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에게 중요한 것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
- “내가 아직도 조연입니까 ^^” 영화와의 첫 인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 ‘살인의 추억’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대사 3분의 2가 ‘애드리브’
- “아버지는 동양화가였습니다. 생업으로 농사도 짓고…”
- 연극배우 시절, 3개월 연극하고 받은 개런티는 50만∼60만원
- 좋은 후배들 밀고 올라오면 다시 조연할 각오
송강호는 단역에서 조역으로, 조역에서 주역으로 차곡차곡 연기를 쌓아올려 연기가 단단하고 폭이 넓다는 평가를 받는다. ‘살인의 추억’은 송강호의 11번째 영화. 조연 신세를 면하고 처음 주연으로 발탁된 영화가 1999년 ‘반칙왕’이다. ‘살인의 추억’을 포함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가 고작 네 편밖에 안 되는 배우에 대해 한국 영화의 정상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다. ‘반칙왕’이 영화 팬들에게 조연이나 하며 지내던 송강호를 눈여겨보게 한 작품이었다면 ‘살인의 추억’은 한국영화의 지평에서 그를 우뚝 솟게 했다.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을 쫓는 형사로 나오는 송강호는 신들린 듯한 연기로 영화 전체의 공기를 형성한다. 이 영화 대사의 상당 부분이 송강호가 분위기에 맞춰 즉흥적으로 한 애드리브(ad lib).
봉준호 감독의 말을 들어보자. “강호 선배는 이 영화를 풍성하게 해준 배우입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했던 디테일을 만들었습니다. 시체부검 장면에서 윗 옷자락을 끌어올려 코를 막은 건 그 사람의 설정이었습니다”(영화 전문 주간지 ‘씨네 21’ 대담).
송강호는 전통적 기준에서 용모만을 놓고 보면 조연의 처지에 만족하고 살았어야 할 배우다. 한국의 주연급 영화배우들은 신성일 남궁원 신영균 또는 김지미 윤정희 강수연처럼 빼어난 미남 미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집 아저씨 같고 햄버거가게 종업원 같은 남녀들이 스타로 뜨는 세상이다. 송강호 뿐 아니라 설경구 류승범 조재현 박상범 정웅인 유오성 이범수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평균적인 미모를 거부하고 개성을 갖춘 배우들이 인기를 끄는 현상이 1980년대부터 나타났다. 연세대 최양수 교수는 “대중이 판에 박힌 미모에 식상했다고 할 수 있죠. 독특한 이미지를 갖춘 상품이 마케팅에 성공하는 현상과 같습니다. 송강호 이미지를 다른 배우에게서는 찾기 어렵죠”라고 말한다.
배우에게 중요한 건 ‘삶의 성찰’
강남 청담동 ‘마지아’라는 2층 카페에서 송강호를 만났다. 송강호는 요즘 밀려드는 언론 인터뷰를 소화하느라 체력적으로도 무척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신동아’ 인터뷰 직전에도 ‘동아일보’ 권재현 기자와 1시간 반 동안 인터뷰를 했다. 200자 원고지 15장을 쓰는 신문 인터뷰에 1시간 반을 배정하면서 100장 넘게 원고지를 메워야 하는 월간지 인터뷰에 2시간밖에 주지 않은 것은 영화사의 실수다. 다행히 같은 언론사에 몸담고 있는 권기자로부터 내용이 겹치지 않는 부분을 상당량 빌려올 수 있었다. 스케줄에 쫓기는 송강호에게도 편리한 일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많이 지쳤겠네요”라고 떠보자 송강호는 “아닙니다. 쌩쌩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영화에서보다 젊어 보인다.
―배우라는 직업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송강호씨가 생각하는 배우론에 대해 듣고 싶네요. 배우는 타고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끊임없는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대본은 문학성이 강한 작품이지요. 대본이 갖고 있는 문학성을 스크린을 통하거나 무대 위에서 행위로 전달하는 사람이 배우입니다. 연기의 테크닉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삶의 성찰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삶을 통해 사회를 보는 시각이랄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습니다.
후천적으로 학습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지만 배우는 타고난다고 생각해요. 배우뿐만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에게도 후천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성과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입니다. 해당 예술분야의 특수성과 미학을 파악해야 합니다. 영화배우라면 카메라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을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 중요합니다.”
―배우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된 건 몇 살 때쯤입니까.
“중학교 2학년 때 처음 배우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연극영화과로 목표를 정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입학 원서를 쓰면서 친구들이 눈치작전 펴는 것을 보고 안타까웠어요. 친구들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고3 때까지 대학의 전공이나 인생의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니… 한심해 보였죠.”
―연기자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계기가 있었을텐데요.
“중2 때 흉내를 내면서 얘기를 하다 보면 친구들이 재밌어했습니다. 친구들이 ‘와, 너 배우 해도 잘하겠다’고 이야기하던 기억이 나요. 나는 어떤 상황을 내 식대로 소화해 모사(模寫)하는 재주에 능했습니다. ‘그래, 나한테도 이런 능력이 있을 수 있어. 배우를 한번 해보자’. 그 시절부터 조금은 막연하게 배우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겠군요.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태어나 자랐던 곳이 경남 김해인데, 지금의 행정구역으론 부산시 강서구입니다. 당시는 농사짓는 시골이었죠. 문화적인 체험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어요. 연극이라고는 유랑극단 작품을 한두 차례 본 게 답니다.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동네 사랑방에서 오지명 김창숙 선배가 나오는 ‘일지매’를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서울에서 자랐더라면 수시로 연극이나 영화를 보러 다닐 수 있었겠지만 시골에서 막연하게 꿈만 꾼 셈이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연극을 하게 된 건 대학에 들어가서입니다.”
-송강호씨를 다룬 기사에 대학 시절 이야기가 별로 안 나오더군요.
“4년제 대학 연극영화과에 두 차례나 낙방했어요. 삼수를 하기 싫어 부산 경상전문대학 방송연예과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수험생 한 명당 실기시험 시간을 1, 2분밖에 주지 않았는데 짧은 시간에 끼를 보여주는 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수백 명에 대한 평가가 그런 식으로 이뤄졌었죠.”
송강호가 지원했던 4년제 대학들이 송강호의 끼를 발견하지 못하고 낙방시킨 것을 지금 알게 되면 후회할 게 틀림없다. 송강호는 1학년만 다니고 군에 입대하면서 대학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그러니까 전문대 1년 중퇴가 송강호의 최종 학력이다.
송강호는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학교 이름을 알려주었다. 학벌 콤플렉스일까. 송강호 같은 대배우에게 학벌 콤플렉스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어이없다. 상고 출신이 거푸 대통령을 하고 있는 시대에…. 정상의 자리에 있는 배우의 영예 앞에서 그까짓 학벌이 무엇이랴.
멜로물 “지금은 생각 없어요”
-대학에 들어가 처음 해본 연극이 무엇인가요.
“‘허생전’에서 허생 역을 맡았습니다. 아무튼 연극에 대한 맛보기를 했다고 할까요. 군에 입대하면서 대학을 중도에 그만두었습니다. 1989년 스물네 살 때 제대를 하고 나서 서울에 올라와 ‘연우무대’라는 극단에 찾아갔습니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찾아갔습니까.
“네. 거기서 연극을 처음 시작한 것이지요.”
-옛날 같으면 송강호씨 같은 마스크로 주연배우 하기는 힘들었겠지요. ‘동갑내기 과외하기’에 나오는 김하늘도 옛날 기준에서 보면 미인 축에는 끼이기 어렵겠더군요. 그로부터 과외지도를 받는 권상우가 인물 타박을 하자 “너같이 머리 텅텅 빈 아이들이나 얼굴 찾는 거야”라고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정도이니….
“신성일 시대였다면 나 같은 외모가 먹혔겠습니까. 또 반대로 신성일 선배가 지금 활동한다면 그저 잘생긴 배우 가운데 하나였을 겁니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관객들이 외모의 매력을 가진 배우를 선호했습니다. 배우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뀐 시기가 1990년대 중반부터예요. 젊은 영화감독들, 그러니까 새로운 영화를 공부한 386세대가 감독이 되면서 그렇게 된 거죠. 실력 있는 영화감독들이 그때 다수 배출되었어요.”
-몇 명만 예를 들자면….
“그분들이 지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작업했던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김지웅 허진호 감독 같은 분들입니다. 결국 배우와 관객도 따라가면서 영화 자체에 질적인 향상을 가져오게 된 것이죠. 미남 미녀에 물린 관객들은 주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연기를 하자 더 친근함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송강호씨를 멜로물에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주로 남자들끼리 노는 영화에 단골로 나오더군요. 어쩌다가 러브스토리가 끼여 들어도 영화의 주요 줄거리는 아니지요. 영화사에서 그런 배역을 안 맡깁니까. 아니면 본인 스스로 그런 배역을 기피합니까.
“멜로물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와요. 물론 내가 멜로영화에 어울리는 마스크는 아니죠. 외형적으로 봤을 때는. 기존의 멜로영화 하면 미남 미녀들이 나와서 사랑 얘기하고 아웅다웅 다투다가 화해하는 줄거리잖아요.
그런 영화에 식상한 제작자들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송강호라는 배우를 내세워 멜로영화를 찍었을 때의 신선한 기대감이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은 멜로영화를 한 편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없어요. 그래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다른 영화들을 하고 싶은 생각이 더 많습니다. 정확한 대답입니다.”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 해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인데 그러면 여배우 중 누구하고 멜로물을 찍고 싶습니까.
“멜로영화를 하고 싶은 생각을 평소에 했으면 그런 것도 생각을 해두었을 터인데…. 지금은 딱히 짚이는 여배우가 없네요.”
-농담 삼아 묻는 건데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요. 어떤 여류 방송작가가 이 얘기를 꼭 물어보라고 하더군요. 송강호씨가 애정물에 나오면 필이 안 꽂히는 정도를 넘어서 닭살이 돋을 것 같다는 거죠. 모욕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인데….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개인 차이가 있으니까요.”
-영화 같은 연애 해본 적은 있어요? 결혼 후 연애는 오프 더 레코드로 해주지요.
“지금 집사람이 첫사랑이나 다름없어요. 군 제대하고 부산에서 집사람을 만나 6, 7년 연애를 하다가 1989년 스물아홉 살 때 결혼했습니다. 결혼 후 바람 피운 일도 없고요.” (웃음)
송강호는 다작을 하지 않는 배우이다. 1997년 ‘넘버3’, 1998년 ‘조용한 가족’ ‘쉬리’, 1999년 ‘반칙왕’,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2001년 ‘복수는 나의 것’, 2002년 ‘YMCA 야구단’, 2003년 ‘살인의 추억’…. 송강호가 7년 동안 출연한 영화 목록이다. 1년에 고작 한두 편이다.
-작품을 적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출연교섭이 적어서인가요. 아니면 작품을 까다롭게 고르고 몰두하기 때문인가요.
“1960~70년대는 1년에 수백 편씩 영화를 제작했지요. 지금은 50~60편 정도를 제작합니다. 영화 한 편을 찍자면 최소한 6개월 정도 걸려요. 그러니까 1년에 잘해야 두 편밖에 못 하는 거죠. 작품 한 편 끝나고 나면 다음 작품이 바로 기다리는 경우가 드물거든요.
1년에 한 편 할 수도 있고 두 편 할 수도 있고 또는 2년에 한 편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즘은 그래요.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그래요. 제작 환경이 바뀌었죠.”
-올해는 시나리오를 몇 개나 받아봤나요.
“정확하게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수십 편 되는 것 같아요.”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는 바람에 시나리오를 읽을 시간이 없다고 불평한 기사를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일단 손에 들어온 시나리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합니다. 그 중에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놓고 고민을 하죠. 작품 선택을 할 때는 시나리오의 이야기와 소재도 중요하지만 감독과 스태프가 어떤 사람들인지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연기인생, 두 번의 ‘터닝포인트’
송강호가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단역으로 출연하면서다. 주인공 역을 맡은 연극배우 출신 김의성씨가 감독에게 소개를 해줘 영화 초반에 주인공 친구로 두세 장면 나오게 된다.
두 번째 출연한 작품이 이창동 감독(현 문화관광부 장관)의 ‘초록 물고기’. 극단 ‘차이무’에서 ‘비연소’라는 작품을 공연했는데 연출은 이상우씨가 했고 제작은 명계남씨였다. 명계남씨는 ‘초록 물고기’도 제작했다. ‘비연소’ 공연 첫날 이창동 명계남 이상우씨가 함께 와서 공연을 관람했다. ‘초록 물고기’에 출연할 배우를 한창 캐스팅중이던 이창동 감독이 연극을 보고 나서 송강호에게 출연을 제의했다. 그러니까 송강호를 영화판으로 끌어들인 이가 바로 이창동 감독이다.
송강호는 그의 연기 인생에 두 번의 터닝포인트가 있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연기의 출발점이 연극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영화를 꿈꿨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출발점에서부터 ‘전달하는 이야기 자체가 중요한 것이냐’ 아니면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냐’를 놓고 고민했습니다. 내가 소속된 연우무대는 후자에 충실한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창동 감독에 발탁돼 ‘초록 물고기’에 출연한 것입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연극무대에 서기 위한 아르바이트 수준이었습니다. ‘초록 물고기’를 통해 나 자신의 연기력을 발견하고 검증할 수 있었고 영화의 표현방식에 눈을 떴습니다. 연극 무대에서 펼치는 연기와 영화 카메라 앞에서 하는 연기는 감정의 표현 수위가 달라야 합니다. 나는 ‘초록 물고기’를 통해 나의 연기와 영화를 융합하는 길을 찾아냈습니다.”
청담동 한 카페에서 인터뷰 중인 송강호씨와 황호택 논설위원(오른쪽).
“열망이 강했던 것은 아닙니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런 꿈을 갖는 것이 아닌가요.
“당연히 어떤 배우든 그런 꿈을 꾸겠지요. 그러나 열망이 강하다고 해서 조연이 갑자기 주연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세상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까.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다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냉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을 붙잡고 있는 것은 자신은 물론 남에게도 죄악입니다. 나는 그저 열심히 최선을 다 하다보면 좋은 기회가 올 것이라고만 생각했죠.”
-조연시절 인터뷰에서 “조연과 주연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주연보다는 주역배우가 되고 싶다. 배역이 어떻든 그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생각으로 연기한다”고 했더군요. 조연생활을 오래 하면서 자기 합리화로 한 말같이 들립니다.
“내가 아직도 조연입니까.”
-그 말이 아니라 조연시절에….
“합리화만은 아니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배우든 많이 나온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거든요. 많이 나오면 많이 나오는 대로 관객들에게 중요한 것이 있고 적게 나오면 적게 나오는 대로 중요한 것이 있거든요. 주역배우란 어떤 역할이든 그 배우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는 연기를 하는 배우를 말합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어떤 이들은 ‘공공의 적’ ‘박하사탕’ ‘오아시스’에 나오는 설경구와 비교하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송강호와 설경구가 한국 영화의 미래라는 이야기지요. 경쟁의식은 없습니까.
“경쟁자라기보다는 동료이고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나하고 나이도 같고 연극할 때부터 친구로 알고 지내고 있습니다. 극단은 달랐지만 대학로에 살면서 만난 사이거든요. 그렇지만 연극이든 영화든 한 작품도 같이한 일은 없어요.”
-설경구 연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합니까.
“좋은 배우죠. 다 잘하는 것 같아요.”
-안성기 한석규 선배와는 에피소드가 없습니까.
“재미있는 일화는 없어요. 그분들은 공통적으로 술을 전혀 못 해요. 두 분 다 가정적입니다. 나는 그 선배들에 비하면 별로 가정적이지 못하지요. 두 분은 성격도 조용조용하고요. 나하고는 달라요. 안성기 선배는 워낙 나이 차이가 많아 자주 어울리지 못해요. 한석규 선배는 나보다 세 살 위여서 드물게 만납니다. 한선배도 같이 어울려 다니는 것보다도 혼자 뭘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최민식 설경구와 공통점이 많죠. 두 사람 다 술을 좋아하고.
전성기가 지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정상에서 내려가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나도 좋은 후배들이 밀고 올라오면 다시 조연할 각오가 돼있습니다. 안성기 한석규 선배처럼 나도 자연스럽게 내려가겠습니다.”
“강호 오빠, 살짝 천재예요”
‘YMCA 야구단’에 같이 출연한 여배우 김혜수의 코멘트는 송강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그대로 옮겨본다.
“영화가 생활이고 모든 인생의 중심이고 축인 사람이죠. 의도적인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게 편하고 자연스러운 사람이죠. 사실 연기를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은 같이 작품하기 전부터 알았지만 ‘YMCA 야구단’ 촬영을 하면서 느꼈어요. 강호 오빠는 영화를 이해하는 마인드가 배우가 아니라 감독이에요. 툭하고 내뱉는 아이디어나 충고도 감독의 디렉션 수준이거든요. 사실 아무리 연기 잘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캐릭터에 몰두하느라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많은데, 강호 오빠는 정말 와이드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연기자의 리미트를 넘는 배우죠. 음, 살짝 천재예요.”
4년제 대학 연극영화과를 지원했다가 두 번 떨어진 사람이 무슨 천재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게 그렇지 않다. 어느 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는 사람이 다른 분야에서 평균 이하인 경우는 일상 속에서 흔히 발견된다.
할리우드에서는 스타 배우들의 감독 데뷔 열풍이 뜨겁다.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덴젤 워싱턴(49)과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니컬러스 케이지(39) 등이 작년 말에 감독으로 데뷔했다.
-김혜수나 봉준호 감독 이야기를 들어보면 감독해도 잘할 것 같아요.
“배우도 힘든 직업이지만 영화감독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배우는 어떻게 보면 감독이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하면 됩니다. 영화감독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하나에서부터 백까지 모든 책임을 다 져야 하고 모든 부분을 다 알아야 해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감독은 생각도 안 해봤고요. 배우만 잘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애드리브에 강한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인의 추억’에서는 공장에 취업한 대학생 박현규가 범인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되자 ‘너 밥이나 먹고 다니느냐’고 물은 대사도 시나리오에 없던 것이라면서요.
“‘공동경비구역 JSA’ ‘YMCA 야구단’은 즉흥 대사가 거의 없어요. 그런 영화는 시나리오에 나오는 대사를 얼마만큼 밀도 있고 농도 짙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살인의 추억’처럼 현장 분위기에 맞춰 즉흥대사로 생동감을 살려야 하는 영화가 따로 있습니다. 작품의 특성에 따라 연기 방법이 달라지는 거지요. ‘살인의 추억’에서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내가 했던 대사의 3분의 2 정도가 즉흥 대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배우층 확장하는 게 선배 역할
송강호는 다른 인터뷰에서 “배우 인생에 그래프가 있다면 30대 중반에서 40대 중반까지 정점인 것 같아요. 자신의 연기색깔을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시기이죠”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린 나이의 배우들은 에너지가 넘치지만 인생의 깊이가 모자라고 40대 중반을 넘어서면 체력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이다. 그러고 보면 서른 중반을 넘긴 송강호는 에너지와 경험이 조화를 이루는 최적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셈이다.
-80대를 바라보는 폴 뉴먼은 ‘로드 투 퍼디션’에서 마피아 보스로 나와 녹슬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었어요.
“할리우드에서는 영화었어 시장이 광범위합니다. 배우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장이 있고 작품들이 나옵니다. 한국도 엄청나게 폭이 넓어졌어요. 안성기 문성근 같은 50대 선배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잖아요.
예전에는 20대나 30대 초반 아니면 주연을 맡을 수가 없었지요. 선배들의 뒤를 이어 한국 영화배우의 층을 좀더 확장시키려고 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설경구 최민식 한석규씨 등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후배들이 확장된 세계에서 더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는 것이 선배들의 책무입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베드신에 등장하는 여자가 동거녀인가요, 아내인가요. 영화에서 분명하지 않았어요.
“동거녀로 나오다가 나중에 아내가 되죠.”
-스포츠지 기사에 베드신 1분 찍는 데 송강호의 연기가 서툴러 다섯 시간 걸렸다고 썼더군요. 영화를 보면 전미현씨가 위에서 다하고 송강호씨는 누워서 바라보고만 있던데 그런 연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베드신이라고 특별히 힘든 것은 아니고 어떤 장면이든 그 정도는 걸립니다. 왜냐하면 영화는 드라마 찍듯이 금방금방 찍어지지 않습니다. 카메라와 조명을 맞추는 데 시간이 꽤 걸립니다. 스포츠지들이 그저 흥밋거리로 쓰느라고 그런 거지요.”
봉준호 감독도 1980년대에 대학시절을 보낸 386세대이다. 80년대 중반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살인의 추억’에서 여고생들이 전두환 대통령 환영 행사한다고 수업 빼먹고 길거리에 죽 늘어서 태극기를 흔드는 장면이 나온다. 봉감독은 “갑자기 비가 쏟아지자 여고생들이 길 옆 구멍가게로 우르르 몰려드는 장면에는 시대의 엿 같음과 개인적인 추억이 뒤얽혀 있다”회고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 ‘빠삐용’
-1980년대 중반에 어디서 뭘하고 지냈나요.
“화성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군대에 있었습니다. 1987년 1월에 군대 들어가 1989년 7월에 제대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가 성숙하는 과정에 큰 아픔을 겪은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요.”
‘살인의 추억’이 빅히트를 하면서 17년 만에 이 사건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다음 카페에는 화성 연쇄살인 사건 연구모임까지 생겨났다. 1986~91년 화성 일대 부녀자 10명이 성폭행당한 뒤 살해된 이 사건은 대부분 공소시효(15년)를 넘겼고, 2건만 공소시효 3년 가량이 남아 있다.
-봉준호 감독은 당시 형사들을 인터뷰하면서 왜 이 사건이 미제로 남았는가에 대해 나름대로 연구를 했더군요.
“관객들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겠지요. 공권력의 무능함 때문에 범인을 잡지 못했다거나 범인이 신출귀몰해 그랬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나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런 것은 감독이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배우는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명예조사단원으로 위촉돼 제보를 독려하기 위한 광고포스터에 개런티를 받지 않고 모델로 출연했던데요.
“내 의식이 진보적이라서 그런 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나도 두 아이의 아빠인데 유치원 버스가 집 앞에 딸아이를 데려다 주는 시간이 일정해요. 유치원 버스가 3분만 늦어도 부모 마음이 불안해져요. 그런데 의문사 부모들은 평생 자식을 그렇게 기다려 온 것이죠. 그 고통을 안 당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의문사당한 분들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다가 그렇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잖아요. 그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빚을 갚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진 한번 찍어주고 그 사진이 들어간 포스터가 전철에 붙어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일종의 부채 의식에서 그런 일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는 자세하게 답해주는 게 좋겠어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고 했는데 그 시절을 전후해 본 영화 중 가장 감명 깊었던 영화가 무엇입니까.
“‘빠삐용’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 영화에 나오는 스티브 매퀸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습니다. 그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다 봤어요. 그 배우도 미남 배우는 아니지요. 초등학생 때 빠삐용을 처음 봤고 그 뒤로 여러 번 봤어요.”
-그 영화가 연기자로서의 진로 결정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연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어떤 영화의 영향을 받아서가 아니고 스스로 내가 마음을 먹었던 겁니다.”
-요즘 영화는 ‘빠삐용’처럼 오랜 여운을 주는 영화가 드문 것 같아요. 특히 노년층에서 영화에 메시지가 없다거나 진지한 영화가 안나온다는 불평을 해요.
“영화는 상업적인 매체입니다. 예술적인, 미학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상업적 측면을 무시할 수 없어요. 영화에는 휴먼 드라마도 있고 코믹물 멜로물 조폭물 등 종류가 다양합니다. 어르신들이 볼만한 영화는 상업적 기획영화에 비해서 물량이 아무래도 적지요.”
-관객 동원에 성공한 영화 중에 마피아 또는 조폭물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표적인 상업성 영화죠. 일반 대중은 영화를 통해 정서적으로 소비하려고 합니다. 소비도 하면서 생산도 하는 영화, 예를 들면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겠지요(그는 이 이야기를 하다가 자화자찬이라 쑥스러웠던지 간드러진 웃음을 웃었다).
매번 생산과 소비가 융합된 영화가 나올 수는 없습니다. 소비만이라도 시킬 수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이 대중입니다. 조폭 코미디물도 분명히 존재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님 웨일스 원작의 ‘아리랑’이 영화화된다지요. 거기서 주인공 역을 맡았다고요.
“‘아리랑’이라는 영화가 계획은 돼 있지만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중국 올 로케이션 영화로 스케일이 크기 때문에 여러 가지 변수가 있어요. 그래서 촬영을 할지 안 할지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힘들었던 연극배우 시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학)은 연안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활동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였다. 1936년 서방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연안에서 마오쩌둥 등 공산혁명가들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우의 부인이 님 웨일스이다. 그녀는 연안 도서관에서 김산을 처음 만나 인터뷰를 해 조선독립운동가의 감동적인 삶을 책으로 펴냈다. 그러나 김산은 1937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32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1983년에 복권됐고 아들이 중국에 생존해 있다.
-‘아리랑’에서 항일혁명가 김산 역을 맡았다는데 지금까지 해온 배역과는 성격이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책은 읽었지만 시나리오는 다음 달 경에 나와요. 원작을 워낙 잘 알아 시나리오가 어떻게 구성될지 벌써부터 궁금합니다. 나는 항일운동가라기보다는 인간의 영원한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으며 감동받았습니다. 영화화가 최종적으로 결정돼 내가 그 분 역을 맡는다면 영광스러운 것이지요. 그런데 아직 확실하지가 않아요.”
-1991년 연우무대에서 ‘동승’으로 데뷔해 6년 동안 연극배우 활동을 할 때 춥고 배고픈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연극이라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뭐냐 하면 경제적인 수익이 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영화처럼 많은 대중들에게 동시에 보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경제적으로 아주 힘든 데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이 주는 행복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한창 혈기 왕성한 20대였고 미혼이었으니까….
물론 갈등도 있었죠. 너무 힘들 때는 두어 번 정도 ‘내가 이걸 계속할 수 있을까’하는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고비를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내가 하고 싶어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연극 한 편에 출연하면 얼마나 받았습니까.
“연극은 공연에 앞서 평균 두 달 가량 연습을 합니다. 공연은 한 달에서 한 달 반 정도 합니다. 그렇게 3개월에서 3개월 반 정도 하고 받은 개런티가 50만~60만원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많이 받는 편이었어요.”
한 달에 20만원 정도의 수입이다. 아무리 1980년대였다지만 그 돈으로는 숙식이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자취를 했습니까.
“네, 자취했지요.”
-어디서, 구체적으로.
“딱히 집에서 왔다갔다 한 것도 아니고요. 연극을 하다보면 극장에서 기거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곳에서 지낼 수도 있습니다. 거처는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창피하다고 생각하는지 어렵던 시절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꺼린다. 말을 종합해보면 일정한 거처가 없었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 어려운 시절을 송강호가 이겨내지 못했더라면 한국 영화는 단단한 기둥감 하나를 잃을 뻔했다. 송강호는 최근 연극인들과 어울려서 동숭동 시절을 회고하며 무대 위의 작은 소품 값만도 못한 개런티를 받고 연극 활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털어놨다고 한다.
“그냥 연극이 좋아서 한 거지 돈하고는 연관이 안 돼요. 지금도 구조적으로 연극은 돈 벌 만한 직업이 아니에요.”
송강호가 처음 주연으로 발탁된 영화가 ‘반칙왕’(1999)이다. 그는 레슬링을 배우느라 서울액션스쿨에서 두 달 동안 하루 여섯 시간씩 연습을 했다.
-매번 시나리오를 받을 때마다 그렇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합니까.
“‘반칙왕’은 레슬링 영화니까 집중적인 연습이 필요했지요. 다른 영화는 그렇지 않아요. ‘반칙왕’에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했다면 범작이 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역 없이 레슬링 연기를 하느라 엄청난 육체적 고통이 따랐지만 그런 고통과 싸움에서 이겼기에 관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연기 연습은 어떻게 합니까.
“감독과 배우들은 영화를 많이 보지만 나는 그렇게 많이 보지 않습니다. 게으르기도 하고…. 오히려 신문을 꼼꼼하게 읽습니다. 매일 빠짐없이 훑듯이 읽습니다. 정치면은 빼고요(웃음). 신문을 통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상살이를 보고 느끼고 상상하고 정리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준다는 의미에서 내 연기의 스승은 신문입니다.”
-어린 시절의 가족사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습니까.
“평범하게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배우로서 끼랄까, 특별한 재능이 있었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배우 중엔 외향적인 성격보다 내성적인 성격이 많아요. 연기는 내적으로 성숙돼야만 좋은 표현이 나오는 것 같아요. 연기는 표현하고 창조하기 전에 생각하고 고민하는 작업이 중요하거든요. 그런 것들이 배우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농부
인터뷰를 하는 카페에 ‘공동경비구역 JSA’에 함께 출연했던 이병헌이 흰 양복 차림으로 등장했다. 이병헌이 송강호에게 “형 축하해요”라고 인사하자 송은 “고맙다. 너도 축하하고…”라고 화답했다. ‘살인의 추억’이 관객동원에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인사였다. 차 한잔 마시러 들렀다가 송강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단다. 영화배우들이 들르는 찻집이라서 그런지 카페의 풍치가 근사하다.
-부모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아버지는 동양화가였습니다. 그림도 그리고 생업으로 농사도 짓고….”
그림 그리는 농부라, 얼른 그림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나 송강호는 표현 능력의 상당 부분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털어놓았다. 농토는 얼마나 됐느냐고 묻자 “잘 모른다”는 대답이 나왔다.
-연기 중에서 ‘넘버3’에서 말더듬는 연기가 일품입니다. “내 말에 토…토…토다는 새끼…배신이야 배신…배반….” ‘살인의 추억’에서도 흥분해서 말 더듬는 연기를 하던데….
“‘넘버3’는 일부러 캐릭터화시켰고요. ‘살인의 추억’에서 ‘넘버3’ 이미지를 발견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것은 말 더듬는 연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생경함이라 할까, 정제된 느낌의 연기가 아니라 그냥 들판에서 파닥파닥 뛰는 생경하고 생동감 있는 연기에서 관객들이 ‘넘버3’를 봤을 때와 중첩되는 느낌을 받는 것 같습니다.”
-인터뷰를 하면서 들으니까 부산 말 억양이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거의 사투리를 쓰지 않더군요.
“말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부산 말 억양이 나와요. 그걸 왜 고쳐요. 고칠 필요가 없어요. 관객이 그걸 못 느끼는 것은 내가 편하게 얘기를 하기 때문일 거예요.”
송강호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사진 찍고 인터뷰하느라 1시간 반 가량 시간을 빼앗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 있느냐고 묻자 내 질문지를 들여다보면서 “될수록 빨리 끝나면 좋지만 준비해온 질문은 다 하세요”라고 말했다. 다섯 페이지 중에 한 페이지 가량 남겨두고 있었다.
송강호는 ‘살인의 추억’에서 정신박약 피의자를 심문할 때 “예쁜 여자 보면 너 좆 꼴리지. 그래서 강제로 하다가 죽였지”라고 심문하면서 아주 걸쭉한 욕설을 내뱉는다. 한국 영화의 ‘F 워드’도 미국 영화에서 배워온 기법이다. 1996년 헌법재판소가 영화의 사전검열을 위헌으로 판결하면서 영화의 내용에 획기적인 변화가 생겼다. 영화에서 리얼한 욕설이 나오는 것도 그 후 생긴 변화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18’이라는 욕이 입에 붙어있더군요.
“실제로 영화 촬영할 때는 더 심한 욕을 했어요. 그런데 편집하고 믹싱하면서 순화된 것이에요. 실제로 형사들이나 범죄자들은 영화보다 100배 더 심한 욕을 해요. 영화니까 그 정도로 나온 거죠.”
“모델료요? 밝힐 수 없습니다”
요즘 송강호가 나오는 CF는 세 편이다. 백세주, 로또복권 그리고 조선무약의 우황청심환이다. 로또복권에 나오는 ‘인생역전’이라는 카피가 송강호의 삶과 묘하게 어우러진다. 단역으로 시작해 정상의 배우가 됐으니 송강호도 인생역전이다. 본인이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의미에서 로또복권의 인생역전과는 다르지만.
“일 열심히 해서 사장이 되고 공부 잘 해서 교수가 되고 의사가 된 사람들도 다 인생역전한 사람들이지요. 반대로 망한 사람도 인생역전이지요. ‘인생역전’이라는 카피는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생역전’이라는 카피는 내 마음에 안 드는데 그런 선정적인 카피를 걸어야 많이 팔리니까 그렇게 한 거겠지요.”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묻겠습니다. 세 편의 CF 모델료로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그것은 밝힐 수 없습니다.”
-모델료는 밝히지 않겠다니까 별수없고…. ‘살인의 추억’은 출연료를 얼마나 받았는지 밝힐 수 있습니까. 둘 중에 하나라도 공개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위원께서 연예인하고 인터뷰를 별로 안 해봐서 그런 것 같은데….”
-맞아요. 배우 인터뷰는 처음입니다. 출연료와 모델료 묻는 것은 금기 사항입니까. 내가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것은 아니고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여기서 잠깐 송강호가 밝히기를 꺼리는 개런티에 관한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해보자. 월간 ‘스크린’ 편집장이자 영화평론가인 유승찬씨는 일급 남자 배우의 경우 편당 개런티가 5억원을 호가한다고 증언했다(동아일보 2003년 5월10일자 칼럼). 불과 5년 사이에 거의 다섯 배까지 오른 개런티가 제작비 상승을 주도하고 있어 “요즘 영화판에서 돈 버는 사람은 배우밖에 없다”는 말이 정설로 통한다는 것이다.
‘살인의 추억’은 제작비가 33억원 정도 들었고 영화사를 취재해보니 송강호는 개런티로 3억원 가량 받았다. 송강호 같은 정상의 배우가 1년에 고작 한 편 정도 출연하고 3억원 받은 것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유승찬씨 주장에 토를 다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귀한 재능을 가진 배우의 몸값은 희귀재이기 때문에 비쌀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런 몸값을 지불하고서 수익을 낼 자신이 없으면 신인배우를 발굴해 쓰면 된다.
돈보다는 작품
-작품을 적게 하니까 큰돈은 못 모았을 것 같아요.
“돈보다는 작품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작품이 있을 때 많이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작품 없을 때는 2, 3년 쉴 수도 있어요. 그래서 배우와 돈을 연관시키면 안 맞는 것 같아요.”
-돈 얘기 딱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인생살이에서 돈이 참 중요해요. 가정에 쓰는 돈말고 개인적으로 쓰는 한달 용돈은 얼마나 됩니까. 주로 용처는 어디입니까.
“워낙 불규칙한 생활을 하다보니까…. 지방에서 촬영을 한다든지 세트장에서 촬영을 한다든지 하면 한 달 내내 거기서 촬영만 하니까 용돈이 거의 안 들어갑니다. 영화사에서 밥 먹여주고 재워주니까요. 기껏해야 맥주 한잔 하고 싶을 때 조금 쓰겠지요.
촬영을 안 하고 집에서 쉴 때는 사람도 만나야 되고 미친 짓도 해야 되고 술도 한잔 먹어야 되고, 그러면서 많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딱히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취미활동을 하는 데 돈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주량이 세지는 않지만 술은 좋아해요. 친한 선후배들과 가끔 만나 술자리를 하는 데 쓰는 정도지요.”
-무슨 술을 좋아합니까.
“백세주도 좋아하고요. 맥주도 좋아하고….”
-소주 몇 병까지 마십니까.
“한 병에서 한 병 반.”
-폭탄주는.
“안 좋아합니다. 그냥 한두 잔 정도 마셔본 것으로 기억됩니다.”
-거의 다 끝나갑니다.
“빨리 좀 해 주세요. 약속 시간에 늦어서…. 죄송합니다.”
인터뷰 예정시간을 넘겼는 데도 내 질문지를 들여다보며 “준비해온 질문은 마저 끝내라”며 기다려주는 성의가 고맙다. 이런 인내심과 배려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다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미덕이다. 역경은 인격을 성숙시킨다.
-막연한 질문 같지만 연기생활을 마친 뒤에 팬들의 뇌리에 어떤 배우로 기억되고 싶은가요.
“저 배우는 자기만의 연기 세계를 가지고 있는 배우였구나, 어떤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기만의 연기 세계가 있었던 배우구나, 그런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송강호는 경기도 분당 단독 주택에서 여덟 살짜리 아들, 네 살짜리 딸과 함께 산다.
-자녀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서태지가 은퇴할 때 ‘창작의 고통 때문에 은퇴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연기자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얼굴이 팔려 생활이 불편한 것은 별거 아니에요. 창의력을 끌어내기 위한 스트레스가 너무 큽니다. 우선 자녀들에게 그런 능력이 있느냐도 중요한 판단자료가 되겠지만 쉽게 권유하지는 않겠어요.”
-다 끝났어요. 하루에도 인터뷰를 몇 번씩 하면서 똑같은 질문을 받고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이 지겹지 않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솔직하게 말해봐요.
“늘 새로운 마음으로 인터뷰를 하고 있습니다.”
-다음 약속 시간에 늦은 모양이죠.
“지금 곧 가야 될텐데….”
송강호가 서두르는 바람에 중학교에 다니는 막내아들이 사인을 받아달라고 한 부탁을 깜박 잊었다. 송강호는 떠나고 시간이 늦어 ‘살인의 추억’ 제작사 싸이더스 PR 담당 직원과 저녁을 먹었다. 그녀는 본래 홍익대 조각과를 나와 영화사에서 포스터를 만들고 있는데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의 인터뷰가 밀려들어 PR 일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싸이더스는 ‘지구를 지켜라’가 참담하게 흥행에 실패해 빚을 졌는데 이번에 대박을 터뜨려 회사 사람들 얼굴이 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