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검은 현대의 5억달러 송금 부분만 수사
- 현대, 송금 경로는 밝히면서 정상회담 대가는 부인
- 뇌물 수수하지 않고 정책적 판단으로 대출 지시했다면 실세들은 무죄
- 산업은 관계자들, 업무상 배임으로 처벌될 가능성 높아
- 외환은 관계자들, 금융실명제 위반 혐의 벗을 듯
- 현대,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벌금 1000만원 ‘솜방망이’ 처벌 받을 듯
- 한나라당, 특검이 아니라 국회청문회부터 열었어야
적잖은 국민들은 5억달러 송금 외에 북한에 송금된 것이 더 있다면 특검이 그것까지도 명쾌히 밝혀낼 것을 기대한다. 예를 들어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대한민국 정부기관의 돈이 북한에 갔다면 그것도 분명히 밝혀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바람이 이뤄지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유는 대북송금 특검법(정식명칭은 ‘남북정상회담 관련 대북 비밀송금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 등에 관한 법률안) 2조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한 시기 현대의 대북송금 및 그와 관련된 사건만 특별검사의 수사대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이외 다른 기관의 돈이 북한에 갔다면 그것은 특검이 아닌 검찰에서 수사해야 할 사안이다.
1998년 11월 현대그룹(현대아산)은 금강산 관광사업을 시작하며 2005년까지 총 9억4200만달러를 북한에 주기로 하고 2002년 12월말까지 3억8870만달러를 북한에 보냈다. 그 외 금강산 부근에 온천장 등을 짓느라 지난 해 말까지 1억4242만 달러를 추가로 보냈다.
물론 이 돈도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데 간접적으로는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돈은 남북정상회담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특검 수사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특검은 특검법에 따라 산업은행 대출금이 북한으로 송금됐다는 의혹과 현대건설이 싱가포르 지사를 통해 송금했다는 의혹, 현대전자 스코틀랜드 반도체 공장 매각대금이 북한에 보내졌다는 의혹에 대해서만 수사할 수 있다.
현대의 5억달러 대북송금만 수사
이러한 ‘제한’을 안고 있는 특검이 혹시 있었을 지도 모를 김대중 정권의 다른 대북 송금까지 찾아내 기소할 것으로 기대한다면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 수 없다. 특검은 국민적 기대와는 달리 행동에 큰 제약을 받고 있다.
특검 수사의 핵심은 2000년 6월7일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을 대출받아 북한 측에 송금한 과정과 경위이다.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 대출서류를 접수시킨 것은 6월5일이고 4000억원이 대출된 것은 6월7일이었다. 그리고 북한측으로 송금이 이뤄진 것은 6월9일이다.
따라서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신속한 대출과 송금이 이루어졌는지를 밝히는 것이 특검의 첫 번째 수사 대상이다.
두 번째로는 국정원의 개입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를 밝히는 것이다. 지난 2월14일 김대중 대통령의 대국민담화 때 배석했던 임동원씨는 “국정원장 재직시인 2000년 6월5일께 현대측에서 급히 환전편의 제공을 요청해왔다는 보고를 받고, 관련 부서에 환전편의 제공이 가능한지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었다. 임씨의 이야기는 현대상선이 산업은행에 대출서류를 제출한 날 국정원에 환전 편의를 요청했다는 것 인데 그렇다면 현대는 대출이 ‘반드시’ 이뤄질 것으로 확신했다는 것을 뜻한다.
대출 여부는 산업은행에서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심사한 후 결정하는 것인데, 현대는 무슨 근거로 대출을 확신하고 ‘권부’인 국정원에 환전 편의를 요청했을까. 또 산업은행이 이틀 만에 4000억원이라는 거액을 선뜻 현대에 대출해준 근거는 무엇일까.
국정원은 국가정보원법 2조에서 ‘대통령의 지시와 감독을 받는다’고 규정된 대통령 직속기관이다. 또 산업은행은 정부가 10조원의 자본금 전액을 출자해서 세운 국책은행이다. ‘한국산업은행법’ 12조는 ‘산업은행 총재는 재경부 장관의 제청에 의해 대통령이 임명하고 부총재와 이사·감사는 재경부장관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정원은 대통령의 의중을 헤아려 움직이는 곳이고 산업은행도 대통령이나 대통령의 지시를 받는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을 통하면 움직일 수 있는 기관인 것이다. 따라서 의혹의 눈길은 4000억 대출이 진행됐을 때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임동원 국정원장, 한광옥(韓光玉) 비서실장, 이기호(李起浩) 경제수석, 이근영(李瑾榮) 산업은행 총재 등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특검이 가장 수사하기 좋은 구도는 현대그룹이 이들 실세들에게 뇌물을 주고 4000억원 대출금을 받아낸 경우. 이 구도에선 산업은행 대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뇌물수수 혐의로 기소할 수 있다. 받은 돈의 단위가 크다면(5000만원 이상)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경가법)에 따라 보다 중(重)하게 기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도 돈을 받지 않았다면 뇌물수수나 알선수재 죄를 적용할 수 없다. 물론 특경가법을 적용시키는 ‘가중(加重)’ 처벌을 할 수도 없다.
또 하나의 구도는 현대측에서 “정부 실세들이 정상회담에 필요하니 돈을 보내주라고 했다”고 진술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특검은 김대중 정부의 실세들을 직권남용 혐의 등으로 기소할 수 있다. 특검은 이러한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구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는 이러한 진술을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특검측은 묘수를 찾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설사 김대중 정부의 실력자를 소환한다고 해도, 이들이 “대북사업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대가 북한에 돈을 제공하면 당시로서는 국가중대사였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산업은행측에 신속히 대출해주라고 말했다”며 “정책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하면 일이 복잡해진다.
YS 정부 말기인 1997년 12월 한국은 갑작스럽게 외환위기를 맞아 경제가 휘청거렸다. 모라토리엄(대외부채 지불유예) 직전까지 몰렸던 한국은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아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이듬해인 1998년 6월5일 대검 중앙수사부는 환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姜慶植)씨와 청와대 경제수석이었던 김인호(金仁浩)씨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강씨와 김씨 재판에서는 정책적인 판단을 형사 처벌할 수 있느냐가 논란거리가 되었다. 결론은 ‘할 수 없다’였다. 1999년 8월19일 1심 재판부는 두 사람의 직무유기 부분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2002년 10월17일 2심 판결도 무죄였다.
이러한 판례를 원용하면 산업은행에 대해 현대상선에게 대출해 주라고 한 사람들은 잘못된 정책 판단을 한 것에 해당하기 때문에 설사 기소된다고 하더라도 무죄 판결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이용호 특검 이후 특검팀은 수사뿐만 아니라 수사가 끝난 후 재판장에 나가 피고인에 대한 공소를 유지하는 기능까지도 떠맡게 되었다. 따라서 특검은 기소를 하면 반드시 유죄판결을 받아내야 한다는 ‘부담’을 지게 되었다.
특검팀은 ‘누구를 기소하느냐보다는 대북송금의 실체를 규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밝혀왔다. 특검측은 현대의 대북송금을 남북정상회담의 대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정황증거는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대의 대북송금이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라는 직접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특검 수사와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김대중 전대통령이 대북송금에 얼마나 관여했느냐는 부분이다. 특검의 수사도 궁극적으로는 남북정상회담의 당사자인 김대중 전대통령의 행적을 겨냥할 수밖에 없다. 소식통에 따르면 현대는 5억달러를 북한에 송금한 것에 대해서는 순순히 진술하고 있으나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대가로 돈을 보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송두환 특검팀이 진실을 밝혀내려면 김대중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병행해야 하는데, 김 전대통령은 특검 조사에 협조할 뜻이 없는 것 같다. 이와 관련해 관심을 끄는 것은 지난 5월11일 김 전대통령의 입원이다.
이날 김 전대통령의 비서관인 김한정씨는 “김 전대통령이 심장부에 대한 불편을 호소해 주치의와 상의한 후 예방적 차원에서 검진과 진료를 받기 위해 1주일 정도 예정으로 입원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김 전대통령은 사타구니 안쪽에 접혀 있는 동맥 안으로 풍선을 집어넣고, 풍선에 바람을 넣어 접혀 있는 동맥을 펴주는 확장술을 받았다. 이 병원 정남식 교수는 “수술이 아니라 내과적인 시술이었다”며 “시술은 잘 되었고 김 전대통령의 상태는 상당히 좋다”고 전했다. 이어 정교수는 김 전대통령은 암을 비롯한 다른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김 전대통령은 특검 수사가 시작(4월17일)되기 직전인 4월13일에도 종합검진을 위해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와 함께 2박3일간 국군 서울지구병원에 입원했었다.
김 전대통령이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 특검은 강제 구인할 수 있다. 그러나 강제 구인은 혐의사실이 분명할 때 실시하여야 한다. 즉 김 전대통령이 현대로부터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여러 차례 특검의 소환에 응하지 않을 때 강제 구인을 시도할 수가 있다.
DJ의 입원, YS의 등산
검찰이나 특검·국회일지라도 전직 대통령을 소환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1999년 환란 책임을 규명하고 한보그룹 사건을 밝히기 위해 열린 국회 경제청문회는 김영삼(金泳三) 전대통령의 출석을 요구했다. 그러나, YS는 국회가 출석을 요구한 날 측근들과 함께 등산을 갔다. 그것으로 YS의 국회 증언은 무산되었다.
특검이 여러 차례 소환을 요구하면 김대중 전대통령측은 신병 치료차 도미(渡美)를 결정할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소식통들은 YS의 ‘등산’이 DJ에게는 ‘입원’이 될 수도 있다며, 현대가 김 전대통령이나 김 전대통령 측근에게 금품을 주었다는 사실이 포착되지 않는 한 김 전대통령 소환은 물론이고 측근 실세들에 대한 구인이나 기소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따라서 특검 주변에서는 진작부터 현대의 계좌와 장부를 조사해 현대의 돈이 김대중 정부 실세들에게 흘러들어 갔는지의 여부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대북송금 특검법은 특검은 검찰로부터 검사 세 명을 지원 받을 수 있고 기타 검찰이나 경찰·금감원 등에서 최고 15명의 공무원(수사관과 계좌추적 전문가)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특검팀은 16명의 특별수사관을 임명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실제로 특검은 이용호 게이트 수사에서 실력을 발휘한 검찰의 이모 수사관과 계좌 추적의 1인자로 불리는 전직 검찰 수사관인 임모씨 등을 채용했다.
현대가 김대중 정부 실력자들에게 금품을 제공했다면 그 돈은 비자금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특검의 일차 수사는 현대가 조성한 비자금을 밝히는 데 초점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현대의 분식회계가 드러날 수가 있다.
최근 시민단체의 폭로로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난 SK는, 채권단이 채권 회수에 나섬으로써 위기를 맞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분식회계 사실이 드러나 채권단이 채권회수에 나선다면 ‘가뜩이나 허약한’ 현대는 큰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염려 때문인지 현대는 오히려 특검의 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있다. 소식통에 따르면 현대아산의 김윤규 사장 등은 어느 은행을 통해서 송금했는지 등을 상세히 밝혔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특검팀이 현대의 모든 장부와 계좌를 뒤짐으로써 분식회계 사실이 포착될 것을 염려한 현대측이 방어적인 협조를 하는 것이라는 풀이도 있다.
그러나 현대는 대북송금은 경협 차원이었고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는 아니었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특검은 현대의 분식회계 사실을 포착해 ‘현대그룹이 해체되도록 하겠다’며 압박을 가하지 않는 한 현대로부터는 남북정상회담의 대가로 돈을 보냈다는 진술은 받아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산업은행 대출은 처벌될 것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현대상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대출이 적법했느냐의 문제이다. 현대상선은 일시당좌대월로 대출을 신청했는데, 일시당좌대월은 기업 운전자금으로 지원되는 초단기 대출금이다. 쉽게 설명하면 일반인들이 많이 갖고 있는 ‘마이너스 통장’과 유사한 것이다.
현대는 대출한 4000억원 중 2235억원은 북한에 보내고 나머지 1765억원 중에서 1500억원 가량은 자금사정이 어려워진 현대건설의 기업어음(CP)을 사주는 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대북송금이나 CP 매입으로 사용된 돈을 기업의 운전자금으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이 대출을 허가한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처벌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때 이들에게 적용될 죄목은 ‘업무상 배임’.
특검은 현대상선에 대한 대출을 결정한 산업은행 관계자에 대한 압수수색을 할 때에도 수색영장에 업무상 배임 혐의가 있다고 기록했었다.
특검의 수사가 김대중 정권의 실세들은 놓치고 대출에 관계된 산업은행 관계자만 기소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다면 ‘몸통은 빠져나가고 꼬리만 잡았다’는 비난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기소된 산업은행 관계자들이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대통령의 지시를 받게 돼 있다. DJ를 비롯한 김대중 정부의 실세들이 시켜서 대출을 결정했다”고 주장한다면, 법원은 이들에게 적용된 업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릴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꼬리만 기소했는데 그마저 무죄 판결이 나왔다’며 특검 수사의 허술함을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날 수도 있다.
현대, 대가는 부인 송금 수사는 협조
한국은행법에는 같은 그룹에 포함된 회사들은 그 그룹 자본금의 25% 이상을 대출받을 수 없다는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이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있기 전 현대그룹은 왕자의 난을 겪으며 심각한 재정위기를 맞았다. 그로 인해 계열사 곳곳이 대출을 받아 연명을 했는데 2000년 5월 현재 현대그룹은 동일인 여신한도를 넘어서 있었다. 따라서 6월7일 산업은행에서 4000억원을 대출받은 것은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을 어긴 것이다. 산업은행 관계자들은 동일인 여신한도 규정을 어긴 데서 빠져나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2235억원의 대북 송금 과정이다. 6월7일 현대상선은 산업은행 본점 영업부(1000억원)와 구로지점(1000억원), 여의도지점(2000억원)에서 4000억원을 일곱 장의 수표로 인출했다. 그리고 돈세탁을 하듯 이 수표를 여러 금융기관에 돌려 잘게 쪼겠다가 합치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6월9일 국가정보원 직원이 배서한 액면가 합계액 2235억원인 26장의 수표가 외환은행 본점 영업부에서 북한으로 송금되었다.
여기서 왜 현대상선의 돈을 국가정보원 직원들이 들고 왔느냐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부분에 대해 당시 국정원장이었던 임동원씨는 송금 편의를 제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현대가 이 돈을 국정원에 주었다고 주장한다면 정상회담을 위한 ‘대가성의 돈’으로 정의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는 송금을 의뢰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특검을 난감하게 만드는 요인이 아닐 수 없다.
외환은행은 국정원 직원이 가져온 이 돈을 적법하게 다루었는가도 살펴볼 문제다. 외환은행 직원들이 금융실명제를 위반했는가의 여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실명제는 수표의 원주인이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게 아니고 수표를 가져온 사람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환은행 직원들이 국정원 직원의 신분증을 본 후 수표에 배서한 내용과 같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외한은행 직원들은 무죄다. 현재까지 나온 이야기로는 수표에 배서된 것과 국정원 직원의 인적사항이 일치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외환은행 직원들에게 금융실명제 위반죄를 적용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국정원 직원이 가져온 수표 중에서 10억원짜리에는 국정원이 아닌 외환은행 직원 인적사항이 배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환전 수수료를 계산하는 과정에서 잔돈(금액이 적은 수표)을 만들 필요가 있었고, 외환은행 처지에서는 원래 수표의 배서를 확인했기 때문에 잔돈을 만들기 위한 수표는 업무 편의상 그들이 배서했다고 설명한다. 10억짜리 수표에 배서한 외환은행 직원은 이 수표가 부도나면 책임을 져야 하지만 현행법상 금융실명제 위반으로는 처벌하기 어렵다.
금융실명제 위반은 없다
외환은행은 백성기 전 외환사업부장이 밝혔듯이, 오래 전부터 국정원의 송금을 대행해주었다(166페이지 기사 참조). 따라서 송금과 관련된 외환은행 관계자들은 면책될 가능성이 높다. 대신 송금을 의뢰한 국정원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 여부가 관심을 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에서는 최규백 기조실장과 김모 예산담당관(2급) 등 고위인사가 임동원 원장의 지시를 받고 현대상선 돈을 송금하는 데 관여했다. 국가정보원법은 직권 남용을 금지하고 있으나, 남용의 범위는 ‘사람을 체포하거나 감금하는 것’과 ‘다른 기관이나 단체 또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으로 한정돼 있다.
국정원 직원들이 외환은행에 송금을 의뢰한 것은 체포나 감금과는 전혀 무관하다. 또 외한은행은 해외송금을 하는 곳이니 ‘의무 없는 일’을 시켰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임동원씨와 최규백씨 등을 국정원법 위반으로 기소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는 것은 남북교류협력법과 국가보안법에 의한 기소 여부이다. 그러나 당시는 남북 교류를 활성화하던 시점이므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남북교류협력법은 통일부장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북한과 접촉한 사람은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최고 형벌은 징역 3년이나 벌금 1000만원 이하이다.
수천억의 대출을 받아낸 사람에게 벌금 1000만원은 그야말로 ‘껌값’이다. 현대는 이 정도의 형벌만 받고 풀려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현대건설 싱가포르 지사가 북한에 보낸 돈이나, 현대전자 스코틀랜드 공장 매각 대금이 북한에 제공된 것은 모두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이뤄져, 현대측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사실 규명이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사실관계가 밝혀지더라도 남북교류협력법에 따라 벌금 1000만원 이하의 처벌만 할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솜방망이’가 된다.
현대그룹의 대북송금 의혹은 김대중 정부의 실력자들이 현대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지 않거나 현대측에서 정상회담을 위해 보냈다는 진술이 나오지 않는 한 결국 4000억원을 대출해준 산업은행 관계자 몇몇만 업무상 배임 혐의로 처벌받고 현대 관계자들은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선고받는 선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높다.
청문회부터 열었어야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 대북송금 의혹은 온나라를 흔들어놓았지만 흐지부지 끝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특검 주변 사람들은 특검 구성을 요구한 한나라당의 단견을 지적한다.
“1997년 김영삼 정부는 전두환(全斗煥) 전대통령 등을 5·18 내란 음모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그때 김영삼 정부는 ‘5·18 특별법’이라는 칼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대북송금 수사는 칼(특별법)도 없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실을 밝혀도 처벌은 미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치적인 득실로 따진다면 한나라당은 특검이 아니라 대북송금 규명을 위한 청문회부터 구성했어야 한다. 청문회에서는 사실 규명이 우선이므로 많은 것을 따지며 여당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그런데 한나라당은 특검, 그것도 현대의 대북송금으로 한정된 특검을 성급히 수용함으로써 김대중 정부의 실력자들에게 오히려 면죄 기회를 주는 자충수를 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