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버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 옮겨온 여고생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에 10대들이 열광하는 이유는 언어파괴와 세계의 단절, 일탈 욕망과 금기파괴 심리에 대한 생생하고 통쾌한 묘사 때문이다.
- 한 10대 독자는 이렇게 말한다. “어른들, 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학교생활이 어떤지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세요.”
이 소설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소설을 쓴 사람들의 나이가 많아야 서른을 넘지 않는다는 점. 둘째, 그들 세대에 딱 들어맞는, 그러나 다소 과장돼 있는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 셋째, 글쓰기 능력보다는 유머 감각에 의존한다는 점. 세 번째 특성은 이들 중 상당수가 ‘유머 게시판’에 연재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절정에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귀여니’의 소설 ‘그놈은 멋있었다’가 있다.
‘사이버문학의 2차 공습’
‘귀여니’(본명: 이윤세)의 ‘그놈은 멋있었다’(전2권, 도서출판 황매)가 출간된 2003년 3월15일을 후세의 문학 연구자들은 ‘사이버 문학의 2차 공습일’로 기록할지도 모른다. 출간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2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간 이 작품(?)은 한국 출판에 판타지 문학 열풍을 불러온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전12권, 황금가지)에 이어 다시 한번 우리에게 사이버 문학의 힘을 분석해보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80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고교생들(주로 남학생들)의 필독서로 자리잡은 ‘드래곤 라자’와 비교된다.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는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와 세 가지 측면에서 같고 두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두 작품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이버 공간을 자양분으로 삼고 자라나서 현실 공간으로 침투해 들어왔다는 점. ‘드래곤 라자’는 1997년 10월3일부터 PC통신 하이텔의 ‘창작 연재란’에 연재되기 시작해 100만에 달하는 조회 수를 얻었으며 1998년 5월에 종이책으로 출간된 지 6개월도 안 돼 50만부 이상이 팔려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2001년 8월부터 포털 사이트 ‘다음’의 한 인터넷 카페에 연재되기 시작해 30만명에 이르는 회원을 확보했으며 올 3월에 소설로 나온 이래 계속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다.
둘째, 이영도와 귀여니 두 사람 모두 신춘문예 등을 통한 등단 절차, 문예지 중심의 문단 활동, 작품집 출간이라는 전통적인 문학 출판의 코스를 밟지 않았다는 점. 거칠게 말하면 ‘문단 공인 작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필자는 1987년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문학과지성사)가 처음 나왔을 때를 기억한다. 당시 문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던 필자는 ‘얼마나 좋은 작품이기에 등단도 안 한 작가의 작품을 출판했을까’ 하고 기이하게 생각했고, 출판사에서는 ‘워낙 좋은 작품이라서 등단 절차 없이 전작으로 출판하기로 했다’고 작품 뒤쪽에 애써 변명의 글을 달았다.
1991년에는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민음사)이 같은 형태로 출판됐고, 이제는 이런 출판 형태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영도 이후’와 ‘이영도 이전’에는 쉽게 넘어설 수 없는 문턱이 존재한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가 성공한 이후 상당수의 문학청년이 위계를 갖춘 상상의 공동체인 ‘문단 입문’을 통하기보다는 사이버 공간에 자신의 글을 연재함으로써 대중의 맨 얼굴과 직접 맞닥뜨리는 쪽을 통해서 자기 글을 사회화하는 전략을 택하게 됐다. 이들은 문학 원로들의 승인이라는 귀찮은 통과의례를 거치기보다는 상상의 동료(독자)들에게 인정받음으로써 따분하고 짜증나는 입사식을 좀 더 재미나게 통과하려고 애쓴다. 그 결과 PC통신과 인터넷의 소설 연재 공간엔 하루에 수천 편의 소설이 등록되는 글쓰기 열풍이 몇 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다.
셋째, 이영도와 귀여니 두 사람 모두 판타지, 로맨스 등 장르 문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장르 문학’은 무협, 밀리터리, 추리, SF, 판타지, 스릴러, 호러, 로맨스 등의 문학 양식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처럼 인물, 배경, 지식 등 특정한 코드 또는 세계관을 여러 작가가 공유하면서도 작가 특유의 덧붙임 또는 지움에 의해 새롭게 읽히는 문학을 말한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서양 중세의 기사 이야기에서 기원한 판타지 장르에 기대고 있으며,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는 ‘어느 날 벼락처럼 다가오는 운명적인 사랑’이라는 근대적 사랑 담론이 만들어낸 로맨스 장르에 업혀 있다.
이러한 장르 문학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자들도 같은 세계를 공유한다는 점, 세계 자체의 변화라는 거시적 차이보다는 이야기 전개의 박진성이나 에피소드의 새로움 같은 미시적 차이에서 문학적 성과가 갈린다는 점, 작가와 독자가 하나의 세계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와 작가의 위치 뒤바꿈 현상(생산 소비자 현상: 생산자가 소비자가 되고, 소비자가 곧 생산자가 되는 현상)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동류의 문화 상품들(영화, 연극, 게임, 만화 등)로 전환되기 쉽다는 점 등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와 ‘그놈은 멋있었다’ 사이에는 이러한 유사성을 넘어서는 두 가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PC통신 세대와 인터넷 세대의 차이기도 하고, 어쩌면 1970년대 생과 1980년대 생의 차이기도 하다.
첫째, ‘드래곤 라자’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문단 소설과 커다란 차이가 없는 교과서적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놈은 멋있었다’는 교과서적 문장만을 구사하는 사람들은 읽어내기가 거의 불가능한 탈교과서적인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두 소설의 첫 부분 몇 문장을 들여다보면 분명해진다.
(A) 드래곤이야! 정말 화이트 드래곤이야! 우와, 멋있어!
(B) 나는 피식 웃었다. 제미니는 펄쩍 뛰면서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계집애. 뱀을 밟았으면 밟았지 왜 그렇게 덥석 안겨?
(C) 그. 런. 데. 옆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ㅇ_ㅇ 엥? 머야. 살며시 고개를 들자 그 노란머리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_- 엄마야!! 럴수럴수, 이럴 수가!
(D) ㅇㅏ! 다모임! 마지막으로 떠오른 나의 다크호스, 다모임! ^o^ 하지만 여고라 그런지 글도 잘 안 올라온다. -ㄷ- 게시판에 글이 한 개도 없길래 방명록을 클릭 했다. ㅇ_ㅇ 어 예~!
(A)와 (B)는 ‘드래곤 라자’에서 인용한 것이다. (A)는 감탄을 드러내는 형식이고, (B)는 보통의 지문이다. ‘정말’ ‘우와’ ‘피식’ ‘펄쩍’ ‘덥석’ 등 부사어를 다소 많이 쓰는 경향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가벼워 보이기는 하지만 교과서적인 문장에서 별로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작품에서 보통의 소설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것은 화이트 드래곤, 제미니 등 서양에 기원을 둔 것이 분명한 이름들뿐이다.
그러나 ‘그놈은 멋있었다’에서 뽑은 (C)와 (D)는 완전히 다르다. (C)의 앞부분 ‘그. 런. 데.’에서부터 이른바 언어 파괴(아마 이 소설의 주 독자층인 10대의 입장에서 보면 언어의 창조일지도 모른다)가 눈에 튄다. 게다가 감정을 표현하는 부호인 이모티콘(emoticon)의 전면적인 등장(ㅇ_ㅇ, -_-, ^o^, -ㄷ- 등), 느낌표의 엄청난 남발(소설의 아무 쪽이나 펼쳐도 10여 개는 눈에 띈다), ‘럴수럴수’ ‘ㅇㅏ!’ 등 일부러 맞춤법 틀리게 쓰기 등 교과서적 문장에서 무의식적으로 멀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작가 귀여니는 한 인터뷰에서 “언어라는 건 결국 부호가 아닌가요?”라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기성세대와는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싹튼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드래곤 라자’는 ‘부호’가 아니라 ‘언어’의 범주에서, ‘그놈은 멋있었다’는 ‘언어’가 아니라 ‘부호’의 범주에서 문장을 구사하고 있다.
둘째, ‘드래곤 라자’는 판타지라는 낯선 형식을 통해 자기와 타자, 인간과 자연, 한 종족과 다른 종족 사이의 소통 문제라는 거대 담론을 중심에 두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이영도는 수많은 선배 문인이 수만 가지 형태로 다루어온 주제를 판타지라는 새로운 문학의 형태로 풀어낸 것이며, 장르 문학일지라도 작가의 강조점은 어디까지나 ‘문학’에 찍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놈은 멋있었다’는 10대들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온갖 부호를 다 동원해서 아주 재미있게 쓴 ‘10대들의 상큼한 사랑이야기’일 뿐 주제의식 같은 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사이버 문학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어 온 한 후배는 이 소설을 두고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올해 여고를 졸업한 작가 귀여니(필명)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이 문학이기 어려운 것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만으로도 문학은 새로운 문학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새로운 형식이 새로운 인식을 제공할 때뿐이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어떤 의미에서 10대들의 세계를 솔직하게 그려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통해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보여주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말에는 ‘그놈은 멋있었다’를 둘러싸고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공방에 대한 온갖 불편함이 녹아있다. 1970년대 생이며 PC통신에서 오랫동안 문학활동을 해왔고 사이버 문학의 적극적 옹호자였던 후배가 느끼는 그 불편함의 근거는 ‘사이버 문학’도 결국 ‘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귀여니나 그 책을 펴낸 출판사측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 듯하며, 기존에 문학이라는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을 자극하고 싶어하지 않는 듯하다. 서점에서는 ‘문학’으로 분류해 ‘소설’ 코너에서 팔리고 있지만 출판사측은 이 작품에 소설이라는 분류기호 대신 ‘이야기’라는 분류기호를 붙였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미학적 형식을 갖춘 이야기의 한 형식’인 ‘소설’이 아니라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말 중 줄거리를 갖춘 말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일종이라고 스스로를 의식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PC통신에 기반을 둔 ‘드래곤 라자’에 이어 인터넷 공간에 기반을 둔 ‘그놈은 멋있었다’의 등장과 그 폭발적인 판매량은 언제든지 사이버 문학이 현실 문학의 정체성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힘은 현실 문학이 전혀 다루지 않는, 아니 다룰 수 없는 세계를 그려낼 때 무지막지한 위력을 발휘한다.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는 현실문학이 미시적 현실의 세부를 파먹고 있을 때 등장했다. 그의 소설은 현실의 이면에 무한대로 펼쳐져 있는 상상의 대륙을 탐험하며, 엄청난 힘을 가진 온갖 괴물 앞에서도 결단코 굴복하지 않는 중세적 영웅주의를 조롱하는 동시에 은밀하게 소설의 세계 속으로 다시 끌어들인다.
어떤 면으로 봐도 영웅일 수 없는 한 소년이 영웅적인 모험을 떠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아서 왕 이야기’와 ‘보물섬’ 등을 읽으면서 상상력의 크기를 키워온 모든 소년의 꿈을 대변한다. 그의 소설은 현실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 바깥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10대들의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아이디만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접속할 수 있는 통신망이 존재했기 때문에 소설에 깔려 있는 이 비밀의 코드가 10대 속으로 파고드는 데에는 결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는 좀더 노골적이다. 그의 소설은 10대들의 세계를 기존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해버린다. 오랫동안 주변의 소설가들에게 10대들의 세계를 현실 그대로 그려낼 것을 주문해온 필자로서도 당혹스러울 만큼 그들의 세계는 기성세대의 코드와 거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학평론가 김동식의 표현대로 “예쁘지도 않고 잘하는 것도 없는 평범한 여고생 예원과 양아치 스타일의 꽃미남 은성 사이의 사랑 이야기”이며, “만화적인 구성과 하이틴 로맨스의 문법이 고스란히 적용된 소설”이지만, 어쨌든 10대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적어도 10대들은 그렇게 느낀다).
인터넷서점의 한 독자 서평은 다음과 같다. “고등학생 언니가 써서 스토리가 뻔하다 하실지 모르겠지만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로만 눈물을 흘린 소설입니다. 어른들, 저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학교생활이 어떤지 알고 싶으시다면 이 책을 읽어보세요.”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기성세대(물론 필자는 절대로 기성세대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티를 내느라고 후배 한 명을 조용히 불러 한두 가지를 물어 보았다. “평범한 여학생이 양아치랑 사랑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가?”(일반적으로 평범한 여학생은 보통 남학생이랑 사귀지 양아치랑 사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여학생이 웬 술을 그렇게 자주 먹고 부모는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느냐?” 등.
대학을 갓 졸업한 후배는 아무 말 없이 씩 웃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이모티콘 등을 동원한 언어적 단절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의 단절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니 10대들의 열광은 당연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이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고 하는 10대들의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필자는 이 소설이 흔해빠진 연애 이야기만으로 10대들의 환호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조성면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지극히 옳지만 다소 일면적이라고 생각한다.
“근대 사회의 제도와 관습이 강요하는 성적 억압과 규율 앞에서 힘겨운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청소년들에게 이성은 언제나 금지된 욕망이며 동경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순정 만화와 하이틴 로맨스에 등장하는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캐릭터들은 10대들의 이성에 대한 갈망과 성적 환상이 만들어낸 피조물들인 셈이다. (중략) 따라서 터프한 꽃미남 지은성과 평범하지만 재기발랄한 여고생 한예원이 이중의 삼각관계에 빠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그놈은 멋있었다’는 극도로 억압적인 교육제도와 엄숙한 관습에 결박돼 있는 우리 10대 소녀들의 일탈에의 욕망과 이성에 대한 동경을 담아낸 인터넷판 하이틴 로맨스라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는 믿음
물론 “결정적인 인기 비결은 ‘꽃미남 반항아’ 지은성이라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한다. 고등학교 4대 천왕의 우두머리로 카리스마는 천성, 담배와 술은 기본, 주먹질과 자동차 운전은 옵션이면서도 가슴 한구석에는 슬픔을 끌어안고 모성 본능을 자극하는 지은성이야말로 10대가 열광하는 이상형”이라는 작가의 고백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대부분 일본산 순정만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카리스마, 담배, 술, 주먹질 등으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슬픔, 아픈 추억, 모성 본능 자극 등으로 상징되는 여성성이 결합된 유니섹스형 신인류인 ‘꽃미남’은 한국과 일본의 국경을 넘나들며 생산된 수많은 순정만화에서 수없이 변주돼 나타나는 남성 주인공이다.
이러한 캐릭터는 점차 소년 만화에도 영향을 끼쳐 청소년을 타깃으로 하는 온갖 만화에 나타나는 등 갈수록 그 영토를 확장하고 있다. 최근 10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조운학의 만화 ‘니나 잘해’의 주인공 이후가 그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만 이 소설의 인기를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이러한 꽃미남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로맨스 소설은 인터넷 공간에 수없이 많으며 프린터로 출력하면 한 트럭은 될 것이다. 우리는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가 성공한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핍진성(逼眞性)’의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놈은 멋있었다’는 독자들로 하여금 10대들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고 착각하게 만들었으며, 그래서 수없이 반복돼 신물이 날 지경인 하이틴 로맨스적인 줄거리를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경험하게 만든 것이다.
10대들이 이 소설을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인 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첫째, 소설 첫 부분부터 작가 귀여니는 ‘여고’와 ‘상고’의 대립을 유난히 두드러지게 강조한다.
“여고라 그런지 글도 잘 안 올라온다.”(5쪽)
“우리 학교, 과천에서 공부 잘한다고 소문난 핵교다. 그러니 당연히 학생들은 이런 스타일을 고집했다. ☞ 두발자유임에도 불구하고 귀 밑으로 단정하게 넘긴 머리(앞머리와 함께), 펑퍼짐한 교복치마, 줄줄 흐르는 마이, 70퍼센트 가량은 안경 착용.”(6쪽)
요컨대 10대들의 세계는 대학 갈 사람과 가지 않을 사람으로 완전히 나누어져 있다. 그들은 복장이나 노는 장소부터 생각하는 것까지 완전히 다르며 같은 또래인데도 서로 거의 섞이지 않는다. 귀여니는 그들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함으로써 두 주인공 사이에 뛰어넘기 어려운 단절을 강조하며, 이것은 10대들 사이에 기이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른바 기성 사회가 ‘교실 붕괴’로 진단하는 사회적 현실이 소설의 밑바닥에 진하게 깔려 있는 것이다.
여고와 상고의 이러한 대립은 대단히 구체적인 것, 그러니까 ‘학교 근처’와 ‘시내’라는 공간적 차이로도 나타난다.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은 ‘(상고 아이들이 점령한) 시내 나오지 말라’는 협박을 여러 번 당한다. 따라서 여주인공 예원이 은성을 만나기 위해 시내에 나가는 것은 이러한 단절 내지 금기를 뛰어넘는 행위이며, 그러한 코드를 익히 잘 알고 있는 10대 독자들의 가슴은 예원이 그런 행동을 할 때마다 더 크게 울렁거리는 것이다.
둘째, 작가는 10대들이 열망하는 문화 상품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주인공들의 상황을 드러내는 데 활용한다.
“너 땜에 스카이 핸드폰 뺏겼어! 내가 1시에 하랬지!”
“나, 스카인 거 안 물어봤어.=_=”(44쪽)
이야기 전체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되는 이 짤막한 대화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의 세계는 신종 문화 상품을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대화에서 은성의 말은 수업시간에 친구에게 온 전화를 받다가 선생님에게 휴대전화를 빼앗기는 일이 흔하게 일어난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스카이’기 때문에 예원이 더 미안해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에 대한 예원의 반응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열등감의 산물이다. 벽돌 같은 모양에 거의 수신만 되는 휴대전화를 가진 예원은 ‘스카이’ 같은 멋진 문화 상품으로 치장한 은성과 날카롭게 대립하며, 10대 독자들에게 이러한 대립은 그들의 사랑을 더욱 극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예원은 물론 작가도 고등학생에 지나지 않는 은성이 50만원에 달하는 스카이 휴대전화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사회적 관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그것은 부유한 부모 덕에 생겼을 수도 있고, 힘 약한 아이들의 돈을 빼앗아 가진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의 눈에는 그러한 사회적 관계는 전혀 보이지 않으며 오롯하게 빛나는 상품의 이미지만이 보일 뿐이다.
셋째, 온갖 사회적 금기를 넘나들 때 주인공들이 느끼는 심리가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나이트를 가자고? 니 미친 거 아이가?”
“정민이한테 멋진 추억을 만들어줘야 하지 않겠니?-_-”
(중략)
=_= 그래도 이 옷은 진짜 아닌데. ㅜ_ㅜ 나는 보라색 광택이 나고 목주변이 흐느적거리는 나일론 소재의 야시꾸리한 윗도리에, 해초를 연상케 하는 나풀거리는 흰색 치마를 입었다.
(중략)
우리는 정민이의 집까지 가는 도중 뭇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각에 어느 다방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인지 궁금해 쳐다본 게 아닐까 싶다. -_-^ 화장만은 짙게 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쳤건만…….
흑흑. 울 엄마한테 걸리면 나 죽는단 말여, 이 가스나야. ㅜ^ㅜ
생생하고 통쾌한 심리 묘사
예원의 친구 경원에게 ‘멋진 추억’은 ‘나이트클럽에 가는 것’, 그러니까 사회적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예원의 반응에서 보듯이 사회적 금기를 어기고 어른처럼 행동하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지극한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주인공의 반응은 여타의 성장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필자가 흥미롭게 본 것은 흔히 기성세대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회적 금기가 목록에서 아예 빠져 있으며 이야기 속의 어른들도 그것을 용인한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술 마시기’다. 예원은 자신의 주량(맥주 네 병)을 거의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화가 나는 등 일이 있을 때마다 술을 마신다. 그런데 예원의 행동을 사회적으로 가로막는 시스템은 완전히 무력화돼 있다.
또 다른 예는 ‘한밤중에 외출 또는 외박하기’다. 예원은 집에 있다가도 은성 등이 부를 때마다 아무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새벽 한두 시에도 외출해 새벽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야기 전개상 필요해서 그런 것인지 현실이 진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예원의 행동은 거의 부모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기이한 일이 아닌가? 어찌 보면 친구들과 나이트클럽에 한두 번 놀러가는 것보다 이러한 행동이 더 큰 사회적 제재의 대상이 아닌가? 어쨌든 ‘그놈은 멋있었다’는 10대들이 금기로 느끼는 것을 겪을 때의 심리를 생생하고 통쾌하게 보여줌으로써 10대 독자들의 마음을 흡입하고 그들을 감동시키고 울음과 웃음을 끌어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온갖 상황에서 10대들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심리학 연구 보고서로 읽힐 수도 있다.
이야기 자체로는 상당히 미숙한데도 10대들은 귀여니의 ‘그놈은 멋있었다’에 열광한다. 그들의 열광을 덜떨어진 아이들의 치기나 잘못된 사회 제도가 낳은 병리 현상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미래에 좀더 성숙한 형태로 되돌아올 10대들의 문화적 에너지가 하나의 출구를 통해 분출해나온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입시에, 문화 상품의 공세에, 사회적 금기에 노출돼 있는 10대들의 생생한 현실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럼으로써 10대들의 엄청난 공감을 얻었다. 어쩌면 이 이야기를 좀더 진지하게 검토함으로써 일종의 임포텐츠 현상을 겪고 있는 한국 문학은 하나의 탈출구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