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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허무와 절망 넘어선 ‘극기적 긍정’의 미학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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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세기 미국 문단에서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을 투영했다는 ‘모비딕’. 화자(話者)이자 주인공인 이스마엘은 떠오르는 국제도시 뉴베드퍼드를 지나 고래잡이의 발상지 낸터키트로 들어간다. 벼랑 끝까지 몰린 삶에서 벗어나고자 마침내 고래잡이배에 몸을 실은 이스마엘. 삶과 죽음, 세속과 천상, 광기와 이성은 어느새 무한의 바닷속으로 소용돌이친다.
‘모비딕’ 사냥의 출항지   뉴베드퍼드·낸터키트

미국 포경업의 발상지 낸터키트 항 전경.

작가의 삶으로서 허먼 멜빌(Herman Melville·1819~91)의 그것처럼 드라마틱한 경우가 또 있을까. 오늘날 그는 너새니얼 호손, 마크 트웨인과 더불어 19세기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지만, 1891년 세상을 떠날 당시 신문의 부음 기사에 이름이 오기(誤記)되어 나올 정도로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진 작가였다.

멜빌은 처녀작, ‘타이피’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행운 속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했으나 이후 10여 편의 소설을 써내는 동안 내내 내리막길을 걸어 급기야 소설을 출간해줄 출판사조차 구하지 못할 정도로 전락하는 쓰라림을 겪어야 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은 그의 나이 25세에서 35세에 이르는 불과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이다. 자신의 소설이 더 이상 독서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멜빌은 인생의 절정기인 30대 중반에 소설 쓰기를 그만두고 만다. 그 후 뉴욕의 세관에 취직해 20여 년을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지내다가 세상을 떴다.

그렇게 망각의 늪에 파묻혀 있다가 1920년대에 이르러 멜빌 문학은 극적으로 ‘재발견’된다. 그의 대표작 ‘모비딕’을 우연히 접한 몇몇 문인의 상찬에 힘입어 그에 대한 관심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그 관심은 새로운 예술 형식의 창조를 통해 전후의 환멸을 극복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감수성과 조응되면서 널리 확산됐다.

1921년 레이먼드 위버가 쓴 그의 첫 전기, ‘허먼 멜빌: 뱃사람 그리고 신비주의자’가 출판될 무렵 영미 문학계에서 멜빌과 모비딕에 대한 관심은 이미 붐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고조됐고, 그것은 이내 ‘19세기 미국이 낳은 가장 뛰어난 소설적 상상력’이라는 문학사적 재평가로 이어졌다. 소설가로서 멜빌의 이런 극적인 부활은 그가 사망한 후 30년 만에, 그가 소설 쓰기를 그만둔 시점으로 본다면 실로 6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도 드라마틱했다. 멜빌은 뉴욕의 유서 깊은 명문가 후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때 이른 죽음으로 그는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한 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찍부터 이런저런 일자리를 찾아 전전했다. 당시로서는 힘들고 위험해 누구나 기피하는 선원 생활에 뛰어든 것도 이런 절박한 상황 탓이었다.



‘모비딕’의 첫 장에서 화자 이스마엘은 실의와 좌절에 지친 나머지 그의 영혼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동짓달’ 같은 상황에서 권총으로 자결하는 대신 마지막 대안으로 고랫배를 타기로 작정했다고 적고 있다. 멜빌 또한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1840년 1월 초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고랫배에 승선, 장장 3년 10개월이 걸릴 고래잡이 여정을 떠난다.

이렇게 절박한 대안으로 선택한 여정이었으나 그것은 멜빌에게는 삶에 대한 안목을 키우고 그 지평을 넓힌, 그리하여 소설가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된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는 고래잡이 편력을 통해 낯선 이방의 문화를 호흡하며 감수성을 한층 예리하게 닦고, 그 낯선 세계와의 대비를 통해 자신이 떠나온 사회를 보다 투철하게 이해하는 비평안(眼)을 키울 수 있었다. 고래잡이 선원으로서의 태평양 편력은 멜빌에겐, 그의 소설적 분신인 이스마엘의 표현 그대로, ‘예일대학이요 하버드대학’이었던 셈이다.

‘모비딕’은 멜빌의 이와 같은 고래잡이 체험을 집약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설적 상상력으로 용해해 삶에 대한 원숙한 비전으로 빚어내는 뛰어난 기량을 과시한 작품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작가를 오랜 망각에서 구해내는 기폭제가 될 수 있었다. 멜빌은 기실 그 어느 때보다도 대작을 쓰고 있다는 자부심 속에서 모비딕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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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수 서울대 교수·미국문학 mshin@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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