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4월호

“자유보다 평등 앞세우는 사회, 결국 둘 다 달성 못 한다”

[누가 위대한 지도자인가] 침몰하던 영국을 구출한 마거릿 대처 총리

  • 최광 前 보건복지부 장관·現 대구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입력2025-04-05 09:00:02

  • 글자크기 설정 닫기
    • 영국 역사상 유일무이…‘대처리즘’과 ‘철의 여인’

    • 독서광 아버지 영향으로 신자유주의적 사고 갖춰

    • 전공인 화학보다 정치에 흥미 느낀 옥스퍼드대생

    • ‘유럽의 병자’ 소리 듣던 영국, 회생의 길 이끌다

    • 노조 지도층 독재적 권위 분쇄해 노사문제 해결

    • 영국을 세계 최초의 ‘민영화 수출 국가’로 만들어

    • 정치적 이해관계 떠나 장기적이고 분명한 국가 비전 제시

    1982년 6월 유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는 마거릿 대처 총리. 뉴시스

    1982년 6월 유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질의에 답하고 있는 마거릿 대처 총리. 뉴시스

    마거릿 대처 총리의 업적과 명성은 영국병 치유를 위해 재임 12년간 추진한 각종 경제·사회 정책을 대처리즘(Thatcherism)이라 총칭하는 데서 잘 나타난다. 세계 어느 지도자에게도 그 이름(Thatcher)에 접미사 ‘이즘(ism)’이 결부돼 대처리즘이란 새 용어로 탄생한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그만큼 대처는 영국 역사에서는 물론 세계사에서도 위대한 지도자였다. 

    대처리즘을 대처보다 먼저 구상한 사람은 키스 조지프(Keith Joseph) 경이었다.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녀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았고, 정치인으로서도 대처보다 3년 먼저 하원의원이 된 선배 조지프는 보수당 당수 대처, 영국 총리 대처를 보필한 명참모였다. 명군과 명참모가 역사를 바꿨다.

    대처 총리는 ‘철의 여인(Iron Lady)’이라 불린다. 영국 노동당 정부를 쥐락펴락했던 탄광 노조가 불법파업을 했을 때 공권력 투입으로 법과 원칙에 따른 노사관계라는 대원칙을 정립해 노조를 제압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유를 보장하면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는 강력하게 대응했기에 대처 총리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마거릿 대처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5년 11월 워싱턴DC 백악관 정원을 함께 걷고 있다. 뉴시스

    마거릿 대처 총리와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1985년 11월 워싱턴DC 백악관 정원을 함께 걷고 있다. 뉴시스

    대처 총리는 로널드 레이건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신보수주의(New Right)의 쌍두마차였다. 특별한 배경도 없이 여성이라는 난관을 극복하고 총리까지 되면서 신자유주의적 사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부친의 종교와 가르침 때문이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등이 어머니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대처 총리는 식료품점 가게 점원에서 출발해 식료품점 주인이 되고, 정치에 입문해 그녀가 태어난 시의 시의원을 거쳐 시장이 된 독서광 아버지 로버츠(Alfred Roberts)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처 총리는 자립과 자조 정신을 어릴 때부터 배웠으며, 아버지의 노력과 성공을 보면서 개인이 어떻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는 걸 깨달았다. 집안에서 대대로 믿어온 감리교의 가르침에 따라 ‘남에게 기대지 말고, 뭐든 자기 힘으로 하고 늘 반듯하게 모범적으로 하라’는 엄격한 가르침으로 보수적 성향을 띠게 됐다. 



    1943년 10월 대처 총리는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해 화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화학보다는 정치에 더 흥미가 있었다. 당시에 소수였던 보수주의협회 동아리에 가입해 활동했고, 1946년에는 보수주의학생연합 의장으로 선출됐다. 대처 총리는 1944년에 하이에크(Friedrich von Hayek)가 쓴 ‘노예의 길(Road to Serfdom)’을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읽었는데 이 책은 그녀의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하원의원과 총리 재임 시에는 하이에크 교수를 포함 밀턴 프리드먼과 제임스 뷰캐넌 등 노벨경제학 수상자 세 명의 자문을 받았다.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전쟁을 승리로 이끈 훈장, 영국병을 고친 훈장, 추락한 영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훈장, 권좌로부터 용퇴한 훈장, 바쁜 공무 중에 어머니로서 그리고 아내로서 역할을 해낸 인간 훈장 등 다섯 가지 훈장을 수여 받은 인물로 유명하다. 

    1970년대 영국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행진하고 있다. Gettyimage

    1970년대 영국 공공서비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런던 하이드파크에서 행진하고 있다. Gettyimage

    대처 취임 전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

    대처 총리가 등장하기 전, 1970년대 영국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1970~1974년 보수당의 히스(Edward Heath) 총리 집권, 1974~1979년 노동당의 윌슨(James Harold Wilson) 총리와 캘러헌(Leonard James Callaghan) 총리가 재임하는 동안, 영국은 높은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그리고 빈번한 노조 파업으로 인해 혼란과 암울의 시기였다. 경제적으로는 두 자릿수의 인플레이션과 낮은 경제성장률, 고질적 노사분규로 인해 국가경제가 매우 불안정했다. 정치적으로는 노동당 정부의 사회주의 정책이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노조의 강력한 영향력에 정부의 정책이 크게 좌우됐다. 사회적으로는 지나친 복지와 평등 정책으로 인해 국민이 일하기보다는 국가가 제공하는 복지 혜택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비능률의 정부, 과도한 복지지출, 무거운 세금 등으로 기업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있었다. 특히 걸핏하면 벌어지는 노동조합의 파업 등으로 사회 전반에 기업하려는 의욕이 상실되고 있었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이 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국은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3600달러로 프랑스의 5100달러, 이탈리아의 4400달러 등에 뒤지면서 2류 국가로 침몰하고 있었다. 급기야 1976년에는 선진국이라 자부하던 영국이 선진국 중 최초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39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기도 했다. IMF는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영국 정부에 2년간 25억 파운드라는 공공지출의 대폭적 삭감과 금리인상을 요구했으며 국내 여신 한도를 축소하며, 총통화량 증가율을 억제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했다. IMF는 영국의 경제정책을 감시하며, 미국이 막후에서 조정 관리자 역할을 맡았다.

    대처 개혁의 동인(動因)은 포클랜드전쟁 승리

    포클랜드(Falkland Islands)는 아르헨티나에서 640km, 영국에서 1만2000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1816년 아르헨티나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 얻었다. 하지만 1800년대 영국이 강제로 병합하고 이 섬을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다. 대처 정부는 포클랜드에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르헨티나에 매각한 후에 임대하는 것을 검토하기도 했다. 

    1982년 4월 아르헨티나 군부독재 정권은 포클랜드를 기습적으로 점령했다. 아르헨티나 군부는 포클랜드를 침공하더라도 대처 정부가 평화를 사랑하고 의지가 부족해 강력한 대응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여서 국민의 불만을 해소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침략을 강행했다.

    대처 내각에서 일부 각료들은 아르헨티나와 협상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세계질서를 좌우했던 ‘최강대국’ 영국의 지위는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기에, 영국의 영토라는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해야 했기에, 대처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용단을 내려 전쟁을 결행했다. 당시 미 해군도 영국의 포클랜드 탈환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았음에도 대처 총리의 결의는 의연했다. 

    1982년 4월 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이 아르헨티나와의 분쟁 지역인 포클랜드제도에 도착하고 있다. Gettyimage

    1982년 4월 포클랜드전쟁 당시 영국군이 아르헨티나와의 분쟁 지역인 포클랜드제도에 도착하고 있다. Gettyimage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영국군의 허를 찌르는 선제공격으로 아르헨티나는 74일 만에 항복했다.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1983년 선거에서 승리하게 돼 자신이 추진하는 각종 개혁 조치를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1987년 선거에서도 연거푸 승리했다. 당시 경제가 살아나고 야당이 허약하기도 했지만,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대처 총리가 개혁적으로 추진한 많은 정책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포클랜드전쟁이 신자유주의가 전 세계를 휩쓰는 방아쇠였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집권 3년차일 때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포클랜드전쟁 전, 대처 총리는 체임벌린(Arthur N. Chamberlain) 총리와 더불어 가장 무능한 총리라고 평가됐다. 또한 보수당 내각의 지지율은 10%대에 머무는 등 당시 대처 정권은 매우 위태로웠다. 바로 그때 대처 총리는 포클랜드전쟁의 승리에 힘입어 재집권에 성공했고, 이후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그녀는 포클랜드전쟁의 승리로 최고 지지율 98%라는 맹위를 떨치면서 1990년 총리에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영국 내에서 절대 권력을 휘두르게 됐다.

    대처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단연 처칠 총리였다. 처칠의 진정한 후계자가 되고 싶었던 대처는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처칠과 비슷한 능력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대처와 처칠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영국이 위대한 나라라고 생각했으며, 애국심을 강조했으며, 영국의 전통에 자부심을 느꼈다. 대처는 처칠의 유명한 표제어 “전쟁에서는 결의, 패배에서는 도전, 승리에서는 아량, 평화에서는 선의”를 가끔 인용했다.

    돌이켜보면, 윤석열 정권을 포함해 이명박·박근혜 등 우리나라 우파 정권에서도 각종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이-박-윤으로 이어지는 정권에서 개혁에 실패하고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간 이유는 혁명보다 어려운 개혁을 추진하면서 성공을 뒷받침하는 동인(動因)을 사전에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에서 출발해 해방 건국 정국을 거쳐 지금까지 좌우 이념 대립과 체제 전쟁에서 역대 우파 정권은 이념과 체제 전쟁의 개념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초에 체제 전쟁의 기치를 강하게 내걸고 좌파 척결에 나섰거나, 부정선거 문제를 강하게 제기해 22대 총선을 무효화하고 선거를 다시 치렀다면, 대통령 자신과 나라의 운명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까.

    1941년 11월 촬영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Gettyimage

    1941년 11월 촬영된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Gettyimage

    달리 대안이 없었던 탄광노조와의 정면 승부

    대처 총리는 노사문제 핵심을 “일반 노조원들은 순진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합니다. 문제는 노조 지도층인데, 그들이 모든 문제를 일으킨다”라고 진단했다. 그래서 그녀는 노조 지도자(union boss)가 파업을 결정하려면 노조원 전체의 비밀투표에 의한 동의를 받아야 되도록 법을 고쳤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근로자가 가담치 않았고, 간혹 파업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피해가 있으면 그들에게 책임을 지웠다. 요는 노조 지도층의 독재적 권위를 분쇄했다.

    대처가 총리가 되던 1979년 겨울 영국의 경제·사회 상황은 매우 참담했다. 자동차·운수·병원·청소 등 사회 기간 부문에서 1978년 시작된 파업이 장기화하면서 나라 전체에 비관주의가 넘쳐나고 국민들은 절망했다. 당시 상황을 영국인들은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이라 불렀다. 운송망이 마비돼 경제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청소부들이 파업해 도시 곳곳에 쓰레기 더미가 쌓였다. 병원 파업으로 환자들은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난방이 되지 않는 병원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노인들은 과연 살아서 이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를 걱정했다. 노조원들이 시신 매장과 화장까지 방해함에 따라 죽은 자들이 갈 곳을 찾아 헤매는 지경이 됐다. 

    1970년대 영국은 노조의 파업으로 날이 새고 날이 밝았다. 노조의 횡포에 정권이 바뀔 정도로 노조의 힘이 막강했다. 정부는 노조 달래기에 급급했고 임금은 급격하게 상승했다.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재정적자가 계속 확대됐다. 철도·통신 등 주요 기간산업이 국유화(國有化)나 공기업이 돼 경쟁력을 잃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인플레가 발생하고 실업자가 늘어났다. 영국의 최종 종착역은 1976년에 선진국 최초로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수모를 당하는 것이었다.

    1974년 보수당의 히스 총리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노조냐 정부냐?”를 물으며 실각했고, 1979년 ‘불만의 겨울’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에 노동당의 캘러헌 총리도 노조에게 “이제 국민이 참는 것도 한계에 와 있다”라는 말은 남기며 정권을 대처 총리에게 넘겼다. 정권을 넘겨받은 대처는 중병을 앓고 있는 나라를 수술해야 했지만 결코 쉽지 않았다. 대처 총리는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해 전투를 전개했다. 운이 좋게도 포클랜드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총리에 대한 국민 지지도가 80%에 달함에 따라 한층 더 자신감을 갖고 결전에 임하게 됐다.

    영국병의 중요 요인인 동시에 자신의 개혁정책을 좌절시킬 최대의 장애물인 노조와 대적하기 위해 대처 총리는 먼저 노조의 특권을 규정한 법률을 고쳐나갔다. 파업과 협약 체결을 위한 조합원 투표를 반드시 비밀투표로 하게 했고, 기업이 비조합원을 채용하기를 거부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파업 찬반 투표에서 승인을 받은 파업에 한해서 면책특권을 인정해 주고, 동조파업이나 지원 파업 등 2차 파업을 주도한 조합 간부들에 대해서는 면책특권을 박탈했다. 대처 총리는 1980~1988년 동안 고용법(Employment Act)을 4번 개정하고 노동조합법(Trade Act)을 1번 개정했다.

    법적 준비를 마친 다음 대처는 석탄 공급과 비축을 시작했다. 우선 연간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5700만t의 석탄을 비축하고, 필요할 경우 폴란드·호주·프랑스 등으로부터 수입하기 위한 계획도 수립했다. 비축된 석탄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비노조원 운전기사도 충분히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지방단위로 분산돼 있는 경찰력을 유기적으로 조직해서 필요시 언제든 현장에 투입할 수 있게 했다.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영국 셀비에 위치한 위스토우 탄광을 방문하는 모습. 왼쪽은 국가석탄위원회의 노스요크셔 지역 책임자인 마이클 이튼. Gettyimage

    마거릿 대처 총리가 영국 셀비에 위치한 위스토우 탄광을 방문하는 모습. 왼쪽은 국가석탄위원회의 노스요크셔 지역 책임자인 마이클 이튼. Gettyimage

    마침내 대처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계획을 발표했다. 채산성이 없는 20여 개의 탄광을 폐쇄하거나 통합하고 광부 2만여 명을 정리해고한다는 내용이었다. 발표 직후 노조위원장 스카길(Arthur Scargill)은 “대처로부터 영국을 구해낼 혁명 전위대를 지휘한다”고 하면서 1984년 3월 총파업에 들어갔다. 그 파업은 무려 1년간 계속됐다. 파업 과정에서 폭력에 연루돼 체포나 기소된 건수가 1만 건을 넘었고, 그중에는 살인 3건, 상해 468건, 협박 290건, 방화 15건, 절도 380건, 경찰관에 대한 폭력 및 집무방해가 2000건에 달했다. 대처 정부와 노조 간 대치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수치다. 노조 파업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국내총생산의 1%가 넘는 30억 파운드에 달한 것으로 추정됐다.

    대처 총리는 파업에 단호하게 대처했다. 노조가 찬반 투표를 거치지 않았기에 불법 파업이란 이유로 법원은 탄광 노조의 재산을 동결했고, 노조 위원장 등 파업 주동자 3명에게는 2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했다. 이 과정에서 파업 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분열이 야기되기도 해 스카길 노조위원장은 1년여 파업 끝에 1985년 3월 3일 “희생이 너무 크기 때문에 파업 속행이 더는 불가능하다”며 항복했다. 영국 최대 노조인 탄광 노조가 항복하자 다른 노조들도 강경 태도를 버리고 정부가 제시한 임금인상안을 수용했다. 

    탄광 노조와 벌인 결전에서 거둔 승리를 바탕으로 대처 총리는 임기 말까지 지속적으로 노동법을 개정해 노조의 특권을 배제하면서 노동개혁을 완성시켰다. 대처 정부는 치안과 질서 유지를 위해 법과 원칙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하기도 하면서, 이면에서는 타협과 협상을 하기도 했다. 사실 탄광 노조와 정면 대결하면서도 온건파 노조와 제휴하기도 했다. 대처 총리는 법과 원칙에 따른 노사관계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대처 정부의 노력에 힘입어 파업에 따른 손실이 1979년 2950만 일에서 1986년에 190만 일로 급감했다. 

    노조에 지나치게 강경하게 대응하는 대처 총리의 자세에 대해서 누군가든 충고를 하면, 그녀는 “대안이 없습니다(There Is No Alternative)”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로부터 그녀의 별명은 ‘TINA(There Is No Alternative)’가 됐다. 대처 총리의 유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노동조합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일 것이다. 그녀의 강력한 노동개혁으로 노동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하고, 임금이 정부의 간섭이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장 상황에 따라 변화됐고, 그 결과 고용은 오히려 증대됐다. 

    신자유주의와 대처리즘 

    대처 총리의 사상은 주로 자유시장경제와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였다. 그녀의 정치철학은 정부의 경제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했다. 이를 통해 경쟁을 촉진하고 경제성장을 도모하고자 했다. 대처는 많은 국영기업을 민영화해 경영 효율성을 높이고, 국가의 재정 부담을 줄였다. 경제활동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하고, 경제의 활력을 높였으며, 복지지출을 줄이고 개인의 자립을 촉진했다. 노동조합의 권한을 제한하고,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였다.

    대처 총리의 의지와 철학, 그리고 신자유주의 사조에 근거한 경제정책을 대처리즘이라고 한다. 대처리즘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기반하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 경제 안정화, 정부개혁, 노동개혁, 민영화, 금융개혁 그리고 규제 개혁이었다. 대처는 큰 정부, 높은 세금, 만연한 관료주의 등 비효율적인 것들을 타파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정부지출을 줄이고 법인세를 인하했다. 

    대처의 공공부문 개혁의 세 가지 과제는 예산을 삭감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정부 운용 방식을 개선해 강력한 정부를 만들고, 민영화를 추진해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이었다.

    노동당의 케인스주의와 시장 개입주의는 정부지출 확대, 재정적자 확대, 그리고 인플레 유발을 초래했다. 예산을 삭감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기 위해 대처 총리는 집권하자마자 다음 회계연도 예산을 40억 파운드 삭감하고, 이 삭감은 이후 모든 회계연도에도 적용된다고 발표했다. 구조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공무원을 1979년 73만5000명에서 1990년에 57만6000명으로 15만9000여 명을 줄였다. 집권 기간 중에 전체 국영기업의 75%에 해당하는 48개 공기업을 민영화했다. 작은 정부를 추진하려는 근거는 작은 정부가 기업 활동을 활성화하고 개인의 자유를 확대해 경제를 살린다는 것이었다.

    대처 총리는 작지만 강력한 정부를 실현하기 위해서 정부 운영 방식을 개선하고, 정부의 일하는 틀을 다시 짜도록 했다. 정부 운영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첫째 정부 기능과 운영 수단의 효율성 여부를 조사하고, 둘째 통제 중심의 예산 관리 방식에서 각 부처 장관이 소속 기관에 상당한 수준의 자율적 예산 운영권을 주도록 해 기업 운영과 같은 관리 방식을 도입하도록 했으며, 셋째 중앙정부가 관장하던 단순 서비스와 행정 서비스는 전문 기관에 맡기고, 넷째 청소나 자동차 면허 발급 등과 같은 특정 서비스는 민간에 맡겨 정부 예산을 절감하도록 했다.

    대처리즘의 가장 결정적 요소이자 전 세계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바로 공기업 민영화 조치였다. 영국에서 공기업 민영화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를 나타내는 표현 즉 “영국이 세계 최초의 민영화 수출 국가가 됐다”에서 읽을 수 있다. 대처 총리가 집권하기 전에는 ‘국유기업의 독점화 방지’나 ‘국유기업의 효율성 제고’ 같은 표현이 일상적이었다. 하지만 시대 상황에 잘 어울리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처음에는 비국유화(denationalization)로 했다가 민영화(privatization)로 최종 확정됐다. 민영화라는 말은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는데 대처 정부에서 사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대처 정부는 민영화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고객의 이익을 위해 정부 사업과 서비스를 최대한 경쟁시켜 효율성을 촉진하게 하고, 둘째 대중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가능한 한 국민의 주식 소유를 확산시키고, 셋째 정부가 매각하는 사업에서 최대의 가치를 얻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 세 가지 목표는 공기업의 효율화를 논의할 시절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민영화의 가장 큰 성과는 기업들이 정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경영해 이익을 높일 수 있었고, 노조와의 협상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민영화로 정부 독점에서 벗어나 민간부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했고, 신기술 도입과 경쟁 촉진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졌다. 민영화된 기업이 이윤 극대화를 실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고객에게 질 좋고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영국 공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는 경제와 금융 분야 최고의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민영화 과정에서 정치 논리는 완전히 배제하고 철저한 공개경쟁을 통해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게 했다. 민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1980년대에 아르헨티나·이탈리아·포르투갈·스웨덴·핀란드·인도네시아·폴란드·오스트리아·중국 등이 ‘민영화 기법’을 배우려고 했다. 그 결과 영국의 민영화는 전 세계로 수출됐다. 이리하여 대처는 ‘영국을 세계 최초의 민영화 수출 국가로 만든 통치자’로 기록됐다.

    대처 총리는 국가를 경영하는 데 확고한 원칙과 리더십을 강조하는 ‘국가경영(Statecraft)’이라는 자서전에서 자본주의가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유재산은 반드시 존재해야 하고, △사회가 법의 지배를 받아야 하며, △기업 친화적 문화가 있어야 하며, △근로의욕을 부추기는 조세제도와 최소한의 규제가 있어야 하며, △경쟁관계에 있는 다양한 국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처 총리의 리더십은 단기적이거나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장기적이고 분명한 국가 비전을 제시하고 강력하게 추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녀는 합의(consent)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확신(conviction)의 지도자였다.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그것이 영국을 위해서 옳은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끈질기고 확실하게 추진했다. 대처 총리는 집권 초기에 구조조정으로 실업자가 300만 명을 돌파하자 내각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음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많은 비난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가장 위대한 지도자적 자질은 단기적으로 정치적 이익에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처 총리는 영국이 2류 국가로 전락하기 직전에 영국 국민이 과거와는 다른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영국 국민이 새로운 제도와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영국의 역사를 새로 만든 지도자였다. 대처는 영국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연 지도자였다. 그녀 스스로도 “나는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처주의 혁명’은 영국의 경제 및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대처 총리의 명언(名言)들 

    위대한 지도자들은 자신의 정책을 두고 국민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촌철살인의 명언을 내뱉었다. 대처 총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각자는 자신이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잡화상 주인이었던 부친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한 대처는 선거 승리 후 “내가 선거에 이긴 것은 그리고 선거에 호소한 것은 모두 어릴 때 아버지께서 제게 다 가르쳐주신 것이다”라고 아버지에게 대단한 존경심을 표했다. 

    대처 총리는 정치인이 되길 결심한 동기를 “정부라는 괴물에 맞서 개인의 권리를 지키겠다는 강력하고 열정적 의지를 갖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나는 선과 악의 대립 때문에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결국 선이 승리할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설파했다. 동료 정치인들을 향해 “군중을 따라가지 말고 군중이 당신을 따르게 하라” “인기가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실천할 용기가 있으면 대중은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 “지도자란 자신이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알고,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외쳤다. 우중정치(愚衆政治)에 대해 대처는 “민주적이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수가 틀린 것을 옳게 만들 수는 없다”라고 하며 대중의 인기보다 원칙과 올바른 정책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처 총리는 영국 경제를 개혁하며 작은 정부, 자유시장경제, 재정 책임성을 강조했는바 이와 관련해 대처가 남긴 대표적 명언을 살펴보자. 정부가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고, 국민의 세금을 신중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하기 위해 “공공자금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납세자의 돈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설파했다. 경제발전과 부의 창출이 중요한 것이지, 부를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 그녀는 “부를 창출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돈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땅에서 벌어야 한다”라고 말해 대처 총리는 국민과 기업이 스스로 돈을 벌어야 잘살 수 있는 것이지, 정부의 지원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국가는 국민이 직접 벌어들이는 돈 외에는 다른 수입원이 없다”라고 말한 것은 정부의 모든 지출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므로 신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좌파 지식인들을 향해 대처 총리는 “좌파의 실수는 부를 창출해서 개인들에게 분배 또는 재분배하는 것이 국가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최고의 것만 믿고, 반공주의에 대해서는 최악의 것만 믿는 좌파 지식인들에 대해 거의 경외감이 느껴질 지경이다”라고 지적하며, 평등을 강조하는 좌파에 대해 “평등을 자유보다 앞세우는 사회는 결국 평등도 자유도 달성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자유를 첫째로 내세우는 사회는 보다 큰 자유와 보다 큰 평등을 달성할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대처는 “사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존재할 뿐입니다”라는 일반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했는데 이는 국민을 돌보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과 가족이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대처의 자유주의적 견해를 나타낸 명언이다. 



    에디터 추천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