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연쇄살인사건 막 내렸다
이춘재 자백은 후배 프로파일러들의 개가
시그너처 없더라도 다음 범행서 더 많이 나타나
왜소한 체격의 정남규, 서늘한 기운 흘러
유영철, 판 곳 또 팔까봐 시신 묻은 곳 표시
경제 문제가 분노 촉발, 고립감이 연쇄살인범 양산
[지호영 기자]
18년간 범죄자 1000명 면담
9월 20일 반기수 경기남부지방경찰청 2부장이 경기 수원시 경찰청사에서 33년 만에 유력한 용의자가 확인된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왼쪽). 화성연쇄살인사건 유력한 범인 이춘재의 고교 졸업 앨범 속 사진. [동아DB]
권 교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정중하고 완곡한 말투에도 이제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했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듯한 의중이 확실히 느껴졌다.
- 왜 인터뷰를 자제하겠다는 건가.
“프로파일러는 수사관, 과학수사대(CSI) 요원과 함께 사건 현장에 출동한 뒤 그 ‘현장’에서 범인이 남긴 흔적과 범행 특성, 심리, 유사 사례 분석을 토대로 범인에 대해 프로파일링을 한다. 왜 범인이 피해자를 뒤에서 공격했는지, 어째서 족적이 특정 방향으로 향하는지 하나하나 의미를 파헤쳐가며 사건이 벌어진 이유를 찾는다. 기자들이 자꾸 전화를 걸어와 ‘이춘재 심리가 뭐냐’고 묻는데, 전직 프로파일러인 내가 단편적인 사안만 가지고 이춘재에 대한 견해를 밝히는 건 옳지 않다. 자칫 범죄자 정보를 왜곡할 수 있어서다. 이춘재 프로파일링에 대해서는 후배 프로파일러들이 언론 인터뷰에 응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경찰이 조사 중인 사건이 아닌가.”
- 이춘재의 자백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은 프로파일러들이었다.
“후배 프로파일러들이 이룬 개가(凱歌)다. 2005년 선발한 1기 프로파일러가 현장에 나와 수사 경험을 쌓은 지도 14년이나 됐다. 이춘재가 여성 프로파일러에게 ‘손 예쁘다, 손 좀 잡아도 되냐’고 했는데, 그 후배가 2009년 강호순 면담 당시 막내 프로파일러였다. 이번 이춘재 면담조사에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얘기를 듣고 후배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이춘재는 9월 18일부터 여성 프로파일러 3명이 포함된 진술분석팀의 조사를 받아왔다. ‘손 좀 잡아도 되냐’고 발언한 이춘재를 향해 당시 여성 프로파일러는 “조사가 마무리되면 악수나 하자”고 답했다고 한다. 기지를 발휘해 이춘재의 요구를 완곡히 거절하면서 공적인 인사로 입을 열 여지를 준 것이다. 앞선 조사에서 이춘재는 대체로 답을 하지 않으면서 화성연쇄살인사건과의 연관성을 부인해왔다.
시그너처는 범죄 관련 없이 계속 반복돼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경기 화성 일대에서 10명의 여성이 살해된 사건을 일컫는다. 권 교수는 1989년 경찰이 된 뒤 형사, CSI를 거쳐 2000년 국내 최초 프로파일러로 임명되면서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을 처음 도입했다. 2006년 11월 경찰청 사상 처음으로 프로파일링 조직인 범죄행동분석팀이 신설됐을 때 첫 팀장을 맡기도 했다.- 경찰이 화성 8차 살인사건을 재조사하고 있다.
“33년 만에 경찰이 대표적인 미제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를 검거하고 자백까지 받아냈다. 공소 여부를 떠나 국민 전체를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일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렇더라도 경찰로서는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경찰은 8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돼 옥살이를 한 윤모(52)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질 경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밝혀내야 한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핵심이다. 과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 이춘재가 8차 사건의 범인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시그너처는 범인의 독특한 수법이나 흔적을 가리키는데, 이춘재의 시그니처는 ‘스타킹 매듭’이다. 화성연쇄살인사건에서 이춘재의 시그너처가 보이지 않은 건 8차 사건뿐이다. 그렇다고 이춘재가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은 잘못된 해석이다. 설령 시그너처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다음 범행에서 더 많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9차, 10차 사건을 보면 매듭이 더 많이 나타난다. 범인이 범행을 계속 하다 보면 범행 때 하는 행위를 뜻하는 MO(범행방식·Modus Operandi)는 바뀌어도 시그너처는 바뀌지 않는다. 욕구를 분출하는 범인만의 습관이기 때문에 범죄와 관련 없이 계속 반복돼 나타난다.”
프로파일링은 심령술이 아니다
- 프로파일러 하면 분석하는 이미지가 떠오른다.“드라마나 영화는 종종 프로파일러를 범죄 현장을 보지도 않고 범인을 맞히는 천재 심리학자 같은 이미지로 다룬다. 사람들은 프로파일러가 화려한 화술과 언변, 수사(修辭)를 총동원해 범죄자 안에 내재한 악을 불러내 범행 자백을 받아낸다고 오해한다. 프로파일링은 심령술이 아니다. 범인의 관점에서 보는 데서 출발한다. 답은 범죄자와 범죄 현장에 있다.”
- 범인의 시각에서 프로파일링을 한다는 뜻인가.
“범죄자 입장이 돼 그들처럼 생각한다. 이를 ‘그 화(化)’라고 하는데, 괴물을 잡기 위한 유일한 방법일 때가 많았다. 예컨대 강호순 사건 수사 때 피해자들이 실종된 시간과 같은 시간대에 버스 정류장 두 곳에 나가봤다. 탐문 전에 기상청 홈페이지에서 실종 당일의 강수량, 기온, 일몰과 일출 시각 등도 전부 확인했다. 추정 실종 시간 전후에 해당하는 몇 시간을 그 자리에 서서 주위를 살폈다. 현장에서 두 가지를 깨달았다.”
- 그게 뭔가.
“버스 정류장에서 실종자들이 발생한 날은 체감온도가 몹시 낮은 날이었고, 교외 지역이라 버스 배차 간격이 매우 길었다. 지나가던 동네 트럭 운전사가 내게 ‘추운데 차 타라, 큰길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말을 걸어올 정도였다. 현장에 직접 오기 전까지는 왜 공장지대 사람들이 면식이 없는 사람의 차를 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장에 나오니 이해가 됐다. 범인 강호순은 피해자들에게 호의 동승을 제안하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이었다.”
- 프로파일링은 과학수사와 다른가.
“CSI가 족적 자체를 감식한다면, 우리는 족적의 방향을 본다. 범죄자 행동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사건 현장을 정확하게 재구성해야 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혈흔 분석이 고도화하면서 요즘은 혈흔 지름만 재도 각도를 구할 수 있다. 그것을 실로 연결하면 그 피가 날아온 원지점이 나온다. 프로파일러가 혈흔 각도를 구하는 법까지 알 필요는 없지만, 범죄 현장의 혈흔 패턴을 통해 사건 현장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유영철, 순전히 살인이 목적
- 프로파일링과 과학수사를 어떻게 연결하나.“유영철 범행 가운데 노인 살해가 4건인데 그중 네 번째 사건은 피의자 상처 부위를 분석하니 피해자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으로 나온다. 집 안에 현금이 있었지만 그대로 두고 피해자들의 이마, 뒤통수, 관자놀이, 광대 부위 등을 흉기가 아닌 둔기로 가격했다면, 순전히 살인을 목적으로 들어왔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정남규가 주택을 침입해 피해자를 살인한 사건 현장에서 발자국은 모두 작은방으로 향한다. 큰방에는 주로 남자가 있고 작은방에 여성이나 아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를 보고 공격성은 굉장히 높지만 대범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 8년간의 CSI 업무 경험이 큰 도움이 됐겠다.
“CSI 업무를 익혀두면 수사 역할을 분담하는 ‘눈’이 생긴다. 혈흔형태분석학회나 DNA 수사 관계자 모임에 참석해 이들과 교류하며 누구에게 수사 지원을 요청하면 좋을지 평소 생각해뒀다. 사건 터지면 ‘부산 지역 혈흔 분석 전문가, 강원 지역 지문 분석 전문가, 경기 지역 DNA 분석 전문가를 수사팀에 합류시켜 달라’고 한 뒤 이들과 함께 사건 현장으로 달려갔다. CSI와의 공조 덕분에 누구보다 빠르게 프로파일링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CSI 경험을 10년가량 쌓은 뒤 프로파일링 업무를 맡는다. 반면 우리나라는 프로파일러를 선발한 후 현장에 투입해 CSI 경험을 쌓게 하는 탓에 프로파일러가 ‘사건 현장 재구성’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 왜 우리나라는 2000년대 들어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을 도입했나.
“1990년대 중반에 ‘막가파’ ‘지존파’ 같은 무(無)동기나 이상(異狀)동기를 가진 불특정 다수를 향한 연쇄·연속 살인범죄가 등장했다. 그때 우리 사회에 ‘왜 범인이 이런 범행을 저질렀는가’에 대한 고민이 생겨나며 범죄 심리 분석을 토대로 한 수사 방향 설정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대비 차원에서 2000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과 과학수사계에 범죄행동분석팀이 만들어졌다. 내가 범죄행동분석팀 첫 담당자였는데, 팀원이 없는 1인 프로파일러였다.”
범죄자 127명 인터뷰
- 초창기엔 막막했겠다.“일선 형사들은 범인상을 추정해 용의자 집단을 좁힐 수 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했다. 현장의 불신을 불식하려면 하루빨리 프로파일링의 효용성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의 심리를 분석하려면 범죄자에게 물어보는 것이 정답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 강덕지 전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범죄심리과장과 함근수 전 국과수 범죄심리실장이 국과수 업무와 범죄 심리의 접점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궁여지책으로 이들과 함께 2000년 8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전국 경찰서를 돌며 송치 전 피의자 127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때 인터뷰가 훗날 연쇄살인범을 본격 수사하는 데 중요한 토대가 됐다.”
- 범죄자의 마음의 문을 여는 전략이 있나.
“심리적 공감대를 쌓으며 ‘라포르(Rapport·정서적 친밀감과 신뢰를 갖는 것)’ 를 형성하려 노력했다. 신뢰감을 주려고 노력했다. 양복의 보수적인 이미지가 범죄자들에게 신뢰 이미지를 주는 듯해 최고기온 30도 넘는 초여름 날씨에도 면담 때 일부러 검은 양복을 입고 가서 ‘나는 사건을 수사하러 온 게 아니고 이 사건이 왜 벌어졌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서 왔다’고 면담 목적을 설명했다. 가장 중요한 건 프로파일러가 범죄자의 본심을 간파한 뒤 그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게끔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 범죄자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게 한다?
“2016년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 성병대는 서울 강북구 오패산 터널 인근에서 사제 총기를 경찰을 향해 난사했고, 이 과정에서 경찰 한 명이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총기는 성병대가 직접 제작했는데, 화약에 불을 붙여 탄환을 발사하는 화승총 방식이었다. 이 점에 주목해 그와 면담 때 ‘총에 화약을 얼마나 넣어야 총알 두 발이 한꺼번에 발사되느냐’고 물었더니,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안 하겠다’며 버티던 성병대가 화들짝 놀라며 총 제작 과정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총 제작법이었다.”
- 범죄자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해야겠다.
“키, 몸무게, 병력, 부모의 직업과 소득수준, 말투와 옷차림 같은 신상 정보 파악은 물론 범행이 이뤄진 날씨나 공간, 시간, 범행 도구까지 범죄자의 모든 디테일을 파악한다. 정남규는 경찰에 검거되기 전 이미 5년 4개월을 교도소에서 지낸 전력이 있다. 소심하고 공격적인데 비사교적인 정남규가 교도소에서 생면부지의 범죄자들과 한방을 쓰면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면담 때 ‘교도소 생활이 고통스러웠다’며 일부러 교도소를 언급했다. 차가운 태도를 보이던 정남규가 ‘수감자들에게 정말 많이 맞았다’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그 뒤 범행을 모두 털어놓았다.”
서늘한 기운 흐르던 정남규
연쇄살인범 유영철은 살해 후 시신을 훼손하는 과정이 잔혹했고, 정남규는 상대방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즐겼다. 강호순은 성범죄 과정에서 쾌락을 느꼈다(왼쪽부터). [동아DB]
“정남규였다. 정남규 면담조사 때 내가 그자 바로 옆에 앉았는데, 서늘한 기운이 흘렀다. 대중은 유영철이나 강호순은 잘 알아도 정남규는 잘 모른다. 키 167㎝의 왜소한 체격을 가진 그는 아무 죄책감 없이 여성 10명과 남자아이 3명을 죽인 연쇄살인범이다. 정남규에게 좌우 대칭으로 된 잉크 얼굴 그림들을 보여주며 어떻게 보이는지 물었더니, 주로 ‘폭발·피·연기’ 같은 이미지가 보인다고 답했다. 한 그림을 보고는 ‘크고 거대한, 무시무시한 괴물이 죽이고 해치려는 모습’이라고 했다.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라는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결국 2009년 교도소에서 자살했다.”
- 연쇄살인범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나.
“영화나 소설에선 연쇄살인범을 자신의 살인 행위를 반추하고 기억하는 자로 그린다. 유영철을 면담한 뒤 연쇄살인범에게 낭만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추억을 떠올리려고 표시를 해둔 거냐’ 물었더니, ‘내일도 시체를 묻어야 하고, 그다음 날에도 묻어야 하는데 판 곳을 또 파면 안 되니까 그랬다’고 태연히 말하더라. 이게 바로 괴물이구나 싶었다.”
고립된 사람들이 범죄 저질러
- 왜 똑같은 환경에서 누군가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는 정상인으로 남는가.“1997년 IMF 외환위기 사태 이후 발생한 경제적 몰락과 급격한 계층 간 격차가 누군가에게는 분노와 증오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요인은 고립감이다. 연쇄살인범들은 자신이 사회와 단절돼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적 문제로 촉발된 분노와 증오가 사회와의 단절이라는 부수적인 요소와 결합하면서 면식 없는 사람을 죽이게 만들고, 그럼에도 연쇄살인범 자신 스스로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망상에 빠지게 한다.”
권 교수는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고립된 사람들이 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여러 연쇄살인범을 통해 확인됐다”며 “고립돼 있는 사람들을 찾아 이들이 사회에서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 ‘대한민국 프로파일러 1호’로 산 시간은 어땠나.
“사건이 일어나면 새벽에 뛰쳐나가는 일이 허다했다. 내 시간을 정하는 건 범죄자들이었다. 그들은 면담 때 상상도 못할 잔혹한 행동을 이야기하며 화사하게 웃는다. 그런 걸 보고도 꾹 참고 냉담함을 유지한 채 이야기를 이끌어내야 하는 게 힘들었다. 퇴직한 지 2년 지났지만 지금도 내상 입은 것처럼 온몸이 아프다. 이춘재의 검거로 이제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후배들이 잘할 거라고 믿는다.”
- 앞으로의 계획은.
“프로파일링을 대중의 삶에 접목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치매 노인, 자폐아 등 실종사건 때 경찰, 군견, 드론이 투입되는데, 여기에 프로파일링을 적용하면 골든타임 안에 사람을 찾을 수 있다. 관련 프로그램 개발을 준비하고 있다.”