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호

‘장손’ ‘후계자’ 꼬리표 너머 정의선이 사는 법

MZ세대 잡아야 역사 쓰는 현대家 3세 경영人

  •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2-08-0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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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베일 싸인 王회장 손자, MK 아들

    • 삼성 이재용과 데칼코마니 운명

    • 피터 슈라이어 그리고 제네시스

    • 위대한 창업자·기민한 추격자를 넘어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현대자동차]

    이것은 삼대(三代)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 경제의 압축적 성장담이 층층이 누적된 하나의 짧은 서사다. 할아버지로부터 드라마의 막이 오른다.

    ‘현대자동차주식회사.’ 1967년 12월 쉰두 살의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자본금 1억 원을 갖고 회사를 세웠다. 정주영은 이미 1946년 4월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적이 있다. 다섯 글자가 같지만 두 회사는 성격과 규모가 전혀 달랐다. 현대차공업사의 경우 정비공장에 가까웠다. 현대차는 건설업으로 돈을 번 정주영이 박정희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고 만든 자동차 제조업체였다. 그러니 현대라는 이름의 모태는 1946년에 있지만, 현대차의 뿌리는 1967년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 차(車)가 ‘카피카(copy car)’ 신세를 벗지 못한 시대였다. 현대차는 미국 포드와 합작회사로 출발했다. 갓 태동한 현대차에는 완성차를 만들 기술이 없었다. 현대차는 포드의 차량을 조립생산(SKD)하는 길을 택했다. 1968년 11월 코티나(Cortina) 생산이 시작됐다. 1969년이 되자 코티나는 5567대가 팔려 직전 해 판매량을 10배 웃도는 대성과를 거둔다. 지금도 현대차는 홈페이지에 코티나를 “현대자동차 최초의 생산 모델”이라고 소개한다.

    정의선(현대차그룹 회장)은 이무렵 현대가(家)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일은 1970년 10월 18일이다. 마침 아버지 정몽구는 같은 해 2월 현대차 서울사업소 부품과에 과장으로 입사한 참이었다. 정주영이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고 정몽구가 자동차업계에 몸담은 때 태어났다는 것은 정의선의 삶과 행보를 이해할 중요한 열쇠다.

    “아직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00년은 현대차에 변곡점으로 기록된 해다. 그해 현대그룹 경영권을 놓고 이른바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왕자의 난’에서 패한 정몽구는 같은 해 9월 자동차 계열사들을 이끌고 현대그룹으로부터 계열분리를 해 현대차그룹을 만든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서울 서초구 양재동으로 사옥을 옮기면서 본격적인 ‘강남 시대’를 열었다. 그해 겨울은 길었다.



    정의선의 이름도 2000년부터 언론 지면에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가 만으로 서른이 되던 해였다. 하지만 정의선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었다. 산업계 소식에 밝은 경제신문에서도 그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지 방향을 못 잡고 있었다. 예컨대 ‘매일경제’는 2000년 12월 13일자 ‘재벌 2세들 실력으로 평가받고 싶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정의선에 대해 “그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공부했으며 지난해 현대차에 합류했다. 아직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 욕심이 많으면서도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썼다.

    이것이 전부다. “일 욕심이 많고 합리적”이라는 말은 누구를 주어로 갖다놔도 어색할 게 없는 표현이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재벌 2·3세는 정의선과 이재용(삼성전자 부회장), 정일선(현대비엔지스틸 회장)을 포함해 총 9명이다. 이 중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이라는 수식이 쓰인 건 정의선이 유일했다. 이재용에 대해 쓰인 구체적 설명, “박사 논문이 끝나고 상속에 대한 국내 작업이 끝난 후 어느 시점을 정해 화려하게 부상할 것”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이후에도 정의선은 한동안 베일에 싸인 재벌 3세로 통했다. 임원으로 승진한 뒤에도 공식 행사에 얼굴을 내미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동아일보’ 2002년 11월 20일자 기사 ‘“자동차의 미래를 한눈에…” 2002 서울모터쇼 개막’에는 “이날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의 아들인 현대차 정의선 전무가 오랜만에 공식 행사에 모습을 나타내 눈길을 끌었다”는 대목이 등장하기도 한다. ‘왕자의 난’으로 혹독한 ‘독립 수업’을 치른 정몽구로서는 자신의 아들이 때 이르게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2000년대 자동차업계를 취재했던 국내 한 경제지의 부장급 기자는 “2000년대 초중반 정의선은 현대가의 장손이나 정몽구의 아들로서 주로 뉴스 가치가 있었다”면서 “그래서 자동차업계 출입기자보다는 오너 일가 소식을 다루는 재계 출입 기자들에게 더 인기 있는 취재 대상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그럴 때조차 메인(main)은 이재용과 최태원(SK그룹 회장)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는 “정의선의 말과 행보를 중심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고 배웠다”는 6년차 현직 자동차업계 출입기자의 말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글로벌 현대차’의 물적 토대

    2021년 7월 22일(현지 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20/2021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이 정몽구 명예회장 헌액 기념패를 들고 램지 허미즈 자동차 명예의 전당 의장(왼쪽), K.C.크래인 자동차 명예의 전당 부의장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2021년 7월 22일(현지 시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2020/2021 자동차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가운데)이 정몽구 명예회장 헌액 기념패를 들고 램지 허미즈 자동차 명예의 전당 의장(왼쪽), K.C.크래인 자동차 명예의 전당 부의장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30대의 정의선은 비중 없는 조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정몽구가 CEO(최고경영자)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CEO의 리더십과 전략은 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다. 정몽구는 재벌 2세였지만 창업자라 해도 과장이 아닐 만큼 현대차를 탈바꿈시킨 경영자다. 정몽구는 자동차산업에서 유례가 없는 속도로 미국·중국·체코·터키·러시아·브라질·멕시코 등 각 대륙에 생산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3월 16일(현지시간) 준공식을 한 현대차 인도네시아 공장이 정의선이 ‘원톱’ 회장으로서 만든 첫 번째 해외 공장이다. 바꿔 말하면 ‘글로벌 현대차’의 물적 토대는 정몽구가 대부분 구축했다는 뜻이 된다.

    ‘정몽구 시대’에 현대차는 내수시장을 노리던 국내 재벌에서 세계 유수 완성차업체와 어깨를 겨루는 기업으로 변모했다. 회사의 두뇌도 발달했다. 남양연구소는 신차 개발, 디자인, 설계, 시험 및 평가 등을 총괄하는 싱크탱크로 정평이 났다. 정몽구의 이름값도 높아졌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HBR)’는 1995년 이후 글로벌 기업 CEO로 재직한 인물 중 주주수익률, 시가총액 등 경영 실적을 토대로 100명을 추렸다. 정몽구는 6위였다. HBR에 따르면 현대차는 1999년 이후 시가총액이 480억 달러 늘었고, 누적 주주총수익률은 2024%였다. 미국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 Hall of Fame)에 처음으로 헌액된 한국인도 정몽구다.


    2002년 3월 21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1주기 추도식이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서 열린 가운데, 유족 대표인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 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동아DB]

    2002년 3월 21일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1주기 추도식이 경기 하남시 창우동 선영에서 열린 가운데, 유족 대표인 정몽구 당시 현대차그룹 회장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동아DB]

    아버지의 전성기는 청춘의 정의선에게 행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회사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에 정의선은 1인자의 외아들이었고, 고속 승진하는 임원이었으며, 차기 대권을 쥘 게 확실시되는 후계자였다. 이는 삼성전자의 이재용이 처한 상황과 데칼코마니처럼 닮아 있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할아버지(정주영, 이병철)와 선구자 수준의 경영 성과를 낸 아버지(정몽구, 이건희). 거기서부터 출발해 제 이름 석 자의 힘을 오롯이 입증해야 하는 숙명.

    이는 4대 재벌 기업의 다른 두 사람, 그러니까 SK의 최태원이나 LG의 구광모에게는 없는 경험이다. 최태원은 일찍부터 후계자로 공인받았으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별세 탓에 예기치 못한 시점에 기업을 승계했다. 구광모는 큰아버지의 양자(養子)로 입적된 뒤에야 후계 가도의 전면에 설 수 있었다. 정의선과 이재용은 늘 황태자로 주목받았고 시종일관 준비돼 있어야 했다.

    이재용과 달리 정의선에게는 옆길이 있었다. 정몽구는 2005년 3월 정의선에게 기아차 대표이사를 맡긴다. 정의선이 기획, 해외수출 및 영업, 연구개발 등을 맡고 후견인 격의 다른 대표이사가 경영지원, 국내영업, 애프터서비스 등을 맡는 형태였다. 현대차그룹에 기아차라는 별도의 완성차업체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이재용에게는 삼성전자 바깥에 마땅한 징검다리가 없었다. 정의선에게는 정몽구라는 나무 바깥에서 역량을 펼 기회가 있었다. 어쩌면 ‘기업인 정의선’에게 주어진 최대의 행운일지도 모른다.

    기아차로 간 정의선

    기아차로 간 정의선은 훨훨 날았다. 그는 2006년 파리모터쇼에서 “기아에 ‘디자인 경영’을 도입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즈음 ‘유럽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불리던 피터 슈라이어가 기아차로 왔다. 이후 쏘울, K5, 스팅어 등 세계적으로도 주목받은 히트 상품이 여럿 등장했다. 아버지가 영토를 확장하는 사이에 아들은 조금씩 자기만의 성을 구축해 가고 있었다.

    정의선은 현대차에 입사한 후 6년 만에 대표이사 사장이 됐다. 이 시기 이재용은 아직 삼성전자의 전무였다. 정몽구가 발탁한 임원 사이에서 뒷말이 나올 만 했다. 적잖은 내부자는 정의선의 실패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정의선이 기아차에서 성과를 내면서 그를 향한 보이지 않는 견제 심리도 점차 사그라졌다.

    정의선에게 40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마흔을 코앞에 둔 2009년 9월 현대차 부회장이 되면서 기아차의 울타리를 벗어났다. 그에게 새로운 시험대였다. 마침 정몽구의 측근 일부도 퇴진한 참이었다. 정의선에게는 ‘디자인 경영’을 넘어 아버지 시대와 다른 상징적 제품이 필요했다. 2015년 제네시스가 등장한 건 이런 고민의 결과였다. ‘프리미엄 브랜드 완성차’ 하면 독일과 일본만 떠오르는 상황에서, 제네시스의 등장은 한국 경제의 목표점이 달라졌다는 점을 상징했다. 피터 슈라이어는 방패 모양 그릴로 제네시스만의 확고한 정체성을 구현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정의선 회장이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하고 제네시스 브랜드를 출시하는 데서 주도적 역할을 했는데, 오늘날 현대차 수익률이 높아지는 데 제네시스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1915년생인 정주영은 산업화 세대(1940~1954)와 손잡고 현대를 대기업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1941년생 이명박은 ‘정주영의 현대’에서 일군 샐러리맨 신화를 자양분 삼아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1938년생 정몽구는 베이비부머 세대(1955~1963)의 역량을 기반으로 현대차를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정몽구의 이니셜을 따 ‘MK의 2인자’ ‘MK의 복심’으로 불린 김용환 전 현대제철 부회장은 1956년생이다. 즉 정주영과 정몽구는 자신보다 15~20살 어린 임원진과 함께 황금기를 일궜다. 이 공식대로라면 1970년생 정의선은 멀지 않은 미래에 MZ세대(1980년대 이후 출생 세대를 통칭) 임원들과 손발을 맞추고 있을 것이다.

    “막내딸이 MZ세대라…”

    6월 29일 현대자동차가 전용 전기차 브랜드 아이오닉의 차기 모델인 ‘아이오닉 6’의 내·외장 디자인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

    6월 29일 현대자동차가 전용 전기차 브랜드 아이오닉의 차기 모델인 ‘아이오닉 6’의 내·외장 디자인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

    현대차 내에서 MZ세대의 존재감은 커지는 분위기다. 2021년 12월 현대차 노조집행부 선거를 앞두고는 노조위원장 후보 4명이 MZ세대 표심 잡기에 나서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당선된 안현호 후보는 ‘금속연대’ 출신의 강성파로 분류되는데도 MZ세대 연구직이 많은 남양연구소에서 55.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안 후보가 내세운 신입사원 초임 인상, 호봉표 개선, 구글과 네이버 등을 벤치마킹한 선진 연구 환경 조성 공약 등이 주효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러니 현대차에서 MZ세대 이탈이 늘고 있는 점은 정의선에게 뼈아픈 대목이다. 7월 7일 현대차가 발표한 지속가능성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현대차의 국내 임직원 중 자발적 이직자는 486명이었는데, 연령별로 보면 30세 미만 이직자 비율이 2020년 0.60%에서 0.95%로 증가했다. 6월에는 지난해 4월 출범한 MZ세대 사무연구직 노조위원장이 퇴사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장기근속·호봉제·한솥밥 등의 키워드로 설명되는 정주영·정몽구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최근 정의선은 “막내딸이 MZ세대라, 친구들이 오면 같이 이야기한다. 회사의 MZ세대와도 소통한다”면서 “먹방 등 유튜브를 자주 보는 편이고 기술, 관광, 자연 관련 콘텐츠도 본다”(4월 14일 뉴욕특파원 간담회)고 했다. 이 발언만 놓고 보면 정의선에게 아직 뾰족한 수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정의선의 책임이 없진 않겠으나, 오롯이 그의 잘못이라 규정하긴 어렵다. 산업구조 격변이라는 변수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서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현대차에서도 MZ 세대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어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노동조합도 그 영향력을 주시하는 것”이라며 “임금체계 개편이나 정년 연장 문제 등에 있어 조금 더 합리적인 안이 도출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현대차 노조 조합원 전체가 전기차·자율차 시대로 바뀌면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인데, 정의선 회장이 그에 맞는 비전을 제시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노조는 미래차로 산업의 판도가 달라지는 시기에 고용불안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현대차가 미국 조지아주에 6조3000억 원을 들여 전기차 생산 공장을 짓기로 하자 노조는 “사용자 측의 일방적 미국 공장 추진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의견을 내놨다. 밖에서야 “강성 현대차 노조가 문제”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이지만, CEO는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 최근 발표된 전기차 전용 공장 신설 소식은 그런 의미에서 노사 간 ‘윈윈’ 결단으로 평가할 만하다.

    7월 12일 현대차 노사는 임금협상·단체교섭에서 국내 전기차 전용 공장 신설 등을 담은 ‘국내 공장 미래투자 관련 특별합의서’를 내놨다. 현대차는 2023년 울산에 전기차 신공장을 착공해 2025년 완공할 계획이다. 완공 기준으로 1996년 아산공장이 지어진 이후 29년 만에 국내에 현대차 새 공장이 들어서게 된다. 합의서에는 노후 생산라인을 단계적으로 재건축하는 내용도 담겼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경영진은 울산의 내연기관차 라인을 전기차 라인으로 바꾸는 비용이 클지, 전용 공장을 만들고 기존 시설을 줄이는 게 나을지 분석했을 테고 결국 후자를 택한 셈”이라며 “초기 20만 대 수준으로 시작해 향후 증설할 수 있게끔 만들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어 “현대차는 전기차 전용 공장을 만들고 기아차는 화성에 PBV(목적기반차량) 공장을 짓고 있다”며 “정몽구 회장 때가 패스트 팔로어였다면, 정의선 회장 때에 와서는 ‘퍼스트 무버’로 미래 모빌리티 산업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그림이 보인다”고 덧붙였다.

    시부시자, 호부무견자

    시부시자(是父是子). 이 아비에 이 아들이라는 뜻으로, 부자가 모두 훌륭함을 이르는 말이다. 호부무견자(虎父無犬子). 아비가 범인데 자식이 개일 수는 없다는 의미다. 정주영은 위대한 창업자였다. 정몽구는 기민한 추격자였다. 이 두 문장에는 진보건 보수건 이견이 없다. 정의선은 물려받은 부와 명예를 발판으로 없는 길을 개척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가 닿아야 할 선대(先代)라는 산맥은 더할 나위 없이 험준하다. 발을 헛딛는 순간 그를 겨눌 화살이 도처에 도사린다. 우여곡절 끝에 등정에 성공하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잇는 혹은 뛰어넘는 승부사라는 평을 얻을 것이다. 이것이 정의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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