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된 실패와 좌절
정확하게 말하자면 체임벌린 총리는 이미 총리직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이틀 전인 5월7일, 체임벌린은 나치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을 막지 못한 데 책임을 지고 보수당수 자리에서 물러났다. 내각책임제인 영국에서는 총리가 임기 중 물러나면 새로운 여당 당수가 자동으로 총리직을 승계한다. 선거 없이 총리가 교체되는 것이다.
영국은 1939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독일과 협상을 벌여 전면전만은 피하자는 것이 체임벌린 내각의 전략이었다. 그러나 협상의 결과는 대책 없는 양보 또 양보뿐이었다. 히틀러는 협상의 대가로 유럽의 국가들을 하나씩 요구했고,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오스트리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베네룩스 3국, 그리고 마침내 스칸디나비아 반도마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러시아는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바다 건너 미국은 물자는 지원해도 참전은 어렵다며 한발 물러서 있었다. 유일한 동맹국 프랑스마저 굴욕적인 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영국은 독일의 속국이 되느냐 아니면 맞서 싸우느냐를 선택해야 했다. 비상시국을 맞아 여당인 보수당과 야당인 노동당은 여야를 막론한 전시 내각을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전시 내각을 이끌 총리, 즉 보수당수가 공석인 상황. 5월9일 회동은 새 총리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체임벌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할리팩스 외무장관께서 맡아주시겠소?” 좌중의 시선이 할리팩스에게 쏠렸다. 할리팩스는 1938년부터 외무장관을 맡아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을 직접 만나 협상을 벌여온,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명망 높은 귀족이자 상원의원으로 보수당 내의 신임도 두터웠다. 할리팩스는 머뭇거렸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할리팩스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상원의원인 제가 총리를 맡는 것은 관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뜻을 알기 위해서는 영국의 독특한 양원제를 이해해야 한다. 영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실제적인 권력은 하원에 집중되어 있다. 상원은 작위를 가진 귀족들로 구성된다. 즉 영국 귀족의 장자는 아버지가 타계하면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고 자동으로 상원의원이 되는 것이다. 상원의원은 명예직일 뿐, 실제 정치에는 관여할 수 없다. 이 같은 역사적 관행을 들어 상원의원인 할리팩스가 총리직을 거절한 것이다.
그때 말없이 앉아 있던 처칠 해군장관이 불쑥 입을 열었다. “외무장관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 역시 상원의원이 총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 역시 경력은 할리팩스 못지않게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는 30대이던 1905년에 입각한 이래 내무장관, 해군장관, 재무장관 등 내각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문제는 그 경력의 대부분이 실패로 끝났다는 데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해군장관이던 처칠은 다르다넬스 작전을 의욕적으로 추진하다 20여 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작전 수행에 실패했고, 전후(戰後) 재무장관으로 임명됐을 때는 무리하게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금본위제도를 환원시켜서 영국에 1929년 대공황이라는 악몽을 떠안겼다.
처칠은 보수당원으로 하원에 입성했다가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1924년 다시 보수당에 복귀했다. 이 때문에 보수당원들은 처칠을 배신자로 낙인찍은 지 오래였다. 결정적으로 처칠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자기중심적 스타일이라 토론과 합의를 중시하는 영국식 의회민주주의에 영 적응하지 못했다. 총리인 체임벌린조차 “천국의 즐거움을 다 주어도 처칠과 같은 내각에 있고 싶지는 않다”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이렇게 보수당 내에 적(敵)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66세의 처칠이 10년 만에 다시 입각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처칠은 이미 1934년에 나치스의 공군기가 런던을 폭격할 가능성이 있다며 영국 공군 전력의 강화를 주장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 전쟁이 한 세대 전의 제1차 세계대전 못지않게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보수당 내각은 부랴부랴 처칠을 불러들여 해군장관을 맡겼다.
“우리의 목표는 오직 승리”
아무튼 1940년 5월9일 회동에서 처칠이 자신의 말에 담은 뜻은 분명했다. 그 자신이 총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체임벌린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영국 의회의 관례에 따라 체임벌린은 국왕 조지 6세에게 처칠의 총리 임명을 청원했다. 조지 6세 역시 체임벌린 못지않게 처칠을 싫어했다. 조지 6세는 ‘사랑을 위해 왕위를 버린’ 윈저공 에드워드 8세의 동생으로, 에드워드 8세의 양위에 의해 1936년 왕이 된 인물이다. 당시 볼드윈 총리를 비롯한 전 내각이 조지 6세의 즉위를 찬성했지만, 오직 처칠만이 끝까지 반대했다. 양위가 결정된 후에도 처칠은 에드워드 8세의 양위 연설문 작성을 돕는 등, 물러나는 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러니 조지 6세와 왕비 엘리자베스가 처칠을 미워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조지 6세에게 신임 총리 임명 청원을 물리칠 권한은 없었다. 1940년 5월10일, 윈스턴 처칠은 전시(戰時) 영국 내각의 수장이 되었다. 총리가 된 후, 처칠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준 체임벌린에게 감사 편지 쓰기였다. 그는 마음속 깊이 총리가 되기를 원했고, 영국이 처한 난관을 뚫고 나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총리가 된 후 처칠은 한 측근에게 “진심으로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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