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0월호

은퇴 후 시골살이

  • 안병영│연세대 명예교수

    입력2012-09-19 16: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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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한 후 이곳 강원 속초·고성으로 내려와 산 지 6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지인이 ‘시골살이’에 대해 내게 이것저것 물어왔고, 더러는 직접 이곳을 찾아 살펴보고 가기도 했다. 대부분 적지 않은 관심을 피력했는데, 막상 내 주변에는 ‘탈(脫)서울’을 감행한 사람이 아직 없다.

    내가 서울을 떠나려 할 때 몇몇 지인은 “아마 2년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올 걸세”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들도 이젠 내가 ‘그곳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 스스로도 이곳 생활에 연착륙(軟着陸)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내 경험을 바탕으로 은퇴 후 시골살이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이 글은 서울에서 가까운 수도권에 별장이나 전원주택을 마련하고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려는 분들에겐 맞지 않다. 말하자면 은퇴 후 작심하고 서울을 떠나 멀리 지방 소도시나 산촌에서 ‘새 삶’을 꾸려보려는 이들을 위한 것이다.

    자연 닮아가는 삶의 묘미

    시골살이의 장점은 우선 시골에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자연의 혜택을 들 수 있다. 무엇보다 신선한 공기, 맑은 물, 생명의 원천인 산천초목은 우리 삶의 원초적 바탕을 건강하게 새로 다져준다. 또한 자연은 우리에게 최상의 먹을거리, 볼거리, 일거리를 제공한다. 그뿐인가. 농촌에서는 인공도시가 토해내는 온갖 소음과 분답(紛沓), 갈등과 경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대신 자연이 안겨주는 아름다움과 정신적 여유, 그리고 평화가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은퇴 후 시골살이는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하다. 한국 노인 대다수가 ‘100세 시대’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채 노령기에 접어들었다. 그런 까닭에 물가가 비싸고 소비 수준이 높은 대도시에서 여생을 보낸다는 것은 무척 버거운 일이다. 그런데 지방 소도시나 농촌으로 이주하면 적어도 의식주의 부담은 현격하게 줄어든다. 무엇보다 주거비가 파격적으로 적게 들고 식품과 의류 지출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작은 텃밭이라도 가꾸면 반(半) 자급자족도 가능하다.



    내 경우, 시골살이가 주는 가장 큰 장점은 나 자신이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얼굴 때문에, 남과 척지지 않으려고 하기 싫은 일을 할 필요도 없고 실속 없이 스케줄에 쫓길 일도 없다. 알량한 체면이나 하찮은 명예는 상관할 필요가 없고 뿌리치기 어려운 연고의 늪에서도 해방될 수 있다. 늙마에 세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시골살이에 대한 오해와 진실

    많은 이가 시골살이를 꿈꾸면서도 이를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주저한다. 이유가 뭔지 하나하나 따져보자. 그중 하나는 “나는 당장이라도 하향하고 싶은데 마누라가 절대 반대라서”다. 그러면서 안주인이 ‘늘그막에 영감 없이는 살아도 친구 없이는 못 산다’라든지 ‘손자 재롱’ ‘쇼핑 재미’ ‘고급문화에 대한 미련’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서울을 떠나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아예 시골 가기를 포기하는 게 옳다. 당장 어렵사리 부인을 설득하더라도 약발이 오래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은 건강이나 의료에 관한 걱정이다. 지병이 있거나 잔병치레가 끊이지 않아서 혹은 만약의 위급한 사태가 걱정돼서 의료시설이 좋은 대도시를 떠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건강 걱정을 늘 머리에 달고 다니는 사람에게 시골행은 실제로 무리다. 그러나 이 경우 얼마간 재고의 여지는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의학적으로 검증된 장수(長壽)의 세 가지 요건은 운동과 음식, 조기검진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시골은 운동과 음식 등 섭생에는 최적의 조건이고, 조기검진은 마음의 문제이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은퇴 후 시골살이
    아울러 보안과 연관된 불안감이 자주 제기된다. 시골 외진 곳에 살면 강도 등 강력범죄에 무방비가 아니냐는 얘기다. 당연한 걱정이라고 본다. 그러나 실제로 지방 소도시나 산촌의 경우 좀도둑은 있어도 강력범은 거의 없다. 또 보안업체의 도움을 받으면 이 문제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런가 하면 많은 이가 우려하는 것이 고독, 외로움, 소외감 등 심리적인 어려움이다. 이 문제는 개인차가 있지만, 심각한 문제인 것은 틀림없다. 조금의 외로움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나 세상 사는 재미를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서 찾는 이에게는, 황혼 무렵 홀로 서산에 걸린 저녁노을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많은 이가 자연과 교감하고 대화하는 가운데 내면적 충일(充溢)을 만끽한다는 사실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또 자주 제기되는 걱정이 생활의 불편과 문화 향수(享受) 기회의 부족이다. 도농(都農) 간 삶의 양식 차이와 문화적 격차는 분명 아직도 존재한다. 그러나 농촌도 생활개선, 교통과 통신망의 발달, 문명의 이기, 대중문화의 확산 등으로 그 간격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외에 현지 적응 내지 주민과의 화합 문제도 많은 이가 심각하게 우려하는 사항 중 하나다. 이는 지방 소도시 아파트로 옮기는 경우에는 별로 문제 될 게 없다. 그러나 산촌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경우 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사전에 이주하고자 하는 곳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한데 중장년층이 영농을 목적으로 하향하는 경우에 비해, 은퇴 후 노령자의 이주는 상대적으로 현지 갈등의 소지가 적은 편이다.

    이제 내 경우를 얘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정년 10년 전부터 은퇴하면 서울을 떠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다행히 내 처도 동의했다. 그래서 첫 고개를 무난히 넘겼다.

    처음부터 서울에서 멀리 갈 궁리를 했다. 서귀포, 남해, 통영, 속초 등이 주요 후보지였는데, 마침 가까운 친구가 속초에 미리 자리를 잡고 그곳을 ‘강추’했다. 결국 설악과 동해가 함께 손짓하고, 친구가 기다리는 이곳으로 왔다.

    이곳에서 산 지 6년 동안 건강이나 보안 문제로는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그간 감기 한번 걸리지 않았다. 산행을 즐기고, 농사일을 하는 나는 이곳에서 건강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지적 작업이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대도시에서보다 오히려 소도시나 시골이 더 생산적이지 않을까 한다.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이기가 있어 지식과 정보의 수집과 소통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자연으로부터 지적, 예술적 영감을 풍성하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 비우고 ‘탈(脫)서울’ 만끽하기

    처음 3년간은 의도적으로 서울에 기웃거리는 일을 피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공식적 모임에 전혀 참석하지 않았고, 내 편에서 서울 친지들에게 전화도 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작심하고 ‘정 떼는’ 작업을 한 셈이다. 서울에서 얼마간 ‘잊힌 존재’가 되어야 이곳에 발붙이기가 한결 수월할 것 같아서였다. 이곳에 연착륙하는 데 그러한 노력이 꽤 주효했던 것 같다.

    가끔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느꼈지만 가슴이 저밀 정도로 심각한 적은 없었다. 생활인으로 시골에 살려면 부지런해야 하고, 그러자면 고독할 틈도 없다. 내 경우 이곳에서 작은 규모의 농사를 짓기 때문에, 봄에서 가을까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시골살이를 하다보면, 문화, 특히 고급문화를 누릴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서울에 산다고 실제로 문화적 향수 기회가 그리 많은가. 내 경우, 실제로 바쁘다는 핑계로 서울에서 예술이나 문화생활과는 거의 담을 쌓고 살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곳에 온 후 지난 한 해에만도 서울에서 열리는 음악회, 공연, 전시회에 네 번이나 다녀왔다. 그때마다 모처럼의 기회인 양 느껴져 마음이 크게 설고 기쁨도 그만큼 더 컸다. 다양한 지방 축제에 자주 기웃거리고 ‘양양 5일장’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뿐인가. 여기서 나는 서울에서보다 음악을 훨씬 더 자주 듣고, 그림도 그린다.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겐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쁨이 가장 크다. 우리 집에서 설악동, 봉포 바닷가, 영랑호가 똑같이 차로 15분 거리다. 다른 사람들이 1년을 별러야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자연 명소를 나는 옆 마을 가듯 자주 오간다. 내 서재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울산바위는 언제 보아도 한 폭의 명화다. 그런가 하면 도보로 왕복 1시간 걸리는 뒷산 솔밭 길은 여름에 뱀, 겨울에 멧돼지 걱정만 빼면 최상의 명상 길이다. 근처에 양질의 온천이 많은 것도 주요한 매력 포인트다.

    여기 올 때만 해도 서울서 속초에 오는 데 차로 4시간 가까이 걸렸다. 그런데 미시령 터널이 뚫리고 서울~춘천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두 시간 반이면 거뜬하다. 서울과 너무 가까우면 자칫 서울이라는 거대한 ‘블랙 홀’에 다시 빨려 들어갈 위험이 크다. 그렇다고 서울과 지나치게 멀면 어쩌다 서울행을 해야 할 때 적지 않은 불편이 따르게 된다. 그렇게 볼 때 속초~서울 간의 물리적, 심리적 거리는 적절하다고 본다. 아직 결론을 얘기하기는 이르지만, 대체로 나의 ‘탈(脫)서울’은 그런대로 성공적이 아닌가 싶다.

    성공비결과 필수조건

    마지막으로 내 경험에 비추어 은퇴 후 시골살이의 성공조건을 간추려보고자 한다.

    첫째, 마음의 준비와 부부간의 합의가 필요하다. 시골살이는 삶의 ‘패러다임적 전환’이다. 따라서 자신의 ‘시골살이 적합성과 ’현지 적응 가능성’에 대해 냉철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부부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둘째, 마땅히 할 일이 있어야 한다. 삶의 의미와 성취의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그 일을 부부가 함께 할 수 있으면 더욱 좋다.

    셋째, 심신이 건강하고 부지런해야 한다. 시골살이는 생각만큼 낭만적이고 목가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눈앞의 현실이고 생활이다.

    넷째, 사회적 교류는 적정 수준인 게 좋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러나 필요 이상의 사회적 네트워킹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

    은퇴 후 시골살이
    안병영

    1941년 서울 출생

    1975~2007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1995~1997년 교육부 장관

    1998~2002년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KOSSREC) 회장

    2003~2005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2007년~ 연세대 명예교수


    다섯째, 살면서 현지 주민과 생활의 격차를 보여서는 안 된다. 검약한 생활이 필수적이다. 사치와 과소비, 오만과 과시는 주민들과 위화감을 조성하고 자칫 따돌림과 소외를 자초할 수 있다.

    여섯째,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귀의하는 마음가짐이 절실히 요구된다. 몸만 시골에 있고 마음은 여전히 서울에 머문다면 실패를 자초하기 십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움의 철학’이 성공적 시골살이의 필수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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