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살상의 밑그림을 붙여 작업 중인 부조.
“이모 소개로 두 외삼촌과 형이 석물공장에 나가게 됐고, 외삼촌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저도 나중에 서울로 왔습니다. 형은 광주에서 석물 일을 배우다 왔지만, 저는 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올라왔지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그의 나이 열네 살. 그러나 곧 광주로 내려가 양복점에서 두세 달, 가구점에서 반년 정도 일을 했다. 솜씨가 좋았으니 훌륭한 소목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주인 아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목수 일은 재미도 있고, 주인도 좋아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검정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개인교습까지 받게 해줬는데 밤마다 주인 아들과 어울리는 패거리가 드나들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가구점에서 익힌 결구법(나무를 끼워 연결하는 법)이 나중에 돌 일 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돌 작업에도 목공의 결구법과 비슷한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양복점에서 배운 바느질도 도움이 됐어요. 조각 역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정으로 일일이 쪼아 다듬거든요. 지금 보면 모든 일이 다 석공이 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처럼 오묘한 것이니, 주인 아들의 행패도 나무랄 수가 없다. 그의 인생 여정은 마치 훌륭한 석장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짜놓은 각본처럼 보일 정도다. 열다섯에 다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돌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한창 짓기 시작한 성북동의 고급 주택과 남산 어린이회관, 연세대 정문 일을 했다. 그리고 2년도 채 못 돼 문화재 일을 주로 하던 김부관 선생 작업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런 중요한 만남에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나 물으니, 그저 일자리가 있어서 ‘일하러 간 것’이라는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김 선생님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복원하신 분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마침 불국사 복원 작업이 있었어요.”
비록 그는 현장에서 일하지는 못했지만 불국사에 들어가는 돌을 준비하고 다듬는 치석(治石) 일을 서울 창동 작업장에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조각의 명수이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인 김진영 선생 밑으로 들어간다. 이번에야말로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 법한데 역시 “그쪽에 일손이 필요하다 해서 일하러 간 것”이라고 한다. 여느 장인처럼 일자리를 찾아간 것뿐인데 처음엔 석조건물이나 다리 등 구조물 복원에 뛰어난 장인을 만나 치석하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엔 조각 명장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 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을 많이 맡는 당대 최고의 장인이니, 정말 짜놓은 각본 같지 않은가.
“김 선생님은 돌조각으로는 최고였지요. 4·19탑을 만드셨고 전통 비(碑), 용이나 사자 같은 조각을 잘하셨습니다. 조선시대 말 경복궁의 석조물을 만든 이세욱을 잇는 김맹주의 제자로 정통의 기술을 이어받으셨지요.”
이렇게 화려한 계보를 가진 김진영 선생은 당시 망우리에서 신진석재를 이끌고 있는 사장이기도 해서 어린 석공에게 일일이 기술을 전수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선생은 조각 잘하기로 이름난 권경섭이라는 이를 경주에서 초빙해온 게 아닌가.
“솜씨 좋은 석수를 특별 채용한 것이었지요. 김 선생님 밑에서 10년 있는 동안 권 선생님과 5, 6년을 보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권 선생님은 특히 모형을 기막히게 잘 만드셨습니다.”

파편 몇 조각만 남은 원종사비를 탁본에 의거해 검은색 돌인 오석(烏石)에 재현한다.
“기술은 권 선생님한테 배웠고 세상을 보는 눈이랄까요, 제 눈을 크게 틔워주신 분은 김 선생님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매우 지적인 분으로 교수나 실내장식가들과 자주 어울리셨는데, 그런 자리에 어린 저를 잘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문화나 불교미술 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지요.”
또 김 선생은 스승으로서 제자를 격려할 줄 알고 사장으로서 사람을 잘 관리하는 ‘노하우’를 가진 이였다. 그는 김진영 선생 아래서 많은 것을 배운 덕에 고작 스물셋 나이에 쉰 명이 넘는 인부를 관리하는 공장장이 되었을 때도 무리 없이 해나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