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차고 나면 기우는 달

  • 유희인

    입력2009-11-04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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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고 나면 기우는 달

    일러스트·조은명

    내게 의지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를 모셨다.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준비에 철저하며 당신의 일에 흠 잡히는 것을 싫어하셨던 시어머니와 평생 동안 남의 밑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게 자랑이었으며 남달리 건강했던 친정아버지.

    두 분 다 젊은 시절에는 한몫을 하시던 분들이었으나 세월에는 장사가 없어 노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웰다잉

    40대의 가장으로 식구들을 겨우 이끌고 있는 어느 중년 남자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시설에 모시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두 가지 방법밖엔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버리거나 아예 그만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 날더러 나쁜 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치매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어르신들이 집에서 자녀들의 수발을 받는 비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어르신들을 모시는 시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어떤 수준의 시설에 계시건 속마음으로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신다. 다만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할 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친정아버지가 건강하신 동안에는 혼자서 지내셨지만 거동이 불편해지신 이후로는 내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13년 동안 친정아버지의 수발을 들었다. 마지막에는 시설의 도움을 받았지만 어르신이 중증이 아니라면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전생수 목사님은 생전에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첫째,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인즉,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지 말라.

    둘째, 나는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어떤 음식이든 먹지 않을 것인즉 억지로 권하지 말라. 또한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꺼리지 말라. 셋째. 내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려 장례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넷째, 내가 죽으면 내 몸의 쓸모 있는 것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내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던 옷을 입혀 화장을 하고,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향 마을에 뿌려주기를 바란다. 다섯째, 내가 죽은 뒤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 와서 산 만큼 신세를 졌는데 더 무슨 폐를 끼칠 까닭이 없도다.

    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잘 죽을 준비는 노년이 된 다음에 시작해서는 너무 늦다. 웰빙(well being)도 좋지만 웰다잉(well dying)도 일찍부터 준비하는 게 옳다.

    모자란 사람

    일본에서 살고 있던 시어머니가 귀국한 이후로 함께 지내던 작은 시숙 댁에서 시어머니와 문제가 생겨 남편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본에 있는 막내동서까지 포함하여 며느리가 넷인데 내가 셋째다. 큰형님은 그동안 시어머니에게 너무 무시를 당해서, 작은형님은 시어머니의 억지소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시어머니를 모실 수가 없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거취를 두고 형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에 큰 시숙 내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작은 시숙 내외는 누군가는 해야겠지만 우리는 이제 더 못하겠다고 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남편이 자진해서 이번에는 자기가 모셔보겠노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일주일에 서너 번 다니는 성당에도 자기가 출근길에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막상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온 다음에 남편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간 것은 대여섯 번뿐이고 실제로는 그게 다 내 몫이었다. 아이들은 내게 아버지 한 사람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아버지하고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날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놀렸다.

    그래도 남편이 효자노릇 한 건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끼어들지 않은 일이다.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와 무슨 일을 하던, 무엇을 먹던, 어디를 가던 전혀 참견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시어머니와 그런대로 잘 지낼 수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남편의 고단수에 넘어간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친구 말대로 내가 좀 모자라서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작은 시숙 댁에 있다가 우리 집으로 오신 일을 두고 당신이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하셨다. (그럼, 나는 좀 모자란 호랑이?)

    포르노

    시어머니가 재일교포 거류민단 부인회에서 일을 보실 때였는데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으면 국회의원이건 사업가이건 교수이건 거의 모두가 포르노극장에 가고싶어 하더란다. 그럴 때마다 늘 남자직원들을 시켜 안내하게 했었는데 어느 날 도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일본에 오는 사람마다 보고 싶어 하는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회 임원 몇 명과 함께 포르노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고 저녁 늦게 만나 머플러를 뒤집어쓰고 표를 사서 들어갔다고 하셨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시어머니께 여쭈어보았다.

    “그래서 재미있게 보셨어요?”

    “재미있는 게 다 뭐냐? 구역질이 나서 도중에 나와버렸다.”

    그래도 왕성한 호기심은 충족되셨을 테지.

    시어머니는 미모가 뛰어난 데다 머리도 좋고 사리에 밝았다. 예의범절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소년·소녀가장을 지원하기도 했고 양로원 등의 복지시설에도 많은 돈을 기부하셨다. 시어머니의 방은 언제나 청결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차고 나면 기우는 달
    시어머니는 신문을 읽으실 때마다 정치면, 사회면을 보고 분개하시며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다고 하셨다. 하시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점이 보이면 늘 지적하고 점검하고 바로잡아주려고 하셨다.

    외식을 하러 나가서도 우리보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식사가 먼저 나오면 종업원을 불러 식당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시키고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 난다고 나무랐다.

    그런 시어머니를 보고 큰아들이 말했다.

    “이 사회에 할머니 같은 분이 꼭 필요하기는 한데 집안 식구가 그러면 좀 골치 아프지.”

    하시는 말씀도 언제나 옳고 당신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키시며 산다. 하지만 사람들이 시어머니께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실제로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8년 동안 큰 시숙이 세 번, 작은 시숙이 두 번, 시누이가 한 번 온 게 전부이고 열 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은 안부전화 한 통도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아이들은 왜 자기 할머니에게 전화도 하지 않는 걸까요?”

    “그걸 왜 내게 물어보냐?”

    남편이 설명하기엔 너무 뿌리가 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자신을 한번 돌아볼 만도 한데 시어머니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라며 “모두가 날 외면하여도 나는 주님만 따라가리”라는 찬송을 부르셨다.

    막강한 시어머니

    성당에서 야유회를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떠난다고 해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강을 건너 청담동 성당에 도착하자 야유회를 위해 대절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버스에 올라가서 앉을자리를 찾는데 마침 비어 있는 자리에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시어머니는 가방이 놓인 좌석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물으셨다.

    “여기 자리 있소?”

    “누가 올 건데요.”

    “그 ‘누가’가 여기 왔수다.”

    그 아주머니는 함께 앉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미리 자리를 맡아놓은 모양이지만 먼저 오는 순서대로 앉는 게 상식이라고 믿는 시어머니에게는 통할 리가 없다. 시어머니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아주머니가 머뭇거리자 시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가방 치우시오! 가방이 야유회비 냈습니까?”

    이런 일도 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에 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일본에 다녀오셨다. 시어머니가 비행기 안에서 식사 중이셨는데 앞사람이 먼저 식사를 마쳤는지 좌석을 뒤로 젖히더란다. 식사 중이던 시어머니가 그 사람을 나무랐다.

    “의자 바로 세우시오. 당신은 예의도 상식도 없습니까? 내가 식사 중이란 말입니다.”

    시어머니에게 무안을 당한 그 남자 분은 의자를 바로 세우더니 스튜어디스를 불러 위스키를 주문하더란다. 시어머니는 그 사람이 맨정신에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술김에 행패를 부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 다시 앞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이니 당신이 정 술을 마시고 싶거든 저기 있는 빈자리로 가시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피해 시어머니가 빈자리로 옮겨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남편은 자기네는 왕족이라서 당당함이 피 속에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김해 김씨는 가야의 김수로왕 후손이기 때문에 왕족이라는 거다.

    나는 짐을 벗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치매가족협회 사이트에 시어머니, 친정아버지가 쓰던 휠체어를 드릴 테니 필요하시면 연락하라는 글을 남겼더니 어느 분이 착불로 보내주시면 감사히 받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택배회사에 문의했더니 포장하지 않고 보내면 파손되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큰 휠체어를 포장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직접 갖다드리기로 하고 주소만 가지고 더듬어 가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 민속촌 근처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다시 차를 돌려 길가에 있는 꽃집에도 들어가고 옷집에도 들어가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렵게 만난 그 부인의 시어머니 증세는 이미 집에서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그동안 요양원에서 모셨는데 얼마 전에 면회 갔을 때 시어머니의 발이 부은 것을 보고 요양원 측에 물어보았더니 3~4일 전에 넘어졌다고 말하더란다. 그래서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해본 결과, 골절된 지 이미 2주 정도 지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마치 시어머니를 내다버리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기는 했는데 자신이 하루 종일 시어머니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밤에도 남편이 아니라 시어머니와 한 침대에서 잔다고 한다.

    그녀는 휠체어를 받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을 때도 마음 놓고 천천히 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를 그냥 요양원에 내버려두지 않고 집으로 모셔온 그 심성은 갸륵하나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지쳐버린다고.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지만 휠체어를 받고 무척 좋아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뿌듯한 마음으로 밤길을 돌아왔다.

    해본 사람만이 안다

    큰아들은 여행 갔고 작은아들은 엑스트라로 사극에 출연한다고 지방에 촬영하러 내려갔다. 남편은 늘 늦으니 여느 날처럼 저녁식사를 혼자 먹으려고 하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거였다. 옷을 차려입고 기다리다가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섰다.

    기분 좋게 저녁을 먹은 후에 호젓한 분위기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남편은 다음번에는 노인복지 관련 책을 번역해보라고 말했고, 간식거리로 무지무지하게 비싼, 차마 내 돈 내고는 못 살 쿠키도 샀다. (저녁식사 값보다 더 비쌌다.)

    돌아오는 길에는 영화 비디오도 한편 빌렸다. 두 분 어르신 모시던 일이 언제였나 싶다.

    어제 만난 친구가 이웃 아주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 시어머니 목욕도 시켜드리고 머리도 빗겨드리고 참 착한 아줌마야. 근데 시어머니가 요새 치매에 걸리셨대. 시어머니가 뭐가 뒤틀렸는지 문을 쾅 닫고 들어가셨대.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마루 끝에서부터 쫓아가서 그 방문을 발로 세 번이나 걷어찼대.”

    그 아주머니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해본 사람만이 안다. 말짱한 노인도 모시기 힘든데 제정신 아닌 노인 모시기가 얼마나 버거운지.

    나도 시어머니를, 친정아버지를 거의 때릴 뻔했던 적이 있다.

    비석집 아줌마

    어제는 부모님 묘소에 표석을 세우느라고 친정 선산에 다녀왔다. 요양원 다닐 때나 마찬가지로 나 혼자였다. 동생들도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어제 같은 날 혼자 묘지에 가기는 좀 쓸쓸했다. 석재집 아저씨도 의아해한다.

    “오빠가 오실 줄 알았더니 혼자 오셨네요?”

    “오빠가 아니라 남동생인데요. 회사일 때문에 바쁘대요.”

    묘지까지 가는 동안 석재집 아저씨한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생존해 계신데 중풍을 세 번이나 맞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배낭 속에 갖고 있던 내 책에다 사인을 해서 아주머니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석재집 아주머니를 만난 적은 없고 표석에 들어갈 글씨 때문에 서너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일처리가 매우 꼼꼼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아주머니 일하시는 게 무척 야무지시던데요.”

    “우리 집사람, 만나보셨어요?”

    “아니요. 전화로 체크하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네. 좀 그런 편이에요.”

    다음 날 아침에 그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우리 아저씨 편에 보내주신 책, 잘 읽었어요.”

    “그러세요?”

    “저도 셋며느리인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거든요. 중풍이 온 후로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셔요.”

    “아이고, 힘드시겠네.”

    “어쩌면 그렇게 제 마음과 똑같이 쓰셨는지 밤 열두 시까지 읽었어요. 저희도 작은 시숙이 그래요.”

    공들여 키운 자녀가 꼭 효도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당사자들은 할 만큼 했다고 하겠지. 돈 가져갈 때는 별별 약속을 다 했다는데 막상 시어머니 수발을 해야 할 때가 되자 시숙은 나만 자식이냐고, 왜 거머리같이 들러붙어 있으려고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소개된 어느 스님의 주례사처럼 부부 사이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의 덕을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나 원망은 일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지 않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고 하니 남 말 하기 전에 나부터 곱게 나이 먹을 생각을 해야겠다.

    늙으니까 참 좋다

    올해로 아흔두 살이 되신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제 장지에 다녀왔다. 사촌언니와 함께 선산까지 가는 도중에 차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촌형부는 올해 예순여섯으로 작년에 은퇴하면서 직장생활 40년을 마감하셨다. 사촌언니는 세 딸이 다 공부를 마치고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이제 뭘 더 이루려고 애를 쓸 일이 없어서 늙으니까 마음이 고요해져서 좋단다.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어서 참 좋다고 했다.

    반면에 운전하던 제부는 이제부터 모든 물가가 오르게 생겼다고 걱정이다. 기름값은 오르고? 미국의 경기는 나빠지고 중국은 새로운 노동법을 시행하고 곡물도, 철강도, 시멘트도 비싸지니 물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라면을 미리 사둔들 평생 먹을 것도 아닌데 라면 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사가 난 후 식품진열대에서 라면이 사라졌다고 한다. 나도 옛날 같으면 뭘 사놓아야 하나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부터는 덜 쓰거나 안 쓰기로 했다.

    아직은 늙으니까 참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다음에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보기 좋게 나이 들기

    아는 이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문병을 갔다. 그분의 옆 침대에는 여든 가까운 할머니가 누워계셨는데 이 할머니 때문에 덧날 것 같다면서 서둘러 퇴원하고 싶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6인실에 입원하고 있다가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다투고 쫓겨나셨는데 2인실에서도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양이다. 낮에는 주무시고 밤에 일어나 소변 볼래, 대변 볼래 하면서 간병인을 깨우는데 대소변 치우는 냄새도 냄새려니와 밤새 중얼거리며 뒤척이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자녀들은 퇴행성관절염으로 걷지 못하는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간병인에게 수발을 맡기고 있었다. 차라리 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간병인을 부르면 좋으련만 어느 자녀도 모셔가려고 하지를 않는 모양이다. 자녀들의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병원에 와 계신 것인데 할머니의 성품도 만만치 않아서 때로는 고함을 치며 누군가를 나무라는 것처럼 말씀하신다고 한다.

    할머니의 병명은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하던데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자녀들이 홀대해서 우울증에 걸리신 것인지 우울증에 걸려서 자녀들이 멀리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인들 그리 되고 싶었겠는가?

    보기 좋게 나이 들어가는 일은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불필요한 존재

    시어머니가 치매증세를 보인다고 걱정하던 친구가 “이제는 많이 나아지셔서 농담도 하시는데 식구들의 얼굴은 어둡다”고 했다.

    나의 경험을 책으로 낸 이후로 치매노인 수발하는 가족들이나 너싱홈을 하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게 될 때가 있다. 지난번에는 내 강의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착각하고 온 너싱홈 원장님이 계셨는데 내가 그분에게 시간을 양보한 덕분에 수강생들과 함께 그 원장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어르신을 시설로 모실 때에는 자녀들이 부모를 방기하는 것 같아서 죄의식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다가도 일단 시설을 한번 이용하면 다시 집으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시설에 머물고 계셔도 어르신들은 다들 집으로 가고 싶어 하신다. 시설이 아무리 훌륭하고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노력해도 그곳이 ‘가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면회 온 가족들이 가끔 어르신의 안부를 물을 때에 어르신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면 가족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니 그저 그만그만하시고 식사도 잘 못하고 계신다고 하는 게 무난하다고 한다. 이 다음에 우리가 노인이 되어 앓다가 회복되었을 때에 자식들 얼굴이 어두워진다고 생각하면 좀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자연인걸.

    부모노릇은 자식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야 끝난다고 하니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지내려고 가랑비 오는 오늘도 집 근처에 있는 신덕왕후릉을 한 바퀴 돌고 왔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몰래 하는 시댁이야기’라는 사이트에서 어느 분이 노인네들 있으면 전기요금 도시가스비가 배로 나온다고 쓴 글을 읽고 이렇게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저도 어르신 모시고 살아본 적 있거든요. 두 분 다 나중에는 정상이 아니었던 어르신들이라 집에서 망가뜨리고 깨뜨리고 부순 물건도 많고 이불에도, 옷에도 가위질을 하셔서 한숨쉬며 꿰맨 적도 있습니다. 외출했다 들어오니 언제부터 틀어놓았는지 목욕탕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 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집에서 모시고 있을 때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거나 시설에 모시게 되면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이 들어갑니다.

    전쟁을 치르듯 아이들과 씨름하면서 한편으로는 집 장만 하려고 애쓰던 때에는 내가 제일 바쁘고 힘든 것 같았습니다. 집에는 늙고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우리 집 근처로 홀로 되신 친정아버지를 모셔다놓고 수발을 할 때에도 내가 제일 바쁘고 힘든 것 같았습니다만 살아가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어르신에게도 힘이 듭니다.

    이제는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 생활을 다시 해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내게 불만이 많았던 시어머니가 가끔 악을 쓰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그때는 말씀 참 고약하게 하신다 싶었는데 그게 서러움과 질투와 분노와 부러움이 섞인 말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이제는 노인이 되어가는가봅니다.

    전기세나 가스비가 많이 나오더라도 할 수만 있으면 어르신들에게 잘해드리세요. 우리가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돌보면 인생이 우리를 돌보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당역에서

    오늘 수원에 갈 일이 있는데, 사당역에서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1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를 가져오는 분이 늦는다고 연락을 해왔다.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보니 고가도로 아래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손을 휘저으며 계속 뭐라고 소리를 치고 계셨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아무도 알은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여전히 소리를 치고 계시는 거다. 나는 주춤주춤 찻길을 무단횡단해 할아버지에게로 갔다.

    “할아버지, 누구를 부르시는 거예요?”

    “나 좀 붙잡아줘.”

    “건너가시게요?”

    “응. 날 잡아당겨.”

    “어디로 가실 건데요?”

    “조~오기 있는 교회에.”

    가신다는 교회가 바로 길 건너에 있는가보다 하고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길을 건넜는데 알고 보니 조~오기가 아니라 한참 올라간 언덕에 있는 까리따스수녀회였고 할아버지는 내가 잡아당겨드리면 발을 겨우 떼어 앞으로 움직이는 정도로밖에 걷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올라가며 여쭈어보았다.

    “할아버지 댁은 어디세요?”

    “청학리.”

    청학리는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야 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