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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사랑한 사군자 칼 삿됨을 물리치고 자신을 닦다

낙죽장도장 한상봉

선비가 사랑한 사군자 칼 삿됨을 물리치고 자신을 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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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가 사랑한 사군자 칼 삿됨을 물리치고 자신을 닦다
아버지 한병문 장인의 집념

화려함보다 소박함을 더 뛰어난 덕목으로 여긴 조선의 선비가 스스로 경책하듯 차고 다니던 낙죽장도는 예뻐서 인기 있었던 은장도와 달리 그 맥이 쉽게 끊어져버렸다. 어쩌면 선비 스스로 만들어온 것이기에, 선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오자 함께 끊어졌을 것이다. 전라남도 곡성의 한씨 가문에서 낙죽장도를 계속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윗대 어른 한기동(韓基東·1873~1959) 덕택이다. 한기동은 한상봉 장인의 부친 한병문(韓炳文·74)의 재종조부로, 한병문 장인은 열세 살에 훈장이기도 한 한기동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글을 배웠다.

“한기동 할아버지는 거문고와 장구도 만들 만큼 솜씨가 뛰어났다 합니다. 또 한문을 잘하셨기 때문에 약방문을 써줄 수 있어서 ‘약국할아버지’로도 불렸고요. 아버지는 이 할아버지 댁에서 글을 배우며 낙죽장도 만드는 기술도 배우신 거지요.”

한기동이 처음부터 낙죽 기술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한기동 집안과 사돈관계였던 이교호 씨가 낙죽장도를 만들었는데, 워낙 공예에 관심이 많았던 한기동은 이씨에게 이 기술을 배우고자 했다. 그런데 이씨는 한씨네가 살던 목사동면 공북리에서 좀 떨어진 신전리에 살고 있어서, 이씨를 공북리로 초빙하기에 이른다.

“한기동 할아버지가 머슴을 여럿 둔 부농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교호 어른을 공북리로 모셔와 생계를 보장해주면서 기술을 배운 거랍니다.”



기술을 배운 한기동은 한걸음 나아가 제자와 후손에게도 이 기술을 전해주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한기동은 그 시대 보기 드문, 의식 있는 선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이 기술을 성실하게 익힌 제자는 많지 않았다. 수제자가 병에 걸려 죽고 친손자들은 꾀를 피웠지만, 한병문은 집안 할아버지가 어려워 낙죽장도 만드는 일을 거들면서 자연스레 기술을 배웠다. 하지만 9년 뒤 할아버지 댁을 나오면서 한병문은 낙죽장도 만드는 일도 그만두게 된다. 돈도 안 되고 찾는 이도 없는 그 일을 특별히 해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한병문이 20년도 더 지난 뒤 다시 낙죽장도를 시작하게 된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한기동 어른 문하에서 함께 수학했던 이동규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일본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하다 일본에 정착하게 되면서 어느 날 동경 고도(古刀)박물관에서 한기동 어른의 낙죽장도를 발견했답니다. 전남 곡성산(産)이라고 돼 있었다니 한기동 할아버지 것이 확실하지요.”

이동규 씨는 글만 배우고 낙죽장도는 배우지 못했지만, 스승의 작품을 익히 봐와서 박물관의 낙죽장도를 보자마자 단박에 스승의 솜씨임을 알아봤다. 미처 몰랐던 낙죽장도의 가치에 놀란 이동규 씨는 고향에 돌아와 낙죽장도를 찾았으나 그 기술이 단절된 것을 알고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농사일을 그만두고 낙죽장도를 다시 만들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후 낙죽장도에 대한 아버지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편찮으신 몸으로 대나무를 어떻게 손질했느냐, 저의 낙 놓는 자세가 좋으니 어쩌니 챙기실 정도입니다.”

문화계 인사도 몰랐던 낙죽장도

선비가 사랑한 사군자 칼 삿됨을 물리치고 자신을 닦다

낙죽장도 재료가 되는 대나무는 산비탈같이 물이 많지 않은 땅에 사는 2~3년생 분죽이다. 유난히 꼿꼿해 말리면 잘 터진다.(위) 사골은 낙죽장도의 아래위를 막는 막새와 고리(메뚜기)를 만드는 데 쓴다.(아래)

지금도 일반인은 낙죽장도를 잘 모르지만 예전에는 더했던 모양이다. 낙죽장도가 처음 세상에 소개된 것은 1980년대 중반, KBS TV의 ‘전국일주’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텔레비전을 통해 한병문의 낙죽장도가 알려지자 곡성군에서는 그를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려고 나섰는데, 전남 문화재 전문위원 한 사람이 반대하고 나섰다.

“자신은 전라도의 모든 문화재를 알고 있는데, 이 낙죽장도라는 것은 처음 봤다면서 한병문이라는 사람이 고증도 없이 단지 ‘고풍스럽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며 반론을 제기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증을 위해 한동안 무진 애를 쓰셨지요.”

옛 문헌을 찾으러 다니는 한병문 장인에게 누군가 인사동과 청계천에 고서적이 많다고 해 서울까지 올라와 낙죽장도 사진을 보여주며 찾던 중에 한 서점 주인이 ‘그런 것은 본 적 없지만 칼이 수록된 책이 있다’며 책 한권을 건네주었다. 바로 ‘통인미술’이라는 도록이었다. 이 도록을 넘기다가 한병문은 낙죽장도를 발견했고, 이번에는 도록 첫머리에 글을 쓴 예용해 선생을 찾으러 나섰다.

“우리 문화재를 발굴하고 가치를 밝혀 높이는 데 애쓰시던 예 선생님은 칼을 수집하셨는데, 그중에서도 낙죽장도를 무척 아껴서 낙죽장도 만드는 곳을 찾으려고 전라도 지역을 조사하면서도 끝내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텔레비전에서 낙죽장도를 보고 기뻐하던 차에 아버지가 찾아가자 반가워하셨죠.”

낙죽장도가 고증이 안 돼서 문화재로 지정되지 못했다는 말을 들은 예 선생은 “문헌자료는 없지만 작품으로 고증할 수 있다”면서 지방무형문화재가 아니라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전승공예대전에 출품을 권유했다.

“그때 예 선생님은 낙죽장도의 뿌리가 백제 시대 비수(匕首)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몸에 지닐 수 있는 비수는 장식 없는 칼인데, 이 전통이 조선시대 선비 문화에서 낙죽장도로 꽃피었는지도 모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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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icecreamhan@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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