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호

차고 나면 기우는 달

  • 유희인

    입력2009-11-04 11: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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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고 나면 기우는 달

    일러스트·조은명

    내게 의지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를 모셨다.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준비에 철저하며 당신의 일에 흠 잡히는 것을 싫어하셨던 시어머니와 평생 동안 남의 밑에서 일해본 적이 없는 게 자랑이었으며 남달리 건강했던 친정아버지.

    두 분 다 젊은 시절에는 한몫을 하시던 분들이었으나 세월에는 장사가 없어 노후에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일상생활이 가능했다.

    웰다잉

    40대의 가장으로 식구들을 겨우 이끌고 있는 어느 중년 남자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시설에 모시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면 두 가지 방법밖엔 없는 것 같다. 어머니를 버리거나 아예 그만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것. 날더러 나쁜 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치매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어르신들이 집에서 자녀들의 수발을 받는 비율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어르신들을 모시는 시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지만 어떤 수준의 시설에 계시건 속마음으로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싶어 하신다. 다만 자녀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할 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친정아버지가 건강하신 동안에는 혼자서 지내셨지만 거동이 불편해지신 이후로는 내가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13년 동안 친정아버지의 수발을 들었다. 마지막에는 시설의 도움을 받았지만 어르신이 중증이 아니라면 가족과 함께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전생수 목사님은 생전에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이런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첫째, 나는 치료하기 어려운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지 않을 것인즉, 병원에 입원하기를 권하지 말라.

    둘째, 나는 병에 걸려 회복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어떤 음식이든 먹지 않을 것인즉 억지로 권하지 말라. 또한 내가 의식이 있는 동안에 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 나누기를 꺼리지 말라. 셋째. 내가 죽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려 장례를 번거롭게 하지 말라. 넷째, 내가 죽으면 내 몸의 쓸모 있는 것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내가 예배를 집례할 때 입던 옷을 입혀 화장을 하고, 현행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고향 마을에 뿌려주기를 바란다. 다섯째, 내가 죽은 뒤에는 나에 대한 어떠한 흔적도 땅 위에 남기지 말라. 와서 산 만큼 신세를 졌는데 더 무슨 폐를 끼칠 까닭이 없도다.

    노력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남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잘 죽을 준비는 노년이 된 다음에 시작해서는 너무 늦다. 웰빙(well being)도 좋지만 웰다잉(well dying)도 일찍부터 준비하는 게 옳다.

    모자란 사람

    일본에서 살고 있던 시어머니가 귀국한 이후로 함께 지내던 작은 시숙 댁에서 시어머니와 문제가 생겨 남편의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일본에 있는 막내동서까지 포함하여 며느리가 넷인데 내가 셋째다. 큰형님은 그동안 시어머니에게 너무 무시를 당해서, 작은형님은 시어머니의 억지소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시어머니를 모실 수가 없다고 했다.

    시어머니의 거취를 두고 형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에 큰 시숙 내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이 없었고 그때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작은 시숙 내외는 누군가는 해야겠지만 우리는 이제 더 못하겠다고 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 남편이 자진해서 이번에는 자기가 모셔보겠노라고 했다. 시어머니가 일주일에 서너 번 다니는 성당에도 자기가 출근길에 모셔다 드리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막상 우리 집으로 모시고 온 다음에 남편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간 것은 대여섯 번뿐이고 실제로는 그게 다 내 몫이었다. 아이들은 내게 아버지 한 사람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면서 아버지하고 똑같은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날 텐데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고 놀렸다.

    그래도 남편이 효자노릇 한 건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끼어들지 않은 일이다.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와 무슨 일을 하던, 무엇을 먹던, 어디를 가던 전혀 참견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시어머니와 그런대로 잘 지낼 수 있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남편의 고단수에 넘어간 것 같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친구 말대로 내가 좀 모자라서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작은 시숙 댁에 있다가 우리 집으로 오신 일을 두고 당신이 여우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났다고 하셨다. (그럼, 나는 좀 모자란 호랑이?)

    포르노

    시어머니가 재일교포 거류민단 부인회에서 일을 보실 때였는데 한국에서 오는 손님들을 맞으면 국회의원이건 사업가이건 교수이건 거의 모두가 포르노극장에 가고싶어 하더란다. 그럴 때마다 늘 남자직원들을 시켜 안내하게 했었는데 어느 날 도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일본에 오는 사람마다 보고 싶어 하는가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부인회 임원 몇 명과 함께 포르노영화를 보러 가기로 하고 저녁 늦게 만나 머플러를 뒤집어쓰고 표를 사서 들어갔다고 하셨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서 시어머니께 여쭈어보았다.

    “그래서 재미있게 보셨어요?”

    “재미있는 게 다 뭐냐? 구역질이 나서 도중에 나와버렸다.”

    그래도 왕성한 호기심은 충족되셨을 테지.

    시어머니는 미모가 뛰어난 데다 머리도 좋고 사리에 밝았다. 예의범절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소년·소녀가장을 지원하기도 했고 양로원 등의 복지시설에도 많은 돈을 기부하셨다. 시어머니의 방은 언제나 청결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차고 나면 기우는 달
    시어머니는 신문을 읽으실 때마다 정치면, 사회면을 보고 분개하시며 당신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것도 싫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싫다고 하셨다. 하시는 말씀은 너무나 당연하고 지당하였으며 다른 사람에게서 잘못된 점이 보이면 늘 지적하고 점검하고 바로잡아주려고 하셨다.

    외식을 하러 나가서도 우리보다 나중에 온 사람들에게 식사가 먼저 나오면 종업원을 불러 식당을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시키고 지하철에서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올라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에스컬레이터가 자주 고장 난다고 나무랐다.

    그런 시어머니를 보고 큰아들이 말했다.

    “이 사회에 할머니 같은 분이 꼭 필요하기는 한데 집안 식구가 그러면 좀 골치 아프지.”

    하시는 말씀도 언제나 옳고 당신도 나름대로의 원칙을 지키시며 산다. 하지만 사람들이 시어머니께 가까이 오지는 않았다. 실제로 내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8년 동안 큰 시숙이 세 번, 작은 시숙이 두 번, 시누이가 한 번 온 게 전부이고 열 명이 넘는 손자, 손녀들은 안부전화 한 통도 없었다.

    나는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어른들은 그렇다 치고 아이들은 왜 자기 할머니에게 전화도 하지 않는 걸까요?”

    “그걸 왜 내게 물어보냐?”

    남편이 설명하기엔 너무 뿌리가 깊은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장 가까워야 할 가족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하면 자신을 한번 돌아볼 만도 한데 시어머니는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모이지 않는 법이라며 “모두가 날 외면하여도 나는 주님만 따라가리”라는 찬송을 부르셨다.

    막강한 시어머니

    성당에서 야유회를 가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떠난다고 해서 새벽부터 부지런히 준비하고 강을 건너 청담동 성당에 도착하자 야유회를 위해 대절한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버스에 올라가서 앉을자리를 찾는데 마침 비어 있는 자리에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시어머니는 가방이 놓인 좌석 옆에 앉은 아주머니에게 물으셨다.

    “여기 자리 있소?”

    “누가 올 건데요.”

    “그 ‘누가’가 여기 왔수다.”

    그 아주머니는 함께 앉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미리 자리를 맡아놓은 모양이지만 먼저 오는 순서대로 앉는 게 상식이라고 믿는 시어머니에게는 통할 리가 없다. 시어머니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 아주머니가 머뭇거리자 시어머니가 호통을 쳤다.

    “가방 치우시오! 가방이 야유회비 냈습니까?”

    이런 일도 있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던 해에 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일본에 다녀오셨다. 시어머니가 비행기 안에서 식사 중이셨는데 앞사람이 먼저 식사를 마쳤는지 좌석을 뒤로 젖히더란다. 식사 중이던 시어머니가 그 사람을 나무랐다.

    “의자 바로 세우시오. 당신은 예의도 상식도 없습니까? 내가 식사 중이란 말입니다.”

    시어머니에게 무안을 당한 그 남자 분은 의자를 바로 세우더니 스튜어디스를 불러 위스키를 주문하더란다. 시어머니는 그 사람이 맨정신에는 말을 못하고 있다가 술김에 행패를 부리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어서 다시 앞에 앉은 남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사람이니 당신이 정 술을 마시고 싶거든 저기 있는 빈자리로 가시오.”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술 마시는 사람을 피해 시어머니가 빈자리로 옮겨갔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더니 남편은 자기네는 왕족이라서 당당함이 피 속에 흐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김해 김씨는 가야의 김수로왕 후손이기 때문에 왕족이라는 거다.

    나는 짐을 벗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치매가족협회 사이트에 시어머니, 친정아버지가 쓰던 휠체어를 드릴 테니 필요하시면 연락하라는 글을 남겼더니 어느 분이 착불로 보내주시면 감사히 받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택배회사에 문의했더니 포장하지 않고 보내면 파손되어도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 큰 휠체어를 포장하는 게 만만치 않아서 직접 갖다드리기로 하고 주소만 가지고 더듬어 가다보니 길을 잘못 들어 민속촌 근처까지 가버리고 말았다. 다시 차를 돌려 길가에 있는 꽃집에도 들어가고 옷집에도 들어가 물어물어 찾아갔다.

    어렵게 만난 그 부인의 시어머니 증세는 이미 집에서 모실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았다.그동안 요양원에서 모셨는데 얼마 전에 면회 갔을 때 시어머니의 발이 부은 것을 보고 요양원 측에 물어보았더니 3~4일 전에 넘어졌다고 말하더란다. 그래서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해본 결과, 골절된 지 이미 2주 정도 지난 상태였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 마치 시어머니를 내다버리고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오기는 했는데 자신이 하루 종일 시어머니 곁에 붙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밤에도 남편이 아니라 시어머니와 한 침대에서 잔다고 한다.

    그녀는 휠체어를 받기 위해 나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고 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을 때도 마음 놓고 천천히 오라고 하면서 이렇게 밖으로 나올 수 있어 좋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시어머니를 그냥 요양원에 내버려두지 않고 집으로 모셔온 그 심성은 갸륵하나 틈틈이 쉬는 시간을 가지라고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지쳐버린다고.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지만 휠체어를 받고 무척 좋아하던 그녀를 떠올리며 뿌듯한 마음으로 밤길을 돌아왔다.

    해본 사람만이 안다

    큰아들은 여행 갔고 작은아들은 엑스트라로 사극에 출연한다고 지방에 촬영하러 내려갔다. 남편은 늘 늦으니 여느 날처럼 저녁식사를 혼자 먹으려고 하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녁을 같이 먹자는 거였다. 옷을 차려입고 기다리다가 나를 데리러 온 남편을 따라 집을 나섰다.

    기분 좋게 저녁을 먹은 후에 호젓한 분위기의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시면서 남편은 다음번에는 노인복지 관련 책을 번역해보라고 말했고, 간식거리로 무지무지하게 비싼, 차마 내 돈 내고는 못 살 쿠키도 샀다. (저녁식사 값보다 더 비쌌다.)

    돌아오는 길에는 영화 비디오도 한편 빌렸다. 두 분 어르신 모시던 일이 언제였나 싶다.

    어제 만난 친구가 이웃 아주머니 이야기를 했다.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 시어머니 목욕도 시켜드리고 머리도 빗겨드리고 참 착한 아줌마야. 근데 시어머니가 요새 치매에 걸리셨대. 시어머니가 뭐가 뒤틀렸는지 문을 쾅 닫고 들어가셨대.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마루 끝에서부터 쫓아가서 그 방문을 발로 세 번이나 걷어찼대.”

    그 아주머니가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해본 사람만이 안다. 말짱한 노인도 모시기 힘든데 제정신 아닌 노인 모시기가 얼마나 버거운지.

    나도 시어머니를, 친정아버지를 거의 때릴 뻔했던 적이 있다.

    비석집 아줌마

    어제는 부모님 묘소에 표석을 세우느라고 친정 선산에 다녀왔다. 요양원 다닐 때나 마찬가지로 나 혼자였다. 동생들도 저마다 사정이 있겠지만 어제 같은 날 혼자 묘지에 가기는 좀 쓸쓸했다. 석재집 아저씨도 의아해한다.

    “오빠가 오실 줄 알았더니 혼자 오셨네요?”

    “오빠가 아니라 남동생인데요. 회사일 때문에 바쁘대요.”

    묘지까지 가는 동안 석재집 아저씨한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만 생존해 계신데 중풍을 세 번이나 맞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침 배낭 속에 갖고 있던 내 책에다 사인을 해서 아주머니에게 갖다드리라고 했다. 석재집 아주머니를 만난 적은 없고 표석에 들어갈 글씨 때문에 서너 번 통화한 적이 있는데 일처리가 매우 꼼꼼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아주머니 일하시는 게 무척 야무지시던데요.”

    “우리 집사람, 만나보셨어요?”

    “아니요. 전화로 체크하시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지요.”

    “네. 좀 그런 편이에요.”

    다음 날 아침에 그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우리 아저씨 편에 보내주신 책, 잘 읽었어요.”

    “그러세요?”

    “저도 셋며느리인데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거든요. 중풍이 온 후로 정신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셔요.”

    “아이고, 힘드시겠네.”

    “어쩌면 그렇게 제 마음과 똑같이 쓰셨는지 밤 열두 시까지 읽었어요. 저희도 작은 시숙이 그래요.”

    공들여 키운 자녀가 꼭 효도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당사자들은 할 만큼 했다고 하겠지. 돈 가져갈 때는 별별 약속을 다 했다는데 막상 시어머니 수발을 해야 할 때가 되자 시숙은 나만 자식이냐고, 왜 거머리같이 들러붙어 있으려고 하느냐고 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소개된 어느 스님의 주례사처럼 부부 사이뿐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서로 상대방의 덕을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분노나 원망은 일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러지 않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되기 쉽다고 하니 남 말 하기 전에 나부터 곱게 나이 먹을 생각을 해야겠다.

    늙으니까 참 좋다

    올해로 아흔두 살이 되신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제 장지에 다녀왔다. 사촌언니와 함께 선산까지 가는 도중에 차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촌형부는 올해 예순여섯으로 작년에 은퇴하면서 직장생활 40년을 마감하셨다. 사촌언니는 세 딸이 다 공부를 마치고 각자 제 할 일을 하고 있으니 이제 뭘 더 이루려고 애를 쓸 일이 없어서 늙으니까 마음이 고요해져서 좋단다. 특별히 갖고 싶은 것도 없어서 참 좋다고 했다.

    반면에 운전하던 제부는 이제부터 모든 물가가 오르게 생겼다고 걱정이다. 기름값은 오르고? 미국의 경기는 나빠지고 중국은 새로운 노동법을 시행하고 곡물도, 철강도, 시멘트도 비싸지니 물가는 오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라면을 미리 사둔들 평생 먹을 것도 아닌데 라면 값이 오를 것이라는 기사가 난 후 식품진열대에서 라면이 사라졌다고 한다. 나도 옛날 같으면 뭘 사놓아야 하나 걱정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이제부터는 덜 쓰거나 안 쓰기로 했다.

    아직은 늙으니까 참 좋다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지만 다음에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보기 좋게 나이 들기

    아는 이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서 문병을 갔다. 그분의 옆 침대에는 여든 가까운 할머니가 누워계셨는데 이 할머니 때문에 덧날 것 같다면서 서둘러 퇴원하고 싶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 할머니는 6인실에 입원하고 있다가 같은 병실의 환자들과 다투고 쫓겨나셨는데 2인실에서도 여전히 곁에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모양이다. 낮에는 주무시고 밤에 일어나 소변 볼래, 대변 볼래 하면서 간병인을 깨우는데 대소변 치우는 냄새도 냄새려니와 밤새 중얼거리며 뒤척이는 통에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한다.

    자녀들은 퇴행성관절염으로 걷지 못하는 할머니를 병원에 입원시켜놓고 간병인에게 수발을 맡기고 있었다. 차라리 집에 모시고 있으면서 간병인을 부르면 좋으련만 어느 자녀도 모셔가려고 하지를 않는 모양이다. 자녀들의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병원에 와 계신 것인데 할머니의 성품도 만만치 않아서 때로는 고함을 치며 누군가를 나무라는 것처럼 말씀하신다고 한다.

    할머니의 병명은 노인성 우울증이라고 하던데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모르겠다. 자녀들이 홀대해서 우울증에 걸리신 것인지 우울증에 걸려서 자녀들이 멀리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할머니인들 그리 되고 싶었겠는가?

    보기 좋게 나이 들어가는 일은 중년에 들어서면서부터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불필요한 존재

    시어머니가 치매증세를 보인다고 걱정하던 친구가 “이제는 많이 나아지셔서 농담도 하시는데 식구들의 얼굴은 어둡다”고 했다.

    나의 경험을 책으로 낸 이후로 치매노인 수발하는 가족들이나 너싱홈을 하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나의 경험담을 이야기하게 될 때가 있다. 지난번에는 내 강의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착각하고 온 너싱홈 원장님이 계셨는데 내가 그분에게 시간을 양보한 덕분에 수강생들과 함께 그 원장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다.

    그 원장님의 말에 따르면 어르신을 시설로 모실 때에는 자녀들이 부모를 방기하는 것 같아서 죄의식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다가도 일단 시설을 한번 이용하면 다시 집으로 모셔가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시설에 머물고 계셔도 어르신들은 다들 집으로 가고 싶어 하신다. 시설이 아무리 훌륭하고 직원들과 봉사자들이 노력해도 그곳이 ‘가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면회 온 가족들이 가끔 어르신의 안부를 물을 때에 어르신의 건강이 좋아지고 있다고 하면 가족들의 얼굴이 어두워지니 그저 그만그만하시고 식사도 잘 못하고 계신다고 하는 게 무난하다고 한다. 이 다음에 우리가 노인이 되어 앓다가 회복되었을 때에 자식들 얼굴이 어두워진다고 생각하면 좀 씁쓸하다.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자연인걸.

    부모노릇은 자식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야 끝난다고 하니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날까지는 건강하게 지내려고 가랑비 오는 오늘도 집 근처에 있는 신덕왕후릉을 한 바퀴 돌고 왔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몰래 하는 시댁이야기’라는 사이트에서 어느 분이 노인네들 있으면 전기요금 도시가스비가 배로 나온다고 쓴 글을 읽고 이렇게 댓글을 단 적이 있다.

    저도 어르신 모시고 살아본 적 있거든요. 두 분 다 나중에는 정상이 아니었던 어르신들이라 집에서 망가뜨리고 깨뜨리고 부순 물건도 많고 이불에도, 옷에도 가위질을 하셔서 한숨쉬며 꿰맨 적도 있습니다. 외출했다 들어오니 언제부터 틀어놓았는지 목욕탕 수도꼭지에서는 물이 콸콸 흐르는 일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집에서 모시고 있을 때에 들어가는 비용이 적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거나 시설에 모시게 되면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큰돈이 들어갑니다.

    전쟁을 치르듯 아이들과 씨름하면서 한편으로는 집 장만 하려고 애쓰던 때에는 내가 제일 바쁘고 힘든 것 같았습니다. 집에는 늙고 병든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으면서 우리 집 근처로 홀로 되신 친정아버지를 모셔다놓고 수발을 할 때에도 내가 제일 바쁘고 힘든 것 같았습니다만 살아가는 일은 젊은 사람에게도, 어르신에게도 힘이 듭니다.

    이제는 기운이 떨어져서 그런 생활을 다시 해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내게 불만이 많았던 시어머니가 가끔 악을 쓰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안 늙을 줄 아냐?”

    그때는 말씀 참 고약하게 하신다 싶었는데 그게 서러움과 질투와 분노와 부러움이 섞인 말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이제는 노인이 되어가는가봅니다.

    전기세나 가스비가 많이 나오더라도 할 수만 있으면 어르신들에게 잘해드리세요. 우리가 힘없고 약한 사람을 돌보면 인생이 우리를 돌보기 시작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당역에서

    오늘 수원에 갈 일이 있는데, 사당역에서 차를 얻어 타기로 했다. 1번 출구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차를 가져오는 분이 늦는다고 연락을 해왔다.

    차가 오기를 기다리며 가만히 보니 고가도로 아래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손을 휘저으며 계속 뭐라고 소리를 치고 계셨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아무도 알은체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도 그냥 가만히 서 있었는데 한참이 지나도록 여전히 소리를 치고 계시는 거다. 나는 주춤주춤 찻길을 무단횡단해 할아버지에게로 갔다.

    “할아버지, 누구를 부르시는 거예요?”

    “나 좀 붙잡아줘.”

    “건너가시게요?”

    “응. 날 잡아당겨.”

    “어디로 가실 건데요?”

    “조~오기 있는 교회에.”

    가신다는 교회가 바로 길 건너에 있는가보다 하고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길을 건넜는데 알고 보니 조~오기가 아니라 한참 올라간 언덕에 있는 까리따스수녀회였고 할아버지는 내가 잡아당겨드리면 발을 겨우 떼어 앞으로 움직이는 정도로밖에 걷지 못하셨다.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올라가며 여쭈어보았다.

    “할아버지 댁은 어디세요?”

    “청학리.”

    청학리는 4호선 종점인 당고개에서 내려 버스를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곳이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시는데 청학리에서 버스 타고 다시 전철로 갈아타고 사당역까지 오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다.

    “오늘은 여기 왜 오셨는데요?”

    “여기 오면 밥을 줘.”

    “그래요?”

    몸피 좋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어찌어찌 수녀회 건물까지 올라가서 숨을 고르며 식당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데 어떤 청년이 점심식사 제공은 평일에만 한다고 했다.

    (에고, 난 몰라! 이 할아버지랑 다시 전철역까지 가려면 20분도 더 걸릴 텐데.)

    그 청년이 식당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자신들의 식사를 할아버지에게 드려도 되는지 수녀님께 여쭈어보았는데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안 된다고 하셨단다. 청년에게 할아버지의 식사는 내가 해결할 테니 제발 사당역 근처 식당까지만 태워달라고 부탁해 전철역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으로 모시고 갔다. 식사를 주문하고 음식값을 치른 후 차비로 쓰시라고 1만원을 드렸더니 할아버지는 벌쭉 웃으시며 여러 겹 입은 옷 속에서 지갑을 꺼내어 돈을 집어넣으셨다.

    차에서 여러 사람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1번 출구로 오라는 전화가 와서 식당을 나서려고 하자 식당 아줌마는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놓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고 짜증을 냈다. 나는 아줌마에게 이렇게 말하고 부리나케 내뺐다.

    “에구, 이따가 경찰을 불러서 전철 태워드리라고 하세요.”

    (아줌마, 미안해요. 나도 모르는 할아버지예요.)

    효부상

    아침에 신문을 보던 남편이 나를 불렀다.

    “이리 와 봐라. 우리가 졌다!”

    남편이 나에게 보여준 것은 ‘두 어머니 모시는 68세 청년’이라는 제목으로 백한 살의 노모와 아흔여섯 살의 장모를 모시는 남자분이 효행상을 받았다는 기사였다.

    그의 부인은 작년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일흔네 살인 그의 누나가 두 어르신 돌보는 일을 거들어주고 있다고 한다.

    효행상패나 꽃다발을 주는 대신에 가정에서 어르신을 돌보고 있는 이들이 일주일에 하루라도 온전히 쉴 수 있는 여건을 누군가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시어머니는 1916년생으로 시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60년 넘도록 교토에서 사시다가 말년에 영구 귀국했다. 일본에 계실 때에는 재일한국인거류민단 부인회 부회장으로 일하시기도 했는데 일 처리가 치밀하고 금전문제에 엄격해서 집행부가 늘 긴장했다고 한다. 어느 해 겨울에 방안에서 넘어져 척추가 골절된 후, 열 달 동안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다. 친정아버지는 1913년생으로 열아홉 살 때 집을 나가 목공소를 차리셨고, 후에는 건축업에 종사하셨다. 젊었을 때부터 유도를 하셨는데 도복을 입지 않으면 지도자라 할 수 없다면서 여든 살이 넘어서까지 도장에서 운동을 하셨다. 뇌경색과 뇌출혈로 치료를 받았고 수집, 배회, 지남력 상실 등의 치매증세를 보이다가 돌아가셨다.)

    수상소감

    차고 나면 기우는 달

    柳熙仁 <br>● 1953년 서울생<br>● 숙명여고 연세대 졸<br>● 카피바라북스 대표

    모시던 시어머니가 여든아홉에 돌아가신 후 바로 모셔온 친정아버지가 아흔셋 나이로 돌아가셨다.

    머리가 좋아도, 몸이 건강해도, 재물을 모았어도 생명이 스러지는 날이 온다. 죽음을 앞두고 많은 사람이 일을 좀 더 할 걸 혹은 돈을 더 많이 벌어둘 걸 하는 게 아니라 그때 화내지 말 걸, 좀 더 사랑할 걸, 미리 용서할 걸 하고 후회한다고 한다.

    시어머니와 친정아버지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을 지켜보고 나서 끝까지 남는 건 ‘관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잘 산다는 것은 좋은 집이나 큰 차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 두 분을 동시에 돌보고 있을 때에는 그저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병원에 모시고 가는 일만으로도 벅찼다. 노인을 돌보는 일은 아이를 키우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만 아이는 시간이 갈수록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데 비해 함께 사는 시어머니도, 우리 집 근처에 사는 친정아버지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 상황에서 두 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커녕 화나 내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러던 내가 그때의 일을 글로 남겨 이렇게 수상소감을 쓰고 있다. 살아계실 때에 두 분에게 더 상냥하게 해드리지 못한 게 죄송스럽다는 말을 하기에는 내 낯이 간지럽다. 혹시 다시 하게 되더라도 그때보다 더 잘해드릴 자신도 없다.


    차고 나면 기우는 달
    행복한 주말

    오래간만에 하루 종일 놀았다. 추석 전에 가벼운 중풍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친정아버지 수발 때문에 더 바빠졌고 척추에 골절상을 입은 시어머니가 방에 딸린 화장실에도 가실 수 없게 되어 실내용 변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9월 이래 종종걸음으로 뛰다시피 살다가 주말에 놀아보기는 처음이다. 게다가 일복이 터져 올해 끝자락에 낼 세 권의 책을 준비 중이었는데 다행히 남편도 때맞추어 해외출장 중이라 책 내는 일을 잠시 뒤로 미루고 삼청동에 있는 찻집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수제비집으로, 단팥죽집으로, 삼청각으로, 노래방으로 돌아다니며 놀았다. 친구 말대로 “짐승같이”, 마시고 먹은 게 내려갈 새도 없이 자리를 옮겨가며 별미를 즐겼다. 오래된 동네에서 나누는 옛날 추억담은 재미있었고 내 생일이라고 선물까지 마련하여 깜짝 파티를 열어준 친구들이 너무 고맙다. 덕분에 오래간만에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시어머니의 유서

    시어머니가 이불 위에 주저앉으면서 허리뼈가 네 곳이나 부러졌을 때 의사는 이제 다시는 걷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누워만 있으면서 점점 쇠약해져가던 시어머니는 그래도 당신이 돌아가시리라고는 생각지 않은 것 같다.

    시어머니가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치료비용이 불어나자 큰 시숙이 제안을 했다.

    “어머니가 가지고 계신 돈이 있지 않으냐? 그 돈을 다 쓰고도 모자라면 우리들도 돈을 내겠다.”

    시어머니는 당신의 돈을 은행이 아닌 성당에 유서와 함께 맡겨두었는데 기분이 바뀔 때마다 성당에 가서 유서를 고쳐 쓰셨다. 그리고 주밀하게도 성당의 사무장에게는 “나는 아들도, 딸도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건 사무장뿐이니 꼭 내 부탁대로 해달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이 봉투를 내주지 말라. 혹시 여자가 찾으러 오거든 절대로 내주면 안 된다”고 하셨다고 한다.

    큰 시숙이 나와 함께 성당으로 가서 사무장을 만났는데 사무장은 평소에 시어머니에게 부탁받은 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다며 장남인 큰 시숙이 전후 사정을 이야기해도 시어머니가 맡기신 통장과 유서가 들어 있는 봉투를 내주지 않았다.

    “할머니 물건이므로 내드릴 수 없습니다. 게다가 할머니가 살아계신 동안은 안 됩니다. 통장과 함께 맡기신 유서에 뭐라고 쓰셨는지는 모르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더라도 그 유서에 쓰여 있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사무장은 요지부동이고 큰 시숙은 쓴 입맛만 다시고 앉아 있었다.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내가 말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 물건만 맡으실 게 아니라 우리 어머니도 좀 맡아주세요.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성당 마당에 모셔다놓고 가겠습니다.”

    사무장은 그제야 시어머니가 맡긴 봉투를 내어놓았다.

    이제 시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좋아하시던 음식을 보거나 시어머니를 모시고 갔던 카페나 레스토랑, 호텔 등을 지날 때마다 생각이 난다. 시어머니가 일처리를 왜 그렇게 복잡하게 하도록 만들어놓으셨는지 그 당시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편 사랑은 받지 못했으니 효도는 강제로라도 받아야겠다고 해서 네 며느리가 다 경원했는데 속마음으로는 사랑과 관심을 원했으나 실제로는 의심과 분노와 외로움 속에 살고 계셨던 걸 생각하면 참 가엾다.

    돌 던지면

    치매기가 보이는 시어머니, 친정아버지 돌보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인터넷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네이버의 ‘몰래 하는 시댁이야기’를 알게 된 지 여러 달 지났다.

    거기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공감도 하고 그래도 내 사정은 나은 편이라고 자위할 때도 있다. 전적으로 동조할 수 없는 의견을 올리는 사람도 있고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조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니까, 누구든지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는 것이니까 그냥 읽기만 하고 지나갔다. 그 처지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일들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시댁 식구들에 대한 불만이 많아도 남편이 미안하다, 고맙다고만 하면 힘든 줄 모르고 일하는 게 아내들이다. 그런데 어느 댁에서는 남편 분이 시댁식구들에 대한 불평을 아예 처음부터 원천봉쇄하는 모양이다. 그런 남편을 둔 아내의 하소연이 올라오기도 한다. “할 도리는 다 하고 당당하게 할 말 하고 살아라, 안 그러면 병난다, 참다참다 한번 엎었더니 시모, 시누이 모두 내게 꼼짝 못한다.” 이런 조언 아닌 조언을 읽으면 우선은 거부감이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하고 싶은 말도 꿀꺽 삼킨 일이 여러 번인데 돌아가신 시어머니는 날더러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산다고 하셨다. 마음에 내키지는 않아도 시어머니가 굳이 원하는 일은 억지로 따르기도 했다. 그럼에도 친정 부모님에게는 착하고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시어머니에게는 이래도 흉이 되고 저래도 책잡히는 독하고 밉살스러운 며느리였다.

    함께 살던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홉 달이 지났고 모시고 살던 친정아버지를 시설로 모신 지 며칠이 되었다. 시어머니에게도, 친정아버지에게도 할 도리를 다 했는지 가끔 자문하게 된다.

    어제는 치매증세를 보이는 시어머니를 모시기로 어렵게 결심한 어느 주부의 글을 보았다. 그녀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참 착잡한 기분이 되어 나도 댓글을 달았다.

    그 댁의 시어머니는 낮에는 주간보호센터에 다니시던데 그 정도의 증세를 가지고 있는 분 씻기고 기저귀 가는 일을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만일 아직 내가 정신을 완전히 놓지도 않았는데 밖에서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온 아들이 나를 씻기고 기저귀를 갈아준다면 내 기분이 얼마나 참담할까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 때에 시어머니가 나를 자극하는 말씀도 여러 번 하셨고 저도 시어머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내 손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가능하면 수치심 느끼지 않게 하려고, 자존심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치매에 걸리셨더라도 존중받아야 하는 인격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심지어 “아들 본인이야 자기를 낳아서 길러준 부모니까 당연지사겠지만 며느리가 무슨 죄냐?”고까지 하시는 분도 계시던데 남편의 짐을 함께 나누어지는 게 부부 아닌가요? 좋은 일은 함께 나누고 궂은일은 각자 책임지기로 해야 하는 건가요?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나도 이제 구세대가 되어간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이 글을 읽은 분들이 “넌 다 잘했냐?”고 돌 던지면 맞겠습니다.

    아무튼 앞으로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게 된 그분이 예쁜 마음 가지셨던데 그 마음이 빛을 잃지 않기 바랍니다.

    치매 초기

    네이버의 ‘몰래 하는 시댁이야기’라는 곳에서 알게 된 분에게서 자신의 아버지가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하시는데 혹시 치매 초기가 아닌지 의심이 된다는 상담메일이 와서 답신을 보냈다.

    말씀하신 내용은 제 친정아버지와 비슷하군요. 처음에는 저도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아버지가 외로우셔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제가 하루에 한 번씩 친정아버지를 찾아뵙고 있는데도 전화를 자주 하십니다.

    “자냐?”

    “몇 시냐?”

    “오늘이 며칠이냐?”

    “나, 나갔다 온다.”

    “별일 없냐?”

    “언제 오냐?”

    나중에는 밤 열두 시, 새벽 네 시에도 전화가 왔어요. 전화벨 소리에 잠을 깬 남편이 벨소리를 줄이라고 화를 냈고 소리를 줄여도 밤중이나 이른 새벽에는 시끄러워서 나중에는 아예 전화코드를 빼놓고 지내다가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친정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셔왔습니다.

    두 어르신 모셔보니 치매가 발생하는 초기에는 함께 사는 가족들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치매는 정신병이 아니라 인격, 행동, 사고,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이 손상을 입는 뇌의 질병이기 때문에 상당히 진행될 때까지는 일상생활이 가능하거든요.

    저도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나이 드시더니 좀 괴팍해졌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그게 ‘심술’이 아니라 ‘질병’이라고 생각하니 이해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요즈음은 50대에 발병하는 초로기 치매도 있다고 합니다. 어르신의 성격이 직선적으로 변한다거나 우울해하거나 맹렬하게 화를 내시면 듣기 좋게 기억력 검사를 해보자고 하면서 신경과에 모시고 가보세요.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매도 초기에 대처할수록 환자도 가족들도 덜 힘듭니다. 어르신과 함께 살지는 않더라도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관찰하시면 조기에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를 모셔오다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보니 사람들이 말로는 온갖 좋은 소리를 하다가도 금전문제가 걸리면 태도가 바뀌었고 예의도 염치도 없었다. 장례기간 중에 어이없는 일도 많았지만 남편이 이제부터 우리가 장인어른을 모시자고 말해주어 고마웠다.

    친정아버지께 들러 시어머니 장례식만 끝나면 이제부터 함께 살자고 말씀드렸다. 장례식 다음 날에 아버지 댁에 가보니 벌써 짐을 싸고 계셨다. 아버지께는 시어머니의 짐을 정리해야 하니까 며칠만 더 기다리시라고 했다. 며칠 후 친정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셨는데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지 조금 혼란스러우신 것 같다. 집이 넓지도 않은데 아직도 현관, 화장실, 아버지의 방을 단번에 찾아들어가지 못하신다. 정신도 정상이 아닐 때가 많은데 이제까지 혼자서 잘도 버티셨구나 싶다. 어제는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올해 70이지?” “아니, 50인데요.” “어쩐지 팔팔하더라.” 말씀하시는 걸 들어보면 내 동생들이 시집을 갔는지, 아이를 몇이나 낳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으시나보다. 살아 있는 사촌오빠는 죽은 줄로 아시기도 한다. 아무튼 이번에 시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면서 친구들에게 두고두고 고마웠고 내 코 닦기 바빠서 친구들의 대소사를 챙기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추위

    오늘은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차 속에서 라디오를 들으니 내일은 서울이 영하 9℃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아버지, 내일은 굉장히 춥대요. 영하 9℃까지 내려간다는데.” “추울 테면 추우라지. 난 남들 다 죽은 다음에 죽을 거니까.” “네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죽으면 뭐하냐?” “네?” “기를 쓰고 죽어서 뭐해?” “아버지는 오래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여태까지도 살았는데 그거 못 살겠냐?” “우하하하. 아버지 최고다!” 올해로 아흔 셋 되신 친정아버지는 부러울 정도로 낙천적이고 우스갯소리를 잘 하신다. 예전에도 우리들이 잘한 일이 있을 때는 칭찬과 함께 “잘했다. 돈 있거든 이따가 뭐 사먹어라”고 하셨고 넘어져서 울고 있을 때는 “이리와! 아빠가 일으켜줄게”라고 하셔서 울다가 웃게 만드셨다.

    취직

    아침식사를 마치고 각 서점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서평 올라온 게 있나 확인하고 있는 중인데 아버지가 등 뒤에서 나를 부르신다. “희인아!” “왜요?” “내가 이렇게 무위도식하고 있을 수가 없구나.” “어떻게 하시게요?” “직업을 가져야겠어.” “무슨 직업을요?” “글쎄, 앞집 영감하고 상의해봐야지.” 아버지가 앞집이라고 부르는 곳은 실제로는 우리 아파트 관리사무소이고 영감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관리소장이다. 밖으로 나갔던 아버지가 한참 있다가 들어오셨다. “요새 젊은 사람도 펑펑 노는데 나 같은 사람에게 일자리가 있겠느냐고 하는구나.” “그래요?” “그럼, 우리가 공업학교를 세우자.” “어디다가?” “어디든지. 목공과도 만들고 철공과도 만들고.” 오늘은 오전 일이 한가해서 아버지랑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거니받거니 하고 있다.

    신발 한 짝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관리사무소의 여직원이 나를 부른다. “할아버지가 여기 계셔요.” “그래요? 제가 왔으니까 집으로 가시라고 전해주세요.” “그런데….” “왜요?” “할아버지가 신발을 한 짝만 신고 오셨어요.” “네에? 그럼, 제가 집에 가서 신발을 가지고 갈게요.” 집에 남아 있는 나머지 신발을 들고 관리사무소로 가니 아버지가 벌써 문 앞에 나와 계신다. 신발은 한 짝만 신고 다른 쪽 발에는 분홍색 수건을 발싸개 삼아 두르고 두루마리 휴지를 여러 번 감아 고정시켜놓으셨다. 나는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내고 수건을 벗겨낸 다음에 신발을 신겨드렸다. 여직원이 퇴근 준비를 하며 말했다. “할아버지가 발을 다치셨나봐요.” “아니에요.” “근데 왜 수건을 두르고 나오셨을까요?” (낸들 압니까? 그 심오한 뜻을.)

    인터뷰

    KBS-TV의 ‘아침마당’에서 출연섭외가 왔다. 치매노인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MBC-TV에서도 연락이 왔다. 내가 아버지를 수발하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다고 하면서 감독님을 비롯하여 카메라맨과 조명 팀까지 여러 사람이 왔다.

    오전부터 찾아온 촬영팀은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산보 나가는 신덕왕후릉에도 함께 가고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도 촬영했다. 아버지가 기거하시는 방이나 내가 치매의 진행속도를 늦추기 위해 아버지와 함께 퍼즐이나 뜨개질, 종이접기 하는 모습도 찍었다. 나중에 촬영팀은 작은아들과도 인터뷰를 했다.

    “생기는 것도 없는데 이런 일을 하는 엄마가 대단하다고 느껴요. 그런데 오래 사는 것도 별로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아이들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이제 끝났나 싶었는데 바로 외할아버지가 오셨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힘이 들었나보다. 그래도 내가 휴식을 위해 가끔 집을 비울 때는 둘이서 외할아버지 목욕도 시켜드리고 기저귀도 갈아드리는 등 내가 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감독님이 남편에게 집에 들어오면 장인어른 방에 먼저 들르는 모습을 연출해달라고 했는데 남편이 거절했다.

    “싫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요.”

    촬영팀 앞에서 무안하기는 했지만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치매에 걸린 노인을 돌보는 일은 쉽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날이 갈수록 증상이 심해지면서 직접 돌보는 사람뿐 아니라 나머지 가족들도 지쳐간다. 집은 늘 어수선하고 언제 돌발 상황이 발생할지 알 수 없으니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가 없다.

    집이 안식처로서의 기능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가족들은 자연히 집에 들어오기 싫어하고 가능하면 밖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늦은 시간에 들어온다.

    감상문 숙제

    대학후배 하나가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교양과목 숙제로 내가 쓴 ‘팔순 시어머니 구순 친정아버지’를 읽고 감상문을 써내라고 했단다. 그중 몇 편을 내게 보내면서 잘된 것을 한 편 골라달라고 했다. 감상문을 낸 학생들은 이번 신입생들인 모양인데 맞춤법이 엉망이거나 논리 전개가 부족한 글도 여럿 보인다. 그래도 정말 재미있다. 어떤 학생이 글을 이렇게 썼다.

    (전략) 이 작가가 어떤 면에서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약간 짜증이 났다. 우선 대단한 점은 치매 걸리신 시어머니와 구순 친정아버지를 모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바로 친정아버지를 모셨다. 진짜 체력은 좋으신 분 같다. (이 학생은 나를 황소로 아는가 보다.) 만약에 내가 이 책에서처럼 치매 걸린 노인이 곁에 있다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내 똥 닦기도 더러운데 남의 똥을 받고, 쭈글쭈글한 몸에서 귀저기를 떼어내고, 심한 욕도 다 받아주고 정말 상상조차 하기도 싫다. 내가 그 상황에 놓인다면 종교에 매달리는 것도 이해가 간다.

    게다가 나를 지칭하는 표현이 재미있다. 쑥스럽기는 하지만 나를 ‘작가’ 혹은 ‘글쓴이’라고 하는 건 이해하겠는데 ‘주인공 아줌마’ ‘이 여자’라고 한 학생도 있다. 주인공 아줌마가 신앙심이 너무 심하셔서 책에까지. 성경내용을 적으셨다고 쓴 학생도 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

    친정아버지를 모시면서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나보다도 더 살뜰하게 보살펴드렸을 텐데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몸이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았던 친정아버지는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아버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이 수시로 찾아왔는데 아버지는 그 사람들과 만나거나 운동을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에 두 분이 함께 외출하시는 것은 예배에 출석하는 것이 전부였다.

    친정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당신 귀에 거슬리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어머니도 많은 갈등을 겪으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발견한 일기장을 보면 아버지에게 섭섭했던 일들, 주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음으로 인한 고민과 갈등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기저귀를 갈아드리고 방에서 나가려 하자 아버지가 내 손을 잡으셨다.

    “내가 노영란(친정어머니 이름)이에게 너무 많이 잘못했어.”

    아버지에게서 생전 처음으로 들어보는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평소에 이 세상에 무서운 것, 힘든 것, 어려운 것이 없다고 하시던 아버지였는데 그날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방바닥만 내려다보시더니 울먹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잘못했어. 나를 용서해줘.”

    치매가 진전되면서 아버지는 가끔 나를 어머니로 착각하기도 하고 어머니가 살아계신 줄로 알기도 하셨는데 그날은 “노영란이에게 너무 많이 잘못했다”는 말을 되풀이하시면서 소리 내어 우셨다.

    누구 앞에서도 고개를 숙여본 적이 없다는 게 자랑이던 분이시라 나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태도에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만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도 아버지를 용서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친정아버지와의 이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그랬지만 아버지가 지난주에는 몸이 몹시 괴로우신 것 같았다. 옷을 입었다, 벗었다, 양말을 신었다, 벗었다 하셨고 하루에도 열 번 넘게 화장실을 들락거리셨다. 앉거나 서거나 눕거나 어떤 자세를 취해도 불편하신 모양이었다. 새벽까지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는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다가 세 시쯤 누웠지만 아침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마루로 나가보니 아버지가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파일박스를 옮기려고 힘을 주고 계셨다. 발밑의 양탄자 위에는 흙이 수북하고 베란다에 있던 화분의 화초가 양탄자 위에 뽑혀 있었다. 시계를 보니 여섯 시. 잠은 없어지고 기운은 솟아나시는가보다. 발가벗은 아버지를 방으로 모셔다가 기저귀를 채우고 옷을 입혀드렸다. “아버지,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아요.” “….” “저한테 하고 싶으신 말씀 없으세요?” “많지.” “말씀하세요.” “….” “저한테 하고 싶은 말씀이 많으시다면서요. 보고 싶은 사람은 없으세요?” “….” “말씀하시라니까요.” “보고 싶은 사람이 없어졌어.” “?”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냐? 여자한테.” “?” 그러고는 마치 고장 난 전축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한다. “옷 좀 벗겨줘.” “아까도 벗었잖아요?” “벗겨줘.” “금방 입혀달라고 할 거면서 그래도 벗겨드려요?” “좀 벗겨줘.” 옷을 벗겨드리고 나서 베란다의 빨래를 걷고 있는데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다. “뭐라고요?” “옷 좀 입혀줘.” “네에?” “이것 좀 입혀줘.” “또 그러시네.” “옷 좀 입혀줘.” 그러더니 아버지가 의자에서 일어나신다. “왜요?” “소변 좀.” “화장실로 가세요.” “요강 줘.” “아버지, 우리 집에는 요강이 없어요.” “알았어. 요강 가져와.” “요강이 없다니까요.” “요강 좀.” “….(무시)” “요강 가져 와.” “….(계속 무시)” “요강, 요강, 요강! ”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아이처럼 요강을 찾는 아버지를 달래어 화장실로 가시게 했고 점심식사를 하신 후에는 약을 드렸다. “약 좀 줘.” “아까 드셨어요.” “그래? 약 줘.” “아까 드셨다니까요.” “약 줘.” “약 많이 먹으면 큰일 나요.” “큰일 나나?” “그럼요.” “약 좀 더 줘.” 이런 아버지를 나 혼자서는 더 이상 감당하기가 어려워서 몇 곳에 알아보고 연신내에 있는 시설로 모시기로 했다. ‘사유’를 적는 난에는 ‘보호자의 휴식’이라고 썼다.

    아버지를 시설에 모시고 나니 아침에 일어났을 때 모든 물건이 제자리에 있는 게 참 신기했다. 신발도 그대로 현관에 있고 빗자루도 제자리에 걸려 있다. 당연한 건데도 신기하고 안심이 된다. 전에는 밤에도 두세 번씩 일어나서 기저귀를 갈았는데 이제는 저녁에 잠들면 아침까지 내처 잘 수 있다. 최근에는 잠도 모자라고 피로가 누적되어서인지 아침에 일어날 때면 누가 내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아버지를 시설로 모시던 전날은 나도 어지간히 지쳐 있었다. 이른 새벽에 가방을 싸들고 밖으로 나가겠다는 아버지를 말리며 하소했다. “아버지! 나도 잠 좀 자자!”

    내 몸이 편해야

    아버지를 시설로 모시고 나니 그동안 개점휴업 상태로 방치했던 재고 확인, 반품된 물량 종류별로 분류하기, 미수금액 독촉하기 등 밀린 출판사 일이 많았다.

    밥해 먹고 병원 출입하고 짬짬이 일하며 하루하루 넘기는 일만으로도 빠듯했고 밤에는 아버지 기저귀 갈아드리느라고, 넘어지신 건지 뭘 쓰러뜨리신 건지 “쿵!” 하는 소리가 날 때마다 자다 말고 뛰어나가던 그때는 그저 잠들면 도중에 깨지 않고 아침에 눈뜨는 게 소원이었다. 아버지가 물건을 부수고 화분에다 소변보고 기저귀 차림으로 밖으로 나가겠다며 문 열라고 호통 치실 때는 한숨만 나왔다.

    지금도 아버지 수발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지만 이제는 오늘 끝내기로 한 일은 오늘 마칠 수 있고 만나야 할 사람은 아무 때나 시간 정해 만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동안에는 예정했던 일도 오늘 못하면 내일로 미루고 아버지를 돌봐줄 간병인을 구하지 못하면 사람 만날 일도 다음으로 미루며 지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다고 했지만 결국은 내 몸이 편해야 남의 사정도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친정아버지를 시설로 모신 지 한 달 반, 이제야 돌아가신 시어머니 가여운 생각도 들고 친정아버지 애처로운 마음도 든다.

    이북골에 가자니까

    어제도 아버지에게 다녀왔다. 그저께 갔을 때에 내 얼굴도 보지 않으시고 나와 눈을 맞추지 않으시던 것이 마음에 걸리기에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가지만 이틀 만에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시 찾아갔다.

    사실은 아버지가 나와 함께 살고 싶어 하시는 걸 알고 있지만 아버지의 증세는 누군가 한 사람이 전적으로 매달려야 할 만큼 중증이기에 집으로 모셔갈 수가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라도 당신을 그곳으로 모신 내게 섭섭하신 것 같다.

    아버지를 모시고 나가서 서오릉에서 산보도 하고 좋아하시는 불고기도 사드렸는데 무슨 말을 시작하더라도 말끝에는 성뒤로 가자고 하신다. 성뒤는 아버지의 고향으로 지금의 방배동 근처다.

    “가자!”

    “어디로요?”

    “성뒤.”

    “난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데.”

    “아, 이북골을 몰라?”

    “이북골은 또 어디예요?”

    “성뒤.”

    이북골 타령은 시설로 돌아간 다음에도 이어졌다.

    “어서 가자.”

    “어디로요?”

    “이북골.”

    “난 이북골이 어딘지 모른다니까요.”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되지. 할머니, 이북골 아세요?”

    “몰라요.”

    “할아버지, 이북골 아세요?”

    “네.”

    “야, 이 할아버지가 안댄다. 이북골이 어디예요?”

    “아까 아주머니가 가져갔어요.”

    “?”

    “아까 아주머니가 가져갔다니까요.”

    “무엇을요?”

    “리모콘!”

    이북골이 어쩌다 리모콘으로 들렸는지 모르지만 아버지에게 다시 말씀드렸다.

    “아버지, 이분도 모르셔요. 이북골이 아니라 리모콘이라고 하잖아요?”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간병인 아주머니가 걱정을 했다.

    “큰일 났네. 한번 저러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데.”

    아버지를 그대로 두고 올 수가 없어서 이북골 이야기를 잊어버리게 하려고 집안 식구들 이야기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 참! 큰댁 형님이 이북골에 살고 계실 거다.”

    “교장 큰아버지요?”

    “그래.”

    “그 큰아버지는 조포나루터에서 돌아가셨어요.”

    “아니야. 죽을 뻔하다가 살았어. 이북골에 살아.”

    (집안 식구들 이야기 괜히 꺼냈다.)

    옆에서 간병인 아주머니가 거들었다.

    “할아버지! 따님도 이제 식구들 저녁 해주러 가야 하니까 이제 그만 좀 누우세요. 기저귀 봐드릴게요.”

    오후 한나절을 그렇게 보내고 일곱 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다.

    가장의 책임

    어제 처방받은 안정제를 가지고 아버지를 뵈러 갔다. 간병인에게 물어보니 어제는 밤에 서너 번밖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너 번밖에? 그럼, 더 자주 일어나는 때도 있다는 말인가?) 기저귀를 갈아 채우고 오늘도 서오릉으로 모시고 갔다. 오늘은 해도 그리 뜨겁지 않고 습도도 낮은 것 같다. 그늘에 차를 세우고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바나나우유를 사드렸다. 나도 뒷좌석에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우유를 닦아드리며 말을 걸었다. “아버지, 요새 화나는 일 있으세요?” “없어.” “그럼, 섭섭한 일 있으세요?” “없어.” “보고 싶은 사람은요?” “없어.” “뭘 하고 싶으세요?” “쌀장사 좀 했으면 좋겠어.” (쌀장사라고! 아흔셋 나이에!) “어디서요?” “저기 아랫동네 미꾸라지 많이 잡히는 데.” “그게 어딘데요?” “인영이 아저씨네 집 근처.” “쌀장사 해본 적 있으세요?” “아니. 그래도 그게 큰돈이 생기거든.” 우리 집에서 모시고 있을 때에도 이렇게 무위도식하고 있을 수는 없다며 취직자리를 알아본다고 나가신 적이 있다. 아무리 나이를 먹고 치매에 걸렸어도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적어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시는 게 한편으로는 황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진다.

    배나무를 찾아라

    어제 오후에 원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지가 전에 없이 난폭해져서 간병인들을 발로 차고 때리셨다고 한다. 집에서 드리는 신경안정제 같은 게 있었느냐고 물으셨다.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는지는 몰라도 일단 달래드려야 하니 내가 바로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할 간병인 아주머니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급했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간병인 아주머니를 만났더니 아버지가 어젯밤에는 목을 매어 죽겠다고 하시며 벽에 걸린 선풍기의 코드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벽걸이 선풍기가 떨어졌다고 한다. 힘이 넘치는 것도 이럴 때는 참 곤란하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니 대뜸 내게 물으신다.

    “너, 몇 등 했냐?”

    “일등이요.”

    “그거 잘 했구나. 참 좋구나.”

    “일등 하면 뭐가 좋은데요?”

    “난 모르지.”

    “왜 몰라?”

    “난 일등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아버지의 기저귀도 갈고 새 옷으로 갈아입힌 후에 외출을 했다.

    “아버지, 어디로 갈까요?”

    “네 마음대로.”

    “성뒤에 가볼까요?”

    “그것도 좋지.”

    며칠 전에 사촌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북골이 어딘지, 성뒤가 어딘지 대충 이야기를 들어둔 참이다. 사당동을 지나 남부순환도로로 가면서 살펴보니 정말 아래성뒤길, 윗성뒤길이라고 쓰인 팻말이 보였다.

    “아버지, 여기가 성뒤인데 알아보실 수 있겠어요?”

    “몰라.”

    “그럼, 그냥 갈까요?”

    “큰댁 형님은 찾아뵈어야지.”

    “그럼, 앞장서보세요.”

    “모르겠는데. 그 댁 마당에 큰 배나무가 있었는데. 너, 배나무 좀 찾아보아라.”

    “배나무는 보이지 않는데요.”

    이제는 고물상과 석재상이 즐비한 곳인데 어디 가서 배나무를 찾는단 말인가? 마침 근처 주택가에서 어떤 할머니가 이불을 걷으러 나오셨기에 다가가서 여쭈어보았다.

    “이 근처에 배나무는 없어. 여기에 유씨 성 가진 이가 세 명 살았었는데 지금은 다 죽고 없어.”

    아버지도 할머니의 설명을 듣고 발길을 돌렸으니 당분간 성뒤 타령은 하지 않으시겠지. 이번 주일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아버지를 모시고 외출을 했기 때문에 집안일도, 회사일도 많이 밀렸지만 집에 돌아오니 그저 눕고만 싶다.

    아이 돌보기보다 어려운 일

    다행히 남편이 출장 중이라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서 어제 맞춘 찰시루떡을 관리사무소와 노인정에 나누어주고 반쯤은 친정아버지가 계신 시설에 가지고 갔다.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으로 가는데 병원 근처에 있는 서적총판에서 전화가 왔다.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다시 집에 들러 책을 챙기고 나서는데 몇 군데서 책을 보내달라고 또 전화가 왔다.

    아들 녀석이 책을 차에 실어주면서 걱정을 했다.

    “이거 책이 팔려도 고민이고 안 팔려도 고민이네.”

    일전에 내가 쓴 편지가 양희은 송승환의 ‘여성시대’에서 방송되던 날, 남편이 아들을 불러 큰일 났다고 했었다.

    “뭐가요?”

    “엄마가 쓴 책이 팔리면 전국적으로 망신이거든.”

    “왜요?”

    “그 책 속에는 엄마 빼놓고는 다 나쁜 사람으로 나온단 말이야.”

    (그러게 누가 망신당할 짓을 하래?)

    친정아버지를 모시고 나와 치과에 들러 진찰을 받아보니 이가 하나는 빠지고 하나는 부러져서 틀니를 걸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부러진 이를 빼고 틀니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데 연세가 너무 많아서 발치(拔齒)를 해도 되는지 신경과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난 다음에라야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

    친정아버지는 뇌경색에 걸린 이후로 피가 잘 응고되지 않도록 하는 약을 복용하셨기 때문에 혹시 출혈이 있을 때 바로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도록 종합병원에 있는 치과에서 치료를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고혈압이나 당뇨나 심장병이 있어도 동네에 있는 치과에서는 치료하기가 조심스러운 모양이다.

    고대안암병원에 가서 접수→치과→신경과→치과→수납→방사선과→치과→신경과→수납→약국 순으로 돈 뒤 이발소에 모시고 갔다. 이발을 마치신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 듯했다.

    “아버지, 뭐 잡수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불고기나 냉면 같은 거 먹고 싶지만 그거 어떻게 이루 다 말을 하겠냐?”

    (다 말해놓고선.)

    식당에 가서 불고기를 주문했는데 식사 도중에 흘리시기도 하고 입가에 묻히시는 게 이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치매에 걸린 부모님을 모시는 일은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날이 갈수록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데 비하여 치매노인들은 점점 더 손이 가게 된다.

    노인을 돌보는 일은 마치 짐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얹어놓는 것 같아서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치매가 발생하여 점점 증상이 진행됨에 따라 돌보는 이가 무리에 무리가 겹쳐 쓰러질 지경이 되어서야 가족의 도움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또 쫓겨나다

    시설에 계시던 아버지가 폭력을 써서 또 쫓겨났다. 시설에서 쫓겨난 게 벌써 두 번째다. 간병인을 때리고 테이블을 엎고 물건을 뒤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조마조마하더니 며칠째 밤마다 소리를 질러 동네에서 민원까지 나오게 생겼다고 한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서 간병인을 왜 때리셨느냐고 하니까 대들어서 때렸다고 하셨다. 원장님과 상의하여 원당이라는 곳에 있는 요양원으로 옮겨드리고 왔는데 주변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일단 민원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거기서도 또 폭력을 쓰시면 이번에는 또 어디로 가야 하나? 당뇨도 없고, 심장도 정상, 혈압도 정상이니 내과적인 치료를 할 필요는 없으나 격리시키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떤 면에서는 나 죽을 때 너를 꼭 데리고 가고 싶다고 하시던 시어머니 모시는 게 더 쉬웠다. 허리를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시어머니의 악담이야 귓등으로 들어 넘기면 그만인데 몸이 건강한 아버지는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물건을 부수었고 그럴 때마다 들어가는 돈이 만만치 않았다.

    평생 동안 근검절약하면서 모은 돈을 잘못된 판단으로 몇 년 사이에 날려버리고 빈털터리가 되신 친정아버지의 수발이 벌써 12년째. 100살까지는 살아야겠다고 하시니 나는 앞으로 7년 동안은 정신 바짝 차리고 앓아눕지도 말아야 한다.

    마지막 진료

    친정아버지를 요양원으로 모신 후에도 정기적으로 병원에 모시고 가서 약을 처방받았다. 그날도 요양원에 들러 아버지를 모시고 신경정신과에 갔더니 의사선생님께서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아버지가 질문의 내용을 어느 정도나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는 모양이다.

    선생님에게 아버지가 예전보다 좀 더 난폭해지셨다고 말씀드렸더니 이제까지와는 다른 약을 처방할 테니 반응을 좀 관찰하라고 하셨다.

    처방전을 받아 약을 구입한 후에 다시 시설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차를 세우라고 하셨다.

    “왜요?”

    “화장실에 가야겠어.”

    “지금 여기서 화장실에 가시면 갈아드릴 기저귀가 없거든요. 이제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참으세요.”

    그렇지만 도저히 참으실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비명을 지르셨다.

    “아이구우! 나 죽겠다.”

    “아버지, 죄송해요. 지금 어디 차를 세우고 화장실에 들어갈 수가 없어요. 못 참으시겠으면 그냥 일을 보세요. 기저귀를 차고 계시니까 괜찮아요.”

    그러나 아무리 기저귀를 차고 있더라도 앉은 채로 큰일을 보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 아버지는 몹시 불편하신 모양으로 몸부림을 치며 죽을 것 같다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나는 마음이 급해서 계속 아버지를 달래면서 요양원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직원들이 달려왔고 나는 그분들에게 아버지를 화장실로 빨리 모셔다달라고 부탁드렸다.

    내가 차를 주차하는 동안 간병인들은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일을 보도록 도와드린 후 아버지의 몸에 묻은 배설물을 다 닦아드리고 새로 기저귀를 채워 침대에 눕혀드렸다. 나는 아버지가 누워계신 침대 곁에 다가가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디 가는데?”

    “돈 벌러 가야죠.”

    “그래?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일을 접으시고 나서도 삼성동 무역센터나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을 수시로 다니시던 아버지는 아흔이 넘어서도 컴퓨터를 배워야겠다고 할 만큼 호기심과 의욕이 왕성하셨다. 그러던 분이 휠체어에 앉았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그날 침대에서 나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며 올려다보던 아버지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며칠 후 요양원에 가서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운 채로 테라스에 나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버지는 땅만 내려다보시며 또 집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집에 가시면 뭐하시게요?”

    “벼도 심고, 꽃도 심어야지.”

    그것이 의식이 있는 아버지와의 마지막 대화였다.

    그 다음에 갔을 때 아버지는 사무실에서 제일 가까운 방으로 옮겨져 있었는데 계속 잠만 주무시고 계셨다. 추석이라고 오래간만에 시간을 내어 함께 간 올케, 조카들과 함께 아버지의 침대 곁에 앉아서 우리들끼리만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온 지 며칠 안 되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유대 미드라시(midrash)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다윗 왕이 궁중의 한 보석 세공인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나를 위하여 반지 하나를 만들되 거기에 내가 매우 큰 승리를 거두고 그 기쁨을 억제하지 못할 때에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글귀를 새겨 넣어라. 그리고 동시에 그 글귀가 내가 절망에 빠져 있을 때는 나를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느니라.”

    보석 세공인은 왕의 명령대로 곧 매우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적당한 글귀가 생각나지 않아 걱정을 하다가 솔로몬 왕자를 찾아갔다.

    “왕의 황홀한 기쁨을 절제해주고 동시에 그가 낙담했을 때 위로해드리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떤 말을 써 넣어야 할까요?”

    솔로몬이 대답했다.

    “이런 말을 써 넣으시오. - 이것 역시 곧 지나가리라! 왕이 승리의 순간에 이것을 보면 자만심이 가라앉게 될 것이고 그가 낙심 중에 보게 되면 이내 표정이 밝아질 것입니다.”

    지난주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많은 분이 조문 와주셨고 발인하는 날에는 날씨도 좋았다. 간병인마저 때리는 친정아버지를 더 이상 돌보기 어렵다고 할까봐 요양원에서 전화가 올 때마다 긴장하고 마음 졸이던 일이 끝났으니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지만 오늘 남편과 아들의 상복을 세탁소에 맡기고 돌아오는 길에 친정아버지에게 뜨개질 가르치던 일을 생각하자 갑자기 목이 메어왔다.

    치매의 진행속도를 늦춘답시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요즈음 치매와 관련된 책을 읽으며 치매환자에게는 새로운 것을 익히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그저 마음 편하게 친정아버지가 할 줄 알던 목공 일이나 하시게 할 것을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섣불리 얻은 지식으로 뜨개질을 가르치면서 서로 마음만 상하고 말았다.

    아무리 가족들이 싫어해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고야 마는 아버지였기 때문에 절대로 가엾게 여겨지거나 그립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뜨개질을 하려고 애쓰시던 모습을 떠올리고 “아버지, 미안해”라고 읊조리자 눈물이 쏟아져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내려다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몇 번씩이나 자판이 흐릿해진다. 이것 또한 지나가는 일이겠지만.

    내일은 삼우제를 지내러 다시 아산에 있는 가족묘지로 간다. 과거에 친정아버지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많은 우리 형제들은 장례식장에서 아무도 통곡을 하거나 크게 슬퍼하지는 않았지만 외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소리 죽여 울던 올케가 있으니 친정아버지는 시아버지로서는 꽤 행복한 분이다.

    호상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추석 연휴 직후여서 다른 분들에게도 폐가 되지 않았고 장례식장 잡기도 좋은데다 새벽에 돌아가셔서 오전부터 장례준비를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어제도 큰일 치르고 나서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 전화를 세 통이나 받았다. 요즈음에는 인사를 빠뜨렸던 분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내고 아버지의 짐도 정리하면서 밀려 있던 출판사 일을 보며 지내고 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살 때에는 가자는 대로, 하자는 대로 모시고 다니면서 정작 내 아버지에게는 그렇게 해드릴 틈도 없이 그저 청소와 빨래만 하고 오기에도 바쁜 게 늘 마음에 걸렸는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아버지를 우리 집으로 모셔다가 함께 살면서 외식도 하고 구경도 시켜드리고 가고 싶다는 고향에도 모셔다 드렸으니 마음에 남는 아쉬움은 없다. 시어머니 여든아홉, 친정아버지 아흔셋으로 두 분 다 장수하셨으니 두 번의 장례식 때에 오신 문상객들이 모두 호상이라며 위로해주셨다.

    요즘도 시어머니가 좋아하던 연시나 인절미를 볼 때, 아버지가 주워 오신 우산이나 아버지가 쓰시던 컵을 볼 때 잠깐씩 두 분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간다. 문상 온 친구 중의 하나가 “희인이는 섭섭하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잘된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난폭해진 아버지의 수발에 지쳐갈 즈음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두 어르신을 섬길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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