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 김기정 연세대 교수·국제정치학

    입력2005-10-24 17: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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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경복궁 근정전엔 일장기가 걸렸다.

    [9월30일 주미대사관에 대한 국회 외교통상위 국정감사에서 재연된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한미 과거사 논란으로 번졌다. 최성 의원(열린우리당)이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이 미국민에게 여러 가지 오해와 서운함을 안겨준 데 대해 여당 의원으로서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며 질의를 시작하자 같은 당 김원웅 의원은 미국측의 반응을 이해한다면서도 “100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서 비롯된 한반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미국측의 역사적 책임의식이 결여돼 있다”고 주장한 것. 이에 대해 박계동 의원(한나라당)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이 조작한 역사를 갖고 미국이 (한반도의) 식민지화 과정에 악역을 했다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고 반박함으로써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존재 여부와 일본의 한반도 병탄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을 놓고 역사 논란이 제기됐다.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해줌으로써 한국 근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과연 존재했던 조약인가. 아니면 일본이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가공(架空)의 산물인가. 일제의 한반도 식민통치, 분단과 6·25전쟁, 냉전의 근본원인으로 간주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정체를 알아본다.]

    1905년7월27일, 미국 육군성(국방부의 전신) 장관인 윌리엄 태프트는 일본 도쿄를 방문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상과 장시간 회담을 했다. 1924년에야 그 내용과 실체가 알려진 이른바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이 회담의 산물이다. 도대체 밀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밀약과 관련해 어떤 점이 여전히 논쟁거리로 남아 있는가.

    우선, 1905년 7월의 동북아 국제정치 상황부터 살펴보자. 1904년 2월 발발한 러일전쟁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두 강대국이 벌인 일전이었다. 일본은 1905년 초, 난공불락의 요새로 알려진 러시아 점령하의 뤼순(旅順)을 함락시켰고, 3월에는 펑톈(奉天·지금의 선양)의 육전에서도 승리를 거뒀다. 그해 5월 동해상에서 당시 세계 최강이던 러시아의 발틱함대까지 전멸시킴으로써 마침내 전쟁의 승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러시아는 물론, 일본 또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바닥난 상황이었다. 일본으로서는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는 외교적 협상 구도를 미국을 통해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미국의 협조는 불가결했다. 우선 절실했던 것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권을 관련 열강으로부터 확인받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일본에 대해 지지의사를 표명한 나라가 미국이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그 배경에서 탄생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은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당시 미국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대해 일본이 어떤 공세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음을 확인한다는 점, 둘째 일본측의 일본-영국-미국 ‘비공식 동맹’ 제안에 대해 태프트는 미국이 의회의 승인 없이 ‘조약적 의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점, 셋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라는 일본의 의견을 미국이 인정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 회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비밀조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밀약’이라는 표현은 데넷의 글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韓-比 맞교환 가능성은 낮아

    데넷의 논문에는 회담 직후 태프트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전문이 실려 있는데, 전문에 나타난 회담 내용 가운데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 번째 사안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 문제와 관련해 가쓰라는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임을 밝혔다. 또한 그는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내세운 논리, 즉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국을 지배해야 한다는 논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다.

    당시 정황으로 미뤄볼 때 태프트는 ‘모종의 확실한 조치’가 보호조약 체결을 암시한다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태프트는 가쓰라의 ‘논리적 정당성’에 대해 충분히 인정하면서 “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 외국과 조약을 맺지 못하게 요구하는 범위에서 일본 군대로써 한국에 대해 종주권(suzerainty)을 확립하는 것은 전쟁의 필연적 결과이며, 극동의 항구적 평화에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 비밀협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논쟁점을 던졌다. 첫째 이 협상 내용에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필리핀을 상호 교환하는, 이른바 ‘외교적 주고받기 흥정(quid pro quo)’의 의미를 담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 그것이 단순히 양국 고위관료간 의견교환 수준인지, 아니면 양국간 장래의 행동을 상호 약속하는 ‘협정(agreement)’의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그 비밀협상이 한국-필리핀의 맞교환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약소국 문제를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 추세였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전문의 내용상으로는 ‘A 대신 B’라는 논리가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더욱이 필리핀에 있어 미국의 입지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지배권 승인 요구는 외교적 흥정 대상으로 적절하지 않았다. 적어도 미국의 인식은 그러했다.

    일본은 한국 지배권 독점에 대한 국제적 승인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반면, 미국은 1898년 이래 이미 필리핀을 군사적으로 점령한 상태에서 반군 토벌작전을 진행하고 있던 점이 달랐다. 루스벨트 자신도 회담 3개월 후 태프트의 방일(訪日)이 외교적 흥정이었다는 소문이 일본 신문에 실리자 상당히 불쾌해하면서 미국은 “영토보전을 위해 누구의 지원이나 보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가. 그것은 몇 가지 요인이 결합된 결과였다. 루스벨트의 인종주의적 문명관과 친일론적 인식도 중요한 원인이었고, 그것이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판단과 결합되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당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중국시장이었다. 이미 1899년,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은 중국 문호개방 원칙을 천명해놓은 터였다. 즉 군사적 개입이라는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면서 중국시장에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고 있었다.

    문호개방 정책에 대해 일본은 외교적 지지를 보내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문호개방 원칙에 대한 도전이라 인식했다. 따라서 루스벨트는 일본의 대(對)러시아 전쟁을 “미국의 게임을 일본이 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미국의 그러한 기대감은 러일전쟁 후 일본이 만주로 진출하고 러시아와 다시 손을 잡게 되면서 적대감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이 동아시아에서 미일 충돌의 원인(遠因)이 됐다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다.

    협정인가, 각서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양국간 법적 의무를 가진 협정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의견교환, 즉 각서로 볼 것인지는 다소 복잡한 문제다. 태프트 장관이 회담 직후 루스벨트에게 보낸 전문에는 이 회담의 성격을 ‘합의각서(agreed memorandum)’로 밝히고 있다.

    만약 그것이 단순히 각서라면 미국은 아무런 법적 의무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해왔다. 법적 의무란 미국이 1882년 조미수호조약에 명기한, 우호적 중재(good office)와 관련한 체약국 의무를 의미한다. 게다가 태프트는 특히 한국 문제에 관한 그의 의견 표명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서 어떠한 지시도 받은 바 없으며, (외교문제에 관한 한) 태프트 자신이 어떤 직권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면서도 그의 의견에 루스벨트 대통령이 동의할 것이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그 자신이 육군성 장관이라 외교 문제에 관한 그의 발언이 국무성 업무에 관여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우려도 이 전문에 드러나 있다.

    이 비밀협상을 단순히 각서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비밀에 부쳐졌다는 점, 회담 내용상의 표현, 그리고 구체적인 외교적 거래를 명시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논리의 근거로 내세운다.

    루스벨트는 밀약에 동의했다

    반면 이것이 실제로 협약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드러난 형식보다는 국제정치적 중대성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이 비밀협상의 실질적 의미, 즉 일본과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그 회담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으며, 협상 이후 미국의 한국 정책이 어떻게 수행됐는가 하는 관점에서 그 의미를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스벨트 자신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국제정치적 중요성과 미국의 외교정책적 영역에서 그 의미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한국 문제에 대한 태프트의 발언에 대해 루스벨트는 “우리의 입장이 더는 그처럼 정확하게 언급될 수 없다”고 하면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미국의 대한(對韓)정책에서 갖는 시기적 적절성과 중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루스벨트는 당시 미국 외교정책 결정과정의 핵심이었다. 1903년 여름 이후 미국 외교정책은 사실상 그가 주도했다. 그를 일컬어 ‘일인(一人) 국무성’이라고 불렀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다.

    태프트는 회담에서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으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태프트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 루스벨트는 한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의도가 무엇인지 태프트에게 미리 알려줬다. 그는 1905년 4월20일 태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다는 조항이 포함되는 한 나는 강화조약의 일본측 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한 바 있다. 일본의 한국 지배를 미국이 앞장서서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일본의 한국 지배에 대한 미국의 적극적 지지를 확인해준 것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루스벨트는 태프트가 보낸 전문을 읽고 난 즉시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당신이 가쓰라 백작과 나눈 대화는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타당하다. 당신이 말한 모든 말을 내가 추인한다고 가쓰라에게 언급해주길 바란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점은 그 밀약의 국제정치적 위상을 루스벨트 자신이 어떻게 인식했느냐 하는 문제다. 1905년 11월, 그의 친구이자 영국 외교관인 스프링 라이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나의 지시에 의해 태프트가 일본 수상 가쓰라와의 회담에서 재차 강조한 것은, 구체적으로 영일동맹에서 명기하고 있고, 또한 포츠머스(Portsmouth) 조약에서 인정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우리가 전적으로 승인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스벨트에게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일본의 한국 지배에 관한 국제적 승인이라는 점에서 제2차 영일동맹이나 포츠머스 조약과 동등한 중요성을 갖는 협정이었다. 영국과 러시아가 조약을 통해 그렇게 했듯, 루스벨트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했던 것이다. 적어도 미국의 핵심적 외교정책 결정자의 인식구도에는 그러한 등식이 성립돼 있었다.

    아울러 루스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 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스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 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도 뒷날까지 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줬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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