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한국의 대중음악은 조용필이 천하를 지배하고 있던 가요계가 전부가 아니었다. 음악시장을 장악한 TV스타들과는 전혀 다른 현실참여 음악, 이른바 ‘민중음악’이 민주화투쟁에 나선 학생, 노동자, 지성인들의 지원 속에 강한 자생력과 파급력을 발휘하며 또 다른 ‘진영’을 구축했다. 자체 생산·유통·소비구조를 형성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던 이 시기 민중가요진영이 맺은 열매의 한 가운데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안치환이 서 있었다.
격렬했던 1980년대가 스쳐 지나간 1990년대 이후, 민중가요의 ‘적자(嫡子)’이자 상징물이던 안치환은 대중가요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도 그는 이념이 스러져간 시대에도 민중음악이 전해준, 변화를 갈망하는 메시지가 죽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음을 증명했다. 고독하지만 양심을 자극했던 그의 통렬한 사자후는 ‘소금인형’ ‘수풀을 헤치며’ ‘내가 만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같은 일련의 히트곡(?)을 통해 대중의 가슴에 밀착했다.
흥청거리는 댄스파티와 비주얼 중시 풍토도 그의 ‘안티 음악’을 짓누를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당하게’ 따라 부르면서, 안치환 음악은 주류가요만이 판치는 노래방에서마저 지분을 획득했다. 다수가 꺼리는 지점에서 오히려 그의 노래는 광채를 발한 것이다. 덕분에 그는 민중가수로 남긴 굵은 자취에 이어 대중가수로도 성공했다. 1990년대 가수 중 주류의 한복판에서 거짓과 부조리를 꼬집고, 사람과 인생을 따스하게 포옹하며, 민족과 통일에 대해 비장하게 설파해온 ‘주류-비주류 통괄 가수’는 아마도 안치환 외에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성공사례는 이후 ‘운동권 가수’들이 제도권으로 터전을 옮기는 기틀을 마련했다.
민중가요라고는 잘 모르던 그가 대학의 노래동아리에 들어가 노래를 직업으로 삼은 지 2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다. 그는 활동 20년을 앞둔 올해 일련의 ‘의미 있는’ 노래작업에 나설 계획이다. 그 하나가 문익환 목사 10주기를 기념해, 중소도시 20개를 순회하는 ‘통일맞이 공연대장정’이 될 것이라고 전하면서, “그 때문에 금년이 너무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흘러가는 세월은 속일 수 없는 것인지 그도 이제는 예의 푸릇푸릇한 열혈 청년의 얼굴은 아니었다. 어느덧 불혹을 바라보는, 제 나이가 보이는 얼굴. 날카롭고 예민한, 옆 자리에 찬바람이 불 것 같던 예전의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대신 온화한 미소가 가득했다. “인상이 편해졌다”고 말을 건네자 “주변 사람들이 다들 ‘이제 많이 좋아졌다’고 말한다”며 밝게 웃어 보인다.
노래에는 세대가 있다
인터뷰에 인색하기로 소문난 그였지만 그는 모처럼 ‘긴 얘기’를 할 수 있는 자리에 꽤 흡족한 듯했다. 처음에는 “좀 거친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잘 걸러 써달라”고 당부한 그였지만 막상 대화에 들어가자 심한 표현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절제의 시기’에 들어가기라도 한 듯 단어선택에 애를 쓰면서도, 자신의 음악과 인생에 대해서는 기대 이상으로 솔직하게 풀어냈다.
-요즘도 대학축제의 초청공연이 많습니까? 공연 때문에 늘 분주하다고 들었습니다만.
“조금 줄기는 했지만 아직도 많아요. 대학의 행사 초청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늘어나서 전체적으로 옛날보다 더 많아졌어요. 지난 5월1일 노동절에도 서울과 지방 이곳저곳으로 정신없이 불려다녔습니다.”
-어느덧 30대 말의 나이가 됐는데요, 아직도 20대 젊은이들의 자리에 많이 초청받는 것으로 압니다. 옛날과 비교하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대학생들이 전에는 동시대 사람으로 보였는데, 솔직히 지금은 ‘애들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어려 보이는 거죠. 그때 비로소 제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무대에 서는 기본자세엔 변함이 없습니다. 학생들이 절 어떻게 볼지는 모르지만요.
관객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태도도 많이 변했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제 노래를 참 진지하게 들었는데, 요즘은 함께 뛰고 소리지르고 그래요. 그게 나쁘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참 밝아서 좋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세월도 많이 흘렀고 시대도 변했습니다. 가수가 경력을 쌓기 위해선 팬들의 성원이 지속돼야 하고, 그러려면 새로운 팬 층의 확충이 필요하지요. 그 점을 고민하지 않습니까? 요즘에 갖고 있는 음악적 관점이 궁금합니다.
“저를 원하는 세대나 계층과 관련해서 한계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극복하려고 일부러 몸부림치기보다는 ‘남아 있는 팬’과의 관계를 견고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한 음악의 영향력은 어느 특정세대에 집중되는 성질이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요즘 제 노래는 추상적인 생각이나 관념보다는 주변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포인트를 둡니다. 좀 달라졌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게 새로운 세대의 팬들을 위한 제스처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그들(신세대) 언어에 맞추기보단 그들이 나를 이해하는 방향이 돼야 하는 것 아닐까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안치환은 신세대가 좋아하는 음악과 굳이 ‘코드’를 맞추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음악에 충실하다. 그래도 공연만 했다 하면 관객들로 북적거린다. 공연부문에서는 보기 드문 성공사례여서 일각에서는 윤도현밴드, 크라잉넛과 함께 ‘라이브 빅3’로 거론하기도 한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안치환을 이해하는 젊은 세대가 의외로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근래 들어 음반판매의 위축으로 주류가수들이 맥을 못 추는 반면, 그들처럼 오래 전부터 공연에 주력해온 가수들이 오히려 ‘불경기를 덜 탄다’는 말을 듣는다. TV에도 나오지 않고 앨범판매량이 두드러진 것도 아닌 그의 ‘주머니 형편’이 나쁘지 않은 것은 라이브 가수로 위상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요즘은 대중음악 전반에서 라이브가 진가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안치환씨의 성공도 라이브 이미지와 관련 있다고 봅니다. 활동 초기부터 라이브를 의식한 것인가요?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무대가 라이브라면 그것은 가수에게 기본이자 철칙이지요. 의식이고 뭐고 상관없이 당연히 이를 기준으로 삼아왔습니다. 대학 노래패 때나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때나 따지고 보면 다 라이브였죠. 그 이후 10년에 걸쳐 1년에 세 차례는 단독공연을 해왔습니다. 제게 라이브 공연은 일상입니다.”
‘우리’로부터 비판받는 고통
-이제 안치환이라는 이름에는 개인 못지않게 백업 밴드인 ‘자유’가 녹아들어 있습니다. 팬들의 뇌리에도 ‘안치환과 자유’라는 풀 네임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요. 밴드 구성은 안치환씨 음악경력에 아주 중요한 지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솔로 가수가 밴드를 구성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떤 연유로 ‘자유’를 만들게 된 거죠?
“전에는 전문적인 세션맨들이 연주를 해줬는데 성에 차질 않았어요. 제가 음악적인 고집도 세고 맘에 들지 않으면 독하게 다그치는 스타일이다 보니, 저보다 나이나 경력이 많은 전문 세션맨 선배들로부터는 입맛에 맞는 음악적 만족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996년부터 밴드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이듬해 ‘자유’를 만들어 함께 호흡을 맞추니까 기분이 짜릿짜릿했어요. 밴드를 하는 맛이 이거다 싶었지요. 지금까지 결정해온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것 중 하나가 밴드 ‘자유’를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밴드를 통한 라이브 가수로, 또 인기가수로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그러나 안치환에게 ‘영광스러운 일’만은 아니었다. 대중전선을 취하는 한편 진중한 주제의식을 갖고 힘겹게 노래투쟁을 벌인다는 그의 ‘노선’에 대해 음악적 고향이라 할 민중음악계의 시선은 때로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그가 ‘노래운동 투사’가 될 것이라 기대했던 민중음악계는, 그가 ‘인기가수’가 되자 ‘변절했다’는 섭섭한 감정을 지우지 않았다. 더욱이 그의 음악은 1980년대 운동진영이 배격했던 서구의 록이었다. 이어서 그가 최고 히트작이 된 ‘내가 만일’로 완전히 스타덤에 오르고 심지어 인터넷 벤처기업의 TV광고에까지 출연하자 비난은 절정에 달했다.
주류에서 활동한 10년 동안 안치환은 격려 이상으로 배신에 대한 냉랭한 눈초리에 시달려왔다. 아마 그처럼 팬들의 ‘사랑’과 ‘안티’가 극명하게 갈린 가수도 없을 것이다.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극복해왔는가. 안치환 본인에게 가장 민감한 사항인 이 부분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격랑을 헤치고 안정을 얻은 사람마냥 얼굴이 편해 보이는 것은, 민중음악계 일각의 부정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입장정리가 끝난 겁니까?
“이제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 상당히 날카로워졌는데 지금은 들어도 내색하지 않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우리’라고 생각했던 진영에서 오히려 물고 늘어지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술자리에서 많이도 싸웠지요. 이제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욕먹을 소지도 분명 있었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그 사람들이 날 이해해줄 것이라고 봐요. 그때는 의사소통이 부족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직접 만나 생각을 나누면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안치환의 영역, 안치환의 한계
-안치환씨에 대한 노래운동 진영의 비판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습니까?
“한마디로 하자면 달라졌다는 거겠죠. 노찾사를 나올 때부터 변절자라는 소리를 들었어요. 아직도 노동진영에서는 절 차갑게 봅니다. 한때는 심지어 ‘노동자의 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제가 인터뷰에서 ‘노동자의 정서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말이 확대된 것이었죠. 그 말에서 정서는 다름 아닌 음악적 정서를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실제로 전 ‘음악적으로’ 노동자 정서는 싸워나가야 할 대상이라고 보거든요. 노동가요가 갖고 있는 음악적 수준은 신뢰하지 않는다는 거죠. 왜 제가 노동자를 신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제 자신을 노래하는 노동자, 단지 돈 많이 버는 노동자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1990년 대중가수로 활동을 시작하던 시점에 한 인터뷰에서 약간은 민중가요의 유산을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기사를 읽기로는 안치환씨도 민중가요진영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할 여지도 있었겠지요. 톤도 강했을 때였고. 하지만 전 그때 오로지 ‘이제 나의 노래를 가지고 대중 앞에 서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었습니다. 민중가요의 프리미엄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딛고 나아가고자 했어요. 시대상황이 변화하면서 민중가요의 힘이 약해져가는 데도 거기 안주해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포크 발라드풍의 민중가요를 하다가 하필 록으로 달려갔다는 점도 비판의 요소로 작용했을 듯합니다. 대학동아리를 보면 아직도 민중 노래패와 록밴드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존재하는데, 그러한 전향은 어떤 이유에서였습니까?
“록에 관련된 악기들이 일렉트릭 기타, 드럼 등등 모두 서구악기잖아요. 아닌게아니라 그 점에 실망한 민중진영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 점에서도 단호했어요. 록은 제가 잘할 수 있는 분야라는 생각이었지요. 제가 록으로 전향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잘했다고 봅니다. 표현의 수단을 어떻게 가져가느냐의 문제인데 저에겐 록이 적합했던 거지요.”
-그 말은 민중음악을 할 때는 표현력에 있어 한계를 느꼈다는 뜻이네요. 민중음악에 몸을 담고는 있었지만 내심은 불만족 상태였다는 건가요?
“전 민중가요에 대한 신뢰가 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지금도 그런 노래를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제 스타일과 관련해서 그 무렵 민중가요의 표현력은 성에 차지 않았어요. 당시 민중가요는 다분히 지사(志士)적인 러시안 발라드풍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노래를 부를 때는 스스로 ‘소리를 안으로 먹어가며’ 억누르고 불러야 했지요. 그게 답답했어요. 민중가요 자체보다는 고정된 표현방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던 민중가요의 상황에 염증이 났던 겁니다. 3집의 ‘자유’를 썼을 때 정말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소리를 억제하지 않고 터져라 부를 수 있었던 첫 곡이 아니었나 싶어요.”
-‘내가 만일’은 안치환 음악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대중적 히트곡입니다. 대중가수로서의 위치를 튼튼히 다져준 곡이지만 솔직히 노래는 일반 가요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또다시 ‘변절’의 도마에 올라야 했고요.
“4집에 수록된 곡인데요, 그 곡 덕분에 앨범이 60만장 팔려나갔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굉장한 히트였어요. 그런데 솔직히 그 곡은 앨범작업을 마친 뒤 응급처방 차원에서 급히 들어간 곡이에요. ‘너를 사랑한 이유’ ‘수풀을 헤치며’ ‘당당하게’ 등 10곡을 담은 원래 마스터는 저로선 충분히 만족스러운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레코드사에서 ‘색깔은 좋은데 방송용 노래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더군요.
당시로서는 음반사의 지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어요. 그래서 녹음이 완성된 후에 다시 김범수의 곡인 ‘내가 만일’과 한동준의 ‘그 사랑 잊을 수 없겠죠’ 두 곡을 보강했던 겁니다. ‘내가 만일’이 워낙 소프트한 노래다 보니 사람들은 그 곡 하나만으로 앨범 전체의 성격을 규정했고, 일부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앨범 전체를 들어보면 그런 말 못할 거예요. 방송되는 곡만 가지고 변절이니 배신이니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봅니다. 음악적으로 내가 할 일은 다했으니까요.”
-하지만 뭐라고 해도 ‘민중가요 유산의 독점적 수혜자’라는 일각의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봅니다. 확실히 오늘의 안치환을 만드는 데엔 민중가수 출신이라는 특혜와도 같은 조건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도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곰곰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 점을 한번 생각해보죠. 진보적인 행사가 과연 처음부터 끝까지 진보적인 것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까? 뭔가 관객을 장악할 만한 지명도를 갖춘 대중적 위치의 사람이 필요하게 마련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또 반대로 대중적인 행사가 있다면 오로지 재미있는 것만으로 덮을 수는 없잖아요. 뭔가 의미를 부여해줄, 내용을 채워줄 사람이 있어야 할 거예요. 제가 그래서 진보와 대중행사를 망라해 초청받는 것 아닐까요. 두 구역을 아우르는 거죠.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전 진보니 대중이니 하는 나눔 자체가 싫습니다. 저는 이미 대중적이다 혹은 진보적이다 라고 딱 나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상태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웃으며) 양다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고 내가 그런 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줄 수도 없는 문제고요. 혼자 양 진영을 독점하려 한다는 비판이 옳은지 그른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기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위치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에요. 때로는 제발 누구 다른 사람이 나와서 이런 괴로움을 덜어주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안치환이 이끌고 있는 밴드 ‘자유’의 공연 모습.
하지만 서울 남강고를 졸업하고 1984년 연세대 신학대에 입학해 우연히 노래패 ‘울림터’에 들어간 이후 그의 인생은 급속도로 ‘좌회전’했다. 울림터에서 민중가요의 강한 울림에 색다른 감동과 충격을 받고는 노래가 세상에 미치는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민중음악의 성지라 불리는 연합노래패 ‘새벽’에 이어 노래운동사가 만들어낸 최대 결실인 ‘노찾사’ 등에서 노래운동으로 숨가쁘게 질주해갔다.
‘새벽’에서 활동하던 시절 그는 민중음악진영 최고의 애창곡이 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와 ‘잠들지 않는 남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등을 만든다. 특히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그가 처음으로 작곡한 노래였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대중가수를 향한 욕구를 잠재워버린 것은 아니었다. 민중가요의 토양에서 강한 주제의식을 축적하면서도 지평을 넓히고자 하는 그의 음악적 야망은 결코 그를 그 상태에 머물도록 놔두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조용필씨가 가슴속의 음악영웅이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렇다면 훗날 안치환씨가 대중가수로 발돋움하는 데 나름의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마침 두 분이 모두 경기도 화성이 고향이네요.
“사실입니다.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시골에서 조용필씨는 당연히 최고였지요. 중학교 때 조용필 모창을 잘한다는 말을 듣고 우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음악적인 부분이든 음악 외적인 부분이든 당시에 조용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전에는 전혀 민중가요에 관심이 없었다면서 연세대 중앙노래패 ‘울림터’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겁니까? “대학가요제에 출전하지 않고 울림터로 간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줄곧 밝혀왔는데, 20대 초반의 노래운동 경험이 본인에게 무엇을 남겼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학번 위 선배 소개로 들어가게 됐는데, 단지 노래하고 싶어서였어요. 오디션 때 부른 노래도 팝송인 캔사스의 ‘Dust in the wind’였는데요 뭘. 운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죠. 그런데 거기서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세상과 사회에 대한 생각은 물론, 단순한 유희를 넘어서는 노래의 힘을 체감하게 됐죠. 대학가요제에 출전해 성공했다면 지금과 같은 가수가 되기는 어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노래에 대한 태도나 자세가 왜곡되었을 게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대학가요제에 안 나간 것은 아닙니다.”
-안치환씨가 대학가요제에 나간 적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인데요. 당시 노래운동 환경에서 대학가요제 출전이 가능했습니까? 노래패 선배들이 그냥 놔뒀을 리 없었을 것 같은데요.
“대학 3학년 때, 그러니까 제가 ‘새벽’에 들어간 뒤 대학가요제에 출전했습니다. 선배들 입장에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었지요. 1차 예선에 통과한 뒤 어느날 선배들이 찾더라고요. 가보니 지하 스튜디오에 쟁쟁한 선배들이 죽 앉아서는 나가지 말라고 무거운 목소리로 설득하더군요. 전 나가겠다고 버텼지요. 선배들 몰래 2차 예선을 준비했는데 막상 2차 예선 당일 행사장에 가보니 아무도 없는 거예요. 제가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겁니다. 2차 예선은 이미 끝났던 거죠. 따지고 보면 꼼꼼하지 못했던 성격 탓에 한 실수지만, 결과적으로는 인생에 엄청난 득이 된 실수였던 셈이지요.”
“왜 노래를 꼭 가요처럼 부르냐?”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는 가사에 그려져 있듯 감옥에 있는 동료를 위해 만든 곡입니다. 누구를 위해 만든 것이며 어떻게 대학가에 퍼지게 된 겁니까?
“저를 ‘울림터’에 데려간 선배가 주인공입니다. 지금은 음향회사 사장으로 있는 안종호씨지요. 당시 군대 갈 무렵이 된 선배들은 집회를 주도해 감옥에 가는 게 하나의 관행(?)이었죠. 그 선배 때문에 저도 가투(街鬪)라는 걸 처음 알았고요. 노랫말은 박영근씨의 시를 보고 이것저것 따서 완성했어요. 제 노래에는 시를 가사로 삼은 것이 많은데, 시집을 읽고 가사를 쓰는 버릇은 이때부터 시작된 겁니다. 음악적으로는 당시 음악계를 휩쓸던 록밴드 들국화의 공연을 신촌 그랜드백화점 10층에서 보고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썼지요.
그 노래를 처음 부른 것은 4학년 때 연세대 총학생회장 선거 유세에서였습니다. 당시 제가 지지한 2번 후보 유세 때 불렀는데, 결국 그 후보는 떨어졌고 1번 후보가 당선됐지요.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는데, 당선자가 저에게 총학생회 발대식 때 그 노래를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발대식 때는 다른 대학 학생들이 많이 오곤 했어요. 덕분에 그때 다시 부른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도 삽시간에 서울지역 대학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맞는 표현일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때부터 노래운동의 중심이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옮겨졌다고 봅니다.”
대중적 인기를 얻는 계기가 된 3집 앨범(왼쪽)과 이후 재발매한 1+2집(오른쪽).
“선배들이 정해준 대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었습니다. (웃으면서) 노래운동집단도 하나의 조직이니까요. 음악적인 면에서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신뢰는 그리 깊지 않았던 것 같아요. ‘왜 노래를 꼭 가요처럼 부르냐’ ‘잘하기는 하는데 썩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다’는 거였죠. 세미나 시간에는 늘 졸고, 토론도 잘 못하고 하다 보니 선배들 보기에 대견한 후배는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음악가로서의 치열한 자기고민 끝에 그는 노찾사를 탈퇴하고 노래에 대한 더 큰 욕망을 펼치기 위해 제도권 가수로의 변신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의 주류시장 진군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솔로로 독립해 발표한 1990년의 데뷔 앨범과 이듬해 2집 ‘안치환의 노래 한마당’은 제작사와의 불화로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20대 후반이었던 그 무렵 결혼을 하고 나서는 생활고까지 겹쳤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를 고민할 만큼 막막했던 시절, 뜻밖에도 대학축제가 그에게 서광을 비춰주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대학공연에는 늘 출연하는 가수가 되었다. 1993년 발표된 3집은 마침내 그에게 새 길을 마련해주었다. 타이틀곡 ‘고백’과 ‘소금인형’이 대중의 호응을 얻었고, 그 작은 성공 덕에 묻혀진 앞의 두 앨범도 ‘1+2’라는 제목으로 재출반될 수 있었다.
이후 1995년 4집 수록곡 ‘내가 만일’은 그를 인기 대중가수로 부상시켜준 결정적인 계기였다. 성공행진은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수록된 1997년의 5집으로 이어졌다. 민중음악진영의 ‘불순분자’라는 꼬리표가 붙었지만 그의 대중적 흡수력은 상승을 거듭했다.
하지만 안치환의 미덕은 인기를 누리면서도 군사독재와 민주화투쟁으로 인한 지난 세월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은 ‘도의’에 있을 것이다. 1997년에는 80년대 대학가 중심의 민중가요를 모은 포크음반 ‘노스탤지어’를 발표했고, 광주항쟁 20주년이 되던 2000년에는 김남주 시인을 위한 헌정음반 ‘리멤버’를 내놓았다. 지금도 그는 끊임없이 현실사회의 왜곡과 부조리, 반전과 통일의 메시지 송을 만들고 노래한다.
후보 지지보다 노래 한 곡이 더 값져
-안치환의 음반을 관통하는 것은 ‘내용성’일 것 같습니다. 현실적 주제를 외면한 앨범이 없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수록된 5집도 통일 메시지가 두드러집니다. 하지만 그 경우는 ‘내가 만일’의 성공에 따른 부담 때문에 더욱 내용성을 부각했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어떻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노래에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제 안에 내면화되어 있는 원칙이었습니다. 통일에 대한 메시지는 특히 지속적인 관심사였어요. 5집의 경우 단지 그 색깔을 부각하고 싶었을 따름이지 ‘내가 만일’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4집도 그러한 제 음악적 지향에서 탈선한 앨범이 결코 아니었고요.”
-1996년에 발표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원래 노래운동그룹인 꽃다지를 위해 써준 곡이죠? 그런데 이제는 명실상부한 안치환 곡이 되었습니다. 결국 곡을 빼앗은 셈 아닌가요?
“정지원 시를 붙여 만든 곡인데, 차 안에서 써서 녹음기에 담았어요. 그리곤 꽃다지에게 줬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도록 대중적 파급력이 없는 것 같길래 ‘이제 내가 불러도 되지?’하며 꽃다지의 허락(?)을 받아 부르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 빼앗은 것은 아니죠. 이제는 저와 꽃다지가 함께 부릅니다. 우연히 한 공연에서 만나면 먼저 부른 쪽이 임자죠. (웃음)”
-작사 능력이 있으면서도 줄곧 시인들의 작품을 쓰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김남주 시인 ‘저 창살에 햇살이’를 비롯해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귀뚜라미’ 등 부지기수가 시입니다. 싱어송라이터라면 모든 곡에 자신이 가사를 붙이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을까요. 시에 의존해 품격을 높이려 한다면 그것도 비판받을 소지가 있습니다.
“저에게는 좋은 노랫말을 만드는 재주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오로지 음반에 대한 욕심 때문에, 노래에 담긴 문학적 예술성을 높이고 싶은 생각에 시를 가져다 쓰는 거죠. 그것은 당연한 욕구 아닐까요. 이제는 시에 노래를 붙이는 게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안치환씨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앨범과 곡을 꼽아주시죠.
“다 장단점이 있고, 다 제 맘에 듭니다. 모든 곡이 내가 살아오고 고민한 궤적이지요. 굳이 꼽으라면 시에서 따온 가사보다는 내가 힘들게 지은 가사의 노래가 좋습니다. 안치환이라는 사람 속에 깊숙이 들어가 있는 ‘내’가 담긴 노래들이죠. ‘고백’이 그런 곡입니다.”
한 가지 질문이 빠졌다 싶었다. 지난해 대선에서 특정후보를 택해 공개지지하지 않은 까닭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나는 딴따라다. 정치판에 끼여들고 싶지는 않다. 내 자신이 명확해지면 정치적 선택을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싫다. 차라리 반전노래, 통일노래를 한 곡 더 부르겠다”는 것이었다. 정치적 성향을 밝히는 게 두려운 것 아니냐고 재차 물었더니 대뜸 손을 내저으며 자신이 그렇게 용기 없는 사람은 아니라면서 “사람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위한 정서적 기준만 제공해도 내가 할 도리를 다한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메시지와 사회성을 제스처로 삼는 듯한’ 후배들에게도 일침을 가했다. 그것이 가수 본인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기획자의 감각이었을까에 대한 궁금증, 평소 음악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던 정치적인 주장을 음악 외적인 공간에서 펼치려는 일부 후배들의 ‘진정성’에 대한 안타까운 의문이었다. 어느덧 그는 다음 세대를 걱정하는 선배였다.
‘저 친구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구나’
마지막으로 “안치환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다고 보느냐”는 고정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려운 질문이라며 꽤 오래 시간을 끌었다. 필자가 앞서 시리즈를 거쳐간 다른 선배가수들의 답변을 예로 들며 한참을 채근한 후에야 비로소 그는 입을 열었다.
“적절한 답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말하자면 ‘믿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또래는 어느새 세상을 살아가는 소시민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젊었을 때 알고 지내던 그 친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떠올리게 되지요. 저를 보면서 대중들이 느끼는 것도 그런 게 아닐까 합니다. ‘저 사람은 저 자리를 늘 지키고 있구나’ 하는 ‘믿음’ 말입니다. 제 노래를 듣는 동안 자신들이 세상에 물들기 전에 꿈꾸던 것을 한번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그를 위해 한번 더 작은 노력이라도 보태고 싶다고 느끼게 되는 것, 그런 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그는 보충 삼아 자신의 노래를 사랑하는 팬 층의 성격을 규정했다. 비록 극성적이지는 않지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였다.
“드러나지도 튀지도 않지만 전 그들이 적지 않은 수라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저 역시 ‘노래를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는 것이고요.”
인터뷰 내내 유지되던 그의 평정이 이 마지막 답변에서 무너져내렸다. 모처럼 안치환 특유의 ‘결단’을 느끼게 하는 악센트가 실려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을 받아 적고 일어서면서 필자의 머리에도 많은 생각이 스쳤다.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안치환이 이제 수많은 시비곡절이 엉켜 있던 과도기를 벗어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가속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내달릴 일만 남은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