “다음에 다시 오면 계곡 유람도 해보라”고 권했다. 그 말에 따라 황산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니 산의 동쪽, 즉 동해에는 봉황원(鳳凰源), 비취곡(翡翠谷), 구룡폭, 용녀담(龍女潭) 등이 눈에 띄었고 전해(前海)의 청담봉 아래에는 백장천(百丈川)과 관폭정(觀瀑亭) 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황산은 알고 보니 산이면서 바다이고 또 계곡이었다. 산과 물이 분리되지 않은 이런 자연 속에 사는 인간이라면 딱 부러지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다. 논리나 이성은 이런 풍토 속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 상보(相補)와 순환, 태극의 원리를 존중하는 동양 문화는 동양의 산수가 빚어낸 작품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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