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후기 굶주림과 일제의 폭압을 피해 러시아로 떠났던 한인들.
- 그 후손들은 140년이 흐른 지금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 흩어져 조선족 또는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
- 19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러시아 정부의 강제이주 정책의 결과다.
- 한때 600여 개에 달했던 연해주 일대의 한인마을들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러시아 한인마을을 찾아 불행했던 초기 러시아 한인이민사를 되짚어본다.(편집자)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마을을 기억하는 이들은 극히 드물다. 반세기에 걸친 냉전시대에 러시아 지역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온 우리들은 물론이고 상트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로부터 사할린,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 알마아타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 중에서도 지신허라는 마을을 알고 있는 이들을 찾기는 어렵다. 그만큼 지신허는 역사문헌이나 고지도(古地圖)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 현대의 지도에서는 사라진 지명이다.
필자는 이 마을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고려인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0여 년 전부터 ‘지신허’는 역사학자인 필자의 오랜 화두였다. 그러다 마침내 2년 전인 2001년 7월 국가보훈처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지신허’ 마을의 옛터를 발굴·조사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조사단은 관련 문헌자료들은 물론, 러시아의 고지도와 현대지도, 9세기말 간행된 조선지도 등 각종 자료들을 참조해 ‘지신허 발굴’이라는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TV와 주요 일간지에 크게 보도됐다.
그로부터 1년19개월이 지난 2003년 2월, 필자는 5명으로 구성된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학술조사단을 이끌고 지신허 마을을 다시 찾았다. 2월4일부터 18일까지 약 2주에 걸친 조사단의 연구과제는 블라디보스토크, 파르티잔스크,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일대의 연구소, 대학, 기록보존소 등을 방문해 한국학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고려인과 러시아 노인들을 인터뷰하는 것이었다.
사과와 보드카로 조상의 넋 위로
2월9일 아침 8시10분경 우리 일행은 블라디보스토크의 호텔을 나섰다. 이번 답사에는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의 박희수 원장과 교포신문인 ‘연해주소식’의 김광섭 사장이 동행했다. 필자가 이들 현지 교포인사들에게 동행을 권유했던 것은 지신허 마을을 단순히 학술적인 조사 대상에 머무르게 할 게 아니라, 현재의 고려인 사회에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일행을 실은 미니버스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인 산과 들을 양옆으로 내치며 눈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 알촘, 라즈돌리노예, 바라바쉬를 거쳐 오후 1시20분경 마침내 지신허 마을로 들어가는 길 입구인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에 도착했다. 이 강의 이전 명칭은 지신허강(Rechka Tizinkhe)이었다.
비노그라드나야강을 지나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진 입구에서 약 15분쯤(2km) 들어가니, 2년 전에 찾았던 농가가 나타났다. 닭, 젖소, 거위들이 낯선 이방인들의 출현에 놀라 푸드덕거리며 한꺼번에 울어대자 한 농민이 집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2년 전 필자에게 역사 속에 묻힌 지신허의 존재를 확인해줬던 시디코프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Sidikov Boris Aleksandrovich)씨였다. 그와 나는 끌어안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그에게 일행을 일일이 소개했다. 군복무 시절 이 지역에 마음이 끌려 제대 후 이곳에 정착했다는 시디코프씨는 젖소를 기르며 우유공장에 우유를 공급하고 있다.
2년 전 시디코프씨는 필자에게 한인들의 집터와 연자매 맷돌, 항아리 파편을 보여주면서 지신허 마을에 관해 중요한 증언을 해줬었다. 그는 한인 유적에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날 시디코프씨는 그동안 새롭게 발견된 또 다른 집터와 연자매 맷돌 한 짝, 아래받침돌 등을 보여주었다. 일행은 연자매 맷돌 위에 가져간 사과와 보드카를 올려놓고 김광섭 사장의 주재로 제사를 올렸다. 오래 전 이곳에서 살았던 고려인 조상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
강제이주로 마을은 사라지고
필자는 2년 전 장마와 우거진 잡초 때문에 확인해보지 못했던 비노그라드나야강 상류지역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국경지역이라 러시아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시디코프씨의 기억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이곳에는 집 두 채가 남아 있었다. 종전 후 러시아 농가 40채가 들어서면서 소프호스(국영농장)가 만들어졌고, 현재 자기 집 위치에 국영농장의 책임자가 살았다고 한다. 소 200마리를 기르는 목장이 있던 이 마을의 명칭은 ‘우로치쉐 비노그라드노예(Urochishche Vinogradnoe)’. 목장 이외에 포도나무, 살구나무 등 과실나무를 많이 재배한 데서 비롯된 명칭일 것이라는 게 시디코프씨의 짐작이다.
필자가 가져간 현대 러시아 지도에는 비노그라드나야강 옆 지점에 ‘비노그라드노예(Vinogradnoe)’라 표시돼 있는데, ‘비거주지역’으로 돼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는 시디코프씨 집에서 서쪽으로 중국과의 국경 부근까지 한인마을이 분포해 있었고, 시디코프씨가 소장하고 있던 옛 지도에는 지신허(Tizinkhe)로 표시돼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1937년 강제이주로 폐허가 됐던 지신허 일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농민들의 국영농장 마을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시디코프씨의 목축업을 위한 목초지로 변한 것이다.
시디코프씨는 “과거 한인들이 러시아와 조선 국경지대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정착한 것은 자기나라 정부(조선 정부)의 추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나름대로 매우 흥미로운 시각이었다.
시디코프씨는 자신도 한인관련 서적들을 읽어봤지만, 한인들이 홍후즈(紅? 賊 : 붉은 수염을 한 마적이라는 뜻)나 강도였다는 내용을 보지 못했다며 홍후즈는 대부분 중국인들이었음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또한 한인들이 이 지역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으며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제공한 사실을 강조했다. 시디코프씨는 집 주변의 연자매 맷돌과 집터를 보여주면서 한인들이 쓰던 가위, 질그릇 파편, 쟁기의 쇠날을 선물로 주었다.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기록들
현재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무산(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의 양응범(梁應範), 두 사람이 이끄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1863년 월경(越境)을 엄금했던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정착한 것을 최초의 한인이주로 간주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연해주지역이 청나라 영토에 속해 있었을 때는 물론,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가 된 이후에도 조선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냥이나 채취 또는 여름에 파종하고 가을에 추수해 돌아오는 이른바 계절형 이주에 불과했을 뿐, 영구거주와 정착을 위한 이민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1863년의 지신허 마을 개척은 현재 구소련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들의 첫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신허는 원래 중국식 명칭으로 계심하(鷄心河, 발음은 ‘지신허’)라고 표기했던 강의 이름이다.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닭의 심장부분에 해당하는 강’인데 어원이 분명치 않은 이 강 이름을 따 최초의 한인마을 이름을 지신허라 했고, 이후 한인들이 우리식 한자발음을 빌려서 ‘地信墟’ ‘地新墟’ ‘池新河’로 표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신허강은 현재 비노그라드나야강(Rechka Vinogradnaia)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 강은 탐험대만(Bykhata Ekspiditsii:과거 노보고로드만)으로 들어가는 그라드코이강(Rechka Gladkoi)의 지류로 북쪽 중국 국경지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그라드코이강으로 이어진다. 지신허 마을은 러시아수비대 초소가 위치해 있던 탐험대만으로부터 19km 정도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중국령인 훈춘과는 14km 정도 거리에 있었다.
최초의 한인이주에 관한 기록들은 이주시기는 물론, 이주한 가구와 인원수에서도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먼저 러시아 쪽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1867~69년에 동시베리아 총독의 파견으로 남부 연해주지역을 답사한 프르제발스키(N. M. Przheval’skii, 1839~88)는 1869년에 쓴 글에서 “1864~65년 겨울에 한인 10가구가 조선정부의 금지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이주해왔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 보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저서 ‘우수리스크 크라이 여행(Puteshestvie v Ussuriskom krae), 1867~69’에서는 한인들이 “이미 1863년 12가구가 이주해왔다”고 수정했다. 시기가 1년여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가구수도 10가구에서 12가구로 늘어난 것이다.
지신허 마을의 존재를 확인해준 러시아인 시디코프씨와 그의 농장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의 초기 형성과정은 러시아측 자료를 광범위하게 분석한 고려인 한국사학자 박보리스 교수에 의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남부 우수리 지역에 최초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공식보고는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Rezanov)가 연해주 군무지사인 카자케비치(P.V.Kazakevich)에게 보낸 1863년 11월30일자(현재 서력으로 12월13일자) 보고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레자노프 중위는 “한인 몇 사람이 와서 20가구가 노보고로드 초소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km) 떨어진 지신허강 분지에 정착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하였는데, 이미 이들은 이곳에 대여섯 채의 집을 지어놓은 상태였다”고 보고했다. 이들 한인들은 또한 자신들을 홍후즈로부터 보호해줄 수 있도록 러시아군인 5명을 파견·배치해줄 것을 요청했다. 레자노프 중위의 보고를 받은 연해주 군무지사 카자케비치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864년 5월 레자노프 중위에게 홍후즈의 공격으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초소를 지신허 마을 주변에 배치하고, 한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레자노프 중위가 이 명령서를 접수한 것은 1864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 지신허강 분지에는 60명 정도의 한인들이 새로 지은 집과 채소밭, 농토를 갖고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카자케비치 군무지사에게 보낸 레자노프 중위의 두 번째 보고서는 1864년 9월21일(서력 10월4일) 작성된 것인데, 지신허 마을의 한인들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공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레자노프는 지신허에 정착한 한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이 생산한 메밀을 우선적으로 국고로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또 연자매 맷돌을 설치해주고, 중국인 ‘라(La)’로부터 빌린 종자와 양식비용을 갚기 위한 보조금 200루블을 대여해줄 것도 요청했다. 이주 2년 후인 1865년 연해주 군무지사는 지신허강 분지에 형성된 최초의 한인마을의 공식명칭을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Rezanovo)라 했다.
그렇다면 한인들의 기록은 어떨까. 필자가 확인한 바 현재 남아 있는 최초의 기록은 초기 한인사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 1862∼1918)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면서 쓴 발간사이다. 이 ‘발간하는 말’에서 최봉준은 “서력 일천팔백육십삼년은 곧 음력 갑자지년(甲子之年)이라. 우리 동포 십여 가구가 처음으로 이 아국(俄國)지방 지신허에 건너와서 황무지지(荒蕪之地)를 개척하고 연(連)하야 살음(살게 됨)에 해마다 몇십 호씩 늘어가니…”라고 썼다.
최봉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1869년 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한 후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점에서 이 글은 지신허 이주민이 쓴 지신허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최봉준은 지신허 이주의 시기를 ‘1863년’으로 정확히 기록하고는 있으나 ‘갑자년(甲子年)’, 즉 1864년으로 잘못 계산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한인들이 음력에 익숙해 있었고, 또 지신허 출신이자 한인사회의 유력인사였던 최봉준이 ‘갑자년’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정확성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 한인들이 최초의 이주시기를 ‘갑자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기록은 러시아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계봉우(桂奉瑀, 1880∼1959)가 1920년 ‘독립신문’에 12회에 걸쳐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다. 계봉우는 1914년 러시아 한인들이 추진했던 한인노령이민 50주년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계획한 러시아 한인이주민사, 즉 ‘강동쉰해’ 간행을 위한 자료수집과 편집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그는 1919년말 북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파견됐는데, 이광수(李光洙)의 부탁으로 기고한 ‘아령실기’에 러시아 한인들의 역사를 이주사, 풍속, 노동, 사회, 교육, 독립운동으로 나누어 소개했다.
계봉우는 “사천백구십칠년 갑자춘(甲子春)에 무산(茂山) 최운보(崔運寶), 경흥(慶興) 양응범(梁應範) 2인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훈춘(琿春)을 경유하야 지신허(地新墟)(차(此)는 연추(煙秋) 등지)에 래주(來住)하야 신개간(新開墾)에 착수하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기록들과 달리 최초의 이주한인으로 최운보, 양응범 2인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나, 가구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계봉우 역시 이주시기를 ‘갑자춘(甲子春)’, 즉 1864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최봉준의 예와 같이 당시 노령의 한인들이 한인의 최초 이주시기를 ‘1864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중국인 집과 비슷
초기 지신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프르제발스키는 1868년 지신허 마을을 방문하고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다소 길지만, 인용해보기로 한다.
“가장 광활하고 오래된 한인마을 지신허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 마을은 노보고로드 항구로부터 18베르스타(약 19km) 떨어져 있는, 비옥하고 경치가 좋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만(灣)으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뻗어 있는 산들이 이곳 분지에 이르러서는 마치 두 개의 병풍을 두른 듯한 지형을 이룬다. 분지의 길이는 15베르스타(약 16km)며, 폭은 1~1.5베르스타(1km~1.6km)다. 활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지신허강은 분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양쪽을 거의 같은 크기로 갈라놓아 농사에 편리하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놓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산들은 비탈이 꽤 가파르고 견고한 덤불, 울창한 잡초들과 여러 개의 좁은 길들이 있어 결코 평탄치 않은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 뒤로 높은 산봉우리들이 무리를 지어 에워싼 형세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10베르스타(약 11km)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는 지신허 마을의 집들은 100보 내지 300보씩 떨어져 있다. 한인들의 집은 흙벽과 문종이를 발라 막은 창문, 난로(아궁이)와 판자침상, 초가지붕 등 외형으로나 내부구조로나 중국인의 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중략…)
집과 집 사이에는 한인들이 공들여 가꾼 마당이 있다. 들판에서의 농사는 암소와 황소를 부려서 하지만 조잡한 형태의 쟁기를 사용한다. 농작물로는 수수를 가장 많이 파종한다. 그리고 자가식량으로서만이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팔기 위해서다. 주식으로 콩, 강낭콩, 보리를 파종하고, 양은 적지만 옥수수 감자 메밀 대마 담배를 심으며 야채밭에는 오이 호박 무 상치 고추 등을 심는다.”
이외에도 프르제발스키는 지신허에 머물면서 참석했던 장례식에서 자신의 통역으로 많은 대화를 나눈 지신허 마을 노야(老爺, 촌장) 최운국에 대한 얘기 등 매우 귀중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후 지신허 마을의 모습은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관리들이 기록한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82년경 지신허 마을을 찾았던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큰산이 솟아 있는 아래에 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지신허(地信墟)이다. 남북으로 수십 리이고 동서로 사오 리인데 집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양인초소가 있고 서학서숙(西學書塾)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서양인이고 우리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서양말과 서양글을 할 줄 알았다.”
최근 지도(위)에는 ‘지신허’라는 지명이 없지만, 옛 지도(아래)에는 ‘지신허’라고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1869년 육진지방에 몰아친 대흉년은 이전까지의 간헐적인 이주와는 달리 폭발적인 규모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러시아 자료에 기록된 1869년 가을과 겨울의 대이주를 살펴보면, 1869년 9월말∼10월초 1850명의 농민(남자 1300명, 여자 550명)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지신허로 이주해왔는데, 이들은 의복이나 비축한 식량이 없었다. 이어 같은해 11월말∼12월초에는 훨씬 더 많은 4500명이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불리는 1869년의 대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는 후일 두고두고 러시아 한인사회에 이야깃거리가 됐던 것 같다. 이때 여덟 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했던 최봉준은 “1868년(1869년의 잘못) 기사(己巳)에 이르러는 본국 함경도 지방에 흉년이 크게 들거늘 그 해 겨울에 기황(饑荒) 들었던 백성 수천 호가 일시에 지신허로 내도하니 기왕에 우거(寓居)하던 몇십 호의 농작한 힘으로는 수천 인구를 구제할 방책이 없는지라, 그런고로 기황을 이기지 못하여 생명을 구제하매 극근득생(極僅得生)한 반분(半分)에 지나지 못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옛 지도에는 ‘지신허’라고 분명하게 표시돼 있다.
계봉우 역시 ‘아령실기’에서 기사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1869년의 흉년은 음력 7월에 내린 장매(長?, 강풍에 따른 흑비)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때 육진지방은 한줌의 벼도 거둘 것이 없는 공전(空前)의 대흉년이었다. 이에 더해 얼마 전 웅기만에 미국 상선이 표착(漂着)했는데 적재돼 있던 물화를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사건을 조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영문(營門)장교가 사실 조사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두려워한 경흥 읍민 96가구가 음력 11월 일시에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이닥친 이들을 맞은 지신허 마을에는 거처할 집도 식량도 없어 이주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의 아비규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지신허 마을은 이렇게 물밀듯이 몰려드는 이주민을 소화할 수 없었다. 러시아당국 역시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결국 이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켜 정착케 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1869년에는 지신허를 개척했던 최운보가 지신허 빈민 35가구를 이끌고 추풍(秋豊, 수이푼)으로 이주했고, 1870년에도 역시 지신허 마을 빈민 60가구가 러시아 관리의 지도를 받아 추풍으로 옮겼다.
러시아정부는 1871년 여름 지신허 마을 70여 가구 315명을 포함한 연추 등지의 빈민 500명 가량을 아무르주(흑룡주)의 아무르강 지류 사마르카강가의 블라고슬로벤노예(Blagoslovennoe) 마을로 이주시켰다.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당국이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조성한 최초이자 유일한 모범마을이었다.
이처럼 지신허로 이주했던 한인들이 남부 우수리지역 각지를 개척하면서 수많은 한인마을들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1871년 1월의 통계에 따르면, 당시 남부 우수리 일대에는 총 3750명의 한인들이 정착해 있었는데, 지신허 1200명, 연추 300명, 시지미 80명, 노보고로드만(灣) 120명, 포세트만 주변 150명, 수이푼 분지(추풍) 1200명, 나홋카·스챤(수청) 500명, 그리고 러시아 마을에 20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인이 최초로 지신허로 이주한 것은 1863년의 일이다. 그러나 1914년 당시 러시아의 한인들은 이주 5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1864년을 최초의 한인이주가 일어난 해로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주50주년기념행사에 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13년 6월부터의 일이다. 이후 1913년말 4명의 원호인(이른바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사람) 지도자 최재형(崔在衡), 최봉준, 채두성, 박영휘에 의해 ‘한인아령이주 50주년기념 발기회’가 조직됐다.
2003년 2월 지신허 마을을 찾은 한국외국어대 역사문화연구소 학술조사단 일행. 가운데(오른쪽에서 세번째)가 시디코프씨다.
발기인들의 제안에 따라, 지방대표원회의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2월3일부터 7일에 걸쳐 개최됐는데, 수이푼(추풍), 노보키예브스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챤(수청), 도비허, 리포, 신한촌, 권업회 등 8개 지역 및 단체 대표 25명이 참석했다. 러시아인으로는 포스타빈, 쥬코프, 블라노프스키 등 3명이 참석했다.
대회는 1914년 9월21일(현재 서력으로는 10월4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식으로 기념식을 개최하기로 했다. 이들은 처음 이주한 곳이 지신허이나 ‘모임의 편의’를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기념식 장소로 잡았다. 또한 기념식을 9월21일로 잡은 것은 ‘러시아의 극동역사기록’에 한인이 처음 이주한 날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의는 또한 한국식 기념비를 포세트(목허우)에 세우기로 하고, 한인이주역사를 한글과 러시아어로 발간하기로 했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기념행사를 철저히 한국식으로 거행하기로 결정한 사실이다. 즉, 기념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한복을 입으며 될 수 있는 대로 한국 갓을 쓰고 한국 고대의 예복을 입기로 결정한 것이다.
기념행사발기회는 곤닷치 연흑룡주 총독의 허가를 얻었다. 그리하여 3월25일, 30여 명의 대표가 참가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의 우수리스크) 권업회 회관에서 개최된 지방대표원회의에서는 기념행사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이 이루어졌다. 명예회장으로 포스타빈 박사를 선임하고, 기념행사 경비로 3만8700여 루블을 확정했다. 9월21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고, 일주일 후인 9월28일 포세트에서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했다.
회의는 대부분이 원호인인 22명을 위원으로 한 ‘한인아령(俄領)이주 50주년기념회’를 조직하고 집행부 간부로 회장 최재형, 서기 김기룡, 재무 함세인을 선출했다. 회의의 주요한 결정사항은 ‘권업신문’ 지면을 통해 전체 한인사회에 알려졌다.
이처럼 착실하게 진행중이던 50주년기념행사는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인의 민족운동을 탄압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곤닷치 총독은 8월초 기념행사발기회측에 1915년으로 연기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사라진 마을은 모두 606개
필자는 2001년 이후 연해주(프리모리에)와 하바로프스크주, 유태인자치구 등 러시아극동지역의 한인마을들을 찾아 나섰다. 소련시절 간행된 러시아측 자료에 근거해볼 때, 1937년 강제이주로 폐쇄돼 영원히 사라져버린 한인마을의 수는 약 444개에 달한다. 여기에 1929년 중국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의 동중철도 점령으로 야기된 중·소간 무력충돌로 폐쇄됐던 연해주 남부의 하산스키 구역 한인마을 162개까지 합치면 무려 606개의 한인마을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다. 지신허 마을 역시 이들과 같은 운명을 겪었다. 지신허 집단농장의 주민들은 1937년 가을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지역으로 강제 이주됐다.
사라진 한인마을 606개에는 강제 이주 이후 한인마을터에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러시아마을로 변한 곳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1937년 당시까지 러시아극동지역에 존재했던 한인마을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들 한인마을 대부분은 그 위치를 찾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들 마을에 대해 증언해줄 고려인 노인들은 거의 세상을 떠났으며, 살아 있는 이들도 너무나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이들에게 희미한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환경이 많이 변해 원래의 위치를 찾아내기는 힘들다.
강제이주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 속에 한인마을 대부분이 완전한 폐허가 돼버렸다. 또 형편이 어려운 고려인들이 자신들의 옛 고향을 찾는 일도 없다. 러시아마을로 변한 지역에서 러시아인들의 증언을 통해 겨우 그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각종 문헌자료와 이들 러시아인들의 증언에 힘입어 2001년 이후 20개에 가까운 한인마을들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필자는 발해 유적들과 만나고, 70여 년 전 땀과 피눈물을 흘리며 소련 땅을 개척한 억센 고려인 선조들의 삶의 흔적을 보았다. 초기 한인이주민들이 남긴 이 유물과 유적들이 더 훼손되기 전에 모아서 보존해야 한다.
그러나 한·러 친선의 역사적 근거지였던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극동지역에 관한 우리들의 관심은 턱없이 부족하다. 올해는 러시아 한인 이민 140주년의 뜻깊은 해다. 지신허 마을의 시작과 종말은 탄압과 차별의 어두운 면과 친선과 협력의 밝은 면을 동시에 가졌던 한·러 관계의 양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