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계철선, 노태우 정부 때 이미 사라졌다
- 2사단과 8군, 한국 떠난 전력 있다
- 2사단 3여단, 영원히 한국 떠나 신속기동여단으로 재편
- 2사단 2여단도 철수해 신속기동여단으로 재편될 가능성
- 2사단은 6개월마다 여단 단위로 한국에 순환 전개할 수도
- 현존군·잠정군·목적군으로 재편중인 미 육군
- 2사단 공중강습대대와 8군 예하 두 개 항공여단 간의 관계
- 501정보여단, 5정찰대대, CACC, SUSLAK 등 비밀정보 부대
- 데프콘 2부터는 戰時, 작전계획 5027의 비밀은 이것
- 북한 상륙작전 계기로 데프콘 1 선포, 이후는 北進 공격
- 한미연합사 가동 과정, 한국과 미국의 NCMA가 통제
- 유사시 미군 증원 계획인 FDO와 FMP, TPFDD의 비밀
- 전시에 증파되는 미군은 평시의 한국군(69만)과 같은 69만명
- 한국에 배치된 WRSA와 한미간 군수지원협정이 갖는 의미
- 평화통일 위해서는 한미공조 강화해야
그렇다면 지금의 2차 북핵 위기도 일부 주한미군을 철수하고 재배치한 후 미북간에 모종의 타협점을 찾아내는 것으로 귀착되지 않을까. 2차 북핵 위기와 주한미군 철수 사이의 ‘함수’를 살펴보려면 주한미군에 대한 ‘숙지(熟知)’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지도층은 이러한 노력을 방기한 채 주한미군 문제를 ‘마구’ 거론하고 있다.
좋은 예가 3월6일 고건(高建) 국무총리 발언이다. 이날 토마스 허바드 주한 미 대사를 만난 고총리는 “주한미군의 인계철선 역할은 유지되어야 한다”며 주한미군 기지 이전에 반대했다고 한다. 인계철선(引繼鐵線)은 ‘trip wire’를 번역한 것으로 북한군이 남침하면 미국군의 자동개입을 보장하는 단어로 이해돼왔다.
그러나 인계철선 역할에 대해 미국 조야는 ‘왜 우리가 총알받이가 되어 (반미정서가 강한) 한국을 방어해주느냐’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리언 러포트 한미연합사령관은 4월20일 MBC에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인계철선은 부정적인 용어이고 미 2사단 장병에게는 모욕적인 발언이다. 인계철선은 파산한 개념이다”고 밝힌 바 있다.
“인계철선 거론은 모욕적”
결론부터 말하면 고총리의 발언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1992년 이후 미국군은 휴전선에 인계철선 역할을 할 부대를 배치해놓고 있지 않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지금 “주한미군은 인계철선 임무를 해야 한다”며 엉뚱한 주장을 펼친 것이다.
군사분계선(MDL) 남북 2km 지역이 비무장지대(DMZ)다. 이 비무장지대 바로 남쪽(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초소를 ‘GOP (General Out Post : 일반전초)’ 비무장지대 안쪽 수색대가 관할하는 초소를 ‘GP(Guard Post: 감시초소)’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판문점은 비무장지대 안쪽 군사분계선상에 있고 이 판문점을 경비하기 위해 유엔군은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캠프 보니파스’를 운영하고 있다. 캠프 보니파스에서 판문점으로 가는 길 좌우에 GP 오울렛과 콜리어가 있었다.
1971년까지 미 2사단은 현재 휴전선을 방어하는 한국 육군 사단처럼 판문점 주위 18마일(28.8km)의 휴전선을 방어했다. 그러다 1971년 3월21일 7사단이 철수하자 휴전선 방어를 한국 육군 1사단에게 넘기고 후방인 동두천으로 이동했다.
2사단의 휴전선 방어 중단은 한국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한국 정부는 상징적으로라도 2사단이 휴전선의 일부를 방어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캠프 보니파스와 판문점은 ‘사실상의 미군 부대’인 유엔군이 관할한다. 따라서 미국은 2사단의 일부 부대로 하여금 캠프 보니파스에서 판문점으로 가는 길 좌우에 있는 GP 오울렛과 콜리어를 지키게 했다.
제2의 한반도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군은 ‘지뢰가 깔려 있지 않은’ 이 길을 따라 남침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GP 오울렛과 콜리어는 북한군과 교전할 수밖에 없고 병사들이 희생되면 미국은 본토에서 증원군을 끌고 와 북한군과 전쟁에 들어갈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렇게 GP 오울렛과 콜리어에 있는 미 2사단 병사들은 유사시 미군의 자동참전을 유도하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이를 ‘인계철선’이라고 불렀다. 인계철선은 한미 군사당국이 사용한 외교 용어가 아니라 양쪽이 임의로 이해해서 붙인 ‘시사적 용어’였던 것이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난 후 한국에서는 성조기를 불태우는 등 반미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한미은행 점포를 공격할 정도로 무조건 미국을 반대하는 정서가 팽배했다. 그러자 미국에서 반미국가인 한국을 왜 지켜주냐며 주한미군 철수론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하여 1992년 말 2사단 예하 한 개 여단이 철수했는데 이때 GP 오울렛과 콜리어의 방어가 한국 육군 1사단에게 넘어갔다. 2사단은 인계철선 임무에서 완전 해제된 것이다.
인계철선 역할을 하던 주한미군 초소는 이미 11년 전에 사라졌다. 그런데 노무현(盧武鉉) 정부가 인계철선 임무를 계속하라고 요구하자 미국이 발끈했던 것이다. 다행인 것은 고건 총리의 다음 행보였다. 5월6일 고총리는 “앞으로는 주한미군을 인계철선 대신 ‘전선의 동반자(Frontline Partnership)’로 부르겠다”며 현명한 방향전환을 하고 다음날 2사단을 방문해 한미관계를 강화하는 행사를 가졌다.
1992년에는 북한군이 동두천 일대에 포진한 미 2사단 부대를 가격할 수 있는 방사포를 보유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방사포 보유가 확인돼 2사단 전체가 다시 인계철선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확대 해석하면 인계철선의 개념이 너무 커진다는 문제가 있다.
미국은 자기네 젊은이들이 희생되는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인계철선 이야기가 거론되면 될수록 주한미군을 빼내거나 남쪽으로 재배치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계철선을 거론하는 것은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라는 간접적인 압력이 된다. 이러한 상식을 갖고 주한미군의 모든 것을 분석해보기로 하자.
주한미군은 6·25전쟁의 부산물이다. 1950년 6월25일 전쟁이 터졌을 때 한국에는 주한미군이 없고 소수의 고문단만 있었다. 당시 한국 육군은 여덟 개 사단을 갖고 있었는데, 열 개 사단으로 편성된 인민군이 공격해오자 맥없이 무너졌다. 개전 사흘 만에 인민군의 공격으로 2사단과 5사단은 ‘완전 해체’되었고, 1사단과 7사단 및 수도사단은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한 채 패퇴를 거듭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1950년 7월14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미국 극동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위임한다’는 서한을 보냈다. 이로써 한국 방어는 한국군이 아닌 미국군의 몫이 되면서, 대거 미군이 건너와 인민군과 싸우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주한미군을 만들어낸 단초였다.
1953년 7월 휴전이 성립될 당시 한국군은 30만 정도였는데, 한국에 파병된 미군 병력은 30만2483명이었다.
에서처럼 휴전 시기 한국에 있던 미군 부대는 2·3·7·24·25·40·45사단과 해병대 1사단 등 여덟 개 사단과 1·9·10의 세 개 군단, 한 개 군사령부(8군), 그리고 한 개 공군 작전사령부(5공군)였다. 그러나 1955년이 가기 전에 미국은 일곱 개 사단과 두 개 군단, 한개 공군을 철수해 한국에는 7사단과 1군단, 그리고 8군만 남게 되었다.
주한미군 철수와 관련해 한국 정부가 가장 경악했던 것은 1954년 11월, 6·25전쟁을 지휘한 8군을 일본 자마(座間)로 철수했을 때였다. 이러한 안보 불안은 1955년 7월1일, 8군이 다시 서울 용산으로 이전해옴으로써 해소되었다.
미군의 신속한 철군은 북한에 들어왔던 중국군의 철수와 궤를 같이하는 측면이 있었다. 1954년 9월18일 중국은 북한에 있는 중국군 중 40만명을 철수시킨다고 발표하고 1955년 말까지 19개 사단을 철수시켰다.
철수했다 다시 돌아온 2사단
에서 주목할 것은 8군뿐만 아니라 주한미군의 대명사인 2사단도 한국을 떠났다가 되돌아온 역사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은 그들의 세계전략에 따라 부대를 이동시키기 때문에 한국이 강력히 붙잡지 않으면 쉽게 부대를 빼내는 경향이 있다.
전쟁은 끝났지만 휴전선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국민의 불안감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휴전선에서의 충돌을 거의 보도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1950년 7월의 이승만 편지 이후 한반도 안보를 떠맡은 미국은 이 문제를 간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57년 12월7일 ‘기동력이 뛰어난’ 1기병사단을 파견해 주한미군은 한 개 군·한 개 군단·두 개 사단이 되었다. 휴전 이후 최초로 주한미군이 증강된 것이다. 1964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에 개입했다. 베트남의 위기가 높아지자 1965년 6월30일 미국은 ‘기동력이 뛰어난’ 1기병사단을 베트남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한국 방어를 위해 전략군단 소속으로 미국에서 훈련을 해오던 2사단을 바로 다음날 한국에 파견했다.
한 개 군-한 개 군단-두 개 사단의 주한미군 체제에 큰 변화가 닥친 것은 베트남전 말기인 1971년이었다. 1969년 7월2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아시아의 방위는 아시아의 힘으로 하라”는 독트린을 발표하고 약 42만명의 미군을 아시아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에 할당된 숫자는 ‘2만명’이었다.
1971년 3월21일 미국은 동두천에 주둔해온 7사단을 철수하고 판문점 일대 휴전선을 지키던 2사단은 인계철선 역할을 할 두 개의 GP 부대만 남긴 채 7사단이 머물던 동두천 지역으로 이동케 했다.
그때까지 미 1군단은 2사단과 7사단을 작전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7사단이 빠져나갔으니 1군단은 더 이상 한국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군단은 한 개 사단을 통제할 수도 있으나 보통 2∼5개의 사단을 통제한다). 그로 인해 1군단의 철수도 거론되자 놀란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묘안을 짜냈다. 미1군단을 한국군과 미국군이 함께 근무하는 한미1군단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한미1군단은 미 2사단은 물론이고 한국 육군의 1사단과 25사단, 해병대 5여단, 그리고 세 개 사단을 통제하는 한국군 6군단을 작전통제케 하자고 제의했다. 이 아이디어를 미국이 수용함으로써 1971년 7월1일 미 1군단은 한미1군단으로 개편되었다.
<표1>6·25전쟁 이후 현재까지의 주한미군 변천도
목적군으로 전환된 2사단 3여단이 사용할 경장비들. 이 장비들은 공군 수송기에 탑재할 수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M106 경장갑차, 방공무기를 탑재한 LAV 장륜장갑차, M8 자주장갑포, 113 경장갑차
그리고 공중강습대대 위주로 편제된 한국에 있는 2사단 2여단과 하와이에 있는 25경보병사단의 2여단을 놓고 저울질하다 25경보병사단의 2여단을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지정했다(총 여섯 개 부대 지정).
미국 육군이 한국에 있는 2사단 2여단을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지정하려 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지정되면 이 부대는 장비를 교체하고 다른 훈련을 받아야 하므로 한국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한미관계가 나빠지면 2사단 2여단을 미국으로 철수시켜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지정하는 것이 빨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여단급 부대를 목적군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끝나면 이어 사단급 부대를 잠정군으로 지정해 목적군으로 전환한다. 대상 부대는 10산악·82공정·101공중강습사단이 될 것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육군이 2사단과 25경보병사단 예하의 여단을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전환한 것은 미국이 2사단과 25경보병사단을 해체해 두세 개의 신속기동여단으로 만들거나, 사단 전체를 목적군(신속전개사단)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앞에서 설명했듯 미국 육군은 다섯 개의 중사단과 10산악·25경보병·82공정·101공중강습의 네 개 경사단, 그리고 경중 혼합사단으로 2사단을 갖고 있다. 경사단은 경중혼합사단보다 수월하게 목적군으로 전환될 수 있다. 그런데 왜 미국은 경중 혼합사단인 2사단을 목적군으로 전환하려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추정한다.
첫째는 주한미군의 현실적인 고민이다. 미군은 통상 1년씩 장병을 해외에 파견하는데 이때 기혼자에 대해서는 가족과 함께 살 숙소를 제공하거나 집을 구할 수 있는 비용을 지불해준다. 또 이들의 자녀를 가르칠 수 있는 교육시설도 제공한다. 그런데 이러한 부대비용이 전투병을 파견하는 비용보다 더 비싼 형편이다.
이러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미군 장병들은 한국 근무를 기피한다고 한다. 이유는 숙소의 부족 때문이다. 유럽과 일본에 근무하는 기혼 미군은 각각 72%와 74%가 미군이 운용하는 숙소에서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그러나 한국에 파견된 기혼 미군은 10% 정도만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숙소를 제공받는다. 나머지 90%는 한국인 거주지역으로 나가 가족과 함께 살 집을 구하거나 아니면 가족과 떨어져 혼자 한국에 와야 한다.
이 문제를 풀려면 숙소를 확충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반미감정 때문에 숙소 건설 부지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운 형편이다. 기존의 숙소를 헐고 큰 숙소를 짓는 것도 ‘미군이 영구 주둔하려고 숙소를 크게 짓고 있다’는 반미주의자들의 비난 때문에 원활하지 않은 형편이다. 이러한 애로를 미군은 ‘목적군’으로 풀려고 한다.
미군은 6개월간 해외로 파견하는 장병에 대해서는 가족을 딸려보내지 않는다. 때문에 6개월마다 부대를 교체한다면 이 문제는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실제로 보스니아에 있는 미군부대는 6개월마다 교체되는데 부대교체 비용이 가족을 함께 보내주는 비용보다 싸다고 한다. 따라서 2사단 예하의 여단을 신속기동여단으로 만들어 96시간 이내 전개하는 훈련을 겸해 6개월마다 한국으로 순환 배치한다면, 주한미군은 숙소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미국의 잠재적인 라이벌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에 대한 견제의 필요성이다. 미군 처지에서는 2사단을, 북한 억제용 부대로만 활용하는 것은 비경제적이다.
따라서 북한군을 억제하면서 한편으로는 중국군도 억제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다. 이 경우 2사단은 유사시 ‘중국으로 투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2사단을 미리 신속전개군으로 바꿔놓아야 한다.
2사단을 한국 이외의 다른 지역으로 투사되는 신속전개군으로 활용하려면 수송기 탑승이 수월하도록 7공군이 있는 오산 근처에 주둔시키는 것이 좋다. 최근 2사단을 오산-평택 지역으로 이전하겠다는 논의는 이런 이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검토의 연장선상에서 거론되는 것이 대(對)중국 억제부대인 ‘동북아사령부’의 창설이다. 미군이 이런 논의를 하고 있다면 중국이 민주국가로 전환되기 전까지는, 주한미군은 규모가 줄어들 수는 있어도 완전 철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역설’도 성립될 수 있다.
2사단은 8군을 거쳐 미국 태평양사령부의 통제를 받는데, 태평양사령부는 25경보병사단과 알래스카에 있는 172 독립여단도 함께 통제한다. 2사단과 25경보병사단, 172독립여단은 태평양사령부가 보유한 전육군인데 공교롭게도 이 부대들이 전부 목적군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태평양사령부가 부대를 어느 한 곳에 고정 배치하기보다 여러 곳으로 투사할 수 있도록 재편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 육군이 2사단 3여단을 필두로 잠정여단전투팀을 편제하는 것은 주한미군의 미래와 한반도의 안보환경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이러한 미국군의 변화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하면 한반도는 계속된 안보 불안상태에 머물게 된다. 전략가들은 그래서 미군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제4부 : 작계 5027과 미국의 증원전력}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유사시 미국의 증원군 파병 문제이다. 이 문제는 작전계획 5027은 물론이고 한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연합체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8군과 2사단, 7공군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주한미군)일 뿐이지 한미연합사 소속 부대가 아니다. 한미 양국은 데프콘(DEFCON: Defense Readiness Condition, 방어준비태세) 2부터를 전시로 규정하고 있는데, 데프콘 2가 선포돼야 한미연합사는 한국과 미국의 전투부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무조건적인 작전통제가 아니고 주한미군사령부가 2사단 등 예하부대를 한미연합사에 배속시킬 때 비로소 미군부대를 통제할 수 있다.
이때 한미연합사는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과 국방장관으로 구성되는 ‘국가통수 및 지휘기구(NCMA)’의 통제를 받는다. NCMA는 상설기구가 아니고 한·미 대통령과 국방장관이 회담이나 전화대화 등을 통해 합의를 도출하는 추상적인 기구이다. 여기서 ‘북한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평양 정권을 없애라’는 등의 합의가 도출될 수 있다.
이러한 합의가 이뤄지면 양국의 문민지도부(NCMA)는 각각의 합참의장에게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감행하라고 지시한다(전략지시). 전략지시를 받은 한·미 합참이 이를 한미연합사에 전달하면, 한미연합사는 ‘평양정권 제거’를 목표로 한 최신 작계인 5097-98판에 따라 대규모 군사작전에 들어간다.
NCMA의 전략지시에 의해 한미연합사가 작전통제권을 행사해 실질적인 작전에 들어가는 것이 데프콘 2이다. 데프콘 2가 선포되기 이전에는 데프콘 3가 발동되는데, 데프콘 3까지는 평시(平時)에 해당한다. 이때 한국군 합참과 주한미군사령부는 각자의 전투부대를 출동시키는 상황에 돌입한다.
한국군은 한반도에 있으므로 크게 부대를 이동시킬 필요가 없지만, 2사단을 제외한 미국의 증원군은 태평양을 건너와야 하므로 미국군은 데프콘 3 상태에서 다양한 증원작전을 펼친다. 미국군의 증원은 세 단계로 펼쳐진다.
첫째는 신속억제방안(FDO : Flexible Deterrence Option)에 의한 증원이다. 이때는 U-2기를 비롯한 공군의 정찰전략과 해군의 첩보함 등 감시·정찰 전력이 한반도로 이동해온다. 그와 동시에 150개 항목으로 구성된 다양한 북한 억제방안이 가동된다. 북한의 민간선박 이동을 막는 해상봉쇄 같은 군사·경제적인 제재는 물론이고 유엔 안보리를 동원한 정치적 압박 등이 전개되는 것이다.
데프콘 2부터 戰時
이러한 억제방안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위협을 축소하지 않으면 두 번째 단계인 전투력 증강(FMP : Force Module Package) 조치를 취한다. 미국에 있는 전투부대가 한반도로 이동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가장 먼저 이동해오는 것은 일본 사세보에 있는 7함대다. 7함대는 한 개의 항모전투단을 갖고 있다. 반면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있는 3함대는 다섯 개의 항모전투단을 갖고 있다.
3함대는 한반도의 상황을 보아가며 예하 항모전투단을 차례로 7함대에 배속시킨다. 이로써 7함대는 많으면 다섯 개까지의 항모전투단을 거느릴 수 있게 된다. 각각의 항모전투단은 한 개의 비행단을 태운 항모 한 척에 이지스순양함과 이지스구축함, 일반 구축함, 호위함 등의 전투함 7∼8척과 1∼2척의 핵잠수함으로 편제된다.
따라서 다섯 개의 항모전투단이 모여들면 비행단 다섯 개(항모 다섯 척), 각종 전투함 40척 내외, 핵잠수함 10척 내외라는 어마어마한 규모가 된다. 그러나 데프콘 3에서는 대개 두세 개의 항모전투단이 7함대에 배속될 것으로 보인다.
공군에서는 공군전투사령부(ACC) 예하 각종 비행단이 7공군에 배속돼 이동해온다. 한반도로 오는 비행단 수는 최고 10개에 이를 수 있다. 이 중에서 주목할 것이 B-1, B-2, B-52 같은 전략폭격기인데 이들은 토마호크 미사일 수백개를 합친 것보다 많은 폭약을 떨굴 수 있다. 데프콘 3에서는 최고 100여 대의 폭격기가 한반도로 이동해올 것으로 보인다.
육군에서는 포트루이스에 있는 1군단이 주방위군인 40사단(기계화)을 필두로 몇 개의 주방위군과 예비군 부대를 동원해 한반도로 달려온다. 1군단은 8군의 통제를 받으며 한미연합사의 지상군구성군 사령부의 통제를 받게 되는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그러나 북한이 수그러들지 않고 휴전선을 넘어 공격을 감행하면 데프콘 2가 선포된다. 이때부터 한국 육군은 핵심 전투부대인 1군과 3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미 8군은 2사단과 한반도로 온 1군단 세력의 작전통제권을 한미연합사의 지상군구성군 사령부에 넘기는 것이다. 지상군구성군사령관은 한국 육군대장이 맡는다. 해군과 공군에서도 같은 조치가 취해지는데 해공군구성군 사령관은 미군 중장이 맡는다.
이라크전이 발발한 지난 3월20일 송경희(宋敬熙) 당시 청와대 대변인과 기자들이 문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혼란이 일어나 ‘데프콘 2가 발동되었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한반도는 데프콘 4 상황이고 북한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워치콘(Watch Condition : 정보감시태세)은 3단계로 발동돼 있었다.
이날 송대변인이 전하려고 한 것은 ‘데프콘 4, 워치콘 3 상황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대북 경계를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강화’에 무게가 실리다 보니 일부 언론은 ‘워치콘 2로 격상했다’는 보도를 내보냈고, 일부에서는 데프콘 2가 선포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한반도에서 데프콘 3와 2가 선포된 것은 딱 한번이었다. 1976년 판문점에서 8·18도끼만행사건이 일어난 직후 에 데프콘 3가 선포되었고, 3일 후인 8월21일 도끼만행의 발단이 된 문제의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폴 번연’ 작전을 감행할 때 데프콘 2가 선포되었다.
그러자 북한은 미국이 정말로 공격하는 줄 알고 고개를 숙였다. 데프콘 2가 선포된 8월21일 김일성은 스틸웰 8군사령관에게 전무후무한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온 것.
데프콘 2는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한 전시이기 때문에 한국 육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모든 전투 장비와 보급품을 갖고 미리 정해놓은 진지로 이동한다. 북한군의 진격 속도가 빠르면 전방지역 도로변에 설치해놓은 낙석 장애물을 폭파하기도 한다. 그러나 데프콘 2에서는 북한지역으로 진격하지 않고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거부’ 작전만 감행한다.
北進은 데프콘 1부터
전쟁이 더욱 확대되면 미국은 세 번째 단계로 ‘시차별 부대전개 제원(TPFDD : Time Phased Forces Deployment Data)’에 따라 한반도로 파견하기로 돼 있는 모든 전투부대를 보낸다. 미국의 대표적인 중사단인 4사단과 1기병사단을 거느린 3군단이 주방위군과 예비군 부대를 동원해 한국으로 이동한다. 한반도로 오는 미군 함정은 160여 척, 공군기는 1600여 대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이동해오는 미군은 69만이 넘을 것이란 계산이다. 평시 한국군의 총병력이 69만인데 그보다 많은 미군 병력이 한반도로 이동해오는 것이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북한의 도발을 실질적으로 억제해온 것은 김대중 정부가 외친 햇볕정책이 아니라 미군의 증원 계획”이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증원전력 중에서 오키나와에 있는 해병대 3원정군이 한반도로 옮겨온다. 이때 한국 해병대 1사단도 모든 장비를 이끌고 한국 해군의 상륙함에 승선한다. 이러한 한·미 상륙함 세력은 비밀리에 북한의 한 해안을 택해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치는데, 그 순간 한미연합사는 데프콘 1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한미연합사는 북한군의 남침을 ‘거부’하던 작전을 중단하고, ‘공세로 이전’하는 작전에 들어간다. 휴전선 이북의 북한 땅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그리고 북한군을 부수는 ‘격멸작전’을 거쳐 ‘평양 정권’을 무너뜨리고 잔적을 소탕하는 ‘평정작전’에 들어간다. 평정작전 단계에서는 한미연합군이 점령한 북한지역을 상대로 군정을 펼치며 군정이 안정되면 황장엽씨 같은 양심적인 탈북자를 내세워 과도 정부를 수립, 북한을 통치케 하며 한국과의 통일을 논의하게 한다.
이렇게 유사시 미군에서 증원군을 불러와 북한군의 남침을 막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을 정리해놓은 것이 작계 5027-98년판이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 가장 시급한 것은 탄약과 무기의 확보다. 전쟁은 철저하게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적용된다. 한국처럼 세계 10위권의 ‘큰 나라’가 전면전에 들어가면, 세계 무기시장은 물량이 달려 탄약과 무기 가격은 일곱 배 이상 폭등한다(전문가들의 추정).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전쟁의 불똥이 튈까봐 무기를 갖고 있는 나라들이 열 배가 아니라 스무 배의 가격을 준다고 해도 팔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이때 무기를 판매하는 나라가 진정한 동맹국이다.
미국은 이러한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동맹국을 위한 전쟁예비물자(WRSA: War Reserve Stock for Allies)’를 동맹국에 비축해두고 있다. 이 물자의 소유권은 미국에 있다. 그러나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면 한국은 무상 또는 사후정산의 형태로 이 물자를 사용할 수가 있다. 필요한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미군은 한국군과 상호군수지원협정(MLSA : Mutual Logistics Support Agreement)을 맺고 있어, 전시는 물론이고 평시에도 군수지원을 한다. 작계 5027이 작전상의 동맹을 규정했다면 상호군수지원협정 등은 작전 이상으로 중요한 보급을 약속한 정교한 시나리오이다. 여기서 전략가들은 이런 의견을 내놓는다.
“평화적으로 통일이 이뤄진다면 더 없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인가. 평화통일을 이루려면 한반도에서는 통일한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또 중국과 일본 등 주변국들의 방해도 적지 않을 것이므로 그 과정은 필연적으로 군사적인 긴장을 불러올 것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가 노력해야 할 것은 적절한 군사력을 투사해 재통일 과정에서 예상되는 분란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이것이 ‘현실적인 평화통일’이다. 예상되는 분란을 억제하려면 적절한 군사력이 있어야한다. 불행히도 한국의 힘으로는 이를 갖출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세계 최강인 미국의 힘을 이용해야만 한다. 마찬가지로 독일통일도 미독(美獨)공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2차 북핵 위기도 이러한 원칙에서 대처해야 한다. ‘주한미군은 변할 수밖에 없다’며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거나 ‘민족공조가 중요하다’며 한미관계를 떼어놓는 입장을 취한다면, 오히려 북한으로부터의 위협은 높아질 것이다. 반대로 주한미군 문제를 동반자 입장에서 같이 고민하고 체제공조를 강조한다면 북한의 위협은 사그라들고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주한미군 문제 진지하게 접근하라
주한미군에 대한 길고 긴 분석을 정리해 보자. 한반도가 일본과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대륙세력을 틀어막고 있기 때문에 미국이 한반도를 완전히 포기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은 그들의 국익을 위해 2사단을 목적군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지도층은 ‘미국은 한반도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한미군은 변할 수밖에 없다’는 데까지는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주한미군이 어떻게 변하는 것이 우리 국익을 극대화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것 같다.
여기서 전문가들은 “우리 처지에서는 2사단을 지금처럼 경중 혼합사단 형태로 의정부·동두천 지역에 존속시키고, 중국을 염두에 둔 신속배치군은 이미 잠정군으로 지정된 2사단 3여단과 172독립여단, 25경보병사단의 1·2여단이 선정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한다.
박정희 정부는 1971년의 미 7사단 철수를 한미1군단 창설로, 1978년의 철수를 한미연합사의 창설로 대처함으로써 안보위기를 슬기롭게 넘긴 바 있다. 노무현 정부도 이러한 슬기를 보여줄 것을 주문한다. 주한미군 철수 문제에 잘 대처한 박정희 정부가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듯, 노무현 정부도 주한미군 문제로 상징되는 한미관계를 잘 다뤄야 1인당 GDP 1만달러에서 ‘버벅거리는’ 한국 경제를 살려낼 수 있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박정희 사후 ‘서울의 봄’으로 정국이 시끄럽던 1980년 3월14일 한미양국은 한미1군단을 군사령부급 부대인 ‘한미연합야전군사령부(한미야사)’로 개칭하였다. 이로써 한미1군단은 군단이 군단을 지휘하는 ‘조금은 불안정해 보이던 모습’을 탈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한미1군단을 한미야사로 개칭하기 전인 1977년 1월 미국에서는 박정희 정부의 인권 탄압을 비판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 건 카터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카터 행정부는 주한미군을 3단계로 나누어 철수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기 직전인 1976년 8월18일 판문점에서 일어난 도끼만행사건과 1977년 5월 8군 참모장인 싱글러브 소장이 ‘워싱턴 포스트’와의 회견에서 “카터 정부는 8군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 철수안을 짰다”고 공격함으로써 주춤거리게 되었다.
8·18 도끼만행사건이 있기 전 판문점을 지키는 유엔군 주둔지의 이름은 ‘캠프 키티호크’였다. 그러나 이 사건 후 주한미군은 도끼를 맞아 절명한 보니파스 대위의 이름을 따서 ‘캠프 보니파스’로 바꿔 불렀다. 이러한 분위기 때문에 벽에 부딪친 카터의 철군안은 1978년 말 상징적인 의미에서 비전투부대원 3000여 명 철수에 그쳤다.
이 무렵 미국의 CIA와 DIA(국방정보본부)는 과거에는 북한군의 전력으로 보지 않던 20만명의 국경수비대(국가보위부 산하)를 중요 군사력으로 봐야 한다며 ‘북한군의 군사력은 120만명에 이른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를 받은 후 카터 대통령은 2·3단계의 추가 철군 계획을 보류하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오히려 한미연합방위가 강조돼 한미 양국은 유엔사는 정전(停戰) 업무만 맡게 하고 한국 방위를 위해서는 별도의 사령부를 만든다는 데 합의했다. 1978년 11월7일 한미 양국은 한미연합군사령부(연합사, CFC)를 창설했다.
연합사 창설 이전에는 미8군이 한반도 방어를 위한 모든 작전계획(OPLAN)을 작성했으나 이후에는 연합사가 이 일을 맡게 되었다. 카터의 철군 정책으로 위기를 맞았던 박정희 정부는 연합사 창설을 유도함으로써 오히려 ‘역전승’을 거둔 것이다.
한미연합사가 창설되면서 휘하에 지상군(육군)구성군사령부가 만들어졌기에 8군은 더 이상 한미 육군을 지휘할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8군은 야전군 사령부가 아닌 2사단을 지휘하는 행정군 사령부로 변모하였다. 평시에는 2사단을 지원하다가 유사시에는 미국에서 증원돼온 육군부대를 지상군구성군사령부에 배속시키는 행정적인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과 회담을 한 후 레이건 대통령은 카터 행정부가 추진하지 못한 2·3단계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을 백지화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한미관계는 다시 좋아졌다. 미국은 1986년 9월8일 일본에 있는 5공군 예하부대로 편제돼 있던 오산과 군산기지의 미 공군부대를 묶어 7공군을 창설했다. 7공군은 한미연합사의 공군구성군사령부로 유사시 한미 모든 공군전투부대를 지휘하는 부대가 되었다.
허술하게 대처한 노태우 정부
안보 측면에서 순항하던 한미관계는 1988년 노태우(盧泰愚) 정부 출범과 서울올림픽을 전후한 시기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한 반미시위가 격화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다. 한미관계가 흔들리면 대개 주한미군 구조에 변화가 일어난다. 이 시기 한국은 연간 100억달러의 무역 흑자를 올리는 등 6·25전쟁 이후 최고의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미국 조야에서는 “한국의 비약적인 성장은 주한미군이 한국을 지켜주었기 때문인데 한국에서는 그 ‘은혜’도 모르고 성조기를 불태우며 주한 미대사관을 공격하는 등 반미시위가 커지고 있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미국은 ‘돈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에 대한 ‘매질’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한국은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훈련하는 땅만 제공했지 돈을 제공한 적이 없었다. ‘돈’은 미군에서 한국정부로 오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 한국은 미국군이 군사원조계획(MAP)에 따라 지원하는 돈을 받아 행정부 예산으로 사용했다.
또 주한미군이 철수할 때마다 미국은 한국에 철군에 상응하는 지원을 해왔다. 1971년의 7사단 철수를 전후해서는 15억달러의 군사원조와 군사차관을 제공했다. M16 소총 면허생산을 필두로 방위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1978년의 비전투부대 철수 때는 한미연합사를 창설하고 한미1군단을 한미야사로 확대하며 팀스피리트 훈련을 시작하는(1976년) 등 실질적인 안보지원을 제공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의 주한미군 철수 움직임에는 이러한 ‘반대급부’가 없었다. 1987년 오히려 미국은 한국에 대한 대외군사판매(FMS) 차관 제공을 중단했다.
1988년 3월14일 민주당의 로버트 므라젝(Roberk J. Mrazek) 하원의원은 “비약적으로 경제성장을 하였으니 이제는 한국이 한국 방위를 맡아야 한다”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함으로써 미국 내 분위기를 대변했다. 4월19일에는 상원 군사위원장인 샘 넌(Sam Nunn) 의원이 메네트리 한미연합사령관을 의회에 출석시켜 “주한미군의 철군 일정을 수립하라”며 노골적으로 반한감정을 드러냈다.
미 2사단 장갑차로 인해 여중생 두 명이 사망한 후 일어난 반미시위
이 법안은 대표 제안자인 넌 의원과 워너 의원의 이름을 따서 ‘넌-워너 법안’으로 불리게 되었다. 1989년 8월2일 의회를 통과한 이 법안(넌-워너 수정안)은 3단계로 나누어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이같은 미국의 변화에 안일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별 생각 없이’ 1990년 6월25일 ‘서울 용산에 있는 8군 사령부를 오산·평택지역으로 옮긴다’는 합의서를 미국과 체결했다. 이 합의는 한국 정부가 8군 이전비용 30억달러를 마련치 못해 실행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후 한미관계가 나빠질 때마다 미국이 8군 사령부 이전을 요청하는 빌미가 되었다.
1992년 12월말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넌-워너 수정법안과 동아시아전략구상(EASI)에 따라 지상군 5000여 명과 공군 1987명 등 약 7000여 명의 주한미군을 철수했다. 이때 한국을 떠난 5000여 명의 지상군이 문산-파주 축선에 주로 포진해 있던 2사단 3여단이다. 이 2사단 3여단은 바로 GP 오울렛과 콜리어를 운영하던 부대였으니 마침내 인계철선이 사라진 셈이다.
2사단 3여단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로 철수한 후 곧바로 해체되었다. 이로써 한국 육군은 유엔사 관할 지역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과 캠프 보니파스를 제외한 전 휴전선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실질적으로 한국군이 방어한 것은 1991년 9월19일부터).
돈 문제로 한국 길들인다
반미정서의 표출에서 비롯된 주한미군의 철수와 재배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2년 7월1일 한미야사가 해체되며 한미야사가 담당해온 지역의 방어가 한국 육군의 3군으로 넘어온 것이다. 이로써 한미야사에 속해 있던 한국군 부대들(1사단·25사단·6군단 등)은 한국 육군 3군사령부의 통제를 받게 되었고, 미 2사단은 미 8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한미야사의 해체는 ‘한 지붕 밑에 두 가족’으로 살던 한미군이 각기 따로 집을 지어 헤어지게 됐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다 큰 집’인 한미연합사는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한 가족이었다.
1992년을 전후한 이 시기는 한국이 ‘명분만 얻고 실속은 챙기지 못하는’ 분가를 거듭한 때였다. 1991년 3월25일 미국은 한국군 소장으로 하여금 유엔사 군사정전위의 수석대표를 맡게 하였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경비 책임도 상당부분 한국군에 이관했다.
1994년 12월1일에는 평시작전통제권을 한국군 합참에 이관했다. 이로써 한국군 합참은 대(對)간첩작전과 서해에서의 남북 해군 충돌 같은 국지전에 스스로 작전계획을 세워 대처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군과 미국군이 분가를 해나갈 때 고조된 것이 1차 북핵 위기였다. 1994년 10월 미국과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이룸으로써 북핵 문제를 ‘미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2월 클린턴 정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미군을 10만으로 유지한다는 ‘동아시아전략보고서(EASR)’를 작성해,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나온 ‘동아시아전략구상’을 대체하였다.
이로써 주한미군 철수는 중단돼, 의 ‘현재’부분에 표시된 것처럼 주한미군은 한 개 군사령부(8군)에 두 개 여단을 가진 한 개 사단(2사단), 그리고 한 개의 공군 작전사령부(7공군)로 남게 되었다.
그런데 한미관계가 나빠진 지금 다시 주한미군 철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현재의 주한미군 철수 논쟁은 ‘2사단 예하의 두 개 여단 중에서 2여단을 빼내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2여단을 빼내면 2사단은 ‘껍데기만’ 사단일 뿐 ‘내용은’ 여단인 부대가 된다.
2사단의 2여단을 빼내는 것은 미국 육군이 생각하는 세계 전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잠정군(暫定軍)’ 부분에서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7사단을 철수해 2사단만 남게 되었을 때 1군단의 철수를 고려했듯, 2사단이 한 개 여단으로 줄어들면 8군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줄어든다. 8군마저 한국을 떠나면 주한미군은 명색만 사단이지 내용상으로는 한 개 여단인 육군과 언제 떠날지 모르는 7공군만 남는다.
이렇게 주한미군이 줄어드는 것이 한국 안보와 경제에 보탬이 될 것인가. 주한미군에 대해 장시간 설명해준 한 전략가는 이렇게 말했다.
“서울은 휴전선에서 불과 4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미사일은 물론이고 방사포의 유효사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안보적인 측면에서 매우 취약한 서울이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의 북방에 주한미군을 비롯한 상당수 한국군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2사단처럼 한강 이북에 있는 미군은 유사시 서울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증원군을 보내준다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때문에 북한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고 미국의 안보 우산 속에서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DJ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에 이르면서 반미정서가 확산되자 미국은 한강 이남으로 8군과 2사단을 옮기며 동시에 부대를 줄이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여기에 노무현 정부가 공약한 대로 행정수도를 충정도로 옮긴다면 서울이 어떻게 되겠는가.”
이 전략가는 미국이 ‘건방진’ 한국을 길들이는 데에 ‘돈’이 가장 효과적이었다며 주일미군과 비교해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안보위협이 훨씬 더 적은 나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일본에 해병대 1원정군과 7함대, 5공군 등 주한미군(3만6590명)보다 많은 미군(4만100명)을 주둔시키고 있다. 일본에서도 미 해병대 병사의 여중생 강간사건으로 반미시위가 적잖이 일어났지만 1980년대 이후 주일미군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왜 이러한 차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유는 두 나라 지도부가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역대 정권은 ‘입’으로 미군의 중요성을 인정했을 뿐만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상당한 돈을 방위분담금으로 지불한 것이다.
반면 한국은 ‘한국의 안보가 미국과 동아시아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되풀이 주장했지만 반미정서는 확대돼갔다. 방위비 분담도 형식적으로만 했을 뿐이다. 1999년 일본은 39억달러를 직접지원비로 지출했으나 한국은 3억달러를 제공했다. 미국은 ‘방위비를 더 내면 주한미군을 줄이지 않고 그렇지 않으면 줄이겠다’는 자세로 나오고 있다. ‘입’으로 반미와 자주를 외치는 한국과 ‘돈’으로 한국을 누르려는 미국 중에서 칼날을 쥔 쪽은 누구이고 칼 자루를 잡은 쪽은 누구인가?”
“한국을 그저그런 나라로 만든다”
미국이 인계철선이라는 용어에 대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주한미군을 줄임과 동시에 한강 이남으로 재배치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병력을 줄이고 안전지대로 이동하려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과연 자동 참전할 것인가? 전략가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왜 미국은 한국이 싫으면서도 제2의 한반도전쟁이 일어나면 자동 참전을 하게 되는가.
에서처럼 6·25전쟁 때 미국군은 여덟 개 사단, 세 개 군단 등 대규모의 병력을 참전시켰다. 미군의 참전은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이대통령의 요청이 있기 전 이미 참전하고 있었다.
전략가들은 미군의 신속한 참전은 한반도가 갖고 있는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한반도가 공산화되면 일본이 위협받고 이어 서태평양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은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거나 다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결사적으로 막는다.
작전계획 5027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은 두 개 군단 다섯 개 사단, 한 개 해병대 원정군, 다섯 개 항공모함 전투단, 열 개의 비행단(전투기 720여대) 등 약 69만 이상을 파병할 계획이라고 한다(이에 대해서는 뒤의 증원군 분야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미국 처지에서는 한반도에 미국과 같은 체제를 가진 나라가 있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한반도의 공산화만은 결사적으로 막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부흥한 한국에 반미정서가 확대된다면, 주한미군 철수를 통해 안보위기를 조장해 결과적으로 한국 경제의 부흥을 막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을 북한이나 중국에 비해서는 잘사는 나라이되 결코 선진국이 될 수 없는 그러한 나라로 만들려 할 것이라는 게 많은 전략가들의 예측이다.
이들은 좋은 예로 터키를 든다. 터키는 지정학적으로는 미국에 매우 중요한 나라이지만 반미정서가 강하다. 미국에게 있어 터키는 ‘계륵’ 같은 존재다. 지정학적 가치 덕분에 터키는 NATO 회원국이 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제3세계 수준이다.
한 전략가는 “1인당 GDP가 1만달러에 도달한 나라 중에서 5년 내에 1만 5000달러에 도달한 나라는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좋은 예가 일본이다. 그러나 상당수 나라는 1만달러에서 등락을 거듭하며 그저그런 나라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멕시코 등이 그런 나라인데 한국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5년째 GDP 1만달러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문제는 한국의 운명을 좌우할 노무현 정부가 복잡한 한미동맹사를 얼마나 숙지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주한미군을 횡적으로 분석해보기로 하자. 주한미군을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군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미국군과 주한미군의 전력(戰力)을 객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주한미군에 대한 환상과 허위 의식에서 깨어나기 어렵다.
미국 육군은 열 개의 상비사단과 여덟 개의 주방위군 사단, 그리고 13개의 예비군 사단으로 편성돼 있다(독립여단 등은 제외한 숫자). 주방위군은 해군에는 없고 육군과 공군에만 있는 조직으로 말 그대로 주를 지키는 부대이다.
한국 육군은 ‘동원사단’과 ‘향토사단’을 운영하고 있다. 향토사단과 동원사단은 유사시 동원예비군과 일반예비군이 들어와 완편 사단으로 편제된 후 전방으로 이동하거나 그 지역을 방어하게 된다. 이와 유사한 것이 미국군의 주방위군이다.
미국의 예비군은 그야말로 상비군을 지원하는 예비군이다. 훈련이나 동원령이 떨어지면 입소해 즉시 정규 부대를 편성한다. 미국의 작전계획들은 유사시 어느 예비군 사단이 어느 상비사단과 짝을 맞춰 어느 지역(한반도나 중동, 유럽 등)으로 이동한다는 것까지 상세히 짜여져 있다.
미국의 상비사단을 분석해보자. 열 개인 상비사단은 중(重)사단과 경(輕)사단 그리고 경중혼합사단으로 나눌 수 있다.
기계화사단은 무거운 장갑차와 전차를 운용하기 때문에 ‘중(重, Heavy)사단’으로 불리고, 보병부대로 편제된 사단은 ‘경(輕, Light)사단’으로 불린다.
사단은 통상 아홉 개의 전투대대로 편제되는데(한 개 여단에 세 개 대대씩 배속), 미국에서 중사단이라 함은 아홉 개 전투대대 전체가 장갑차나 전차로 기동하는 부대를 뜻한다. 이러한 기준으로 열 개 사단을 분류해보면 1·3·4·1기갑·1기병사단 등 다섯 개 사단은 중사단으로 분류된다.
이라크전의 주역인 3사단은 네 개의 전차대대와 다섯 개의 장갑차대대라는 ‘4전5장(4戰5裝)’ 체제를 갖고 있다. 반면 나머지 네 개의 중사단은 5전4장 체제이다.
그러니까 중사단 중에서 가장 가벼운 것이 3사단인데, 이라크전에서 미국은 3사단을 활용해 불과 29일 만에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이러니 미국의 중사단은 다른 나라의 군단은 물론이고 군사령부보다도 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2사단은 輕重 혼합사단
전차와 장갑차는 해군 수송함에 실어 옮겨야 하므로 미국 본토에 있던 중사단이 해외의 전쟁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는 대략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그러는 사이 전쟁이 크게 확대될 우려가 있으므로, 미국 육군은 중장비 없이 신속히 이동하는 경사단을 편제하였다. 이러한 사단으로는 10산악·25경보병·82공정·101공중강습 사단이 꼽힌다.
미국은 분쟁 지역에 신속히 파견하기 위해 ‘신속전개군(RDF: Rapid Deploy ment Forces)’을 만들었는데, 사단 규모의 신속배치군이 바로 경사단들이다. 경사단은 뒤에서 설명할 ‘신속기동여단(BCT나 IBCT)’과 더불어 신속배치군을 이루는 핵심 세력이다.
중사단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사단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바로 한국에 있는 2사단이다. 미국 육군은 그들 자료에서 2사단을 ‘경중(Heavy/Light) 혼합사단’으로 적고 있다. 왜 2사단은 경중 혼합사단으로 분류되는가. 이를 이라크전에 참전한 3사단과 비교해 살펴보자.
<표 2> 미 육군 3사단과 2사단의 전투부대 비교
그런데 2사단의 2여단은 특이하게도 두 개의 공중강습대대를 갖고 있다. 공중강습(空中强襲, Air Assault)이란 기동헬기에 보병대원을 태우고 가 적 후방에 투하하는 것을 말한다. 헬기를 타기 때문에 공중강습부대원은 순수 보병만으로 편제된다.
이러한 부대는 차량으로 이동하는 보병보다는 기동성이 좋다. 그러나 전차나 장갑차부대보다는 화력면에서 약하므로 2사단의 2여단은 경여단에 해당한다. 이렇게 중여단과 경여단 하나씩으로 편제돼 있기 때문에 2사단은 ‘경중 혼합사단’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가장 재미있는 것은 2사단의 3여단인데 이 여단은 포트루이스로 철수한 지 오래다. 그리고 사실상의 독립여단이 돼 신속기동여단으로의 전환을 목전에 두고 있다. 따라서 2사단은 두 개 여단으로 편제된 셈인데 이렇게 떨어져나간 3여단 자리를 한국 6군단의 기갑여단이 메워주고 있다. 때문에 2사단을 3사단에 비교할 때는 3여단이 없는 상태에서 비교해야 한다. 2사단은 중여단과 경여단으로 구성돼 있어, 경중혼합사단으로 분류된다.
2사단은 3사단에 비하면 파워가 약하다. 더구나 한 개 여단은 미국으로 철수해버렸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은 경사단에 불과하다고 혹평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 육군이 이러한 2사단에 K-1 전차와 K-200 장갑차, K-55 자주포 등으로 무장한 6군단 기갑여단을 배속시킨 것을 고려하면 보통의 경사단보다는 월등히 강하다.
미 2사단에 한국군 기갑여단이 작전 배속돼 있다는 것은 2사단이 과거의 한미1군단이나 한미야사보다는 약하지만 ‘한미연합’ 부대의 전통을 잇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군 기갑여단이 배속됨으로써 2사단은 사단 작전을 원할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내친김에 2사단 전체를 ‘이라크전의 주역’인 3사단 전체와 비교해보자.
<표 3> 미 육군 3사단과 2사단 비교
그러나 3사단에는 ‘군단지원단’이 있으나 2사단에는 없다. 또 3사단에는 헌병대대가 있으나 2사단에는 헌병중대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2사단이 3사단보다는 규모가 작다는 것을 뜻한다. 왜 2사단에는 군단지원단이 없는 것일까.
미국 육군은 각급 제대에 맞춰 네 종류의 병참 부대를 운용한다. 8군과 같은 군사령부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전구(戰區)지원사령부(TSC: Theater Support Command)’를 운용하고, 군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군단지원사령부(COSCOM: Corps Support Command)’,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사단지원사령부(DISCOM: Division Support Command)’, 그리고 여단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전방지원대대(FSB: Forward Support Battalion)’를 운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3사단과 2사단 같은 사단급 제대에서는 사단지원사령부가 보급을 담당해야 한다. 그런데 3사단에는 사단지원사령부 외에 군단지원단이 하나 더 들어와 있으니 특이한 것은 2사단이 아니라 오히려 3사단이다.
군단지원단은 군단지원사령부 예하 부대이다. 군단지원사령부는 9만여 명으로 편제된 다섯 개 사단에 대한 물자 보급을 책임진 부대인데, 예하에 4∼5개의 군단지원단을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한 개의 군단지원단은 한 개의 사단을 지원한다.
그런데 사단이 작전을 하다보면 보급이 중요해져, 군단지원사령부가 군단지원단 하나를 아예 사단에 배속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사단은 기존의 사단지원사령부 외에 또 하나의 병참부대(군단지원단)를 거느려야 한다.
3사단은 미국 본토에 있다가 유사시 전세계로 파견되는 부대이다 보니 보급이 중요해져 두 개의 보급 부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2사단은 한반도를 작전구역으로 하므로 한 개의 보급부대로 편제되었다.
이러한 2사단을 지원하는 것이 8군인데 8군은 예하에 투 스타가 지휘하는 19전구지원사령부를 거느리고 있다. 한반도에는 이미 19전구지원사령부라는 큰 지원부대가 배치돼 있으니 2사단은 별도로 군단지원단을 거느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헌병을 ‘의전용’ 부대로 여긴다. 하지만 전시의 헌병은 보급로를 보호하고, 낙오병을 단속하며, 전투지역과 민간인 거주지역을 구분해주며, 포로수용소를 운용하는 등 많은 임무를 수행한다. 따라서 사단에는 적절한 규모의 헌병부대가 있어야 한다. 3사단은 헌병대대가 있는데 왜 2사단에는 헌병중대뿐일까.
이 궁금증도 8군의 편제에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8군에는 두 개의 헌병대대를 거느린 제8헌병여단이 예속돼 있다. 상급 부대에 훨씬 큰 헌병부대가 있으니 평시의 2사단은 중대 규모의 헌병만 보유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살펴보면 2사단은 공중강습 대대가 있어 3사단에 비해서는 경사단이지만, 결코 ‘만만한 부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굳이 랭킹을 따진다면 열 개 미군 사단 중에서 6위의 파워를 가진 것이 2사단이라고 할 수 있다.
<표 4> 8군 편제도
또 하나의 항공부대인 17항공여단은 공중강습대대를 태우는 UH-60 기동헬기대대와 CH-47 기동헬기대대,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대대로 구성돼 있다. 16기병여단은 공격헬기 여단이고 17항공여단은 기동헬기 여단인 것이다. 이러한 8군의 항공부대와 별도로 2사단도에서 처럼 항공여단을 갖고 있다.
2사단의 항공여단은 AH-64 아파치 공격헬기 24대로 편성된 ‘공격헬기대대’와 공중강습대대원을 태우고 적 후방으로 날아가는 UH-60 기동헬기 59대로 편성된 ‘기동헬기대대’, 그리고 M1 전차 27대와 M2 브래들리 장갑차 16대, OH-58D 정찰헬기 16대, M106 경(輕)장갑차 6대로 편성된 ‘기병대대’로 편성돼 있다.
8군과 2사단의 항공부대를 합치면 주한 미육군의 항공전력은 공격헬기 세 개 대대(여단 규모), 기동헬기 세 개 대대, 그리고 기병대대 한 개와 두 개의 지원 대대로 정리된다. 이러한 항공력은 대단한 힘을 발휘한다.
공격헬기대대는 네 개의 공격헬기중대로 편성되는데, 아파치 헬기 여섯 대로 편성된 공격헬기중대는 여단 규모의 적 기계화부대를 괴멸시킬 수 있다. 따라서 공격헬기대대는 사단 규모의 기계화부대를 박살낼 수 있다. 8군과 2사단은 도합 세 개의 공격헬기대대를 갖고 있으니 주한미군은 군단 규모의 북한군 기계화부대를 ‘고철’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8군과 2사단이 갖고 있는 세 개의 기동헬기대대는 2사단 2여단 예하의 두 개 공중강습대대원을 적 후방 60∼ 100km 지점에 투하시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한다. 그와 동시에 8군과 2사단이 갖고 있는 세 개의 공격헬기대대와 2사단 1여단, 그리고 한국군 기갑여단이 남침하는 인민군을 몰아붙인다. 바로 이것이 현대 지상전의 총아인 입체고속기동전이다.
8군과 2사단은 항공부대만으로도 북한의 군단급 이상 부대를 괴멸시킬 능력을 갖고 있어 북한군이 섣불리 남침하지 못하게 억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외 8군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유사시 한국으로 증원돼 오는 여섯 개 사단에 대한 보급을 책임지는 19전구지원사령부를 거느리고 있다.
501 군사정보여단
8군이 작전통제하는 부대 중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501군사정보여단이다. 한국군은 군사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국군정보사령부를, 군사기밀 유출을 막기 위해 국군기무사를 운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 육군도 정보보안사령부(INSCOM: Intelligence and Security Command)를 운용한다. 미국 육군의 정보보안사는 한국군의 정보사와 기무사, 그리고 통신감청부대인 777부대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미국 육군의 정보보안사령부는 미국을 포함한 네 나라에 다섯 개의 ‘지역 군사정보부대’를 두고 있다(미국에는 두 개). 이러한 지역군사정보부대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에 와 있는 501군사정보여단이다.
501군사정보여단은 다양한 장비를 활용해 정보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이 수집한 정보는 한국군 정보사와 777부대, 한국의 국가정보원, 북한 통신을 감청하기 위해 미국의 NSA(국가안보국)가 한국에 파견한 SUSLAK, 그리고 오산에 있는 미 공군 5정찰대대가 U-2기로 찍어온 사진과 미 공군이 운용하는 첩보위성으로 찍어온 항공사진과 합쳐져 북한을 분석하는 핵심자료가 된다.
이러한 정보활동이 있기 때문에 주한미군은 북한군이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8군의 힘은 오히려 전투 이외의 분야에서 강한 것이다. 현재 501군사정보여단장(대령)은 19전구지원사령관(소장)과 더불어 여군이 맡고 있다.
오산에 있는 7공군의 평시 전력은 ‘별 볼 일’없다. 5공군은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KF-16(블록 50/52)보다 구식인 F-16(블록 30/32)을 가진 8전투비행단과 51전투비행단을 거느리고 있다. 그 외 전차를 공격하는 A-10 공격기를 12대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전투 능력이 미약하다고 7공군을 얕보는 것은 큰 실수이다. 평시의 7공군은 ‘주먹(전투비행단이나 폭격비행단)’이 아니라 ‘천리안(정찰기 대대)’과 ‘두뇌(작전계획부대)’로 작전하기 때문이다.
7공군이 있는 오산기지에는 U-2기 중에서도 최신형인 U-2S를 처음으로 작전 운용한 부대로 유명한 제5정찰대대가 파견나와 있다. U-2기를 한 번 이륙시켜 작전에 투입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100만달러(약 11억원)에 이른다. 운용 비용이 비싸기 때문에 한국 공군은 U-2기를 거저 준다고 해도 제대로 운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5정찰대대는 U-2기를 활용해 수집한 정보를 태평양공군과 미 공군전투사령부, 그리고 주한미군에 제공한다.
5정찰대대가 수집한 첩보를 제공받는 주한미군은 K-COIC(Korean Combat Operations Intelligence Center : 한국전투작전정보본부)와 한미 연합부대인 CACC(Combined Analysis Control Center : 연합분석통제본부)이다. 이곳은 U-2기가 수집한 첩보 외에 미 공군 우주사령부가 운용하는 정찰위성 사진과 기타 한미 정보기관이 입수한 첩보가 종합적으로 입수·분석된다.
따라서 두 기관은 한반도의 위기를 가장 먼저 포착해 ‘비상벨’을 누르는 역할을 한다. 한미연합사가 데프콘 2 이상의 전시(戰時)를 선포한다면 그 자료를 제공하는 곳은 바로 이곳이다.
7공군 예하 607항공작전단은 ‘우발’작전계획을 짜는 부대로 유명하다. 전시의 항공작전은 한미연합사의 공군구성군사령부에서 작성하고 이 부대는 한반도 상공에서 평시에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대비한 항공작전계획을 작성한다.
평시에 일어난 우발적인 사태는 종종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따라서 다양한 우발작전계획을 짜놓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7공군은 지금 당장 전개돼 있는 ‘펀치’는 약해보여도 눈과 두뇌만큼은 그 어떤 부대보다도 뛰어난 것이다.
[제3부 : 변모하는 미 육군]
미국은 한국인의 반미감정이 높아졌다고 해서 주한미군을 철수할 정도로 단순한 나라는 아니다. 미국은 자체 계획에 따라 전세계의 미군을 재배치한다. 이때 주둔국 국민이 반미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면 재배치의 정도를 확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지금의 주한미군 재배치는 지상군에 한정돼 있다. 이는 미국 육군의 세계전략이 주한미군 재배치를 거론하게 된 근본원인임을 의미한다. 미국 육군은 도대체 어떠한 세계전략을 갖고 있는가. 그리고 그 전략이 한국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최근에 이라크전쟁이 일어났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 인류는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아프간전·코소보전·걸프전·파나마침공·하이티침공이 있었지만 미국의 처지에서 살펴보면 단기전이고 미미한 싸움이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컸지만 50년과 30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전쟁이라는 ‘수요’가 줄어들면 군대라는 ‘공급’도 줄여야 수지가 맞는다. 소비자(전쟁)는 줄어드는데 자꾸 더 많은 물건(군대)을 생산하는 기업(미국)이 있다면, 그 기업은 망할 수밖에 없다. 폴 케네디를 비롯한 미국의 국제정치학자들은 이러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어겼기 때문에 로마제국과 대영제국이 망한 것이라며 미 국방부에 적절한 군사력 보유를 권유해왔다.
이에 따라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지속적으로 군대를 줄여왔다. 해군은 14척이던 항모를 12척으로 줄였고, 걸프전이 일어난 1991년 18개 사단이던 육군을 10개 사단으로 줄였다. 이렇게 부대의 규모를 줄이는 대신 장비는 최첨단화하고 있다. 그러다 큰 전쟁이 일어나면 이미 개발해놓은 기술을 토대로 최첨단 장비를 대량생산해 동원한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무장시켜 순식간에 막강한 군대를 만든다는 것이 미국의 복안인 것이다.
이번 이라크전은 미국군이 그동안 최첨단장비 개발에 얼마나 진력해왔는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라크전쟁에서 영국군은 미국군과 공동으로 작전하지 못했다. 영국군이 사용한 장비의 수준이 미국군에 비해 현저히 뒤처졌기 때문이다. 이 경우 미국은 장비를 영국군에 제공해줄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때문에 영국군 기갑사단은 바스라를 포위 점령하는 독립작전만 수행하고 나머지 작전은 미국군이 유기적으로 진행했다. 미국군의 군사혁신(RMA)이 영국군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돼온 것이다.
이러한 군사혁신 중의 하나가 일부 지상군 부대를 신속전개군(RDF)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 육군은 예하 부대를 현존군(Legacy Force)과 잠정군(Interim Force), 목적군(Objective Force)으로 나누어 발전시키고 있다.
현존군(現存軍)은 한마디로 전차와 장갑차·자주포·헬기로 무장하고 기동전을 펼치는 중사단을 가리킨다. ‘거대한 지상전’의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서는 중사단을 투입해 ‘결전(決戰)’을 벌일 필요가 있기 때문에 미국 육군은 중사단을 현존군으로 분류해 계속 발전시킨다. 전차와 장갑차·자주포를 개량하고 중사단의 작전술을 발전시켜나가는 것이다.
중사단의 현존군으로 발전해나갈 부대는 기존의 중사단인 1·3·4·1기병·1기갑의 다섯 개 사단인 것으로 판단된다. 미국 육군은 해군 수송함으로 장비를 옮겨야 하는 ‘무거운’ 현존군 사단은 30일 이내에 분쟁지역에 투입시킨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현존군은 강력하지만 분쟁지역에 투입하는 데 30일이나 걸린다는 것이 약점이다.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나온 것이 목적군(目的軍)이다. 전쟁은 화재와 같아서 열도가 약한 초기에 재빨리 진압을 시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와 같은 임무를 띠고 분쟁지역으로 가장 빨리 달려가는 부대가 목적군이다.
따라서 이 부대는 해군 수송함이 아닌 공군 수송기로 이동한다. 수송기에 장비를 실으려면 이 부대는 ‘작고’ ‘가벼운’ 장비를 사용하여야 한다. 규모는 사단보다 작은 여단이 좋고 사단일 경우에는 경사단으로 편제된다.
미국 육군은 여단급 목적군은 96시간(만 4일), 사단급 목적군은 120시간(만 5일) 이내에 분쟁지역에 도착해 작전에 들어간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목적군은 실존하는 부대가 아니고 현재 만들어가고 있는 군대다.
앞에서 미국 육군의 상비사단은 열 개라고 밝혔는데, 이 외에도 두 개의 독립여단과 두 개의 독립연대를 갖고 있다. 독립여단이나 독립연대는 사단에 속한 여단과 달리 독립작전을 할 수 있도록, 보병·포병·기갑 같은 전투부대 외에 통신·정보·보급 등 다양한 지원부대와 근무지원부대가 들어와 있다. 이러한 ‘작은 사단’은 ‘작은’ 목적군을 만드는 데 적격이다.
2사단 3여단은 최초의 목적군
그러나 독립여단과 연대는 각자 맡고 있는 임무가 있으므로 미국 육군은 선뜻 목적군으로 만들 수 없다. 때문에 사단에서 떨어져 나온 여단을 목적군화하는 부대로 선정했다. 이러한 부대로 최초로 선택된 것이 1992년 한국을 떠난 2사단 3여단이었다.
2사단 3여단을 목적군으로 전환하는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는데, 이렇게 목적군으로 전환해가는 부대를 잠정군(暫定軍)이라고 한다. 미국 육군은 먼저 여단급 부대를 잠정군으로 선정해 목적군으로 개편한 후 이어 사단급 부대를 잠정군으로 선정해 목적군으로 바꿀 것으로 보인다.
목적군으로 전환되고 있는 여단급 부대를 ‘잠정여단전투팀(IBCT: Interim Brigade Combat Team)’이라고 한다. 목적군으로 전환이 완성되면 이 부대는 ‘잠정’이란 단어가 떨어져 ‘여단전투팀(BCT)’이 된다. 여단전투팀은 96시간 이내에 분쟁지역에 전개되므로 한국어로는 ‘신속기동여단’으로도 번역된다.
1992년말 2사단 3여단은 워싱턴주 포트루이스로 철수해 바로 해체됐다가 1994년 9월17일 재창설돼 1981년 10월1일 이미 포트루이스로 철수해온 1군단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 직후 2사단 3여단은 잠정여단전투팀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2사단 3여단은 육군이 보유한 장비 중에서 어느 것이 공군 수송기에 실을 수 있는지 검토에 들어갔다. 69t에 달하는 M1 전차나 25t 무게의 M2 장갑차, 23t 중량의 M109 자주포는 너무 커서 공군 수송기에 실을 수 없었다.
또 이 부대가 96시간 내에 전투지역에 전개되려면 2사단 3여단이 사용할 장비와 미국 공군이 보유한 수송기와의 함수 관계도 찾아내야 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미국 공군의 전투기와 폭격기가 날아가는데, 이때 미국 공군의 수송기는 이들이 사용할 폭탄과 물자를 공급해줘야 한다. 제한돼 있는 수송기를 공군과 육군이 나눠 써야 하므로 2사단 3여단은 유사시 몇 대의 수송기를 공군으로부터 ‘할당’받을 수 있는지부터 검토해야 했다.
공군으로부터 할당받을 수 있는 수송기의 댓수는 전쟁의 규모에 따라 크게 달라지므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만들어 살펴보아야 했다.
이러한 검토를 거쳐 2사단 3여단은 15t 미만인 M113이나 M106 경장갑차, 여덟 개의 바퀴를 가진 LAV 장륜(長輪) 장갑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사진 참조).
그후로는 이 장비를 이용해 종합작전이 가능한 작전술을 개발해야 했다. 이러한 실험을 하며 8년 만에 비로소 여단전투팀이 만들어졌다. 미국 육군은 올해 중 2사단 3여단을 최초의 목적군인 ‘신속기동여단(BCT)’으로 지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