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튼 미국은 적어도 군사력에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임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고대 로마제국이나 동아시아의 한(漢)제국을 훨씬 뛰어넘는 지배력이다. 이 ‘현대의 제국’은 앞으로도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전쟁이 끝난 지금 던져볼 필요가 있는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세계적인 경제지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장 빌 에모트는 ‘20:21 비전: 도전받는 평화, 의심받는 자본주의’(더난출판사)에서 그럴 것이라고 예상한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반미 정서가 역설적으로 미국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한다.
바깥 세상 없는 미국은 불가능
그에 따르면 제국으로서의 미국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하고 자비로운 방식으로 지배력을 행사한다. 그런 방식의 지배가 20세기에 전세계적으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확산을 가져왔으며, 21세기에도 세계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 같은 지배적인 국가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곁들인다. 책 제목에 나오는 ‘20:21’이란 숫자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저자는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긍정적이다. 미국의 자본주의체제는 유럽과 달리 청산이나 해고 같은 창조적 파괴에 익숙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라는 게 그의 예측이다. 유럽이 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붙들려 부담을 느낄 때 미국은 언제라도 한결 가볍게 앞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가 결론적으로 어떤 충고를 할 것인지 짐작하긴 어렵지 않다. 미국 이외의 나라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와 자본주의체제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모트의 시각은 다분히 현실주의자의 그것이다.
에모트의 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시 제국이 쇠퇴할 가능성은 없을까? 이런 궁금증이 든다면 프랑스 국립인구연구소 자료국장으로 역사학자인 에마뉘엘 토드의 ‘제국의 몰락: 미국 체제의 해체와 세계의 재편’(까치)을 읽어보자. 토드는 미국은 보호자가 아니라 약탈자에 불과하며, 결코 완전한 제국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심지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에서 여러 강대국들 사이의 하나로 쇠퇴할 것이라 주장한다.
그는 우선 ‘세계의 인구와 경제가 유라시아에 집중, 통합돼 가는 반면 미국은 신대륙 한편에 고립돼 있다’는 브레진스키의 지적, ‘제국이 외교적·군사적 힘을 사방에 펼쳐놓은상태는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쇠퇴할 때 나타나는 고전적 현상’이라는 폴 케네디의 지적을 인용한다. 브레진스키나 폴 케네디는 미국의 대표적인 주류 지식인에 속한다. 주류의 목소리를 빌려 ‘외곽을 때리는’ 토드의 솜씨가 사뭇 절묘하다.
경제적으로 볼 때 1945년 미국의 총생산은 전세계 생산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세계 경제의 미국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다. 지난 10년간 미국의 무역적자는 1000억달러에서 4500억달러로 늘었고, 이 차액은 외국자본의 유입으로 메워졌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미국 없는 미국 바깥 세상은 가능해도, 바깥 세상 없는 미국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미국인들은 미국 바깥 세계 없이는 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저자는 미국이 세계 각지에서 일으키는 전쟁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할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야말로 이 책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인상적인 부분이다. 그에 따르면 미국이 느끼는 불안은 연극적 군사주의 혹은 연극적 행동주의로 표출된다. 즉 내부의 자신감 상실과 모순을 이란·이라크·북한 같은 나라를 위협 또는 침공함으로써 감추고, ‘나 아직 이렇게 살아 있어!’라고 외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에모트와 토드는 각각 미국적 시각과 유럽적 시각을 반영하긴 하지만 어느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거나 동조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각자의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비교적 객관적인 분석과 전망을 내놓고자 하는 게 두 저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미국 정부 내 보수파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로버트 케이건의 ‘미국 vs 유럽: 갈등에 관한 보고서’(세종연구원)는 ‘제국이여 영원하라’는 논지에 가깝다. 미국이 내세우는 대의가 인류의 대의이며, 미국의 동맹국들이 망설일 때 전쟁과 외교를 좌우하는 압도적인 힘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게 미국의 정당한 역할이라는 것. 결국 미국 이외의 세계가 할 일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에 적응하려는 노력뿐이다.
이 책의 특징은 케이건의 비유에 있다. 그 비유는 술집의 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무법자가 술집에서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다. 아무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이윽고 술집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정의의 보안관. 결국 보안관이 무법자를 제압하고 술집에는 다시 피아노 소리가 울리면서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을 마시고 춤을 춘다. 서부영화에서 한 번쯤 꼭 등장할 법한 이 장면이 바로 오늘날 국제정세의 축도(縮圖)다.
무법자가 이라크라면 보안관은 미국이다. 흥미로운 건 술집 주인이 유럽이란 점이다. 무법자도 보안관도 술집 주인을 건드리진 않는다. 술집 주인은 싸움이 시작되면 카운터 뒤로 숨기 바쁘다. 그리고 무법자건 보안관이건 자기 술집을 망가뜨리는 걸 싫어한다. 보안관이 공짜로 지켜주므로 안전 무임승차를 하는 셈이면서도 늘 불만이 많은 게 술집 주인, 즉 유럽이다.
소프트 파워 vs 하드 파워
미국을 바라보는 독자의 입장에 따라 위의 세 권의 책은 마음에 들 수도,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케이건의 책에 대해서는 ‘뭐 이런 게 다 있어’라고 말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 권의 책을 두루 읽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에 대한 현실주의적 시각과 비판적 시각은 물론, 미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주류 집단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권의 책만 놓고 보면 2:1 스코어로 미국의 승리다. 단 그런 승리에도 조건은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국가정보위원회 의장과 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를 지냈고, 보수와 진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균형감각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 조지프 나이가 제시하는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나이는 ‘제국의 패러독스’(세종연구원)에서 ‘오만함이나 다른 나라의 주장에 냉담한 태도를 보이는 행동, 새로 대두한 일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편협한 국익 접근방식 등은 미국의 소프트 파워를 잠식할 수 있는 요소임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여기서 ‘새로 대두한 일방주의자들’은 부시 정부의 근간인 미 공화당의 보수세력을 가리킨다. ‘소프트 파워’는 보수세력이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삼는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을 뜻하는 ‘하드 파워’에 대립되는 말이다.
나이에 따르면 소프트 파워는 ‘국제정치 무대에서 적절한 의제를 제시해 다른 나라들을 사로잡는 일’이며 ‘미국이 바라는 것을 다른 나라들이 원하게끔 만드는 것’이라 설명한다. 힘 자랑만 하지 말고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대화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 더 나아가 사실상 자발적으로 미국을 따라오도록 만드는 유연한 문화적·외교적 전략이 나이가 말하는 소프트 파워다. 결국 나이는 부시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일단 비판하면서 소프트 파워의 강화라는 대안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도 적용하여 이렇게 말한다. ‘북한과 남한이 통일된다면 통합된 한반도는 인접한 두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려 미국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강대국과의 동맹관계를 유지하려는 강한 유인을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활동이 고압적일 경우 미군 주둔 반대로 빚어지는 거센 민족주의가 이런 정황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親美, 反美 이전에 ‘知美’를
우리가 반미나 친미를 외치기 전에 미국을 정확히 파악해야 하는 까닭, 미국에 관해 말하는 책들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을 바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노암 촘스키나 하워드 진 같은 미국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성의 목소리에도 귀기울일 필요가 있지만, 미 정부 내 주류의 시각을 파악하는 것도 그에 못잖게 중요하다. 촘스키와 진의 비판을 일종의 내부 고발자의 시선이라고 한다면, 케이건의 주장은 고발당하는 세력의 시선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게 상반되는 시선을 두루 파악해야 한다. 미국은 좋든 싫든,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여러 요인 가운데 하나의 변수가 아니라 절대적인 상수에 가깝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