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형법학의 선구자 베카리아.
- ‘이기적 인간’을 긍정하는 것으로부터 죄와 형벌의 본질을 탐구했다.
- 고문, 잔혹한 벌, 사형 폐지를 주장한 근대의 르네상스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창한 한 인간적 사회사상가의 뜨거운 외침.
흔히 유럽에는 북구형과 남구형 사고방식이 있다고들 한다. 전자는 독일과 프랑스 중부, 북부 유럽의 그것으로서 근현대적인 것이고, 후자는 남부 유럽, 특히 이탈리아에 특징적인 것이라고들 한다. 일본을 비롯한 대다수 비서양 후진국은 전자를 선택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비서양권의 유럽 이해는 북구형에 치중되어 남구형에 대한 오해나 편견을 갖게 됐다.
북구형 근대는 종교개혁, 근대과학 및 자본주의라는 3대 지주를 그 뿌리로 한다. 또한 보편주의, 논리주의, 객관주의라는 3대 원리가 그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반해 남구형 근대는 코스몰로지, 심볼리즘, 퍼포먼스를 3대 원리로 한다. 외국어 남발의 악취미는 없으나, 번역하기에는 문제가 있어 그대로 쓴다. 코스몰로지란 우주 철학, 심볼리즘은 상징주의, 퍼포먼스란 실행으로 번역될 수 있으나 다 조금씩 이상하다. 여하튼 ‘고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미묘한 조화 속에서 표상, 레토릭, 외관 등을 중시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이런 남구형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도 어느 정도 공통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한편 남구형 문화는 권위·권력에 대한 저항과 함께 지적 체계에 있어 의문과 회의를 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측면에서는 분명 우리와 다르다. 이는 이탈리아 지식인의 자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절대적 이념을 결코 절대적으로 숭상하지 않으며, 오히려 유연하고 변경 가능한 ‘지(知)’를 즐긴다. 이는 경우에 따라 일관성을 결여하고 편의주의에 빠질 수 있는 단점도 있지만, 현실적응을 가능케 하는 탄력성이라는 면에서는 분명 장점이다.
이러한 남구형 사고의 유연성은 북구형 지식이 선과 악의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구별하는 것과 대비된다. 남구형에는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제에는 논의의 여지가 있고, 모든 가치는 그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이탈리아인은 토론을 즐기며 개별적인 행동을 중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일상생활에서 가치판단을 하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반도는 너무도 강력하고 순수한 사상에 지배되고 있다 생각된다. 남쪽은 그런 자본주의, 북쪽은 그런 공산주의다. 이는 단재 신채호가 이미 오래 전에 지적한 대로 옛날부터 순수한 불교, 순수한 유교만을 고집한 전통 탓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고집으로는 불확실하고 혼돈스러운 현실세계에 충분히 대처할 수 없다.
강한 사상, 약한 사상
그런 측면에서 나는 이탈리아적 사상의 발현인 ‘약한 사상’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1983년 움베르토 에코를 비롯해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엮은 동명의 책은 명백하게 형성된 어떤 구체적 사상이 아닌, 처음부터 그를 거부하며 새로운 지적 자세를 도전적으로 제기하고자 한다. 즉 하나의 기준 아래 통일된 전통적 사고방식을 극복하려는 점에 그 새로움이 있는 것이다. 에코의 여러 소설도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사고방식인 ‘강한 사상’은 사고의 자유를 놀라울 정도로 제한한다. 이에 반해 ‘약한 사상’은 사고, 묘사, 자기표현, 자기변혁, 자신의 삶을 좁은 틀 속에 강제하는 ‘강한’ 이성을 부정한다. 절대적 진리를 전제하는 강한 이성은 제국주의, 전체주의, 폭력적 국가주의, 정치적 학살이라는 근대의 많은 비극을 낳은 근본원인이었다. 자신과 다른 것은 무조건 배제하며 다른 사상을 이해하는 여유를 갖지 못한 탓이다.
그런 만큼 지금 우리에게야말로, ‘강한 이성’이나 이를 무조건 부정하는 비합리주의가 아닌, 유연하고 연약한 이성을 근거 삼아 존재를 명확히 하는 서술·상징·기호를 중시하고, 차이·복잡성·다양성을 존중하는 사상이 절실히 필요한 것 아닐까?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러한 남구 유럽형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다. 최근 에코 등의 저서가 번역되고 있으나, 그 사상의 긴 역사를 훑어 보기에는 관련 문헌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최근 이탈리아 계몽사상가인 비코, 베카리아의 저서가 소개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이들의 사상은 그야말로 기본에 불과하다. 인문사회과학의 고전, 아니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이 책들을 우리는 이제야 겨우 읽기 시작한 것이다.
베카리아
기독교의 공인 이후 유럽의 역사는 정치권력과 종교권력의 투쟁으로 점철되었는데, 특히 이탈리아 로마에는 교황청이 있어 투쟁이 격렬했다. 교황청을 부정하고 정치권력을 지지한 단테는 그로 인해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 후 스페인 계승전쟁(1701~14)의 결과 오스트리아가 밀라노공국과 나폴리왕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정치권력이 종교권력에 대항하는 토대가 형성됐다.
비코와 무라토리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비코(1668 ~1744)의 ‘새로운 학문’(1725년)은 1720년대 나폴리에서 빚어진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한 것이었다. 비코는 노아의 홍수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의 구약성서 역사서술 세계와, 이후 헤브라이인의 역사를 전망한 고대 이교(異敎)신화의 세계를 나누어 그 둘을 양립시키는 세계사의 구상을 제시했다. 데카르트의 이성에 의한 연역적 방법이 유행하고 있을 때 비코는 비합리적 요소를 인정한 가운데 생활감각과 역사감각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역사를 신들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로 구분했다. 그의 역사관은 괴테, 콩트, 마르크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코가 말한 이교 세계의 역사는 성서의 역사와는 구별된 세속사 또는 세속세계사다. 그 사회이론을 가장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는 시민법으로서의 로마법이 있다. 따라서 비코는 로마법의 근본원리는 신의 섭리이며, 자연법이 곧 그 섭리의 규제력임을 상정해, 이것이야말로 시민사회와의 가교 기능을 갖는다는 주장을 폈다. 이 책은 오늘날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 역사학을 비롯한 인문사회과학의 선구로 평가받고 있으나 당대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시 나폴리에서는 조정이 아닌, 국가권력의 확립이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가 비주류의 소외된 법학자라는 점도 무시당한 이유 중 하나였다.
국가권력의 확립을 향한 노력은 당시를 지배한 로마법을 신의 섭리로부터 떼어내 나폴리 국가의 정치적 자립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로 계속 나타났다. 그 대표 논객인 무라토리(1672 ~1750)는 북이탈리아 모데나공국에 속했는데, 그곳은 나폴리와 함께 18세기 초엽 국가권력 확립의 최전선이었다. 무라토리의 ‘법학의 결함에 대하여’(1742년)는 법적 권위의 자의성을 개혁하고자 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로마법이 신의 섭리라 하나, 사실상 정의란 부정이고, 법학이란 수많은 소송을 낳는 온상에 불과하며, 소송을 통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법률가일 뿐이라고 비코를 비판했다. 현실과 유리된 로마법은 시민사회의 법으로서는 부적합하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의 책을 읽으며 바로 우리의 법 현실을 말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까지 받았다.
법학·의학은 유익한 학문인가
이후 1740년에 시작된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이 1748년에 끝남으로써 18세기 이탈리아는 역사적 전환을 맞게 됐다. 이어진 평화의 반세기가 새로운 사회개혁을 촉발한 때문이다. 그 중심은 밀라노였다. 밀라노는 18세기 초엽부터 오스트리아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여서 교회의 영향이 적었다. 덕분에 1760년대에 들어서면서 피에트로 베리와 알렉산드로 베리(1741~1816) 형제, 베카리아 등이 중심이 된 개혁사상가들의 모임 ‘주먹의 모임’이 생겨났다.
피에트로 베리는 동명 잡지에 실린 논설 ‘유익한 학과’에서 법학과 의학을 비판했다. 보통 사람들은 소송에 이기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라 생각해 법학과 의학을 유익한 학문이라고 결론짓지만, 이러한 직접적 유익함은 ‘진리의 발견’을 통해 실현될 수 있는 학문 본래의 유용성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즉 법학과 의학은 적절하게 처리되면 유익하나, 법률가와 의사가 넘쳐나면 사회에 해를 끼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게으른 시민’이 되거나 ‘일을 질질 끌기 위해 소송이나 음모, 질병을 조장함에 틀림없고, 그러한 일은 유익한 학과의 이름에 값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은 입신 출세와 금전 확보의 학문이 된 법학과 의학을 교육·학문의 중심으로 삼은 당시의 지배층, 즉 도시귀족을 겨냥한 것이었다. 피에트로 베리는 1763년 귀족의 아성인 원로원을 공격하면서, ‘법의 주인’인 판사들, 즉 원로원이 시민의 재산, 생명, 명성에 관하여 법에 반해 또는 법 밖에서, 법에 규정된 형식에 따르지 않고 판결을 내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알렉산드로 베리는 더욱 직접적으로 로마법을 비판했다. 즉 공화국, 군주국, 전제정 등 이질적 정치제도 하에서 성립된 고대 여러 법을 하나로 묶은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었으므로 이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군사사회에 불과한 로마의 우월성 자체에 의문을 던졌다. 이는 당시 봉건귀족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르네상스 이래의 전통적 인문주의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탈리아 계몽 사상의 전통 위에 베카리아가 있다.
베카리아는 전형적인 이탈리아 밀라노인이었다. 어려서 받은 기독교 교육을 ‘광신적이고 인간감정의 발달을 질식시킨다’며 비판했고, 법학을 공부한 뒤 부모가 반대하는 결혼을 했다. 그 뒤 베리 형제의 계몽주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권유로 형법을 연구, 1764년 ‘범죄와 형벌’을 썼다. 그 책으로 인해 26세의 베카리아는 곧 국제적 명사가 되었다. ‘범죄와 형벌’은 특히 프랑스에서 1765년 번역된 후 반년 만에 7판을 거듭했으며 이어 전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1995년에 이르러서였다. 형법학과 형벌제도 개혁의 선구자라는 그가 쓴, 죄형법정주의와 사형폐지론의 고전이랄 수 있는 이 책은 법학도는 물론 사회과학도라면 당연히 읽어야 할 고전이다. 사형을 비롯 부당한 형벌의 철폐와 감소를 주장한 이 책은 유럽 각국의 형사법 개혁 논의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빈민의 범죄는 사회적 저항”
이론적으로는 19세기에 독일을 중심으로, 형벌이 아닌 범죄 감소에 초점을 둔 형사정책적 실증주의가 대두해 베카리아를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적 고전파 형사법이론에 강력한 도전장을 던졌으나, 전자가 유태 학살 등 반인도적 결과를 초래함에 따라 고전파가 재평가받게 됐다. 특히 인권 사상의 고양과 함께 형벌과 행형의 자의성과 재량권 남용에 대한 비판 및 축소 요구, 인권으로서의 신체의 자유와 적법절차의 강조 등이 다시 중시되면서 베카리아 형사법사상은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형사법이론 고전파의 고전이자 여전히 생명력을 자랑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이 당시 유럽에 충격을 던진 직접적 계기는 원전 자체가 아니라, 1765년에 번역된 프랑스어판을 통해서였다. 이 프랑스어판은 원저의 장별 구성을 대폭 바꾸고, 내용까지 조정한 것으로 한글 번역판도 이를 따르고 있다. 그래서, 예컨대 베카리아가 형벌에 대립하는 사회적 규제 원리로 강조한 명예가 프랑스어판에는 ‘명예훼손’이라는 하나의 범죄로 전환되었다. 한편 브루크하르트는 그의 명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서, 베카리아 시대에 명예란 르네상스 이래 인간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최후의 도덕적인 힘으로 여겨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프랑스어판은 법학적 관점에서 편집된 것이나, 베카리아는 법학자라기 보다는 사회이론가 내지 사회개혁가로서 이 책을 썼다고 봐야 한다. 말하자면 베카리아를 단순히 법학자가 아닌 사회사상가로 보아야 그의 법학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사회이론을 펼치는 한 영역으로 형벌문제를 다루었다. 특히 범죄를 통해 구체제 사회제도에 반항하는 빈민의 입장을 견지했다. 이 점에서 그는 지식인 중심의 이성 숭배에 그친 프랑스 계몽사상가들과 분명히 구별된다.
여기서 특히 중시되는 것이 명예라는 귀족적 질서원리다. 베카리아는 명예라는 것 자체가 자율적 질서를 형성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사회개혁안으로서의 형벌제도를 비판적으로 검토했다. 즉 그의 의도는 형벌제도 자체가 아니라 감정에 따라 활동하는 근대적 개인을 창출하기 위한 제도적 전제를 탐구한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감정의 중시야말로 이성을 중시한 프랑스식 계몽주의와 이탈리아 계몽주의가 구별되는 지점이다. 이는 멀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 가까이는 비코의 영향이기도 했다.
특권은 인간을 物化한다
베카리아에 있어 근대적 개인은 미성숙 단계에 머물러 낡은 제도를 타파하는 주체로 계몽적 전제군주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를 지닌다. 그러나 인간을 이성의 주체일 뿐 아니라 감성의 주체로 보고, 그에 대한 형사법의 적용을 문제삼은 점에서 특징적이다. 그의 제도 비판과 교육의 강조 또한 근대 계몽주의적 한계라 볼 수도 있으나, 그 유용성을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부정하기 어렵다. 도리어 이는 교육형주의(범법자에 대한 교정교화 작용을 통해 범죄적 심성을 근원적으로 순화, 재범에 이르지 않고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함)가 막연한 추상적 대안에 그치고 있는 데 비해, 일반적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개선을 도모한 점에서 현대적 의의를 갖는다는 적극적 평가를 내릴 여지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부자와 권력자에 대한 빈민의 저항은 소수자에 의한 미조직의 것이며 새로운 사회를 형성할 전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베카리아의 빈민은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빈곤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구체제의 특권 계급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특권’을 허용하는 한 인간은 더 이상 인격이 아닌 물건이 된다고 베카리아는 주장했다. 그렇다고 베카리아가 빈민의 범죄를 찬양한 것은 아니다. 그가 추구한 것은 그러한 빈민의 힘을 범죄가 아닌, 새로운 사회의 ‘최대다수 최대행복’ 실현을 위한 기초 생산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범죄와 형벌’의 기본 이념이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형사법 이론서의 수준을 넘어서는 사회개혁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베카리아는 종교적 편견과 광신에 기인한 잔혹한 고문, 과도한 형벌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처럼 베카리아는 비코처럼 종교의 세계와 세속의 세계를 분리하고, 로마법과 관습법의 혼합인 현존법을 ‘가장 야만적인 여러 세기의 분비물’이라 비판하고, 법의 기본 원리로서 사회계약과 공리주의를 주장한다. 즉 “자유인의 계약(契約)인, 또는 있어야 할 무엇인” 법은 “인민 대중의 여러 행위를 단 하나의 점에 집중시켜, 이를 최대 다수에게 분할된 최대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냉정한 관찰자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공식은 바로 여기서 비롯되었다.
베카리아는 형벌의 기원은 바로 사회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의 기원은 “지속된 투쟁 상태에서, 즉 그 유지의 불확실함에 의해 무익해진 자유를 누리는 상태에서 삶에 지친” 인간들이 “그들의 자유의 일부를 희생하여 나머지를 평온하고 안전하게 누리고자” 한 것으로 “각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한 자유 부분의 총화가 국민의 주권을 형성하며, 주권자란 그 합법적인 수탁자이자 관리자”로 작용한다. 그리고 법은 그러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한 조건으로 이해된다.
여기서 베카리아는 자유의 누림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계약을 상정한다. 그리고 형벌권은 ‘정의=사회질서의 유지’라는 형벌의 사회적 기능에 의해 부여되고, 동시에 한계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즉 사회 질서의 유지를 통해 인간의 나머지 ‘자유=개인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고, 그 한도를 넘으면 형벌이 아니라 폭정으로 바뀐다는 주장이다.
베카리아는, 형벌권은 ‘정의=사회질서의 유지’라는 사회적 형벌의 기본원리를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오직 법에 의해서 범죄에 대해 형벌을 명할 수 있고, 이러한 권위는 사회계약에 의해 결합된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입법자에게만 있다.” 즉 루소처럼 일반의지를 대표하는 주권자만이 입법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둘째, 사회 질서의 대표자인 입법자의 역할은 입법권에 한정되어야 하므로 사법권은 분리 독립되어야 한다. 이러한 베카리아의 ‘입법자=주권자 권력’을 제한하는 논리는 절대 주권을 정당화하는 홉스의 논리와는 반대다. 즉 베카리아는 사회계약에 의해 사회 구성원과 일체화된 ‘입법자=주권자’가 사법권을 행사하고, 구성원을 탄핵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며 “그렇게 되면 국민은 두 부분으로 분열되어 일방을 대표하는 자가 계약의 침해를 주장하는 주권자, 타방을 대표하는 자가 그것을 부정하는 피고가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따라서 사회 계약의 침해 유무를 판정하는 사법관이 필요하다.
셋째, 잔혹한 형벌은 설령 공공 이익과 범죄 예방이라는 목적에 직접 반하지 않아도 ‘정의와 사회 계약 그 자체의 본성’에 반한다. 즉 법의 목적은 사회계약을 체결한 사회 구성원의 보호에 있다.
넷째, 사법관의 권한을 사실인정에 한정하여 법의 자의적 해석에 의한 사회질서의 동요를 예방해야 한다. 여기서 베카리아는 ‘법의 정신’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부정하고, 법관의 철저한 논리적 법적용을 주장한다. “동일한 범죄를 동일한 법원에서 다룰 경우에도 시기에 따라 달리 처벌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법원이 언제나 일정한 법의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고, 자의적이며 불안정한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법의 자의적 해석을 방지하려면 라틴어가 아닌 ‘민중어=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성문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법의 애매성은 민중에게 행위규칙을 명시하기 위해서 사라져야 한다. “신성한 법전을 이해하는 사람이 늘면 늘수록 범죄의 빈도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형벌에 대한 무지와 불확실성은 정염의 웅변을 부채질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회질서의 틀을 만들기 위해서는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력=형벌’을 발동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유효한 규제 수단과 유효성의 기준이 분명해야 한다. “범죄가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정도에 따라, 그리고 인간을 범죄로 이끄는 충동의 정도에 따라 그를 억제하는 기제 또한 더욱 강해져야 한다. 범죄와 형벌의 정도는 비례해야 한다.”
여기서 인간 행위의 기본 동인, 그리고 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해악의 구분이 고찰 대상이 된다. 그리고 고문과 사형과 같은 잔혹한 형벌은 당연히 금지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된다. 고문은 인간 본성의 부정이고, 사형은 야만적이기에 유해하며 사형보다도 고통을 지속시키는 종신노력형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사형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인간은 오류 없는 존재가 아니므로 사형을 과할 충분한 확실성은 결코 보장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상 베카리아는 사회 질서의 기초를 쾌락과 고통이라 보고, 이는 이성에 의한 자기 규제의 계기를 갖지 못해 ‘범죄=질서 파괴’로 이어지며, ‘잘못된 입법=잘못된 형벌제도’에 의해 본래는 반질서적이 아닌 행위까지 범죄로 보는 이중의 의미에서 범죄행위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범죄를 형벌로 규제하고 새로운 사회질서 형성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범죄를 그 오명(?)에서 해방시키는 것(낡은 사회에 대한 비판)이 과제가 된다.
베카리아는 형사재판에서 증언의 신빙성과 증거의 입증능력을 검토하는 것은 훌륭한 입법에 중요하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누구라도 증거의 입증능력, 즉 범죄사실 유무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있으며, 따라서 추첨에 의해 선임된 배심원이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감정에 의해 판단하는 무지가 학설에 의해 판단하는 학문보다 확실하고, 죄인을 발견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모든 것을 그들의 서재에서 가져온 인위적 체계에 맞추는 재판관의 학식보다 훨씬 오류가 적은, 단순하며 평범한 양식이 더 신뢰받을 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유죄로 판결하는 데 익숙해진 법관은 언제나 사물을 그가 받은 교육에 따라 인위적인 체계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카리아는 말한다. “법률에 대한 지식이 일종의 학문이 될 필요가 없는 나라는 얼마나 행복한가!” “일반인이 재판하는 배심 재판에서는 권세 있는 자가 약자에 대해 갖는 우월감도, 하류층이 상류층에 대해 갖는 경멸감도 작용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베카리아는 재판에서 민중의 감각적 판단도 양식에 따르는 한 타당하다, 즉 이성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베카리아에게 양식이 타당한 범위는 한정되어 있다. 즉 배심원은 피고인과 동일한 사회계층에서 선임돼야 하고, 양식의 작용은 그 내부에 머무는 것으로서 사회 전체에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수사 기간은 자유의 박탈을 초래하므로 짧은 쪽이 ‘더욱 옳고’, 그것이 유용한 이유는 과형이 신속하면 ‘범죄와 형벌이라는 두 관념의 연합이 인간의 마음 속에서 더욱 강하고 더욱 영속적으로 된다’는 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베카리아는 ‘감정적 활동이 보호되는 경우에 생기는 불평등으로 인한 폐해’를 시정하고 이를 유도할 수 있는 형벌제도를 추구한다. 감정적 활동으로 축적하는 부는 명예라고 하는 귀족적 원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나, ‘귀족의 부=감정적 활동’과 빈민의 그것은 대립한다. 근대적 개인은 빈민으로, 구제도에 반항하는 범죄자로 나타난다. 사회 내부의 불평등과 빈부 대립은 그러한 심각한 모순과 관련된다.
이처럼 베카리아는 빈부의 대립을 전제한다. 그는 빈민 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빈민은 절도로 소유권을 침해하나, 베카리아는 소유권을 불필요한 권리로 보고, 절도를 ‘불행한 범죄’로 본다. 베카리아는 잔혹한 형벌을 명하는 법이 ‘소수자=부자’의 편이었음은 역사가 증명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불행한 사람들은 ‘최초의 자연상태로의 절망적인 복귀’인 범죄를 강요당한다. 이러한 범죄자들에게는 사회의 존재이유가 없으므로 범죄는 사회질서의 침해행위로부터 ‘부자=귀족’의 사물로 변한 낡은 사회체제에 대한 거부의 표현으로 바뀐다.
이기심의 자유로운 발동을 위해
베카리아는 법률에 의한 체포를 주장하고, 무죄 석방된 경우에는 어떤 불명예의 낙인도 찍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소송기간은 처벌의 신속성을 위해 짧아야 하고, 피고인의 방어와 범죄의 증명을 위한 기간은 법률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범죄를 ‘흉악범죄’와 ‘하급범죄’로 구분한다. 흉악범죄는 신체 생명의 침해, 하급범죄는 재산의 침해를 말한다. 생명은 자연권이나, 재산은 자연권이 아니라 사회계약의 산물에 불과하다. 그리고 생명 침해는 재산 침해에 비해 그 수가 적다. 따라서 흉악범죄의 피고인은 무고한 자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 심리기간은 더욱 단축되어야 한다.
베카리아는 질서유지의 수단으로 형벌이 무조건적인 정당성과 우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영역을 흉악범죄라는 좁은 범위에 한정한다. 그리고 재산권 침해의 경우 형벌은 평판이라는 또 하나의 행위규칙과 경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간통 등은 형벌에 의한 직접 규제가 적절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베카리아는 사회질서의 틀 형성이라는 고유의 수비범위를 벗어나 사회적 결합을 파괴하는 형벌 제도를 검토한다. 범죄인의 목에 상금을 걸거나, 공범 밀고자에 대한 형벌 면제는 반도덕적인 것이라고 비판한다. 이어 베카리아는 형집행자의 자의를 막기 위해 재판의 형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그는 유럽을 피로 물들인 광신에 반대하기 위해 종교와 사상의 관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관용을 주장한 것은 아니며, 사회질서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사상의 통일을 주장하면서 그러한 사회질서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현실적 주체로서 주권자를 내세운다.
프랑스 혁명을 소재삼은 들라크루아 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따라서 베카리아는 “범죄 방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빛이 자유를 동반하게 하라! 지식에서 생긴 해악은 그 보급에 반비례하고, 이익은 그것에 정비례한다” “지식은 대상을 쉽게 비교할 수 있게 하며, 그에 대한 시각(이해)을 증대시켜 많은 감정을 대치시키며, 타인에 대해 같은 시각과 반발을 상정하면 그만큼 서로 감정을 쉽게 수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교육을 통해 대등한 타인의 존재가 자각된 시점에서 비로소 사람들은 사회계약을 맺으며, 희생한 자유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자유이므로 사회계약인 법에의 복종은 타인에 의한 침해로부터의 보호라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교육은 질서유지의 보조수단이 아니라, 사회형성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베카리아에 의하면 주권자는 사형폐지론으로 대표되는 진리를 배워 사회에서 스스로에게 부여된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사회질서의 틀인 입법과, 내부의 자율성 결여를 메우기 위한 교육이라는 두 축은 사회질서의 형성과 유지를 위한 논리의 지식이다. 따라서 지식의 원천인 학문은 인간에게 필요악인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이 인간성에 언제나 유해하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필요악으로서의 학문이란, 최초의 사회 형성에 이어 인구가 증대하면서 ‘언제나 더욱 치명적이 되는 비사회상태라는 최초 상태에로의 반복적 복귀’를 저지하기 위해 필요한 종교였다. 그러나 베카리아의 시대에는 새로운 학문인 철학을 탐구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주권자=입법자’와 민중에 대한 교육기능을 담당하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형성하는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다.
형벌은 감성을 제어할 수 있는가
베카리아는 마키아벨리나 갈릴레이와 같은 이탈리아의 사상사적 전통에 서서 영국과 프랑스의 계몽사상을 흡수해 스스로 그러한 지식인임을 자각했다. 그러나 스스로 제시한 그 실현의 수단은 사실상 빈곤한 것이었다. 법의 우위의 주장, 미덕 유도의 제창, 그리고 교육의 중요성의 강조 등이 간단히 언급된 데 불과하다. 아울러 ‘주권자=입법자’에 대한 기대, 즉 사형 폐지를 핵심으로 하는 형벌제도의 개혁을 표명한 것에 그 한계가 있다.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에서 사회계약설을 기본 원리로 삼아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새로운 사회질서 형성의 가능성을 형벌제도 비판을 통해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쾌락과 고통의 원칙에서 비롯되는 이기심을 인간 행위의 원리로 인정하면서도 이기적 개인으로 형성된 사회 그 자체로부터의 자율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형벌이라는 외부적 규제에 의해 이기심의 맹목적 발동을 억제하고 그것을 밖에서 유도하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형벌은 행위의 외부적 규칙에 불과하므로 그것은 적극적 행복 추구라는 개인의 행위규칙으로서는 무력하다.
그래서 베카리아는 이기심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 즉 이기심의 맹목적 발동을 규제하고, 쾌락과 고통의 원칙을 공공이익의 형성과 결합시키기 위한 내적 매개를 탐구한다. 이는 이기심의 사회성 획득을 위한 통로로서 미의 세계 추구로 나타나 1770년 ‘문체의 본성에 관한 연구’로 열매를 맺었다.
미적 쾌락의 향유는 감각적 능력이므로, 이성이 아닌 감성에 따라 움직이는 민중을 긍정하는 베카리아의 ‘범죄와 형벌’의 인간관은 ‘문체의 본성에 관한 연구’에도 그대로 이어져, ‘범죄와 형벌’에서는 전망하지 못한 민중의 주체적 형성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즉 이성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분열이 여러 개인의 등질성의 부정으로 이어져 사회계약설의 근저가 흔들린 ‘범죄와 형벌’의 난점을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동시에 ‘문체의 본성에 관한 연구’는 당시 법학 기초과목의 하나인 법정변론에 도전하는 책이기도 하다. 당시 법학의 언어였던 라틴어가 법을 민중과는 무관한 법조의 독점물로 만든 원인이었다는 ‘범죄와 형벌’의 비판을 계승해, 라틴어의 규범적 지위에 대한 도전을 통해 폐쇄적인 법학 언어로부터 이탈을 도모한 것이다.
베카리아는 1769년부터 3년간 밀라노 황실학교에 설치된 경제학강의를 담당했고, 그 강의록은 그의 사후인 1804년에 ‘공공경제학의 원리’라는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뒤에 슘페터가 베카리아를 ‘이탈리아의 스미스’로 부른 것은 바로 이 책으로 인한 것이나, 사실 베카리아는 노동분업의 개념 및 식량공급과 인구의 관계를 주장한 스미스나 맬서스의 사고를 그들보다 앞서 보여주었다.
‘범죄와 형벌’에서 베카리아는 소유권을 불필요한 권리로 보았으나, ‘공공경제학의 원리’에서는 경제에 대해 더욱 적극적인 평가를 시도했다. 그는 나머지 생애를 밀라노의 최고경제위원회 위원으로 보내며 화폐개혁, 노사관계, 공교육을 비롯한 여러 개혁에 헌신했다.
당시 그가 쓴 보고서는 그 후 프랑스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미터법을 채택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그는 혁명을 열광적으로 지지했으나, 이어진 공포정치에 충격을 받아 통탄을 금치 못하며 죽었다.
베카리아의 사회계약론은 인간의 자기 보존 활동, 즉 이기적 행동을 자연권에 근거해 정당한 행위로 보는 것을 말한다. 잔혹한 형벌의 개선과 사형폐지는 그 필연적 결과다. 그리고 공리주의는 여러 개인의 이기적 행동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원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베카리아는 그 원리인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현하는 자를 입법자인 군주로 본다. 따라서 개인의 행복 추구의 결과로 ‘최대 행복=공공 복지’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군주에 의해 공공 복지가 실현된 뒤에 행복이 분배된다는 이론을 갖게 된다. 즉 민중에게는 공공 복지의 실현을 위해 스스로의 행위를 규제하는 능력이 결여돼 무질서의 성향을 띤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베카리아의 논의는 명백히 당시의 계몽 군주와 그를 둘러싼 이성적 능력을 갖춘 소수자에 대한 기대를 담고 있는 것으로, 결코 민중을 향한 민주주의적인 시각은 아님이 명백하다. 소수와 민중의 대별로 베카리아의 사회이론은 당연히 형사법이론이라는 분야를 통해 전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베카리아의 주장을 현재 차원에서 비판할 수는 없다. 그의 사상은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위험이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계몽군주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점은 충분히 고려돼야 하며, 도리어 그가 다른 계몽 사상가와는 달리 민중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재산범을 관대하게 보고자 한 점 등의 현대적 의의는 충분히 평가돼야 한다.
특히 베카리아의 논의는 한국의 현실에서 보면 더욱 진보적인 측면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형 폐지를 주장하고 배심제를 주장한 점에서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범죄와 형벌’이 발간된 지 2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에 담긴 ‘진보성’을 제대로 체현하고 있지 못한 때문이다. 고문, 잔혹한 형벌, 간통 등 도덕적 범죄의 처벌을 부정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범죄와 형벌’은 여전히 우리에게 살아 있는 고전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는 다양한 지식을 현실에 입각해 통일적으로 추구한 르네상스적 지식인으로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