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4월8일부터 사흘간 한국과 북한, 러시아와 몽골 관계자들이 참석한 고위당국자 회의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렸다.
- 회의 결과는 물론 개최 사실도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 회의는 형식상 UN 산하기구가 주최했지만 실질적으로는한국정부가 주도했다. 회의에서 채택된 ‘동북아 에너지 협력에 관한 고위당국자 합의문’은, 직접적인 대북지원이 아닌 다자협력 틀을 사용해 우리도 이익을 얻고 북한 경제에도 도움이 되는 이른바 ‘윈윈 게임’ 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 합의문의 부속서는 좀더 상세한 사업추진 방안을 담고 있다. 다자간 협력체는 한국, 북한, 중국, 러시아, 몽골, 일본을 범위로 하지만 다른 나라나 관련 국제기구도 재정지원 등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특히 북한과 몽골 두 나라의 경제사정을 고려해 ‘특별 지원(Special Support)’의 필요성에 동의하고, 이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검토·실행한다고 명문화했다.
또 하나 주목되는 사항은 3개 참가국 이상의 이해가 맞으면 협력체 안에서 공동 에너지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한 부분. 이러한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고위당국자위원회를 설립해 정기회의를 열고 그 산하에 에너지분야 재구성(restructuring), 전력연결, 화석연료 이전 등을 담당하는 세 개의 태스크포스 혹은 실무그룹을 두기로 했다. 이 실무그룹은 구체적인 프로젝트의 경제성을 검토하고 실무추진을 맡게 된다.
언뜻 국내 에너지 수급을 위한 지역협력체 구성방안으로 보이는 이 합의문이 의미를 갖는 것은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상황 때문이다. 지난해 10월 북핵 위기가 불거진 이래, 에너지 지원은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당근’의 하나로 유력하게 검토되어왔다. 에너지 제공을 북핵문제 해결 로드맵의 일환으로 삼아, 극심한 전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북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대북 에너지 지원 추진체 될 듯
3월말 러시아 모스크바를 방문한 라종일 청와대 안보보좌관이 러시아 당국자들과 만나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대북 전력(電力) 지원사업에 나설 용의가 있다”며 이르쿠츠크 등에서 남북한을 연결하는 가스관 건설을 대안 중 하나로 언급한 것으로 전해져 논란이 일었다. 이후 청와대가 사실무근이라고 부인하고 나서기는 했지만 정부 최고위층의 의사가 흘러나온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됐다. 그런가 하면 노무현 대통령 또한 3월26일 러시아 최대 천연가스회사이자 시베리아 및 극동지역 에너지개발 사업조정자인 가즈프롬의 사장 알렉세이 밀러를 단독면담한 사실이 알려져 그 이유와 배경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난무한 바 있다.
그동안 대북 에너지 지원 논의는 물밑에서 진행돼온 것이 사실. 민간 기업들 간에 실무협상을 벌이고, 정부는 이를 비공식적으로 검토하는 방식으로 추진돼왔다. 이번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서 합의된 ‘동북아 에너지 협력체’는 수면 아래에 있던 대북 에너지 지원방안을 공식적으로 논의하고 실무적으로 추진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북 양자간의 직접 지원이 아닌 ‘다자간 협력’의 틀이 새로 마련됐다는 점에서 ‘퍼주기 논란’을 피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통일부 당국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러시아로부터 에너지를 수입하는 중간과정에서 북한에 일부를 지원하자는 방안은 사실 통일부 입장에서도 기대가 크다. 한국도 이익을 얻고 북한도 이익을 얻는 ‘윈윈 게임’이기 때문이다.
DJ정부의 대북지원은 쉽게 말해 돈을 주고 안보를 사는 형태였기 때문에 ‘퍼주기 논란’을 피할 수 없었지만, 이 경우는 에너지도 얻고 안보도 얻는 일거양득 아닌가. 가히 ‘노무현 정부식 대북지원’이라 부를 만한 새로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가 이 방안에 의지를 갖는 것이나, 이를 구체화해 나갈 다자간 지역협력체가 마련됐다는 점에 관계부처가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북한은 전기석탄공업성 부상 내보내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 참석한 한국 측 공식대표단은 15명. 단장은 이원걸 산자부 자원정책심의관이 맡았고 관련부서 실무자들이 동행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한국전력 등 정부 유관기관의 부서장급 연구원들도 대거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초 외교부와 청와대 관계자들도 대표단에 포함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개최지인 러시아 정부와의 최종 조율과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측은 “당초에는 우리 부에서도 과장급 실무자가 동행할 예정이었지만 러시아 사정상 참석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지난 3월26일 러시아 가즈프롬의 알렉세이 밀러 사장과 회담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러시아는 연해주 부지사와 대통령 직속 감독관, 에너지 관련부서 및 외무부 실국장, 관련기업 대표 등 3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석했다. 에너지를 ‘파는’ 입장인 만큼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전언이다. 반면 몽골은 에너지 관련부서 차관급 인사 2명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규모. 그밖에 UN개발계획(UNDP), 아시아개발은행(ADB), 국제에너지기구(IEA) 등 관련 국제기구 대표들도 참석했다.
한편 회의 직전까지 참가를 검토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과 중국은 끝내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수교를 맺지 않은 북한과는 당국자 회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공식적으로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대신 관련 연구진 10여 명이 비공식 참관해 논의과정을 꼼꼼히 주시했다고 회의 참석자들은 전했다.
제안, 발제, 뒤처리까지 한국 주도
중국측이 공식적으로 밝힌 불참 이유는 최근 단행된 정부 조직개편으로 인해 주무 담당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2030년이 되면 필요한 석유의 8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해야 할 만큼 심각한 에너지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이 대표를 보내지 않은 것은 예상 밖이라는 것이 회의를 주관한 UNESCAP 담당자의 평가다. 이에 대해 우리 정부의 한 관계자는 “한국이 주도권을 갖고 사업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평했다.
회의의 공식 주최자는 UNESCAP이었지만 실질적인 주최자는 한국이었다는 사실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이미 산자부는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관련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동북아 에너지 협력체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다른 나라들에 제안한 것 역시 우리측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 준비과정에 참여한 한 정부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당초 UNESCAP과는 무관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북한이 참여하게 하려면 UN의 틀 안에서 진행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으로 한국 정부가 끌어들인 것이다. 사실 이번 고위당국자 회의 또한 원안은 평양에서 개최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한측의 내부사정이나 한반도 정세가 여의치 않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바꾸게 되었다.”
회의 진행과정도 한국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일치된 전언이다. 합의문 또한 우리 정부에서 준비한 안이 거의 그대로 채택됐다는 것. 새로 만들어지는 협의체의 의장도 한국이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 역시 북한측 입장을 고려해 UNESCAP이 맡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이번에 만들어진 협력체의 공식회의는 오는 10월 다시 열릴 예정이지만, 실무그룹과 연구센터, 사무국 등은 그 이전에 활동을 개시하기로 했다. 이를 준비하는 업무 또한 우리 정부가 담당하고 해당기구는 한국에 설치하기로 잠정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쯤 되면 외형적으로는 다자간 협력사업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정부의 사업에 인근 국가들이 ‘몸만 대주는’ 형국이다.
동북아 전체를 포괄하고 북한까지 함께하는 사업의 규모와 특성 때문에 외교부, 통일부, 국정원, 재경부 등이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관계자들은 전한다. 일단 실무추진은 산자부에서 맡고 있지만 관계부처들을 조율하려면 청와대가 맡을 수밖에 없다는 것. 대표단에 참여한 정부 당국자는 “자세한 내용은 공개할 수 없지만 출발하기 전에 청와대로부터 훈령을 받았고, 돌아오자마자 즉시 보고서를 제출한 것으로 안다. 비밀로 분류된 이 보고서는 장관을 거쳐 청와대는 물론 통일부, 외교부, 국정원, 재경부 등 관련기관에도 전달됐다”고 말했다. 한편 단장을 맡았던 산자부 심의관은 귀국 직후 민주당 정책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와 함께 지난 4월 출범한 대통령 직속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가 향후 실질적인 정책총괄을 맡게 되리라는 분석도 있다. 이미 관련된 정보를 상당부분 축적한 것으로 알려진 추진위는 금융·물류 등과 함께 에너지 분야의 동북아 경제협력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4월29일에는 산자부 고위 관계자가 위원회에 출석해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와 합의사항에 대해 보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북 에너지 지원을 둘러싼 관심의 또 한가지 초점은 ‘과연 어떤 에너지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하는 부분.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전력, 천연가스, 석유 등 종류별로 토론이 진행됐다는 것.
천연가스의 경우는 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와 극동의 야쿠츠크, 사할린 등에서 북한, 한국, 일본까지 가스관을 연결하는 방안이 거론되었다. 전력의 경우는 극동러시아의 조력자원, 시베리아의 수력자원을 활용하거나 연해주 지역에 화력발전소를 건설해 송전선을 끌어들이는 모델이 제기됐다. 석유의 경우는 국가 간의 송유관 연결보다 공동구매 및 비축이 중점적으로 논의됐다는 전언이다.
이러한 방안들은 대부분 러시아를 공급자로, 나머지 국가들을 소비자로 삼는 구도다. 때문에 구체적인 방안 역시 러시아가 주로 제안하는 형식이었다. 이번 회의에서 러시아측은 정부기관 뿐 아니라 시베리아 가스관에 대한 개발권을 갖고 있는 가즈프롬, 극동지역 전력을 맡고 있는 보스토크에네르고 등 관련기업의 임원들도 참석해, ‘수요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섰다고 한다.
이 가운데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이미 한·러 간에 상당히 논의가 진전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르쿠츠크 가스관 방안(208쪽 관련기사 참조). 이 지역에 천연가스전을 갖고 있는 영국의 BP(the British Petroleum)와 우리측 사업자인 7개 민간기업 컨소시엄이 합의를 이루는 경우, 이번에 구성된 협력체가 그 실행과정을 맡게 될 것이라고 산자부 관계자는 말했다.
북한 입장에서도 이르쿠츠크 사업은 초미의 관심사.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번 회의에 참석한 북한 대표들은 초반 내내 “어떤 사업이든 가능한 한 빨리 추진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르쿠츠크 사업의 경우 가스관이 북한지역을 통과할 것으로 판단했던 북한 당국은 우선 건설과정에서의 고용유발과 함께 향후 고정적인 천연가스 수급, 이를 이용한 발전소 건설 등에 기대를 걸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북한지역 대신 서해 해저통과가 더 경제성이 높다는 분석이 제기되면서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다. 이번 회의에도 유럽 기술진이 참석해 가스관 해저통과방안에 대해 브리핑을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북한측은 회의 후반에는 기술적으로 해저통과가 쉽지 않은 전력 연결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였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이와 함께 전력 연결이 가스관에 비해 짧은 시간 안에 실행될 수 있는 사업이라는 점도 한시가 급한 북한측의 구미를 당기는 요소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했던 북한 조창덕 부총리는 러시아 측에 ‘연해주~북한간 40만㎾ 전력교환’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은 지난해 말 러시아 민간기업으로부터 소규모 전력을 공급받기로 MOU(양해각서)를 체결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현재 북한의 에너지 수급사정은 1989년과 비교할 때 33%선에 불과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 이 정도면 한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폭동이 일어났을 수준이라는 것이다. 북한 정부는 향후 3~4년 내에 이를 1989년의 50%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당면목표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의 과정에서도 북한은 비공식적으로 우리측 대표에게 탄광 현대화, 디젤유 공급, 전력기술 현대화, 전력망 정비사업 등 ‘임시방편용’ 지원을 요청했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오래 걸리는 것이 오히려 장점”
일각에는 이러한 에너지 협력방안이 북한의 핵포기 등 구체적인 문제해결을 유도하는 ‘당근’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가장 큰 단점은 직접적인 도움을 주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는 것. 사업 자체의 경제성을 검토해 투자를 유치하고, 가격, 세금, 이윤분배 등 ‘소프트웨어’에 합의한 뒤, 가스관이든 송전선이든 ‘하드웨어’를 연결해 실제로 에너지를 제공하기까지 최소한 2~3년, 길게는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외교안보연구원의 이동휘 연구실장은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단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북핵문제만 놓고 봐도 앞으로 협상과정이나 핵폐기를 검증하는 작업에 수 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준비기간이 필요한 에너지 협력의 메리트가 더 커진다. 북한의 태도 변화에 따라 진행상황을 조절해가며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제네바 합의에서 제공된 ‘당근’이었던 KEDO의 경수로 지원도 역시 장기 프로젝트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다자간 에너지협력체는 KEDO식 해결을 좀더 생산적인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라 해석하면 된다.”
한편 이실장은 “노무현 정부가 다자간 에너지협력을 대북지원 방안으로 검토하는 것이 혹 반대진영의 ‘대북 퍼주기’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것 아니냐”는 주장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런 효과가 있다 해도 사업 추진과정에서 생기는 ‘부수적인 효과’로 보는 것이 옳다. 노무현 정부가 오로지 비난이 두려워 다자 틀을 추진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다자간 에너지 협력 틀을 이용한 대북지원의 앞길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가장 민감한 것은 북한을 둘러싼 정치적인 상황 변화에 따라 사업의 진척과 관련 국가들의 뜻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 5월12일로 예정돼 있던 관련회의가 취소된 일련의 과정은 이러한 한계를 잘 보여주는 예다.
러시아 시베리아 지역에 있는 가스전. ‘수출국’인 러시아는 동북아 에너지 협력에 적극적인 입장이다.
전문가 토론 위주의 프로그램이었고 참가 또한 개인자격으로 이루어지는 자리인 까닭에 4월 고위당국자 회의에 비해 ‘무게감’이 약하기는 했지만, 4월 회의에 참석했던 국내 관계자들과 북한 당국자 일부가 다시 만날 예정이어서 관련 전문가들은 물론 정부 관계부처에서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개최를 나흘 앞둔 5월8일 갑자기 취소됐다.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우리측 관계자는 “비행기표까지 예약해두었는데 돌연 취소전화가 왔다. 별다른 사전통보는 없었다”고 전한다. 노틸러스연구소측이 밝힌 공식적인 취소 이유는,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던 북한 대표 4명이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감염 우려를 이유로 불참한다고 통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북한측 관계자들과 연락을 취한 한 인사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사스 위험지역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 있겠나. 베이징 3자회담에서 미국이 보여준 태도가 ‘무성의했다’고 생각한 북한 최고위층에서 보이콧을 결정한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노틸러스 회의가 달갑지 않았던 미 국무부 또한 베이징 회담 이후 여러 경로를 통해 회의 취소를 종용해왔던 것으로 안다고 이 소식통은 덧붙였다. 외형적으로는 정치문제가 개입할 여지가 적어 보이는 동북아 에너지 협력과 이를 통한 대북지원 모색도, 상당부분 미국의 의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시사하는 사례다.
특히 부시 행정부 내에는 에너지 협력체를 통해 지역주의가 강화되면 북한 문제를 포함한 동북아 정세에서 자국의 영향력이 감소할 수도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심상렬 실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공식적으로 미국의 동북아 경제전략 창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이다. 새로 만들어지는 동북아 에너지협력체는 미국의 APEC 컨셉트와는 방향이 맞지 않는다. 한마디로 미국이 컨트롤하기 어려운 협력체인 것이다. 이는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협력체를 통해 북한에 대한 협력과 지원이 시스템화·정례화하면 미국이 북한을 제어할 수 있는 여지가 줄어든다. 미국이 이를 환영할 리는 없다고 본다.”
한마디로 미국의 암묵적인 동의와 지지가 없이는 에너지 대북지원이 쉽지 않은데 미국의 입장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견해다. 그렇다면 이러한 난관을 뚫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4월 블라디보스토크 회의에 참석한 산자부의 한 관계자는 “에너지 개발사업에 참여하거나 최소한 투자를 통한 이윤 획득을 노릴 미국 출신의 다국적 자본을 이용하는 것이 한 방법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 자본 통해 부시 행정부 제어”
사업의 종류와 평가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러시아로부터 북한을 통해 에너지를 수입하는 방안에는 최소 200억달러 규모의 자금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 막대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세계 에너지시장을 좌우하는 석유메이저 회사들을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 더욱이 미국 부시 행정부에 대해 막강한 로비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사업에 참여할 경우 미국 입장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앞서 산자부 관계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미국 출신의 다국적 회사인 엑슨 모빌은 이미 사할린의 천연가스를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들여오는 프로젝트 제안서를 정부출범 전 노무현 당선자측에 전달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이 제안서에는 부시 대통령을 설득해 북핵 문제를 해결할 남·북·미 3자 정상회담을 열어 사할린 가스관 프로젝트 시행의 계기로 삼는다는 복안도 담겨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미 북한과 상당히 구체적인 부분까지 사업을 진행시키고 있는 기업도 있다. FSI컨설팅이라는 회사는 조선민족에네르기위원회와 북한 두만강 및 압록강과 DMZ를 잇는 가스관 공사에 대해 독점적인 사업수행권을 갖는 계약을 맺었다. 미국 정부 입장과는 무관하게 기업 입장에서는 동북아 협력체와 대북 에너지 지원이 ‘돈이 되는 사업’인 것이다.”
이러한 의견을 종합해보면 미국 석유회사들이 향후 동북아 에너지 협력사업 추진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큰 몫을 할 용의가 있음은 명확해진다. 고위당국자 회의 합의문 부속서에 ‘해당 국가가 아닌 나라의 정부나 단체도 재정문제 등에 참여할 수 있다’고 규정한 것 역시 이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완을 가진 다국적 자본들과 밀고당기는 협상을 벌이고, 이들이 다시 미국 정부를 압박하도록 유도하면서도 한미관계에 손상이 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고차방정식’이다. 과연 우리 정부는 이 복잡한 게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까. 동북아 에너지 협력체와 이를 통한 대북지원은 우리 정부의 의지대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인가. 국익을 위한 ‘뱀 같은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