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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京 베이징을 바꾼 자가 천하를 바꾼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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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 어디가 더 좋아?”

베이징이 고향인 친구 제임스가 물었다. 중국에선 베이징 시민인 것만으로도 상당한 특권이다. 주택, 교육, 취업 등의 형편을 고려하면 베이징 호구(戶口)의 가치가 100만 위안(약 1억7000만 원)에 달한다고 한다. 게다가 제임스는 영국 유학생이니 상당한 고위층 자제일 가능성도 높다. 훗날 제9세대 공산당 지도자가 될지도 모를 전도유망한 중국 청년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수준의 질문을 하다니.

“둘 다 각자의 장점이 있지만 난 베이징이 더 좋더라. 베이징은 유서 깊은 도시여서 가는 곳마다 역사와 고유의 문화가 있잖아. 상하이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만 할 뿐이고.”

제임스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러자,

“지금 나한테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 거니?”



아아, 그 거만한 웃음을 본 순간 절감했다. 이 녀석, 뼛속까지 베이징 사람이구나. 천하의 중심이자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 베이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구나. 만약 내가 상하이가 더 좋다고 했다면, 적어도 3박4일은 ‘정신교육’을 받을 뻔했다. “그 따위 천박한 도시가 뭐가 좋다고? 유구한 역사와 빛나는 문화를 가진 중국의 중심, 베이징의 진가를 모른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경산에서 굽어본 자금성의 전경.

베이징의 약칭은 ‘서울 경(京)’ 자다. 京은 원래 침수되지 않도록 인공으로 만든 언덕을 뜻한다. 의도적으로 만든 터전 위에 도시가 탄생했고, 정치의 중심 궁궐이 세워졌다. 이제 京은 도시 중에서도 최고의 도시, 수도(首都)를 뜻한다. 베이징을 京으로 약칭한 데서 ‘베이징은 수도다.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베이징 사람들의 자부심이 묻어난다.

京이 말해주듯 베이징은 인공적으로 건설된 도시다. 도시 중의 도시인 수도이며, 중국의 중심이다.

“이게 불상이야, 마징가 제트야?”

옹화궁 만복각(萬福閣)의 미륵불상은 너무나 컸다. 불상의 키가 18m. 지나치게 크다보니 흡사 마징가 제트처럼 보였고, 만복각은 마징가 제트 격납고 같았다.

그러나 이건 약과였다. 서태후의 별장이었던 이화원을 찾았다. 만수산 위의 불향각(佛香閣)에서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니 절로 호연지기가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 산과 호수는 모두 가짜다. 순전히 인간의 손으로 평지를 파서 여의도공원 면적의 10배(2.2㎢)에 달하는 곤명호를 만들었다. 파낸 흙은 쌓아올리니 높이 60m의 만수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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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화궁 만복각의 미륵불. 높이가 18m에 달한다.

대륙의 기상은 만리장성에서 절정을 이룬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 위로 만리장성이 쭉쭉 뻗어나간다. 거대한 용이 산 위에서 춤추는 듯하다. 그런데 이 높은 산으로 돌을 날라 와 하나하나 쌓아올렸다니! 내가 만리장성의 인부가 아님을 천지신명께 감사드렸다.

흔히 중국을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라고 한다. 땅은 넓고 물자는 풍부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인다(人多)’,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중국의 저력은 바로 사람, 많고도 많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수고 새로 만든다

베이징은 ‘사람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인공 도시다. 연암 박지원은 “(베이징) 도성이 바로 서자 천하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너스레가 아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유학자 박지원은 베이징에서 유교의 질서를 읽어냈다. 공자는 평생 주례(周禮)의 회복을 염원했고, 유교는 예(禮)가 실현되는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인 주례는 일종의 국정관리 매뉴얼이다. 6대 부처 산하 360개 관청의 인원과 직무를 명시했다. 오늘날의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등에 해당하는 각종 부처를 나누고 국가의 예산 운용, 산업·물류 등 국정 전반을 체계적으로 논한다. 또한 주례는 국가 운영과 인프라 구축을 강조한다. 주례 고공기(考工記)는 도성의 설계를 설명한다. 성벽을 둘러 성의 방위에 만전을 기하되, 원활한 물류 관리에도 차질이 없도록 동서남북 네 방향마다 세 개의 성문을 뚫고 각 문을 넓은 길로 연결했다. 도성 중심에는 종묘사직, 시장, 조정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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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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