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론 엄밀하게 따지면 화폐 자체도 믿을 수 없는 약속에 불과하다. 사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거래는 자산과 자산을 직접 교환하는 물물교환일 것이고, 다음이 국가가 발행하는 화폐, 마지막이 개인 간의 어음과 같은 약속일 터이니 이들의 신용도는 물물교환 ’ 화폐 ’ 어음의 순서가 된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금융자산의 거래에는 우선 기축통화인 달러를 직접 지급하는 거래와, 달러를 지급할 것을 약속하는 신용거래, 그리고 달러를 지급받을 권리를 표시한 채권거래 등의 방식이 존재한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약속들을 이행하기 위한 실체적인 수단이 단지 ‘신용’ 하나뿐이라는 점이다. 즉 ‘신용’이란 전세계 경제를 원활하게 움직이는 데 가장 중요한 기초인 셈이다. 그런데 지금 세계적으로 이 신용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발 신용위기의 진실
2008년 세계를 휘몰아친 금융위기는 미국의 달러 발행이 부족해서 생긴 게 아니다. 단지 달러를 받기로 약속한 거래에서 상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 신용의 위기일 뿐이다.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돈이 부족해(유동성 부족) 생긴 유동성 위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문제는 신용위기가 유동성의 위기보다 더 무서운 측면이 있다는 점이다. 유동성 위기의 경우에는 금리를 내리거나, 국가가 발권력을 동원해 유동성을 공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신용위기는 누군가가 약속을 어기면 그것을 대신 갚아줄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한 증폭된다. 다시 말하면 재정도가 튼튼한 보증인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결국 신용위기가 정점에 달하면 이 보증인의 역할을 국가가 할 수밖에 없고, 이때 국가는 최종 채무자의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현 상황에서 미국 정부가 최종 채무를 지면 신용위기는 해결될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다시 신용의 본질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은행과 개인의 거래는 계좌에 찍힌 숫자로만 나타난다. 나는 그 숫자를 어디론가 전송한 후 무엇인가와 교환하며, 결제기를 통과한 신용카드는 은행에 있는 내 계좌의 숫자를 줄여놓는다. 이 과정에서 내게 재화를 파는 상대는 내가 그 숫자만큼의 재화를 지급할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거래를 하려 한다. ‘그’와 ‘나’ 사이에 신용이 매개된 것이다. 이때 카드회사는 양자 간의 신용거래에서 완충의 역할을 떠맡고 개입한다.
국가 간의 거래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찍어낸 달러의 60%와 미국이 앞으로 달러를 찍어서 줄 것이라 약속하고 발행한 ‘달러상환 약속거래’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그만큼의 자산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권리를 부여한 셈이다. 즉 2600억달러가 해외에서 유통 중이라면, 미국은 그 종이돈을 찍어서 그만큼의 해외자산을 사는 데 지급한 결과일 것이고, 이때 달러를 받은 쪽은 그 달러가 최초 자신이 지급한 자산가치만큼의 가치를 유지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거래를 했을 터이다.
이 경우 미국은 발행 화폐 기준만으로도 2600억달러의 해외자산을 공짜로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그것의 수백 배에 해당하는 세계금융 거래의 대부분은 필요시 달러를 주고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기축통화국인 미국이 얻는 이익과 거기에 개입되는 ‘신용 시스템’은 사실 측정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에는 달러 지급을 보증하는 미국중앙은행과, 그것을 매개로 채권을 발행하는 정부의 신용, 그리고 그것을 매개로 만들어지는 파생상품과 파생상품의 위험을 제거하는 데 필요한 보험사의 신용 등이 얽혀 있고, 그 뿌리는 다시 서로 얽히고설켜 있다. 따라서 지금처럼 문제가 터지면 대체 어디가 최종 기착지인지를 알 수 없는 혼돈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