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웃고 울고에 거침이 없고 스킨스쿠버와 스키를 즐기며 카메라에 능하고 법문 대신 가요를 멋지게 불러댄다는 스님이다. 아프리카 춤도 곧잘 추고 몸 안에 신명과 정이 넘쳐나며 쇼팽과 바흐를 즐기고 선화(禪畵)를 하고 시를 쓰고 각(刻)을 하는 예술가 스님이다. 세상 속박을 다 벗었다고 소문난, 무장무애 자유로운 그에게 삶의 비의를 듣고 싶었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허전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옳을지 한 말씀 청하고 싶었다.
수안은 대긍정의 스님이었다. 대긍정이니 무장무애니 따위가 되레 거추장스러울 만큼 그는 걸림 없이 말하고 행동했다. 통도사에 내려간 우리 일행을 스님은 일단 근처 식당으로 데려갔다. 26년째 절 아래 마을에 살면서 축서암 살림을 돌본다는 유니크한 미(美)를 지닌 방림보살과, 스님이 요즘 빠져 있는 다화(茶畵·차를 마실 때 차 자리에 거는 그림)를 전시할 인사동 윤갤러리 주인과, 스님의 그림에 반해 죽는다는 몇몇 팬이 함께하는 자리였다. 술도 나오고 고기도 나왔다. 소주잔을 높이 들고 수안스님이 건배를 제안했다.
“자, 내가 먹고! 할 테니 여러분은 죽자, 하세요!” ‘먹고! 죽자!’가 좁은 방에 메아리치고 우리는 통쾌하게 웃어제치고 황홀하게 떠들었다.
‘먹고! 죽자!’를 외치는 스님의 얼굴은 장난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행복감에 겨운 표정,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이 이 세상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건 볼이 볼그족족하고 웃느라고 실눈이 된 대여섯 살 천진난만한 동자의 얼굴인데 다름 아닌 수안스님이 그려놓은 선화 속의 동자상 얼굴 그대로였다.
수안의 그림에 그토록 자주 등장하는 동자상이 자화상이라는 것을 나는 스님을 뵌 지 한 시간 만에 단박에 탐색해버렸다. 그 동자는 대개 3000년 만에 한 번 핀다는 우담바라를 만지고 있는데 우담바라를 만지는 표정이야말로 ‘바로 저래야 한다’ 싶게 따스하고 자족적인, 그야말로 ‘환희심’ 그 자체였다.
그는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시도 쓰고 산문도 쓴다. ‘참 좋다, 정말 좋구나!’, 싱겁지만 이게 그가 쓴 에세이집의 제목이다. 처음 만났을 때 수안은 그 책의 속표지에다 이렇게 썼다. “춘유백화(春有百花) 추유월(秋有月) 하유량풍(夏有凉風) 동유설(冬有雪)!”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봄에는 백화가 있고 가을에는 달이 있고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이 있고 겨울에는 눈이 있다! 얼마나 좋노? 참 좋제?!” 그리고 다섯 살 난 개구쟁이같이 근심 없이 웃었다. “사람들은 지금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자꾸 없는 것만 찾아대그등. 있는 거를 봐야제. 없는 거를 찾아서 머 하노? 그러다 찾느라고 볼일 다 보긋다!” 경남 사투리의 억양과 어휘가 이렇게 함축적인 울림을 가졌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는 중인데 스님이 갑자기 악동같이 씩 웃는다. “어떻노? 내 아구펀치가 괜찮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