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호

난임전문의 조정현의 ‘생식이야기’

자발적 1인 출산 시대의 도래

난자·정자은행 활성화하라!

  • 난임전문의 조정현

    입력2019-06-12 14:00:01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요즘 들어 세대 간 문화의 간극을 부쩍 느낀다. 현실의 비극적 단면을 놓고 사사건건 불만을 토로하고 한숨 쉬는 일부 젊은이들을 보면, 당장 타임머신에 태워서 가진 것 없이 맨주먹으로 시작해야 했던 전쟁의 폐허 속으로 보내버리고 싶다. 

    내 부모님은 실향민이셨다. 어머니는 전후(戰後)에 태어난 막내아들(필자)에게 6·25전쟁이 터진 그해 겨울의 일을 영화 줄거리 읊듯 들려주셨다. 춥고 배고팠던 피난길, 이제 막 6개월이 된 핏덩이를 업고 여섯 살 난 아들의 손을 잡고 평양에서부터 23일을 걸어 겨우 서울에 도착했었노라고…. 서울에 정착할 사이도 없이 1·4 후퇴로 인해 또다시 피난 행렬에 나서야 했던 그 시절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서글프고 황량했다. 포성이 천지에 울려대도 자식을 등에 업고 무서울 게 없었다는 어머니 말씀은 언제 들어도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어머니의 교육열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긴 전쟁 직후 한국의 교육열을 주도한 게 실향민들이었다는 말이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니다. 실향민 상당수가 고학력자였고, 설령 배움이 짧더라도 기술을 익혀야 밥을 굶지 않는다며 억척스럽게 자식들을 공부시켰다. 어찌 실향민뿐이었겠는가. 한국의 어머니들은 자식을 낳고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 가히 위대했다.

    자손 번식 위해 힘 쏟았던 한국 여성들

    한편 1950~60년대 여성들이 교육보다 더 열정을 쏟은 것이 있으니 바로 자손 번식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출산율이 높은 시절이 전쟁 직후에서부터 10년간으로, 여성 1명당 합계출산율이 6.5명에 달했다.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일각에서 북진통일 주장이 제기되자 전쟁 재발이 두려워 조혼 열풍이 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채 맏아들이 입대하면 시어머니와 아내가 부대까지 찾아가 일명 ‘합궁면회’를 신청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고 한다. 실제로 각 군 면회소마다 부부합궁을 위한 쪽방이 있었다니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자손을 낳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고군분투했던 한국 여인네들의 정성 덕분에 1960~70년대 산업화의 주역이 많이 태어날 수 있었다. 

    종족 보존에 대한 애착은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강하다. 남성은 임신과 출산에서 객(客) 같은 존재다. 성생활은 남성의 선택 사항이며 씨(정자) 없이는 임신을 할 수 없다는 식의 남성 중심적 사고에서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하겠지만, 사실이 그렇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궁과 난소의 주인은 여성이며, 여성만이 임신할 최적의 타이밍(배란)을 알 수 있다. 임신을 위해 남성을 유인할 수도 있고 반대로 거부할 수도 있다. 배란을 숨기거나 피한다면 남성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재간이 없다. 따라서 인류의 오늘은 어머니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자식 낳기를 포기하지 않은 여인들이 있었기에 오늘이 존재한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우리뿐 아니라 전 세계가 출산 파업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이러다 지구상에 어머니라는 존재가 사라질까 두렵다. 이미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는 비혼가정, 미혼모, 동성애자까지 난임 시술 지원을 받거나 정자은행을 이용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등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아기 낳겠다는 난임부부들에게 IVF(시험관아기 시술) 보험 혜택 횟수를 좀 더 늘려주고 임신 가능성이 있는 여성에 한해 나이 제한을 폐지해줘서 다행이긴 하다. 올해 하반기부터 사실혼 부부도 난임 시술 건강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정부가 난임부부에게만 출산율을 기대하고 있다면 큰일이다.

    난자은행에 보험 적용이 필요한 이유

    기발한 출산 정책까지는 안 바란다. 우선적으로 난자은행의 급여화(보험적용)라도 빨리 해결되면 좋겠다. 난자은행은 결혼계획이 없는 미혼 여성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자신의 난자를 영하 196℃의 초저온 상태로 동결 보존해 놓는 은행이다. 여성은 40세 이후에 가임력이 급격히 떨어진다. 난소 기능 저하가 아니더라도 부실 난자 배란으로 임신을 해도 유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난자를 동결 보존해놓는다면 임신이 한결 수월해질 수 있다. 필자의 병원도 자기 난자를 오직 자신만 사용할 수 있도록 보관하는 자기난자은행(self eggs bank)을 운영하고 있다. 

    문제는 어느 난자 은행 할 것 없이 비급여인 이상 자신의 난자를 10년 이상 동결보존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라고 해도 불확실한 미래(결혼)를 위해 선뜻 몇 백만 원의 지출을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정부가 난자 동결 보존에 건강보험을 적용해 비용이 저렴해진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미래를 위해 투자할 여성이 많아질 테고 덕분에 출산율 변동까지도 기대할 만하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한 여성에게는 골든타임이 무시할 수 없는 문제인 걸 감안할 때 젊은 시절에 동결 보존해놓은 난자가 있다면 나이가 들어서라도 출산을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자은행도 한국의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저출산에 허덕이는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유일하게 공공(국가) 정자은행이 없고 상업적인 정자은행조차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현재 국내에는 비영리공익재단인 한국공공정자은행연구원이 설립돼 있지만 정자 기증과 관련한 구체적 기준이나 규정이 미비하고 정자 기증자가 없는 실정이다. 정자은행의 이용자는 누구일까. 1차적으로는 난임부부(남성불임/비폐쇄성 무정자증)가 될 수 있지만 2차, 3차까지 생각해야 한다. 

    ‘자발적 1인 출산’이라고 들어봤는가. 최근 통계청 결과를 접하고 놀랐다. ‘결혼하지 않고도 자녀를 가질 수 있다’는 응답 비율이 2016년 24.2%로 2010년(20.6%)보다 3.6%포인트 증가했다.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상에서는 ‘결혼은 싫지만 출산은 하고 싶다’ ‘경제력만 된다면 정자 기증받아 혼자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댓글이 예사롭지 않게 올라와 있다.

    결혼 없이 출산 원하는 여성들을 위하여

    비혼인데 정자은행을 이용해서 출산을 하겠다? 기절초풍할 일이겠지만 세상이 급변한 만큼 가치관도 변했다. 통계에 따르면 OECD 회원국 평균 혼외출산율은 40%에 달한다. 우리나라 혼외출산율이 5% 미만인 것과 대조적이다. 혼외출산은 미혼과 비혼 출산 그리고 법적 부부가 아닌 동거 출산을 아우른다. 앞으로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 불허다. 우리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비혼 여성들이 출산을 당당히 원할지 모른다. 정부가 출산율을 제대로 올리려면 이 같은 시대 코드를 읽어야 한다. 

    모성(母性)은 본능이다. 모성은 자식을 키우는 것 이전에 자식을 낳기까지의 애착과 노력까지를 포함한다. 팍팍한 현실에서 여성들이 비혼을 선택하거나 자식을 마다하며 살고 있지만, 막상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면 자식 욕심이 생기고 출산 후에는 놀랄 만큼의 진한 모성이 발휘될 것이다. 세상살이에서 모성만큼 믿을 것이 또 있을까. 외할머니에게서 어머니로 대물림되었고, 또 어머니에게서 딸로 내려온 그 끈끈하고 깊은 모성 말이다.


    조정현
    ● 연세대 의대 졸업
    ● 영동제일병원 부원장. 미즈메디 강남 원장. 강남차병원 산부인과 교수
    ● 現 사랑아이여성의원 원장
    ● 前 대한산부인과의사회 부회장




    댓글 0
    닫기

    매거진동아

    • youtube
    • youtube
    • youtub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